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ckoo living in early spring RAW novel - Chapter 6
06. 기울어진 시소 위에서
“우림아.”
“어?”
“나 갈게.”
“어, 어. 잘 가라. 조심히 가고.”
“안 되겠다. 너 왜 이렇게 정신이 빠졌어?”
오늘 오전에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한 윤정이 대신 내가 남아서 뒷정리를 하기로 했었다. 윤정이는 가방을 챙겨 나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자습실을 청소할 생각으로 소독제와 마른걸레를 준비한 나는 한숨만 푹 쉬었다.
“그 남자 때문이지? 명윤이가 소개해 줬다는.”
“응…….”
“왜. 자꾸 집착해? 전화하고 그래? 솔직히 이사장 통해서 소개해달라고 압박한 것부터 정상이 아닌데.”
“네가 보기에도 그러나.”
“원래 당사자가 되고는 잘 몰라. 그거 정상 아니야. 이따가 온다고 했지? 나도 같이 봐.”
윤정이와 자리를 잡고 앉아 홍보물 만드는 것에 대해 회의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첫 한 달간은 등록한 아이들 몇몇으로 운영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거나 알바를 써서 학교 앞에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 어떻냐는 얘기로 결론 지어졌다.
나는 공부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윤정이는 연애 경험도 풍부하고 친척이 학원을 운영하셔서 도움받는 면도 많았다. 이십 대 후반에 갑작스레 학원을 차리게 되어 걱정하는 부모님을 설득한 것도 윤정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다가 옳고 그름이 분명했다. 그런 윤정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니 머릿속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때 학원 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벨소리가 들렸다. 윤정이는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책상을 팍 쳤다.
“내가 저런 놈들 많이 상대해 봐서 알아. 우림이 말 못 하겠으면 말해. 내가 신고를 해서 아주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줄게. 어디라고 했지? 화연건설?”
“저기…….”
“넌 십 분 뒤에 나와. 내가 뭐 좀 캐내게.”
뿔이 난 윤정이가 학부모를 맞이하는 로비로 달려 나갔다. 개선장군 못지않게 씩씩한 윤정이와 학교 다닐 때 한 싸가지로 유명했던 장희태의 만남은 피바람을 연상케 했다. 학원 문 열기도 전에 고함 오가는 소리를 듣고 민원이 들어오면 어쩌나.
그래도 윤정이를 봐서 십 분의 약속은 지켰다. 시계를 확인한 뒤 앞치마를 벗고 로비로 나갔다. 한 치수 큰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바람에 자꾸 할랑거리다가 벗겨졌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접수대에 기대어 선 장희태와 히죽 웃는 낯의 윤정이였다. 여간해선 웃지 않는 장희태가 예의 바르게 맞장구까지 쳐주고 있었다.
생각한 그림과 달라서 어리둥절하는 사이 나를 발견한 윤정이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장희태는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었다. 장희태의 시선을 눈치챈 윤정이는 흡족해 보였다.
“우림아!”
윤정이가 기쁜 얼굴로 다가와 내 팔을 당겼다. 윤정이의 목소리가 선 자리 잡힌 날만 들을 수 있는 하이 톤이었다.
“야. 너 엄청 잘생겼다고 왜 말 안 했어?”
“그게 이 문제에 중요한 부분, 이었나?”
“게다가 너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이사장이랑은 원래 친분이 있었대. 그리고……. 이건 네가 직접 들어라. 아유, 뭐야. 완전 땡잡았네. 나 간다!”
윤정이는 요정같이 가벼운 몸짓으로 학원을 나섰다. 두 사람이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걸 보게 된 나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더 무서운 건 윤정이가 나가자마자 웃음기를 싹 지운 장희태였다. 닫힌 문을 잠시 노려본 장희태는 꼬고 선 다리를 풀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도 되겠지.”
“저녁? 뭐 먹을 건데.”
“예약해뒀어. 네가…….”
“떡볶이 먹자.”
장희태가 수상했다. 윤정이는 땡잡았다고 했지만 그건 보이는 것만 그랬다. 명윤이네 학교 이사장을 구워삶은 것부터 학원 위치에, 갈비집 건물 주인이 된 것도 있었다. 연을 끊다시피 헤어졌음에도 그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그러자. 여기서 먹어?”
“들어가서 앉아. 내가 포장해 올게.”
“배달은 안 돼?”
윤정이가 없는 학원은 오늘따라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다가온 장희태가 손을 위로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희태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어깨를 끌어다 품에 안았다.
“보고 싶었어.”
“나는, 잘 모르겠다.”
장희태를 밀친 다음 교실로 뽈뽈거리며 도망쳤다. 땀을 한 바가지는 흘린 것 같은데 정작 땀은 나지 않는다. 기온이 올라서인지 카디건 한 장만 걸쳤음에도 덥게 느껴졌다.
책상 앞에 앉아 청소 도구를 정리하는데 장희태가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교실처럼 꾸며 본 학원 내부를 장희태가 눈으로 훑고 있었다. 감상을 마친 장희태는 의외로 후한 평가를 내었다.
“학교 다닐 때 생각나네.”
“진짜로?”
“내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덜한 날들이었으니까.”
그리워한다기보다 영화를 보고 짧은 감상평을 남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실망한 나는 핸드폰을 켜서 가장 매운 떡볶이를 주문했다. 내 입에도 매워서 생리 전에나 시키는 떡볶이인데 어디 한번 된통 당해보라지 싶었다.
나는 그를 등지고 앉아 멍하니 화이트보드를 바라봤다. 학교에 관련된 것들을 보다가 보면 무조건 장희태와 연결됐다.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의 시간에 그와 손을 잡고 수업을 들었던 그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한테는 잊히지 않아 괴로운 시간들이 장희태에겐 고작 스트레스가 덜한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아, 맞다. 키스를 하면 스트레스가 덜어진다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차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돌아보니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는 장희태가 보였다. 서른을 목전에 둔 우리지만 그가 책상에 엎드려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옛날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장희태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주말에도 일해?”
“응, 바쁘다.”
대답이 없는 그가 불안해져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 물었다.
“갑자기 주말은 왜.”
“영로도에 있는 별장에서 자고 오게.”
“영로도?”
고민하는 내내 나는 말이 없어졌다. 장희태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서 계속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끝에만 조금 뭉치듯이 만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서툰 손길로 머리카락을 땋았다. 학원서 도보로 10분 거리라 금방 배달 온 떡볶이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분위기가 될 뻔했다.
배달 온 떡볶이를 받아와 책상 위에 펼쳤다. 봉지에서 꺼내자마자 맡아지는 매운 냄새에 코를 막았지만 장희태는 표정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어서 눈 뜨고 기절한 거 아닌가 싶었다. 이내 표정을 되찾은 장희태는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앉아.”
의자를 돌려서 그와 마주 보고 앉은 나는 나무젓가락을 그에게 건넸다. 뚜껑을 열자마자 장희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으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장희태는 망설임 없이 매운 고추장소스가 묻은 어묵을 먹었다. 천천히 씹는 그의 입 모양을 지켜보던 나는 떡부터 공략했다.
“쫄깃하네.”
요즘 일이 많이 터져서 그런지 떡볶이도 맵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장희태는 1분이 지나도록 어묵을 씹고 있었다. 바닥을 응시한 채로 시간을 세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에게 휴지라도 건네려 했지만 장희태는 잘게 다져진 어묵을 목으로 넘겼다.
“고만 먹어라.”
“맛이 자극적이라 나쁘지…….”
말을 하다가 만 장희태가 혀로 입술을 쓱 훑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아.”
