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53
드디어 마주한 라트반의 모습에 리나의 눈이 커졌다. 분명 라트반이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라트반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요, 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더욱 낮아져 있었다. 달라진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리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새카맣던 머리카락 사이에 흰색의 머리카락들이 보였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다.
“라트반, 왜 이렇게….”
혼자서 수십 년을 나이 들어 버린 것 같은 라트반의 모습에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군요. 그 수직 동굴에서 떨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그 말에 리나는 지금 제게 말하고 있는 라트반이 그때 자신과 함께 있었던 라트반임을 알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 사흘 정도… 다, 당신은… 얼마나….”
그녀의 물음에 라트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30년간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30년. 그 말에 리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에게는 그저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에게는 30년이 흘렀다고?
“계속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많은 세계를 돌아다녔지요. 죽지는 않았을 거라 믿었습니다. 힘들었던 것은 당신을 보지 못한 날들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은 미소 지었다. 정말로 그녀를 만났으니 이제 자신은 괜찮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리나는 울컥 목이 메었다. 30년. 30년이라고. 그 시간을 혼자 돌아다니며 자신을 찾아다녔다고.
그 정도면 포기했어야 한다. 하지만 라트반은 기어이 이 세계까지 찾아와 자신을 찾아냈다. 그는 휘청이는 리나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손가락 하나까지 그리움이 잔뜩 배어있는 동작이었다. 라트반의 입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리나의 이마 위에 닿았다. 그녀가 무사했으면 모든게 괜찮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시간을… 나를 찾아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리나의 등을 쓸어내리며 라트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헛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렇게 당신을 찾았으니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라트반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 묻어나왔다. 리나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끔찍하고 힘든 시간을 지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아슬란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를 놔.’
라트반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슬란의 앞발에 피가 튀어 올랐다. 마수는 신음을 삼키며 비틀거렸다.
“라트반!”
“괜찮습니다. 어차피 모두 헛것입니다.”
“…헛것?”
“제가 돌아다니면서 알게 되었던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세계는 아슬란이 보았던 세계입니다. 그가 스쳐 갔던 모든 세계의 모든 시간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공간이지요. 이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아슬란의 기억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 말하려던 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신이 되었던 아슬란이다. 그 말은 제 상식을 벗어난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의미를 잃고 인간은 감히 알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가 보았던 기적 너머의 풍경에서 언제나 아슬란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라트반은 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긴 추적이 드디어 끝을 맞이했군요. 이제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가능해요?”
라트반은 대답 대신 주먹을 쥔 왼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리나는 깨달았다. 아슬란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라트반은 왼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었다. 내려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천천히 주먹을 펼쳤다.
“이건….”
라트반이 쥐고 있던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조개껍질. 분명히 아덴베르 황궁에서 레오나가 저에게 주려고 모아 놓았던 것 중 하나였다.
“이건 레오나가….”
“맞습니다. 황녀님께서 저에게 쥐여 주신 것입니다. 손 하나 가득 차게 쥐여 주었지만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군요. 그사이… 여기저기에서 떨어트렸습니다.”
“왜 레오나가 이걸 준 거죠? 그리고 이걸로 무엇을 한다고?”
“이게 있는 한, 우리는 황녀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도 보이는 이정표와 같은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이게 없다면…?”
“…돌아가기 힘들 겁니다.”
리나는 다시 라트반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상처가 가득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 조개껍질들을 소중히 갖고 있었을지.
“처음에는 옷에 넣어 두었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바닥을 구를 때, 공격을 당했을 때… 그러다 결국 사라지지 않도록 쥐고 있는 것이 제일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꽉 쥐고 있으면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라트반은 복잡한 눈빛으로 제 손에 남아 있는 마지막 조개껍질을 보았다.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도, 자는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것이 있어야 리나와 함께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리나.”
그 말에 리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 시간 그 혼자 돌아다니며 입은 상처의 흔적이 느껴졌다.
‘돌아가야 해.’
