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Genius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8
봄비처럼 (3)
“차기작······.”
도준은 아직 차기작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긴 했지만, 촬영이 진행 중이었고, 촬영 중인 작품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게다가 과 사이의 공백도 짧았던 편이라 종영 이후 휴식을 가지며 생각해도 충분했다.
“대본이 꽤 괜찮아. 그뿐 아니라······.”
대기 중인 벤 안에는 진성현 실장과 도준,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진성현 실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주연이야, 주연. 공중파 수목드라마.”
물론 주연 제의를 처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도준은 이미 영화 주연 제의를 받았었다.
그러나 신인 감독이 만드는 실험적인 영화의 주연 제의와 공중파 드라마 남자 주인공 제의는 그 무게감이 달랐다.
광고 13개 출연 제의에 남자 주인공 섭외 제의까지.
비좁던 길을 어떻게든 뚫고 나아가려 아등바등 하던 도준의 인생은 어느덧 아우토반을 내달리고 있었다.
“촬영 끝나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쁜 소식도 아니고, 좋은 소식인데 숨길 것 없잖아? 안 그래? 막 너무 기뻐서 연기에 방해될 것 같아?”
도준을 관리하는 매니저로서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진성현 실장이었다. 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물론 진성현 실장은 어떠한 소식을 듣고도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지면, 연기에 몰입할 도준을 알았기 때문에 별 걱정 없이 소식을 전했다.
“그래, 그래. 너무 들뜨지 말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진성현 실장이 더 들떠 보였다.
어떤 드라마 제의이길래 진성현 실장이 이렇게까지 들썩거리는지 도준도 궁금했으나, 질문은 촬영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
도준의 마지막 촬영 장면은 첫 장면과 쌍을 이루었다.
‘우진원’이 키우는 사모예드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여자주인공을 만나고, 여자주인공과 인사를 하며 대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둘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감정은 모두 정리되고, 남자주인공과 행복한 커플이 된 여자주인공을 축하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여자주인공과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여자주인공을 통해 죽은 옛 연인에 대한 슬픔을 극복해 새로운 내일을 그리며 나아간다는 게 속 ‘우진원’의 해피 엔딩이었다.
서브 남자주인공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해피 엔딩이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도준은 자신이 맡은 배역의 끝이 특별하지 않고 평범한 행복으로 마무리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어느덧 ‘우진원’의 삶을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도준은 진심으로 ‘우진원’의 행복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우진원’을 좋아하고, 아끼던 시청자들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꺄악!”
스태프의 부름에 도준이 준비를 마치고 벤에서 내렸을 때, 높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왈! 왈!’
뒤이어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찼다.
도준은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 보니 그곳에 역시나 정지혜와 충성이가 있었다.
정지혜는 단단하게 꼬아 놓은 끈을 가지고 충성이와 터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이에게 끈을 던졌으면서도 막상 충성이가 날렵하게 날아와 덥석 끈을 물자 놀라 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래도 충성이 곁에 다가가는 것도 무서워하던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큰 개에 대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촬영 회차를 거듭하며 정지혜는 충성이와도 많이 친해졌다.
충성이가 워낙 훈련이 잘된 순한 개이기도 했고, 도준이 지속적으로 정지혜가 충성이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운 것도 컸다.
정지혜의 어설픈 실력에도 으르렁거리며 즐겁게 끈을 가지고 놀던 충성이가 도준의 등장에 끈을 문 채 달려 왔다.
“오! 이 자식. 너, 더 큰 것 같은데?”
도준이 여유롭게 충성이가 물고 온 끈을 빼며 충성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몸집을 자랑했지만, 충성이는 이제 겨우 3살이었다. 한창 더 자랄 때였다. 도준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충성이가 혀를 내밀고 꼬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충성이 놈, 이제 저보다 도준 씨를 더 좋아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옆에서 정지혜가 충성이와 노는 것을 지켜 보던 충성이의 주인이 말했다.
“그럴 리가요.”
“충성이가 도준 씨 보면 어찌나 좋아하는지. 너도 얼굴 보냐, 이놈아.”
“하하.”
충성이를 보며 주인의 말에 웃던 도준의 미소가 쓸쓸해졌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니 충성이와도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충성이 보러 놀러 가도 되나요?”
“그럼요. 언제든 놀러 오세요.”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었지만, 도준은 여건만 된다면 진심으로 충성이와 다시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며 정지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이젠 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준 씨는 정이 정말 많이 들었겠어요.”
“워낙 같이 촬영을 많이 해서······. 보고 싶을 것 같네요.”
도준이 다시금 충성이의 털을 만지며 말했다.
“두 분 충성이랑 같이 위치 확인 먼저 하실게요.”
촬영 직전, 조명과 카메라 위치 확인을 위해 스태프가 다가 와 두 사람을 불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도준은 충성이를 데리고 카메라 앞에 가서 섰다.
“그 자식, 또 속썩이면 꼭 연락해요.”
“네, 알겠어요. 근데 연락할 일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요즘엔 너무 잘해주니까.”
“그래요? 잘됐나고 해야 하나, 아쉽다고 해야 하나.”
정지혜도 어느덧 완벽하게 여자주인공 캐릭터 그 자체가 돼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 두 사람에게서 정지혜와 도준은 없었고, 역할만이 남아 있었다.
그 어떤 이성적인 감정도 남아있지 않는 담백한 눈빛이 오갔다.