솔직히 이 정도 성의만 보여도 나는 대단하다고 박수 쳐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장희태는 떡도 한 번, 어묵 한 번, 오락 게임을 하는 것처럼 번갈아 가며 먹었다. 시식하듯이 떡볶이를 먹고 있는 그에게 감동을 먹을 지경이었다. 장희태는 떡을 세 번 먹었을 즈음 젓가락을 놓았다.
“이런 건 한 달에 몇 번쯤 시켜 먹어.”
“음……. 일주일에 한 번? 이니까. 보통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안쓰러워 보여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 주자 장희태가 군말 없이 물로 입 안을 헹구었다. 장희태는 그 이후로 더는 떡볶이에 손대지 않았다. 나는 오늘따라 떡이 입에 착착 붙어 그 많은 양을 혼자 다 먹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던 장희태가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정 차려 먹기 바쁘면 점심때마다 사람 보내 줄까.”
“사람? 무슨 사람?”
“점심 차려 주는. 저녁은 나랑 먹고.”
“돈이 썩어나나.”
“썩어나. 그러니까 이딴 거 먹지 말고…….”
장희태는 온데간데없던 미소를 불러와 다시 얼굴에 붙였다.
“맛은 나쁘지 않은데. 건강이 걱정돼서.”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무슨 말.”
“이런 거, 저런 거 안 먹으면 오래 살겠지만. 그런 입에 맛있는 음식을 안 먹으면 딱히 오래 살 이유는 없단 말. 나는 쪼끔 공감한다.”
말을 더 섞었다간 성질이 나올 것 같았는지 갑자기 천장을 바라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가 재밌어서 기분이 풀렸다. 말하려면 지금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한 거 있다.”
“궁금한 거?”
“너 나 여기서 학원 차린 거 어떻게 알았는데?”
추궁하기 위해 무표정을 지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장희태가 배를 잡고 머리를 숙였다. 장난하는 줄 알았으나 안색이 정말 좋지 않았다. 하얗게 질려 구슬 같은 땀까지 흘리는 중이었다.
“왜 그래. 어?”
“아파.”
그가 평소에 먹는 것들을 떠올려 보니 떡볶이를 먹고서 속이 뒤집히는 것도 말이 된다. 남은 떡볶이를 봉지에 싸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교실로 돌아왔을 때 장희태는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자.”
“어디를.”
“같이 자동차 극장 가기로 했는데. 잊었어?”
“아, 내가?”
“새벽 2시 20분쯤. 물었더니 좋다며.”
“그때는 내가 기억이 없어……. 괜찮아?”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피부는 핏기가 없어 보였다. 나는 걱정이 되는 마음에 그의 손을 잡았다. 학원을 나서는 내내 부축받은 장희태는 차에 타서도 시름시름 앓았다.
“그냥 네 집 가자.”
“영화는.”
“영화는, 무슨. 이러다가 영화 보면서 죽겠다.”
미끄러지듯 그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독한 놈. 앞으로 웬만해선 이것저것 해 보라고 시켜선 안 되겠다. 자기 자존심 지키자고 절벽에서도 뛰어내릴 양반이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와 죽 한 사발이라고 끓여주려고 했더니만 그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무슨 냉장고에 이런 것밖에 없나…….”
물이나 맥주 같은 종류만 가득한 냉장고를 심란한 마음으로 닫았다. 나의 권유로 위장약을 먹고 침대에 누운 장희태에게 죽을 끓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집에는 쌀이 한 톨도 없어 보였다. 미국에 가서 주야장천 물만 마시고 살았나 보다. 하는 수 없이 파는 죽이라도 사 오기 위해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장희태.”
그새 잠들어 있었다. 나하고는 자는 모습도 달랐다. 나는 새우잠을 자서 옆으로 자는데 얘는 똑바로 누워서 잔다. 열은 없나 싶어 이마에 손을 대는데 뽀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자는 얼굴을 보니 학생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만 같았다.
속눈썹도, 콧대도, 입술도. 질투심에 상처를 줬다는 그 싸가지가 나를 위해서 싫어하던 일도 감수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내 부재를 깨달아서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는 마음이 바뀌어 한국에 돌아온 걸까. 아니, 왜 갑자기 나를 찾은 걸까.
그래도 오늘은 마음껏 가여워할 뿐이었다. 새근새근 잠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미소를 지으며 떨어지는 찰나 잠에서 깬 그를 발견하고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숨길 수 없었다.
“안 잤나.”
“응.”
몸이 쓰러져 침대로 잡혀갔다. 탈이 난 게 거짓말인 것처럼 쌩쌩해진 그가 나를 당겨 안고 입술을 깨물었다. 키스하는 내내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픈 게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읏.”
아니. 차라리 아픈 게 나았다. 엎드려서 울며 이를 갈았다. 그때 술 먹고 취한 척한 것도, 아프다고 수작질한 것도 다 제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훅, 아래로 치받는 성기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젖은 음부를 뚫고 들어와 허리를 턴 장희태가 내 등으로 엎어졌다. 쉬고 싶다고 말한 뒤 엎드려 있다가 당한 봉변이었다. 장희태는 등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허리를 놀렸다. 다정한 추삽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젖어서 번들거리는 그의 성기를 보면 얼마큼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에다, 하지 마.”
“응?”
“알면서 묻…….”
혀를 빨아 당기며 키스를 끝낸 장희태가 나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똑바로 앉혔다. 졸지에 그의 허벅지 위로 끌려간 셈이었다.
“약 먹었어?”
“뭐?”
“피임약.”
“아니…….”
그 말에 만족스럽게 웃은 장희태가 내 다리를 넓게 붙잡아 벌렸다. 그의 손이 배를 타고 내려와 정점에 닿았다. 괴롭힘당해 부푼 것처럼 보이는 음핵을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이용해 살금살금 돌리기 시작했다.
“싫, 아, 이것만, 응!”
그러면서 허리는 잘도 쳐올렸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한 손으로는 음핵을, 허리는 위로. 그 세 박자 속에서 흔들리는 건 나뿐이었다. 그의 팔이 꼭 롤러코스터의 안전 바 같았다. 안전 바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사실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으면 굳이 안전 바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안전 바 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나를 구속하는 팔이었다. 등줄기를 따라 입술을 묻고 쪽쪽거리는 장희태가 가증스러웠다.
“아, 아으, 아!”
두세 번 더 쳐올리는 장희태의 허리 짓이 사정에 가까워졌다. 손으로 음부를 쑤시고 내벽에 처박기 시작할 때. 다리가 저리는 느낌이 아래로 옮겨가 전신을 때리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머리 아픈 쾌감에 몸을 맡기고 싶어질 때. 그의 신음이 내 온몸을 묶을 때. 마지막 귓불이 축축해졌다. 절정에 오르면 그는 내 귓불을 핥거나 물기 때문이었다.
“아, 하아…….”
“응, 읏, 으, 아!”
굵직한 손가락에 의해 턱이 들렸다. 신음을 뱉는 입술이 먹혔다. 고개를 젖힘과 동시에 그가 허리를 들었다. 뭉툭한 성기의 머리가 빳빳하게 일어서서 속살을 짓뭉개듯이 밀고 들어왔다. 음핵에서 손을 뗀, 불어서 젖은 듯한 그의 손가락이 보였다. 내벽을 건드릴 때부터 그의 손이 젖기 시작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아, 으, 아…….”
입술을 놓아주자마자 목 끝까지 찼던 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와 연결된 아래를 보고 탁한 신음을 뱉었다. 기듯이 걸어 나와 아래에 손가락을 조심조심 넣었다. 묻어나오는 건 정액이 아니라 내가 흘린 물뿐이었다. 내가 엎드린 사이 이미 콘돔을 쓴 모양이었다. 나른하게 앉아 나를 바라보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 잘란다.”
