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15
815화 꺼지라니깐!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일단 떠나기로 했다.
환수들의 눈치를 보던 진양은 그들이 한참 말다툼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환수들이 있던 곳을 떠난 진양은 곧장 서쪽으로 향했다.
동쪽에서 상당히 왕성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곳에는 엄청난 강자, 혹은 환해 일족이 모여있는 마을이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들켜서 좋을 게 없는 만큼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다.
굳이 불필요한 싸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만일 환해 일족의 대장로 정도 되는 인물이라도 나타났다간 묵양조차 아무 힘도 못 쓰고 당해버릴지 모른다.
묵양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적인 건 아니다.
아무리 묵양이라도 꺾을 수 없는 상대가 있는 법.
몽사, 그리고 환사는 묵양의 천적이다.
그리고 환해 일족은 환사의 후손들이다.
강한 실력자가 나타난다면 묵양의 목숨까지 노릴 정도는 아니어도 족히 발목을 붙잡아두는 건 문제 없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환해 일족의 본거지다.
일개 신문 수도사에 불과한 진양을 죽이는 건 어쩌면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지도 모른다.
서쪽으로 향하다 보니 평탄한 대지를 따라 쭉 뻗어있는 산맥이 나타났다.
산맥 중앙에는 거대한 협곡의 입구가 있었는데, 협곡은 산맥 너머로 구불구불하게 뻗어있었다.
산 중턱을 보니 옅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안개는 이따금 촉수처럼 손을 뻗어 산 중턱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단순한 안개가 아닌 특수한 환수의 일종인 듯했다.
산맥은 구름 높이 솟아있었고, 사방에 푸른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그러나 생명체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방에 깔린 나무가 전부 환수일지도 모른다.
놈들이 작정하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진양조차도 느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산맥은 남과 북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어있었는데, 육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계곡을 가로지르며 직접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백 리 정도를 더 걸으니 마침내 거대한 산 입구에 도착했다.
협곡은 구불구불하게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이따금 한 번씩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통한다는 건 막다른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크게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망지동과 폐허신목을 사용하여 내부를 꼼꼼히 살폈으나 크게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협곡 대신 옆쪽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위 기괴한 형상의 고목들이 자란 숲을 먼저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숲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고목에서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숲 전체에 마치 무언가 썩는 듯한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지면에 두텁게 깔린 낙엽 사이로 굵직하고 흉측한 나무뿌리들이 솟구쳐올랐고, 악취는 한층 더 심해졌다.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무뿌리가 솟구쳐오르며 흙과 낙엽에 덮여있던 시신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생명체의 시신이었는데, 아직 미처 썩지 않은 시신들도 있었다.
그때, 산봉우리에 걸려있던 안개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촉수처럼 손을 뻗어 진양을 덮쳐왔다.
진양은 침착하게 뇌화 신통력을 사용하며 주먹을 뻗었다.
순식간에 불바다가 만들어졌고, 불바다 안에는 번개가 마치 춤을 추듯 요동쳤다.
낙엽과 나무뿌리는 전부 불타 가루가 되어버렸으나, 악취는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심해졌다.
고약한 악취가 코를 찌르자 진양은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진양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이화접목을 사용하여 육신으로 스며든 독소를 배출해냈다.
떨어진 꽃잎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호리병에 주워 넣었다.
빠져나온 언덕을 살펴보니 불탔던 나무들은 어느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있었다.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것은 낙엽뿐이었다.
진양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숲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포기한 것이다.
상당히 지독한 나무들이었다.
녀석들이 품고 있는 독은 그다지 강한 독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나무에 손상이 가면 독이 수십 배로 강해졌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날아서 통과하는 건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 한 방법이다.
구름 너머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양은 어쩔 수 없이 협곡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수십 리 정도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내리막 아래로는 말라버린 호수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는데, 쩍쩍 갈라진 땅은 근처에 있는 식물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협곡 입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어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몸에 닿는 순간, 진원과 충돌을 일으키며 치직- 하는 소리를 냈다.
겨우 일 다경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메말랐던 호수엔 어느새 새까만 물이 가득 찼다.
수위는 어느덧 호수를 넘어 빠르게 위쪽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물은 진양의 두 발까지 잠길 정도로 차올랐다.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원이 소모되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물속에는 기운을 용해시키는 힘이 들어있는 듯했다.
