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5
‘그레타. 네 차례야……!’
닉시가 그레타를 툭 쳤다. 그레타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 주윌 훑어보는 척하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레타는 돈 많고 철부지인 친구를 둔 부유층의 아가씨 역할이었다.
단정한 단발머리를 반만 묶어 까만 깃털 장식이 달린 핀으로 고정해 둔 헤어스타일. 걸을 때마다 금색 단추로 허리를 고정해 놓은 보랏빛 치마가 그녀를 반짝이는 자수정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가 말 대신 카운터에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바텐더가 다가왔다.
“필요하신게 있으신가요.”
바텐더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어떤’ 손님인지 살피듯 정제된 눈빛이었다.
그레타가 다가오는 바텐더로 인해 긴장했는지 잠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길버트가 불쑥 그레타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끌어당겼다.
“여기 우리 아가씨께서 찾으시는 게 있다던데.”
머릴 말끔하게 올린 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길버트는 그레타를 향해 콧잔등을 찡긋했다. 길버트와 벤자민은 그런 부유층 아가씨들을 모시는 시종 역할.
그중 길버트는 ‘본인은 연기를 못 한다!’며 얌전하게 있겠다고 말했던 것치곤, 제일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의 제스처에 긴장이 풀린 그레타가 다시 한번 걸음을 가다듬었다.
“여기 ‘민트 그라파’ 있나?”
그레타는 차가운 시선으로 가게를 훑어보며 말했다.
라울이 알려 준 첫 번째 입장 조건이었다. 포도즙을 짜낸 뒤 남는 찌꺼기로 만든 브랜디인 ‘그라파’를 주문하는 것.
민트는 누구의 초대를 받고 온 건지를 뜻했다.
이탈리아의 초록색 국기를 딴 민트. 이탈리아 쪽의 연줄로 왔다는 의미를 뜻했다.
“……12개월 숙성된 것과 18개월 숙성된 게 있는데, 어느 쪽을 선호하실까요.”
바텐더가 즉각 축객령을 내리지 않는 것을 봐선, 갓 시골에서 상경한 애송이들 티는 나지 않는 듯했다.
“그 이상은 없나?”
그레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닉시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바텐더가 직접 마시고 판단하길 권한다며, 안쪽의 문으로 안내하면 경매장 입성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뭔지 바텐더는 꽤 오래 고민했다.
그는 그레타의 얼음 인형 같은 얼굴을 의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역시 그레타가 너무 어려 보이는 건가?’
닉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레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스물한 살. 일부러 눈가에 진보라색 화장을 덧칠했지만, 눈화장으로 나이를 속이기엔 약간 어려운 감이 있었다.
“딱 한 병 남아 있습니다만, 워낙 오래 숙성시킨 거라 입맛에 맞으실진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좀 더 가볍게 즐기기 좋은 술이 있는데. 추천해 드릴까요?”
바텐더가 가게 우측에 테이블을 가리켰다. 뜻을 직역하자면 이랬다. ‘너희 같은 어린애들에겐 아직 이르니, 얌전히 술만 먹고 가라.’
이대론 작전 실패였다.
닉시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소동을 일으켜서 주위가 혼란스러운 사이에 몰래 잠입하는 수밖에 없나. 최대한 난리 없이 들어가려 했는데.’
라울이 내부 구도를 알려 줬기 때문에 경매장으로 들어가는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어떻게 적당히 소동을 벌이느냐가 문젠데……’
어쩔 수 없지.
닉시는 가장 쉽고 빠르고 많이 했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장애물이 생기면 부수는 게 제일 쉬운 법.
바로 폭력으로.
“이봐. 내가 가볍게 즐기고만 싶어서 이런 곳까지 찾아와 준 줄 알아?”
닉시가 바 카운터 위에 손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바텐더가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났다.
기세라는 것은 가위바위보와 같았다. 내가 먼저 주먹을 낼 거라고 떵떵거리는 것.
그럼 상대는 별생각 없었다가 괜히 머리를 굴리게 된다. 얘가 왜 이러는지, 그럼 자기는 뭘 내야 이길 수 있는지.
그렇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냥 냅다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후려쳐서 기절시키면 끝.
그게 가위바위보로 위장한 싸움의 정석.
닉시가 바텐더의 기색을 살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철컥.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손님.”
바텐더는 권총을 꺼냈다.
가위든, 주먹이든, 총 앞에선 평등했다.
“에 오셨으면 얌전히 이곳의 법을 따르시죠.”
닉시는 제 이마에 겨눠진 총구를 보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자, 저쪽으로 가실까요?”
‘어쩐다.’
닉시가 눈을 굴렸다.
폭력으로 해결하기! 방법은 무산.
방아쇠에 걸려 있는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을 보니 권총은 단순 위협용인 것 같았다.
‘제압할까?’
가능이야 하겠지만 시간이 지연될 것이다.
“손님?”
‘게다가 나 혼자면 몰라도…….’