앙심을 품고 뒤로 돌아누웠다. 장희태가 부스럭거리며 내 뒤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불까지 끄고 왔는지 사방이 깜깜했다. 나는 장희태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옮겼다. 그러자 장희태가 두 팔에 힘을 줘서 나를 안았다.
“귀찮다.”
쪽, 어깨에 입을 맞춘 장희태가 내 말을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음모를 꾸미듯이 나를 토닥토닥 재우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장희태.”
“왜.”
“아까 물어본 거. 왜 대답 안 하는데?”
“뭘 물어봤지?”
정말 까먹은 건지. 아님 기억 안 나는 척을 하는 건지. 나는 한숨과 질문을 함께 실어 입 밖으로 보냈다.
“우연이라고 말하지 마라. 명윤이네 학교 이사장부터 우리 엄마 가게까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라. 뒷조사했나.”
“주말에 나랑 영로도에 가면.”
그의 말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명확하게 해명해야 할 부분임에도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 아닌가. 입술을 말아 문 나는 배에 얹어진 그의 손을 던져버렸다.
“왜 지금인데.”
장희태는 제 팔을 베고 누우며 차분히 대답했다.
“왜 지금이냐고?”
“많았잖아. 연락도 할 수 있었고. 와서 나한테 지금처럼 이럴 수도 있었다. 장거리 연애가 싫어서? 그래서 그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쓰고, 여자도 만나보고. 그리고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조금만 더 빨리 내려오지. 그럼 나도 봄을 싫어하는 날이 줄었을 텐데. 왜 즐길 거 다 즐기고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드냔 말이다. 그러나 장희태는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귀한 입술을 꼬집고 싶지만 참았다. 장희태의 목소리가 시를 낭독하듯 신중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내 감정이나 내 상황을 설명하는 게 서툴러. 살면서 내 감정이 어떻냐고 물어 본 사람은 너밖에 없었고.”
어렵게 서두를 뗀 장희태는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듯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너에게 재수 없었던 것, 네가 보기엔 매정했던 것, 인정해. 한국을 떠나고 나서 매일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켰을 때 네 사랑이 나한테 오는 게 어렵다는 것도 납득했어.”
물어본 것에서 한참을 벗어난 주제지만 나는 그래도 중간에 끊지 않았다. 이건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의 고백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그전까지는 나는 조금 까칠한 중학생이었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완전히 달라져서, 혼자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 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 그걸 방치한 할아버지, 다 내 앞에서 진실을 불게 만들게만 하면 뭐든 할 거라고. 아버지가 받았어야 할 것들, 할아버지의 인정. 그걸 끝내기 전까지 너한테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생기자마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네 곁으로 왔지. 마침 봄이기도 했고.”
봄. 장희태와 나의 지난 시간 동안의 봄은 달랐나 보다. 장희태의 봄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봄마다 네 생각이 나는 게 자연스러운 건 아니더라. 그걸.”
나는 봄마다 네가 떠오르는 저주에 걸린 것 같았다.
“사랑이라고 하던데.”
장희태는 나의 손끝을 모아 입술을 댔다. 제 손으로 나의 손을 감싼 그가 고해성사하듯이 말했다.
“비밀이 있어.”
“무슨 비밀.”
“내가 너한테 또 무슨 변변찮은 말로 상처를 줄까 봐서. 그건 주말에.”
장희태의 수완이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고백에 빠져들어 어릴 적 받았던 상처까지 어느 정도 납득하고 말았다. 다름 아닌 그의 봄이 사랑이라서. 애처롭게 구애하고 있는 그의 외로움이 나와 닮아서. 나는 그의 눈두덩에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비밀이 없기 전까지는 나의 마음도 비밀이었다.
“오늘 하는 거 봐서. 주말에 만날지, 안 만날지…….”
씨익 웃은 그가 손등 여기저기에 쪽쪽 입 맞췄다. 여전히 내게 봄은 별로였지만, 언제까지나 별로인 채로 둘 순 없었다. 앞으로도 내게 봄날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
하룻밤만 잘 거라고 하기에 등산용 가방 안에 짐을 쌌다. 속옷과 갈아입을 옷 한 벌이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으나 장희태가 들고 온 캐리어를 보고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 단출한 짐을 보고 장희태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차에 오르자마자 서로의 짐 상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하룻밤 잘 건데 뭘 그리 바리바리?”
“기본적인 것만 챙기긴 했는데……. 넌 저게 다란 말이지.”
“우리 하루만 잘 거 아이……. 됐다.”
영로도는 차로 들어갈 수가 있어서 배가 끊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따듯한 남쪽에 별장이 있어서 좋겠다. 원할 때마다 바다를 보면서 쉴 수 있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출발하고 고속도로로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구경하는 일도 한두 번이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기지개를 켜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틀었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던 장희태는 지루하냐 묻고선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음악 틀어줄까.”
“어, 어.”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나는 장희태의 취미나 살아온 삶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최근에야 집안 사정을 조금 알게 됐지만 같이 여행을 떠나는 날에 신나게 이야기할 주제는 되지 못한다. 오늘 말하려는 비밀은 뭘까. 사실 며칠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아니면 더 충격적인 내용일 수도 있었다.
“저기, 노래 바꾸자.”
장희태가 틀어 준 노래는 가사가 없었다.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은 듣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클래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장희태 모르게 하품하는 입을 가렸는데 어떻게 그걸 또 봤나 보다. 차가 막히는 틈을 타서 장희태가 핸드폰을 두드렸다.
“어.”
현란한 스텝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트로트였다. 선곡한 노래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 부르던 것이었다. 장희태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는데 생각해 보니 수학여행에서 내가 이 노래를 선곡해 불렀었다. 목련의 꽃말은 이루지 못할 사랑입니다, 흥얼거리며 손으로 박자를 탔다.
“이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나.”
“가사가 좋아서.”
“진짜로?”
“네 덕분에 내가 할아버지도 안 듣는 트로트를 찾을 줄은. 아마 우리 부모님도 몰랐을걸.”
“트로트에는 삶의 애환이 담겨져 있다. 듣다가 보면 그 한 같은 게 느껴진달까.”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시골에서 살 때 유치원 대신 동네 노인정에 가서 놀다가 알게 된 게트로트였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용돈을 주는 게 좋아서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불렀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신곡 트로트를 들으려고 노인정에 갔다.
장희태는 어느 노인정인지 물어보며 대화에 참여했다. 싸가지 없이 말을 뚝뚝 끊을 줄 알았지만 그는 제가 관심 없는 주제일지라도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감동하지 않았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네가 이리 자상할 줄 몰랐네.”
“어떤 면에서?”
“내 얘기 다 들어 주고 그럴 줄 몰랐다.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거 틀어 주고.”
표정이 풀린 장희태가 놀고 있는 내 손을 꾸욱 잡았다.
“벌써 감동하지 마. 나중엔 어쩌려고.”
“감동까진 아니고. 그냥, 놀랍다? ”
“배우림. 넌 특별해.”
난데없는 고백에 나는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닌 척하려고 했으나 손에 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수업 중에 몰래 손을 잡은 날처럼 말이다.
“무대에 오른 널 보면서 직감적으로 느낀 거지, 내 몸이. 아……. 저 반짝이 재킷이 내 삶을 바꾸겠구나 싶어서. 유치하고 거슬리는 박자도 네가 부르면 귀에 들어왔어.”
“오늘따라. 좀 많이 띄워준다?”
“내가 못되고 네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난 그게 잘못됐고 이상하다고 말해 줄 사람이 없었어. 변명이 아니라……. 내 삶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같이 나눌 사람도 없고.”