“잘됐네. 그 자식이랑 같이 놀러오라는 말은 안 할게요. 우리 둘 다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그쵸. 완전··· 쫌생이······.”
“나 말고 그 쫌생이가 더 좋잖아요.”
아쉬운 척 말하고 있었지만, 톤은 낮고 평온했다.
정지혜는 그 앞에서 개구지면서도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준은 그런 정지혜를 귀여워 하는 듯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귀여워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눈빛이었다.
이성적인 감정이 정리됐다고 해서, 너무 감정 없이 바라보아도 이상할 것이다. 도준은 그 미묘한 선을 세밀하게 연기했다.
이성적인 감정은 깨끗이 정리되었으면서도 자신을 극복하게 해준 정지혜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우진원’의 현재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연기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네. 또 봬요. 충성이, 잘 가!”
정지혜가 커다란 몸짓으로 ‘우진원’과 충성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준도 정지혜를 따라 살짝 손을 저었다. 충성이도 함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정지혜에게 인사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정지혜를 보내는 도준의 시원섭섭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16부 39씬은 마무리였다.
“오케이, 컷!”
채민정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컷을 외쳤다.
10부 이후로 채민정 감독은 도준에게 별다른 감정적인 디렉션을 준 적이 없었다.
도준은 초반 이후로는 이승윤 작가와도 크게 상의하지 않았다. 도준은 이미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속 ‘우진원’이 됐다.
도준은 정확하게 ‘우진원’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연기하고 있었다.
도준의 연기가 곧 ‘우진원’이었으니 감독으로선 더 요구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정지혜는 아직 촬영이 남아 있었지만, 오늘이 도준의 마지막 촬영이라는 것을 아는 스태프들은 채민정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기 무섭게 박수를 쳐 주었다.
도준도 화답하듯 고개 숙여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도준 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독님은 곧바로 또 촬영 있으시죠?”
채민정 감독이 끄덕였다. 오늘이 목요일이었으니 늦어도 내일까지는 16부 촬영을 모두 다 끝내야 주말 동안 편집해 급하지 않게 방송을 내보낼 수 있었다.
“감독님도 조금만 더 힘내세요.”
“그래야지, 힘내야지, 으······.”
채민정 감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도준과 인사했다.
도준은 나머지 스태프와도 한 명, 한 명,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눈 후 진성현 실장이 대기하고 있는 벤 앞으로 향했다.
“저기.”
그때 도준의 등 뒤에서 정지혜가 도준을 불렀다.
“무슨······.”
“이거요. 종방연 때는 사람 많고 정신 없을 것 같아서······.”
정지혜가 내민 건 작은 쇼핑백이었다. 도준이 의아한 눈을 하자 정지혜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충성이도 그렇고, 촬영 때마다 여러모로 도움 많이 받아서 감사의 표시예요.”
충성이의 일이야 촬영을 위해 당연히 정지혜를 도운 것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도운 것이 있던가.’
선물을 받을 만큼 한 일은 없는 것 같아 도준은 선뜻 정지혜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도와준 도준은 잊었어도, 정지혜는 아니었다.
도준은 연기할 때 상대 배우의 대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호흡이 거의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정지혜가 많은 대사량에 허덕이다가 대사를 잊은 날에는 도준이 애드리브로 정지혜의 연기를 돕기도 했다.
동료 배우니 당연히 서로 돕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정지혜는 알고 있었다.
“이야, 정 배우. 나는 뭐 없어? 내가 커피도 많이 사고 했잖아. 도준아, 너는 선물을 주시면, 냉큼 받지 않고 뭐 하냐. 우진원이 까인 거지, 네가 까인 건 아니잖아.”
뒤에 서 있던 진성현 실장이 끼어들며 깐죽거렸다. 정지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선물을 건네며 괜히 긴장하고 있었던 정지혜는 긴장이 풀린 듯 말을 이었다.
“별다른 뜻은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받으시면 돼요. 진짜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제가 뭘 받을 만큼은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말을 흐리면서도 정지혜가 민망할까 도준은 일단 선물을 받았다.
“나중에 종방연에서 봐요.”
“아. 네, 감사합니다.”
도준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지혜를 보냈다.
***
다시 벤에 오르며 진성현 실장이 실실 웃었다.
“하여튼 배우들이 널 너무 좋아하네. 선물 뭐야, 안에 막 따로 만나자고 적혀있는 건 아니겠지?”
“다른 뜻 없다는 말까지 했는데 실장님은 꼭 그렇게······.”
“아, 알았어. 장난이야. 연락처 교환도 안 했는데,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겠냐.”
눈을 흘기는 도준에 진성현 실장이 투덜거렸다. 도준은 조심스럽게 쇼핑백에 든 선물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남성용 화장품 세트가 들어 있었다. 고마움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선물이었다. 도준은 다음 번에 만나면 자신도 선물을 준비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자, 이거. 이건 내 선물이다. 아까 말했던 작품.”
진성현 실장이 시동을 켜며 옆에 두었던 대본을 도준에게 건넸다.
촬영을 마치기 무섭게 새 작품의 대본을 건네는 자신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도준이라면 분명히 ‘선물’로 여길 것을 진성현 실장은 알고 있었다.
“작가는 김은설 작가고, 감독은 아마 박정환이랬나.”
표지에 적힌 작품의 제목을 살펴 보던 도준이 고개를 들었다.
“박정환 감독······ 혹시 영화하던······?”
“어, 아네? 맞아. 그 사람.”
진성현 실장의 답에 도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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