리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님을 알고 있다. 자신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리나는 이것을 라트반에게 건넨 레오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리나가 라트반의 손을 붙잡은 순간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리나는 몸을 돌려 아슬란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힘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그런 제 모습이 리나에게 더 익숙하게 느껴질 것을 알고 있는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몸에는 라트반에게 입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피가 흘러내렸다.
“아슬란.”
“가지 마.”
아슬란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가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임을 더 애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리나는 망설이며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를 찾아 오랜 시간을 보낸 라트반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는 아슬란의 모습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오래전 그와 약속했었다. 찾으러 가겠다고. 그래서 찾았는데….
리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은 채 아슬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
아슬란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나는 오래전에 당신과 약속했어요. 꼭 찾으러 가겠다고… 당신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래전에 약속했다니. 분명 처음 만났는데 언제 자신과 약속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리나의 말에 아슬란은 제 가슴 한쪽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 다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런 통증을 느끼는 걸까.
처음부터 이상한 인간이었다. 저를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익숙하다는 듯이 구는 인간. 그러면서 저에게 미칠 듯한 갈급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 안고 있으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한순간에 지워 버리는 인간. 그래서 계속 곁에 있고 싶고, 품고 싶은….
“…….”
아슬란은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 겪는 것들이다. 하지만 점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전에 겪었던 것처럼.
아슬란은 저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제가 이 손을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그는 손을 뻗어 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리나.”
그래, 마지막 순간에 나를 찾으러 오겠다고 말한 내 반려.
겪은 적이 없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변하는 아슬란의 눈빛에 라트반은 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아슬란. 이 모든 세계는 곧 너다. 어찌 보면 꿈과 비슷할 수도 있지. 이 모든 것이 네가 만들어 낸 세계라는 것을 알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너는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찾아갈 수 있다.”
그 말에 아슬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라트반이라는 자가 하는 말들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아슬란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리나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세 사람의 주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계가 갈라졌다. 다른 세계가 그 틈으로 밀려들어 왔다. 격렬한 섞임 속에 세 사람의 몸이 휩쓸렸다. 세계가 뒤집히며 그들의 몸이 조금 전까지 하늘이었던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섞였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하늘이 정신없이 반짝였다.
리나는 힘겹게 몸을 돌려 마법사들의 섬을 바라보았다. 짓고 있던 마탑이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리나는 저를 붙잡고 있는 라트반과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라트반의 상처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게 남았던 시간의 흐름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리나는 아슬란을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고 신기해하던 반짝임 대신에 아주 오랜 시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리움이 담겼다. 호기심이 아닌 애정이, 서투름이 아닌 능숙함이, 격렬한 욕정 위에 짙은 사랑이. 그 시선에 리나는 알 수 있었다.
제가 아는 아슬란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이제 반짝이는 빛은 사라졌다.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이 셋을 감쌌다.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라트반은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있던 조개껍질이 여러 가지 색으로 반짝였다.
그때 아주 멀리서 빛이 반짝였다. 너무도 까마득한 곳에서 아주 잠시 반짝인 빛이었지만 리나는 그 빛이 지금 아슬란의 손에 들려 있는 것과 같은 빛임을 알 수 있었다. 저곳에 라트반에게 조개껍질을 다 건네주고 마지막 하나를 들고 있는 레오나가 서 있을 것이다.
아이는 제가 좋아한다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을 하나하나 모아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갖고 있던 모든 순간 아이는 계속 언젠가 돌아올 엄마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어느새 아슬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산발이 아닌 예전처럼 정리되어 있었으며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인간스러움이 묻어났다. 아주 오랜 시간을 인간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먼 곳에서 반짝이던 빛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암흑투성이였던 공간에 수천, 수만 가지의 풍경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가 이제 이곳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아슬란의 몸이 은은한 금색과 붉은색의 빛에 뒤덮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아슬란.”
그녀의 부름에 그가 미소 지었다. 오만한 마수의 미소를 본 순간, 리나는 자신의 아슬란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을 눈부신 빛이 휘감았다.
***
“쿨럭.”
레오나의 기침 소리에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와 레오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이 얼굴과 몸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고 몸 전체에 피곤이 배어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은 앞에 있는 빛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