혼자가 편해. 고등학교 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선득해졌었다. 나는 친부모가 버린 대신 우리 엄마, 아빠를 만났고 우영이도 생겼다. 하지만 장희태는 그러지 못했나 보다. 사람이 너무 오래 혼자 있으면 그걸 당연하다고 느끼게 됐다.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되니까. 네 목소리가 그리웠어. 그게 그립다는 건지도 모를 만큼 모자라서 고생한 편이지만.”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서 만졌다. 정반대. 이해할 수 없는 싸가지. 하지만 장희태의 말에 나도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벚꽃을 볼 때, 봄이 온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졌던 이유는 봄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빨리 봄을 잊었음 했던 것은 장희태가 나의 봄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듯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분홍색의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영로도는 벚꽃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매해 사람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바다와 벚꽃이라.
영로도에 진입할수록 차가 밀렸다. 백미러로 빵, 하며 끼어드는 뒤차를 보다가 그의 캐리어가 뒷좌석에 있는 걸 보았다.
“왜 트렁크에 안 넣고.”
“트렁크에 잡동사니가 많아서.”
“아…….”
“나중에라도 열지 마. 지저분해.”
제 드레스룸은 전문가처럼 정리하는 장희태가 트렁크를 방치해 뒀다는 게 이해가 안 가지만 주인이 그렇다고 하니 별수 있겠나. 장희태의 인간적인 면모를 본 것만 같아 신선하고 좋았다.
벚꽃이 휘날리는 도로에서부터 영로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붓나붓 바람 따라 흔들리는 벚꽃 아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벚꽃을 기념해 본 적이 없던 나는 그들의 미소에 전염된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장희태는 영로도 가장 안쪽으로 운전해 언덕을 올랐다. 펜션 두 개가 가로막고 있는 도로를 지나자마자 주차장에 벚꽃 한 그루를 심어둔 집이 보였다. 삼 층 크기의 건물은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명당에 위치해 있었다.
“저거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다도 나오나.”
“산책길.”
“와, 와. 우리 저기도 가자. 어?”
임용에 치이고 학원 일에 치여 바다에 와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도착했을 때가 5시가 가까운 시각이라서 배가 고픈 것도 있었다. 가방과 캐리어를 챙긴 장희태가 별장 문을 열자마자 아이처럼 뛰어들어 갔다.
원목 프레임이 둘러진 커다란 창이 파도치는 바다를 한 폭에 담았다. 그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평상과 뒤쪽으로 넓게 빠진 주방, 이 층에는 이국적인 캐노피 침대와 커피포트를 올려 둔 티 테이블이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이 층 창문을 열어 짭짤한 미역과 바닷바람 냄새를 맡았다. 별장 뒤쪽으로 보이는 벚꽃 나무 길도 산책하기 좋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걸으면 올봄에 휴가 간 사람들이 안 부러울 터였다. 사람들이 왜 봄을 기다리는지 알 것도 같다.
창가에 기대서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캐리어를 끌고 온 장희태가 짐을 풀었다. 옷 두 벌과 바지 두 개를 곱게 접어서 서랍에 넣어뒀다. 짐 정리를 나중으로 미룬 나는 일 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열었다. 새우, 조개, 등심을 비롯한 바비큐용 재료가 놓여 있었다.
“미리 사 뒀어?”
“관리하는 분께 준비해 달라고.”
테라스 문을 열고 바비큐장으로 나간 장희태가 토치를 꺼내 들었다. 나도 도울까 싶어서 일어나자 장희태가 제지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다 되면 부를 테니까. 피곤하면 자고 있던가.”
“아, 그래…….”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 나도 나중에 똑같이 대접해 주면 되겠지. 토치로 불을 붙인 그가 마블링이 예술적인 등심을 숯불 위에 올렸다. 나는 평상에 누워 바닷가 소리에 집중했다. 파도가 내 마음으로 쓸려와 근심을 걷어가는 느낌이었다. 날 듯 말 듯 한 벚꽃의 향도 좋았다. 차가우면서 외로운 장희태의 향기 같았다. 저가 싫다고 악을 쓰는 나를 달래기 위해 장희태는 만발의 준비를 한 듯싶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장희태를 처음 본 순간부터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선 언젠가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연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쿨해진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마음의 수양이 많이 모자랐다.
“배우림.”
파도가 재우는 잠이 달콤해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평상에서 꾸무적거렸다. 고기를 다 구웠는지 부엌으로 들어와 손을 씻은 그가 식기류를 챙기고 있었다. 다 됐으니 오라는 뜻이겠지만 왠지 장난기가 살아났다.
“우림아, 해 봐라.”
접시 위에 수저를 놓고 걸어가던 장희태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굳었다. 천하의 장희태가 나한테 꼼짝을 못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있긴 확실히 있나 보다. 거만하게 책상다리하고 앉아 그를 불렀다.
“우림이 누님, 해 봐라. 그러면 갈게.”
화를 내거나 무안하게 무시할 줄 알았던 장희태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하, 소리 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입은 푸른 니트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종선인 줄 알고 고백한 날의 샐쭉하던 장희태가 보고 싶었다.
“내가 하지 말라는 거 다 안 한다며. 고칠 거 말해 달라고. 니 맨날 배우림이, 배우림이. 하는 거 나 별로거든?”
“우림아.”
장희태가 장난스럽게 접시를 흔들었다. 우림아. 매양 듣던 이름에 꽃이 핀 느낌이었다. 평상에 발라당 누워 방석에 머리를 댄 나는 뛰고 있는 심장 부근을 퍽퍽 쳤다.
“가서 고기 구워.”
장희태의 웃는 소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천장에 떠다녔다. 우림아. 악몽 같았던 봄에 나타나 또 나의 마음을 훔치려고 들었다. 고개를 빼서 그가 접시를 놓고 있는 테라스 쪽을 훔쳐보았다. 배는 고프니 일단 나가서 먹을까.
도둑 걸음으로 바비큐장에 도착해 헛기침 소리를 냈다. 장희태는 구워진 등심을 잘게 잘라서 접시에 옮겨 주고 있었다. 의자를 살살 빼서 앉아 있으니 고기가 담긴 접시를 놓아 주었다. 홀그레인머스타드에, 쌈장에, 굵은 소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성 하나는 기가 막혔다. 새침하게 앉아 등심을 소금에 딱 찍었을 때였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고기는 혀에 앉자마자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음!”
너무 맛있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지만 체면상 그러지 못하니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맛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던 장희태가 또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맛있나 보네.”
“야. 빨리 먹어 봐라.”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소금에 찍어 그의 입에 대주었다. 약간 머뭇거리던 그가 내가 내민 고기를 빠르게 입으로 물어갔다. 뜨거운 음식을 잘 먹는 모양인지 호 불지도 않고 먹었다.
“그게 다가.”
“뭐가.”
“반응이. 좀 더 없나.”
내 눈에서 실망을 읽은 장희태가 음음, 작위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음. 맛있다.”
“거 봐라.”
장희태가 고기를 다 구웠는지 장갑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그새 채소까지 야무지게 구운 센스를 칭찬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오늘 작정한 사람처럼 장희태는 냉장고에서 꺼내 온 와인을 잔에 따라 줬다. 일꾼 역할이 적성에 안 맞을 텐데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장희태는 테라스 뒤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와인을 마셨다. 애초에 먹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접시에 올려진 고기의 삼 분의 일을 해치웠다. 배도 부르겠다. 그의 손에 든 와인 잔에 내 잔을 짠 부딪혔다. 바다 전경에 빼앗긴 시선이 이리로 돌아왔다.