옆에는 두 명의 민간인과 한 명의 수전증 환자가 있었다. 그녀가 싸우는 동안 구석에서 처맞지나 않으면 다행인 사람들이었다.
“제 말 안 들리시나요?”
바텐더가 묵묵부답인 닉시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바텐더는 제 눈앞으로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쾅!
그 기색을 느낀 직후, 바로 테이블을 부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게 안에 있는 모두가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그레타가 치맛자락 안에서 나무 지팡이를 꺼내 곧장 바텐더 앞에 있는 바 테이블을 부숴 버린 것이었다.
그레타는 박살이 나버린 테이블에서 손을 떼어 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
으르렁거리는듯한 목소리. 어마어마한 기백이었다.
이게 바로 늑대를 때려잡은 양치기 소녀의 기백인가. 닉시가 마른침을 삼켰다.
살기를 느낀 것은 바텐더와 가게 안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맨주먹으로 그 시끄럽던 소음을 평정했는데, 오싹함을 못 느끼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무, 무슨 일이야?”
“저, 저자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부숴 버렸어.”
“뭐라고? 아냐, 잠깐! 뭐, 뭔갈 들고 있는데?”
손님으로 가장한 경매장 관계자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텐더는 순간 제 코끝을 스치고 갔던 흉기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써 미소 지었다.
“소, 손님 이러시면…….”
“설마…… 저자가 바로 검정 타란툴라?”
요란스러움 사이, 유난히 떨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텐더의 귀를 때렸다.
바텐더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호, 혹시 ‘검정 타란툴라’ 님이십니까?”
타란툴라? 닉시의 머릿속에 털 달린 거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건 뭔지 모르지만, 이게 기회라는 건 끝내 주게 알 수 있었다. 닉시는 냉큼 고갤 끄덕였다.
“……그럼 내가 흰개미 새끼로 보여? 알면 빨리 움직여.”
“죄, 죄송합니다!”
압도적인 무력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킬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천 발의 미사일을 봤을 때, 산길을 걸어가다가 곰을 마주쳤을 때, 나무 기둥을 들고 가는 오베르의 평범한 할머니를 봤을 때.
몽둥이 하나만 들고 나무 테이블을 박살 낸 것도 모자라, ‘당장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이걸로 너를 패 버리겠다’라는 살의 넘치는 눈과 마주쳤을 때.
“빨리. 앞장서.”
그레타가 짧게 말을 내뱉으며 몽둥이 끝으로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바텐더가 허겁지겁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바텐더가 안쪽으로 사라지자마자 그레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안,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그레타의 한숨 소리에 일제히 총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 이제 그만 화 푸시죠, 아가씨.”
길버트가 허둥지둥 그레타의 어깰 두드렸다.
그들은 바텐더가 안내한 가게 안쪽,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바텐더는 두꺼운 책장 앞에 섰다. 책장 옆의 레버를 잡아당기자 지하로 향하는 문이 등장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 안쪽. 깊고 캄캄한 돌계단이 나타났다.
지하 경매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바텐더는 그레타의 험악한 얼굴을 보곤 흠칫 몸을 떨며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후아…… 하마터면 못 들어오는 줄 알았네.”
이제야 보는 눈들이 없었다. 닉시가 벽에 기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길버트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함께 벽에 기댔다.
“긴장했잖아, 닉시. 네가 바텐더한테 시비 걸길래 난 또 네가 패싸움이라도 일으키려는 줄 알았어.”
“눈치 못 챘나? 이 녀석은 진짜 패싸움이라도 일으키려 했는데.”
“……정말이야?”
벤자민의 말에 길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미쳤니, 그럴 리가!” 닉시는 뻔뻔하게 손사래 치며 웃었다.
“아무튼 네 덕분이야 그레타! 거기서 그런 패기로 사람들의 전의를 꺾어 버렸잖아. 연기는 못 한다더니, 의외로 실전파인가 봐!”
그러자 몸을 계속 구부정하게 반으로 접고 있던 그레타가 고갤 들었다.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검은 머리칼이 그녀를 스산하게 보이게 했다. 괜히 눈이 마주친 벤자민이 흠칫 놀랐다.
“그레타? 어디 아파?”
“……뼈 맞았어요.”
“안 아프면 이상하긴 해…….”
“골절감이긴 했지.”
다행히 그레타의 손은 약간 빨개진 것 말곤 멀쩡했다. 놀라운 주먹이었다.
“설마 그것 가지고 테이블이 부서질 줄은…….”
그것 가지고? 벤자민이 반파된 나무 테이블을 떠올렸다.
“저도 깜짝 놀라서 굳었는데, 어색하진 않았나요?”
“엄청 무서웠어.”
눈앞의 이 사람이 진정 방금까지만 해도 지옥 기둥을 뽑아 들고 불구덩이에서 살아 돌아온 악마 같았던 사람이 맞는지.
곧장 수줍음 많은 시골 아가씨가 된 그레타를 보며, 닉시는 앞으로 그레타를 귀찮게 굴면 안 되겠다 속으로 다짐했다.
