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ckoo living in early spring RAW novel - Chapter 7
외전. 꽃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
젊어서는 일본 말이 최고라 우기고 중년에는 미국이 최고, 늙을수록 유럽이 최고라 말하는 내 할아버지가 나를 한국에 둘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항하려고 했다. 보기 싫다고 악쓰는 여자애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도착하고부터 나는 향수병 아닌 향수병에 시달렸다.
유일한 위안은 가끔씩 한국에서 보내오는 이메일이었다. 한국에서 배우림이 전화로 한 내용을 녹음해 나의 이메일로 보내 주는데, 어쩔 땐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올 때도 있었다. 매일같이 컴퓨터를 붙들고 사는 나를 본 동기 한 놈이 네 애인은 컴퓨터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까지도 단순한 향수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네가 남긴 저주 같은 말들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저 만지기 좋고, 웃는 모습이 좀 귀여운 여자애일 뿐이었는데 내 모든 것이 싫다고 말하다니. 그래서 여자란 족속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봄이 오면 기상 시간이 빨라지고 등굣길이 설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매일같이 네 목소리로 한국의 일상을 확인하던 날이었다. 한국 달력으론 봄이 지나갔으니 설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샌타모니카에 사는 친구 놈을 보려고 갔다가 그곳에 핀 자카란다 길을 걸을 때였다. 나무 아래서 호들갑 떨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피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어제 날짜로 도착한 녹음 내용을 듣고 있었다.
한국의 봄이 분홍색이라면 샌타모니카에는 보라색의 자카란다가 핀다. 그게 봄의 한국을 연상시켜서 이상하게 마음이 아렸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꽃가루 알레르기일까. 그때 핸드폰으로 전송된 네 목소리가 밝게 내 귀를 울렸다.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오늘은요. 저 임용을 포기하기로 한 날이거든요. 더 안 해보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시험 말고 다른 일에 시간을 써보고 싶어져서. 겨울이면 스키장에 못 가고, 가을에는 단풍 보러 등산도 못 가고, 여름엔 바다 보러 못 가고, 또……. 봄엔.
한참을 뜸 들이던 배우림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 봄에 뭐가 있는지. 봄만 되면 짜증이 나고 벚꽃만 봐도 싫고. 아무래도 전생에 겨울에 살던 동장군이었나 봐요. 봄이 싫거든요, 그냥.
봄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꽃만 보면, 그날 내 어깨에 잠들어서 쌔근쌔근 자던 기억, 사람의 숨이 싫지 않던 그날이 떠올라서.
– 또 뭐 정해지면 전화할게요.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하시구요.
나는 마지막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열 번쯤 자카란다 나무 아래에 서서 듣고 있을 때 샌타모니카에 살던 친구 놈이 마중을 나왔다. 하도 안 와서 데리러 왔다는 친구를 보자마자 이어폰을 빼냈다.
“뭔 음악에 그리 집중했길래 내가 온 것도 몰라.”
“이상해.”
“봄?”
“이상하게 꽃만 보면 생각나는 여자가 있어. 왜 그러지?”
다른 여자와 달리 좋아했다는 것 정도는, 내가 그래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람인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싫다고 소리 지르는 여자애의 목소리를 몇 년째 듣고 봄이 아닌 시기에 핀 꽃을 보면서 설레하는 건, 그 여자를 떠올리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뭐야. 누군데.”
집안 어르신들끼리 잘 지내라고 어렸을 때부터 묶어 준 놈이었다.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나와 일찍이 자리 잡은 데다가 사교성도 좋고 양친 모두 살아계시는, 나와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많은 아이였다.
“너도 사랑 같은 걸 하는구나.”
자카란다의 보라색 꽃잎이 내 운동화 위에 떨어졌다. 웃으며 걸어가던 놈을 먼저 보내고 멈추어 섰다. 내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버벅거리자 놈은 일생일대의 깨달음을 주었다.
“누군지 몰라도 잘 꼬셔 봐. 네 성격 받아 주는 거 웬만한 사람 아니면 힘드니까.”
그게 왜 사랑이지. 꽃을 보면 떠오르는 게. 봄이 되면 웃음이 나는 게. 그 당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몇 달 후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나는 결국 이렇게 물었다.
여자는 꽃을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 못 봤다는 놈의 말에 더해 팁이라고 알려 준 것을 외우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결국엔 실패였다.
배우림은 꽃보다 편지를 좋아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맞는 말이었다. 나는 봄에, 꽃에, 배우림에 빠졌다.
[이른 봄에 사는 뻐꾸기,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