“원래 이런 데선 잔끼리 부딪치고 그러는 긴데.”
“몰랐어.”
“아…….”
몰랐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장희태는 성공적인 바비큐 파티를 열었음에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와인으로 입술을 적신 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와인이 지난번 호텔에서 먹은 것보다 달콤해서 내 취향이었다. 나는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바닷바람 쐬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 그 비밀이 뭔데.”
“그 전에.”
장희태는 무슨 무거운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제 주머니를 뒤지다가 다시 손을 뺐다. 불편해 보이는 그의 손이 와인 잔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야단법석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질까 싶어 그의 직장에 관해서 물어봤다.
“일은 할 만하나.”
“일?”
“그, 화연건설 다닌다며. 요즘 좀 한가한가 부지?”
그러자 장희태는 이름만 들어도 고달픈 것처럼 눈이 푹 꺼졌다.
“인천에 아파트 짓는 것 때문에 한가하진 않지.”
“아……. 그러면 이럴 시간도 없겠네. 음, 직장 동료들은 잘해 주고?”
장희태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닫고 나를 바라보았다. 밤바다 색과 어울리는 그의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보았다.
“왜.”
“할아버지가 화연건설 창업주야. 장태건. 몰라?”
장태건. 뉴스에서 들어 본 이름이었다. 장태건, 장희태. 저쪽도 장 씨, 이쪽도 장 씨. 젓가락으로 집은 구운 토마토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잠깐만. 그럼, 그 화연 호텔이랑 화연 리조트도……. 나 거기 스키 타러 갔었는데.”
생각보다 큰 스케일이었다. 이게 장희태가 감추고 있던 비밀인가 싶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재벌 집 아들내미를 만나려면 봉투나 물싸대기쯤은 감수해야 하나.
“배우림.”
“…….”
“배우림.”
장희태가 몇 번의 시도 끝에 넋 나간 나를 부르는 데에 성공했다.
“어? 말해.”
“우림아.”
모피 코트를 입은 사모님이 얼굴에 물을 뿌리는 상상까지 하고 왔다. 나는 우림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희태는 일어나다 만 구부정한 자세로 내 손을 잡았다. 아직 재벌가에 얽힌 출생의 비밀이 남았나 싶었다. 아니면 집안끼리 맺어 준 약혼녀가 있다든가.
“이따가 내가 전화하면, 내려와.”
“전화?”
약혼녀도, 출생의 비밀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그에게 전달했다. 일어나서 차 키를 챙기고 떠나는 장희태의 뒷모습을 쭈욱 보았다. 무슨 대단한 고백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나 싶어서 걱정이 됐다. 그래. 무슨 일이든 사람 생각하기 나름이지. 들어보고 판단하자, 들어보고.
긴장을 풀기 위해 나는 밤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윤정이와 놀러 온 줄 아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영이에게도 한 장씩 사진을 보내놓았다. 혹시 모르니……. 친어머니한테도 한 장을 보내고 테라스에서 나왔다.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오랜만에 전화하고 싶었다. 중간에 장희태가 들어오면 흥이 깨지니 이 층으로 올라가 캐노피를 걷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알려 주면 좋아하려나. 저녁 8시가 다 돼가니 시간대도 알맞았다. 전화를 걸어 정감 가는 신호음 소리가 끊기기를 기다렸다.
지잉, 지잉. 핸드폰 진동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 옆 협탁에서 나는 소리였다. 장희태가 핸드폰을 두고 갔나. 전화할 테니 받으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설마 세컨드 폰인가. 나는 협탁을 열기 전에 통화를 끊었다. 우연인지 협탁 안에서 울던 핸드폰도 잠잠해졌다.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협탁을 여니 꽤 옛날 버전의 핸드폰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오기 시작한 외국 브랜드의 폰이었다. 암만 봐도 전화 울리는 게 용한 구닥다리로 보였다. 다시 협탁에 넣어놓으려는 때에 부재중을 남긴 이름이 낯익었다.
우림.
“우림?”
장희태의 두 번째 핸드폰은 비밀번호 설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핸드폰 연락처엔 나뿐이었다. 배우림. 나의 번호. 부재중을 남긴 시간은 1분 전. 1분 전에 나는 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왜…….”
침을 삼키고 다시 한번 친어머니의 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장희태의 핸드폰이 반응한다. 나는 맥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비밀이 있어.”
“무슨 비밀.”
“내가 너한테 또 무슨 변변찮은 말로 상처를 줄까 봐서. 그건 주말에.”
그 비밀이란 게 이런 거였나. 장희태가 어떻게 내 직장을, 부모님 가게를, 친구가 다니는 학교를 알았는지 알게 됐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장희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떨리는 손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이 층에서 내려왔다. 앞문으로 장희태가 나갔으니 나는 바비큐장과 연결된 문으로 나갔다.
테라스로 이어진 쪽문이 바닷길과 연결돼 있었다. 나는 파도 치는 바다 앞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 번호가 친어머니라고 생각하며 나의 감정, 나의 하루를 말해 왔었다. 나였으면 안 그랬다. 아니, 못 그랬다. 내가 장희태라면 절대로 사람의 그리움을 이용하지 못한다. 장희태도 외로움이 무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장희태는 혼자가 편한 이기적인 놈이었다.
장희태는 끈질기게 내게 전화를 걸었다. 밤바다를 보면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 너 어디야.
별장 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아다닌 모양인지 장희태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놀려 그에게 물었다.
“너. 왜 우리 친엄마인 척…….”
으흡, 하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그 번호는 엄마가 맞냐는 말에 답하지 않았었다. 멋대로 엄마로 정해두고 믿은 것은 내 쪽이었다. 뭐가 서러운가. 왜 나는 속았다는 생각보다 서러운 마음이 드는가.
“진짜야?”
– …….
“대답해. 진짜, 정말 이게 그 비밀은 아니지?”
– 바다 쪽이야?
“왜 대답을 못 하는데?”
– 다른 데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우림아.
나한테 친엄마는 없었다.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해 줄 필요는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내심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나를 못마땅해하는 할머니에게. 뻐꾸기가 아니라 나도 내 엄마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나를 찾아왔다는 엄마를, 그래도 나는 엄마처럼 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를 길러 주신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는 건 당연했다. 비록 두 분에게 떳떳하지 못하지만, 먼 훗날에는 결혼식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하고 싶었다. 만나서 할 말이 없는 것보다 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사람들과 만났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 혼자 꾸는 꿈이었다. 나는 뻐꾸기가 맞았다. 친엄마는 내가 거부한 후부터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버렸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그렇지만, 그래도 나를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닌가.
별장의 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오는 장희태와 반대편 길로 걸어갔다. 파도가 자꾸만 내 발을 가졌다가 놓아 주었다. 모래 들어간 단화가 벗겨질락 말락 했다. 신을 벗고서 맨발로 걷는 데 꼴 보기 싫은 놈이 나를 따라잡았다. 팔이 잡힘과 동시에 뿌리치려고 했으나 몸이 먼저 돌아갔다. 엉망이 된 그의 얼굴과 숨소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뭔데!”
“내 말 들어.”
“제정신 아닌 새끼. 진짜로, 정말로 그냥 말을 하지. 재밌었나? 사람 갖고 노니까 재밌었냐고!”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한이 든 것처럼 손과 입술이 발발 떨렸다. 어깨를 꽉 붙들고 있는 장희태의 손이 살짝 떨고 있었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선지 연신 제 입술을 혀로 핥던 장희태가 나에게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안 갖고 놀았어. 진실을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야.”
“타이밍?”