진양은 손을 감싸고 있는 진원을 거두고 맨손으로 빗물을 받아보았다.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방엔 거대한 분지가 만들어졌다.
사방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뒤쪽에 있던 언덕도 어느새 기괴한 빛을 뿜어내는 석벽으로 변해있었다.
진양은 품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검은 물을 담았다.
그러나 일 다경 정도 지나자 호리병에 구멍이 뚫리며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리병은 물에 의해 완전히 녹아 사라져버렸다.
‘재미있군.’
진양은 씨익 웃으며 성낙진판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의 별을 꺼내 물병으로 만들었다.
응룡에게 받았던 수많은 보물들은 전부 제기(祭器)들이다.
지금까지는 높은 등급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방금 새로운 용도를 찾았다.
바로 물병이다.
‘이 정도 수준의 물병이라면 충분히 버텨내겠지.’
물병 입구를 호수 쪽으로 조준하고 힘을 불어넣으니, 검은 물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물병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지만, 호수의 수위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 뒤.
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은 사라졌고, 호수는 또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 위로 어느새 거대한 석벽이 만들어져있던 것이었다.
진양은 뒤쪽에 있는 석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죠? 좀 더 뿌려줘요. 아직 물병의 절반도 못 채웠다고요!”
진양의 목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진양은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벽을 두드렸다.
“그리고 함정을 팔 거면 좀 더 머리를 써야죠. 이렇게 티 나게 만들어두면 누가 걸리겠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전부 다 피해 갈걸요.”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양은 계속해서 벽을 두드렸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검은 물 좀 더 뿌려주면 안 돼요?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건 당신의 위액인가요? 위력만 보면 상당히 훌륭하던걸요. 게다가 진원의 힘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던데요.”
마찬가지로 대답은 없었다.
“당신은 어떤 환수죠? 사실 파망지동과 폐허신목을 쓰면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약점이 보이거든요. 하지만 정확히 어떤 환수인지는 안 보여서 말이에요. 혹시 환해 일족에서 키우는 환수인 건가요?
만약 맞으면 나 대신 환해 일족 사람들한테 좀 전해줘요. 난 정말로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이곳에 들어오게 됐을 뿐이라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난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요.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거든요.”
진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퉁명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누가 누굴 키운단 말이냐! 환해 일족? 그런 하룻강아지 녀석들이 감히 이 몸에 손이라도 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진양이 능글맞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진양이라고 합니다. 어르신께선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본좌는 산신(山蜃)이다.”
잔뜩 화가 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굳게 닫혔던 절벽이 사라지며 다시 협곡 입구가 나타났다.
“운 좋은 줄 알거라. 얼른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을 테다.”
“어허,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아직 궁금한 게 더 남아있는걸요. 방금 그 검은 물, 혹시 어르신의 위액인 겁니까? 그럼 조금만 더 나눠주실 수 없을까요? 이런 건 살면서 처음 봐서 말입니다.”
“이만 꺼지라니깐!”
잔뜩 성난 목소리와 함께 돌풍이 몰아닥쳤고, 진양을 협곡 입구 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간만에 맛있는 사냥감이 걸려들었나 싶었는데,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위액을 전부 깔끔하게 흡수해버린 게 아닌가?
어차피 먹지도 못할 거 한시라도 빨리 내보내는 게 상책이었다.
“어르신, 그러지 말고 제 얘기 좀 들어보시라니깐요. 얘기 들어보니 환해 일족이랑 어느 정도 교류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정말로 여기서 나가고 싶단 말이에요.”
진양은 중심을 잡느라 비틀거리면서도 연신 그를 귀찮게 만들었다.
그러나 산신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돌풍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큰일이군.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쫓겨날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그게 있었지.’
진양은 예전에 얻었던 만년사를 꺼내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조금씩 밀려나던 진양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그 자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것처럼 말이다.
“어르신,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환해 일족과 마주치지 않고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방법만 알려주신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요. 게다가 먼저 저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건 어르신이잖아요
좋습니다! 방법만 알려주신다면 제가 빼앗아간 위액도 돌려드리겠습니다.”
“글쎄 꺼지라니깐!”
산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농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정인 걸 발견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더 가둬달라고 날뛰는 녀석이라니.
산신은 한층 더 강하게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만년사 때문인지 진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