손톱으로 할퀴어도 버티는 이 지독한 놈의 뺨에 손을 올렸다. 짝, 소리와 함께 후려친 고개가 오뚝이처럼 돌아왔다. 얼마 전 내가 상처를 낸 자리에서 피가 났다. 그런데도 장희태는 맷집이 세다는 소리나 했다.
“더 때려.”
“맞는 데 취미 들렸나.”
“때리고 나서. 분이 다 풀리고 나서. 이성 좀 찾고 내 얘기 들어.”
여전히 제 세상에 빠져 살고 있는 장희태의 손을 끄집어 아래로 던졌다. 드디어 내 어깨에서 손을 떨어트린 장희태는 뒤돌아서서 바닷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내가 두고 간 신발을 주우러 가는 거였다. 나는 단화를 들고 오는 장희태를 두고 도망쳤다. 가 버리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금세 따라잡아 내 어깨를 잡아서 뒤로 돌렸다. 때려서 속 풀라던 장희태가 이번엔 이를 드러냈다.
“가지 말라고.”
그의 말을 무시하고 뒤돌아서자 이번엔 어깨로 끝나지 않았다. 허리를 안아 든 장희태가 무작정 제 품에 들고 걸었다. 그의 어깨에 걸친 듯이 안긴 나는 사정없이 발길질했으나 장희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쪽문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없으니 망정이지 만약 누가 봤으면 바로 신고할 모양새였다.
장희태는 거칠게 쪽문을 열고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삐걱, 삐걱 소리가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서러움이 원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장희태는 나를 우습게 보던 고등학교 시절에서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테라스로 들어와 거실로 넘어오자마자 그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벌써 힘이 빠진 나는 축 처져서 숨만 고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마른 빨랫감처럼 널린 나는 울다가 웃었다. 분노는 그가 별장 문 앞에서 나를 내려 주었을 때부터 불타올랐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이 두 번 배신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나는 그의 말처럼 멍청했던 것이었다. 봄의 단꿈에 홀려서 진실을 외면한 적이 솔직히 없겠는가. 이상하고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봐주고 넘겨준 건 다름 아닌 배우림이었다.
“놔!”
“신발 신어.”
“무슨 상관인데?”
별장 문 앞에서 내려 준 장희태는 신발을 가지런히 두었다. 맨발로 서울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 대충 단화의 뒤축을 구겨 신었다. 평생 안 볼 거라며 이를 갈면서 뒤를 돌았을 때였다.
달이 떠서 환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얀 장미와 수선화와 안개꽃. 온통 하얗기만 한 꽃들로 주차장을 한가득 꾸며놓았다. 신부 대기실을 연상케 하는 하얀 꽃장식, 달빛처럼 환한 전구, 차 트렁크 안에 있는 꽃다발 무덤을 보고 미간에 힘을 줬다. 그야말로 차 트렁크에 꽃집을 차린 양 수십 종의 꽃들이 녹아떨어지게 담겨 있었다.
넝쿨처럼 길게 늘어진 초록 줄기에 보라색과 연분홍 꽃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하얀 안개꽃과 장미로 채운 트렁크 가운데에는 예쁜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전화하면 내려오라고 말한 게 서프라이즈 이벤트 때문이었다. 하지만 꽃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 마음은 지옥에 있었다.
있지도 않은 친어머니에 대해 쌓아온 정이 한순간에 부도 수표가 됐다. 그 원망을 돌릴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 꽃집 같은 별장 앞에서 빠져나와 신발을 끌며 걸었다.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벚나무 밑을 지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내버려 둘 리 없는 장희태가 나를 앞질러 와 길을 막았다.
“말하려 했어.”
내 머릿속은 엉망진창인데 장희태는 도리어 차분해 보였다. 그의 뒤로 가득한 벚나무들이 이럴 줄 몰랐냐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네가 뭐 타이밍? 그걸 놓쳤다고 치자. 그래도 너는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너는 언제나 기회가 있었어, 언제나.”
변명 없이 듣기만 하는 장희태가 체력이 다한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만두자. 너랑 연애 같은 걸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미친 거지.”
“네 귀에 내 말 안 들릴 거 아는데. 내일 데려다줄 테니까 우선 들어가.”
“난 발 없나? 오늘 갈 거다. 내 발로 갈 거고,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가져온 짐이래봤자 속옷에 티셔츠 한 벌이라서 아쉽지도 않았다. 핸드폰만 있으면 지갑 같은 건 없어도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장희태가 내 심정을 알까. 엄마가 있는데도 엄마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두 번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기분을 준 건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무작정 그를 밀치고 나와 달밤의 거리를 걸었다. 벚꽃이 휘황하게 핀 언덕길을 뛰어갔다. 그러나 긴 다리로 따라오는 그림자는 이골이 날 정도로 빨랐다.
“한 번만 더 내 팔 잡으면. 니 경찰에 신고한다.”
“해.”
“귀찮게 좀 하지 말라고!”
“같이 있지도 못할 만큼, 내 변명은 들어볼 가치도 없을 만큼 내가 고작 너한테 그래?”
“들어 주기 싫어.”
기어코 또 운다. 이래서 봄이 싫다. 사람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지나간 일까지 다 불러와서 애먼 사람을 울린다. 눈이 충혈된 장희태는 우는 얼굴에 약한 것처럼 말 한마디 세게 못 했다. 제 딴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만 나는 그를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원망을 쏟아내고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약한 마음은 좋아한 만큼 미워진 사람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장희태. 너랑 같이 있기 싫어.”
“그만 좀 해.”
“그니까 나 두라고. 혼자 가게.”
“내가…….”
장희태는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막는 듯이 계속 말을 삼키고 삼켰다. 본인도 억울한 부분이 있을 터다. 안다. 하지만 나는 장희태와 같이 있는 게 불안했다. 안 그래도 마음의 문을 거의 닫아두고 사는 나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별로라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그의 말대로 혼자 인내하고 삼키는 게 편했다.
장녀로, 입양아로, 또는 기대받는 딸로, 속마음을 남한테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삭이거나 닦아서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누구에게 털어본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 털겠는가. 부모님, 우영이, 내가 입양된 걸 모르는 친구들. 유일한 소통구는 아무 말이 없는 친어머니였다. 그런데 그게 장희태였다는 사실로도 벅찬데 그는 이 자리에서 용서를 받아내려고 했다.
“차에 타. 지금 당장 출발할 테니까.”
“하아…….”
“가는 내내 한마디도 안 해. 내가 입 열면, 중간에 뛰어내려도 안 말려. 어?”
눈물을 닦아 주려고 다가온 손을 피했다. 장희태는 내 손목을 잡고 같이 별장으로 가려다가 멈추어 섰다. 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척을 해 보기도 했다. 속으로는 멱살을 쥐고 싶을 거다.
“차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잘못한 거 알아서 입 다물고 운전만 하겠다잖아.”
“장희태. 희태야.”
나는 그의 뺨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여기 약 바르고. 그리고……. 두 번 다시 나 찾지 마. 내가 그랬지. 너 싫다고. 이번엔 진짜다. 진짜 네가 싫어.”
이렇게까지 말할 것은 아니었지만 이럴 줄 알았다. 혼자 풀릴 때까지 내버려 둬야 하는 나한테 이 자리서 끝장 보자고 하면 끝장이 나는 거다. 장희태에게 점점 더 못된 말을 했다.
“또 아파트에서 기다리면 신고할 거야. 너 대단한 집 아들이랬지? 스토커로 신고하고 광고도 낼 거고.”
기가 찬 듯이 웃는 장희태를 버려둔 채로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거지 같은 벚꽃들. 얼마 피지도 않고 져 버릴 거, 눈발처럼 떨어져 사람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그의 외침을 듣자마자 눈물이 터졌지만 닦지는 않았다. 멀찍이 쫓아오는 장희태는 뒤에서 절규하듯 소리쳤다.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지. 옛날에 왜 그딴 말 했냐고 뺨이라도 때리면서 따지지 그랬어. 성격부터 뭣까지 다 별로라고, 입 맞추고 손잡던 여자애가 하루아침에 싫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내가 미국 가서 멀쩡했을 것 같아? 그런데도 네가 좋아서……. 씨발.”
노란 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에 장희태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뒤로 쏠림과 동시에 내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휙 지나갔다. 오토바이는 죄송합니다, 하며 펜션 쪽으로 가 버렸다. 우느냐고 앞이 보이질 않았다.
단거리를 질주한 장희태의 거친 숨이 내 뒤통수에 묻었다. 내 머리칼에 여러 번 입을 맞춘 장희태는 목소리를 낮췄다.
“데려다줄게.”
“…….”
“응? 위험해서 그래.”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장희태는 제 짐이 아닌 내 가방만 간단히 꾸려서 차에 실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벚꽃이, 차에 타서는 트렁크 꽃의 향기가 나를 질책했다.
장희태는 약속대로 돌아가는 길에 침묵을 지켰다. 4시간을 달려 아파트 앞에서 내려 준 장희태는 내일 연락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그리고 집에 들어와 창밖으로 확인할 때도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놀고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냐는 엄마와 아빠에게 다퉜다고 둘러댄 뒤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싶어 차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을 때는 새벽 4시쯤이었다. 그제야 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본 나는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가라고 난리일 때는 언제고 막상 가 버리니 마음이 쓸쓸하다, 라. 사람이 이렇게 약하고 보잘것없다. 정말 싫었다. 봄도, 나도, 장희태도.
***
봄은 제대로 여물기도 전에 지나 버리고, 지나고 나서야 그게 봄이었구나 한다는 점에서 첫사랑과 닮아 있었다. 학원을 개업하고 깐깐한 고등학생 2학년, 3학년 아이들 및 학부모를 상대하면서 그리움이 줄어들 거라 생각했으나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또 벚꽃 축제니 뭐니 가 보지도 못했네.”
“가게가 바쁘니 별수 있나.”
주말이라서 학교를 쉬는 우영이는 친구네 집에 갔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간 장희태는 연락 한 번 없었다. 끝이라고 했으니 끝이었다. 봄이 끝나는 것처럼 정말 끝. 딴생각에 빠져 밥알을 새듯이 먹으니 엄마나 아빠나 기가 막힌가 보다.
“우림아.”
“예?”
“뭔 일 있나.”
평소라면 웃으며 넘겼을 텐데 엄마든 아빠든 뭔가 짐작한 게 있는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평상시와 달리 웃지도 않고 있으니 짐작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베란다에서 봄의 끝자락을 알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뉴스에서 비 소식이 있다고 했는데 빠르기도 했다. 곧 저 비가 벚꽃을 모두 데려갈 거다.
“엄마.”
“응.”
“혹시 친어머니한테는 그날 이후로 연락 같은 거 없었어요?”
계란말이를 집던 엄마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젓가락을 바로 놓았다.
“왜. 너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하든? 아니, 번호는 어떻게 알았대.”
엄마의 반응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워낙 친어머니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와 친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빠한테 5천만 원 줬다면서요. 물론, 그것도 적은 돈이지만……. 내 소식 더 안 물어봤나 싶어서.”
그나마 우리 친어머니가 염치라는 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5천만 원도 적은 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입 싹 닦고 가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를 자식이라고 생각은 했구나, 싶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런데 엄마나 아빠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두 분의 표정을 모를 리 없는 나는 감정이 복받쳤다.
“안, 줬어요?”
“줬어. 그냥 먹고 살기 바빠서 연락이 없나 보지. 그때 너가 안 만난다고 하니까 그러냐면서…….”
엄마는 필사적으로 말을 꾸며내는 것 같은 눈치였고 아빠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나는 엄마가 아닌 아빠를 바라보며 말을 와다다 쏟았다.
“그럼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아님 연락처 받아놓은 거라도.”
“그걸 이제 와서 왜.”
“두 분은 속상하실까 봐 말을 안 했는데. 내 부모님은 당연히 엄마랑 아빠지만……. 그래도, 나 모른 척 안 해 줘서 고맙다고, 연락은 하고 싶어요. 이제라도.”
두 분이 가슴 아파하실까 봐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왔던 말이었다. 보고 싶다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숨기는 게 힘들었다. 유일한 연결 고리가 찢어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마음이 허했다. 허한 곳을 메울 게 필요했다.
“저, 우림아.”
“예.”
“안 찾으면 안 되겠나. 아니, 연락 안 하는 게 나을 듯싶은데. 그쪽도 지금이면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엄마는 계속 안 찾기를 바라는 입장인 것 같았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아서 가라앉고 있을 때 아빠가 숟가락을 놓았다.
“우림아.”
“예.”
“우리가 너 상처 받을까 봐 숨긴 얘기가 있다.”
“여보야.”
엄마가 눈을 부릅뜨며 아빠를 말렸지만, 평상시 순둥한 아빠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하고 보는 성미였다. 말리지 말라며 손짓한 아빠가 내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다 듣고 마셔라. 물 먹다 체 하면 큰일 나니까.”
“뭔데요.”
“5천이 아니라. 2백이다.”
“2백요?”
“그것도 네가 가기 싫다고 하니까 금액이 팍 줄은기다. 원래는 더 많이 줄 생각이었는데……. 안 본다니까 그 정도 준다고.”
“네…….”
멀쩡한 척 컵에 따라진 물을 마셨지만 내심 충격받았다. 2백. 2백만 원. 아빠는 내가 상처받지 않게 금액을 5천만 원이라고 부풀리셨구나.
“엄마랑 아빠가 보기에. 뭐 집안 사정 때문에 너를 거기 맡겼다고는 하는데. 어찌어찌 수소문하다가 찾은 네가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탐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엔 썩 좋은 엄마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빠도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랬구나.”
아이를 버리는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그 모든 사정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사정은 아니기를 바랐다. 적어도 사랑하다가 어쩔 수 없어서 나를 두고 간 거라는, 용서 가능한 사정이기를 바랐다. 아빠는 슬퍼할 일이 아니라며 나와 손을 맞잡았다.
“그때는 네가 어렸고. 이제는 다 컸고 너도 어른이니까. 응? 언제까지 거짓말만 하고 살 수도 없고.”
“그렇죠.”
“우림이는 강하고 착한 공주니까 이겨낼 수 있다. 그치?”
“예.”
“그래. 됐다. 밥 마저 묵자.”
나는 아빠의 바람대로 강하고 착한 맏딸로서 웃으며 저녁 밥을 먹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거실에 앉아 오락 프로를 보고 깔깔 웃었다. 엄마도 그제야 안심을 한 얼굴이었다. 과일 후식까지 챙겨 먹고, 우영이를 친구네 집에서 데려오고,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까지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2백만 원이 잊히지 않아서, 서러워서 울었다. 엉엉, 울면서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나이는 먹었지만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내 마음은 깨지고 다치고만 할 뿐,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얼마나 더 무뎌진 연기를 잘하느냐의 차이였다. 아픈 건 아팠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핸드폰 화면을 오랜만에 켜 본다. 혹시 장희태에게 연락이 와 있을까 싶었지만, 그 대신 부재중 전화 목록에 새로운 이름이 떠 있었다. 친어머니. 5분 전에 남겨진 부재중 전화 목록. 장희태였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침대로 가서 쓰러졌다. 자고 일어나면, 이 마음도 나아질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이 번호도 내일은 지울 거다. 모든 걸 지울 수 있을 거다.
***
얼마나 잤을까. 토독, 토독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이 떠졌다. 새벽 3시. 핸드폰을 켰을 때 보인 숫자에 놀라서 잠이 깼다. 잠들기 전에 본 부재중 전화가 기억이 났다. 왜 친어머니인 척 전화를 건 걸까.
나는 잠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새벽 3시. 낮만큼 단단하지도 견고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아침이 되면 후회하겠지만 지금은 충동에 지배당했다. 만일 지금 받지 않으면, 영원히 이 번호를 삭제할 생각이었다.
잠에 빠진 듯이 수화음이 길어질 즈음이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끝나는 상황에서 봄이 마지막 생떼를 부렸나 보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비 내리는 소리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어쩌면 꿈일 수도. 전화를 받은 그가 묵묵부답이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밖인 모양이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리듯 물었다.
“왜 전화했어?”
만나서 미안했다고? 다신 보지 않겠다고? 그러나 비 냄새가 물씬 나는 목소리는 한참 후에야 답을 내놓았다.
– 추워.
“추워?”
베개를 끌어안고 일어난 나는 혹시나 싶어 창문을 바라봤다. 캄캄한 새벽에 내리는 비가 나의 목을 타게 만들었다.
“어딘데.”
– 바깥에.
“바깥에 어디.”
– 말하면 와 주려고? 괜히 기대하게 하지 말지.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이번에는 장희태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끊어진 사이라는 것은 이미 아는데, 억지로 연결하려다가 다친 것도 아는데, 빗소리가 귀에서 맴돌아 다시 잠들 수 없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싶었다.
혹시 몰라 우산 두 개를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싸우고 있었다. 정말 있을까. 있으면 어쩌려고? 있으면 안 되지. 이 시간에, 이 날씨에, 우리 집 앞에.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다른 곳도 아닌 놀이터부터 눈에 담았다. 천천히 우산을 들고 걸어간 그곳에는 기울어진 시소 하나가 있었다. 옛날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장희태가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어떤 기대를 했는지 알게 됐다. 있었으면, 했다.
“장희태.”
나는 가져온 장우산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시소에 앉아서 비를 맞고 있던 장희태는 고개를 들었다.
“받아라. 얼른.”
소나기처럼 내리다 그칠 비가 아님에도 장희태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나는 고집 부리는 그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고, 떠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한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그가 눈에 밟혔다.
“여기 앉아 있다고 뭐가 해결 되나.”
하여간 말도 참 안 듣는다. 나는 그의 시소 반대편에 앉았다. 내 무게 때문에 약간 가라앉았지만, 반대편 장희태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아침을 맞이한 우리 둘이 감기에 걸리면 재밌는 결말이겠다.
미끄럼틀에 원수진 것처럼 쳐다보던 그가 빗방울이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덕분에 그를 감시인인 양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남색의 셔츠가 젖어 장희태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내가 준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흡사 우는 것처럼 보일 만큼 그의 얼굴에 빗방울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꼭 잡았다. 안 그러면 비를 가려 주는 우산이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부모는 일이 많고 바쁘다고 하더니 제일 먼저 내 곁을 떠났고, 그리고 내 유일한 양육자는……. 내 안에 남아 있던 아주 작은 조각까지 사그라들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줬지. 그게 뭔지 알기도 전에.”
장희태의 고백은 아주 정적이었다. 그는 애걸하지도, 비굴하지도 않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다. 처음인 듯 서툴러도 나는 그 고백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나한테 네가 일주일에 한 번, 달에 한 번 걸어주는 그 통화가 간절했어. 언제부터인가 훔쳐 듣는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네가 나를 위한 라디오 방송이라도 하는 줄로 착각할 만큼 네 열렬한 팬이었거든.”
아파트 단지 내에 벚꽃이 떨어진다. 때가 돼서 지는 게 아니라 비에 휩쓸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이 생각난다. 내가 처음으로 너에게 마음을 주었던 날. 오래 잊고 있었는데.
“넌 구제 불능이야. 장희태.”
“알아.”
“여기 오지 말랬지.”
시소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왔다. 장희태 쪽으로 완전히 기운 시소를 보다가 나는 우산을 버렸다. 비가 입 안으로 들이침에도 남은 감정을 긁어 그에게 보였다.
“너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알 거 아니야. 내가, 그래도 좋아한 거 알았으면서.”
“내가 미워?”
젖은 그의 물음을 듣고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미워.”
“얼마큼?”
“안 보고 싶어.”
“그냥 쭉 미워해 주면 안 되나.”
비에 젖은 생쥐 두 마리가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돌고 돌아 이 놀이터에서 다시 만났다.
“나 그냥 미워해. 그게 무서운 적은 없어.”
“그럼 뭐가 무서운데.”
“보기 싫다고 하는, 네 말.”
“…….”
“얼굴은 좀 봐 주지. 미워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내가 부족하고, 이상하고, 못난 부분이 유독 잘 보일 때가 있었다. 장희태도 그랬을까. 양복을 입어도, 원장 직함을 달아도 비 하나 피하지 못하는 헛똑똑이들. 우산을 팽개친 그의 앞으로 걸어가자 장희태의 눈에서 비가 아닌 게 떨어졌다. 나는 그의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숙였다.
“또 나한테 속이는 거 없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그의 속눈썹에 빗물이 안간힘 쓰고 매달려 있었다. 내 말을 받아 입 안에서 단물이 날 때까지 씹은 그가 겨우 답을 내놓았다.
“있어.”
“뭐.”
“네가 임신했으면 했어.”
괘씸한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차가운 빗물이 손에 묻어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약도 안 발랐는지 내가 상처 낸 자리에 흉한 딱지가 생겼다.
“또.”
“학원에서 일하는 네 친구. 마음에 안 들어. 향수 냄새가 너무 진해서.”
“또?”
“사랑해.”
나는 우산을 놓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아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비가 나의 머리를 적셨다. 그의 입술이 빗물에 젖은 나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유일하게 따듯한 온기를 옮겨 받았다. 입술을 뗀 그가 멍한 시선으로 비를 맞았다.
“결혼해 줄래.”
나는 말없이 그의 입술을 만지며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까칠한 왕자님이 손수 꽃을 주문하고 트렁크에 싣고 다녔던 게 너무도 웃겨서. 그러나 장희태는 나의 웃음을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입술을 잘게 떨었다.
“이제 더 속이는 거 없어.”
“그래 보인다.”
“김종선한테 해코지한 거 빼면.”
“뭐?”
그 이후의 얘기는 아파트 현관 아래서 비를 피하며 들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독립이 아니라 계속 같이 지낼 수 있었던 김종선을 남모를 계략으로 집에서 독립시켜 해외에 있는 호텔로 취직시킨 것 말이다. 해코지라고 말하지만 나와 같은 한국에 있는 게 불안해서 못 견딘 모양이었다.
그와 현관 아래서 으슬으슬 몸을 떨며, 옷의 물기를 짜며 학생처럼 웃었다. 대화의 태반이 장희태가 못난 마음을 고백하는 걸 들어 주는 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올해 벚꽃의 마지막을 그와 볼 수 있어서 이 봄에 여한이 없었다.
“나는 청혼할 때 꽃보다 편지가 좋다, 편지. 알았지?”
장희태가 모르는 척 눈을 깔았다. 곧 그 예쁜 글씨로 편지를 써 주겠지. 그러면 나도 답장을 쓰겠다. 아주 길고, 오랜 나의 마음을 담아서. 나 역시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