“어쨌든 무사히 잠입엔 성공했다! 이제 우리의 두 번째 목표는 ‘탄라나’라는 약초를 찾는 거야.”
“자자. 그레타, 이번에도 깜짝 놀라서 굳어 버리자고! 그럼 아무도 우리 옆에 못 올 것 같으니까 알겠지?”
“노, 노력해 볼게요, 길버트!”
벤자민이 길버트와 그레타의 희한한 결의를 보며 모르는 사람인 척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문 하나가 더 있었다.
묵중한 문을 열자 채도 낮은 탁한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곧장 지상의 술집과는 약간 다른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온갖 알아듣지 못할 언어들이 시끄럽게 고막을 때리는 곳. 지하에 있는 주제에 골목과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여 있는 곳.
미궁이라는 이름의 지하 경매장이었다.
‘꼭 거기 같네.’
닉시는 언젠가 시궁창의 쥐새끼라고 불렸던 시절, 그녀가 살았던 곳을 떠올렸다.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거 없으니 최대한 빨리 약초를 찾아서 여길 뜨자.”
닉시는 나머지 세 명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들은 미리 작전 회의했던 대로 고갤 끄덕였다.
그때였다. 나무통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불쑥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여긴 처음인가?」
라틴어였다.
그레타가 홱 눈을 치켜뜨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꺼져.」
라틴어를 모르는 셋도 욕이구나 알 수 있는 단호한 대답.
긴장을 너무 많이 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늑대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그레타의 기백은 어디 가지 않았다.
과도한 패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녀석 뭐지?’와 ‘이 사람, 보통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동시에 갖게 한다.
이미 기가 눌려 버린 문지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처, 처음 오는 녀석들이라면 다이달로스의 규칙을 따라줘야겠어.」
「규칙?」
「너희 중 한 명은 여기 있어야 해.」
「내가 네놈들의 뭘 믿고 그런 규칙을 따라줘야 하지?」
「그…… 가끔 처음 오는 놈 중에 돈도 없는데 상품을 훼손하거나 돈을 떼먹고 도망가려는 놈들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일종의 보증이라고 할까……요?」
라틴어를 모르는 셋도 겸손한 대답이구나 알 수 있는 공손한 자세.
남자의 말에 그레타가 고민하듯 눈을 찡그렸다.
그레타가 별다른 욕설 없이 잠잠하자 남자는 조금 자신감을 얻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결정하면 말하십시오.」
남자의 말을 뒤로하고 그레타가 일행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곳에 규칙이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여기 남아야 한대요.”
“흐음. 인질 같은 건가?”
그레타가 닉시의 말에 수긍했다.
“그럼 누가 남지?”
자연스럽게 닉시와 그레타는 생략이었다. 닉시는 독초를 봐야 하고 그레타는 통역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길버트와 벤자민, 둘이었다.
길버트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려 할 때, 뭔가에 집중하고 있던 벤자민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남지.”
“괜찮겠어요, 벤자민?”
벤자민은 근처에서 들리는 익숙한 언어에 귀 기울였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남자. 그 뒤엔 같은 관계자들인지 몇 명의 남자들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잡담에서 익숙한 단어들이 들렸다.
독일어였다.
“저 녀석들, 독일어를 쓰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보다 내가 대처하기 더 쉽겠지. 여긴 내가 남는 게 맞아.”
“그렇다면 네가 적격이긴 하네.”
닉시가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수긍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누가 남을지 정했나?」
남자의 말에 벤자민이 다가갔다.
길버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골칫덩어리인 개를 맡기는 주인의 얼굴이었다.
닉시는 그저 엄지손가락만 들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면…… 알아서 잘해 봐!’라는 듯한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벤자민이 입구에 보증으로서 남게 되고, 나머지 길버트, 닉시, 그레타는 경매장 안쪽으로 향했다.
* * *
「구경하세요! 마야 문명의 사당 깊숙한 곳에서 발굴해 낸 순금 펜던트입니다! 어디에선 웃돈을 주고도 못하는……」
「거기 젊은이, 모피엔 관심 없어?」
어두컴컴하고 소란스러운 골목 안쪽. 비밀스러운 지하 경매장이란 이름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총기부터 시작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짐승의 가죽 따위들까지. 전쟁통에 도굴당한 유물들도 가끔 보였다.
‘이 정도면 제법 건전한 축에 속하는데?’
시궁창 인생을 겪어 봤던 닉시는 내심 식민지 개척 시대의 노예 상인들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지하 도시에서 거래하고 있는 것들은 정상적인 것들에 속했다. 물론 대부분 법으로 금지된 것들이었지만.
태연한 닉시와 달리, 지하 도시의 사정에 내성이 없는 길버트와 그레타는 술과 약에 취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보며 긴장했다.
“이쪽이 약재들을 파는 쪽인 것 같네. 이쪽으로 가자.”
닉시는 길버트와 그레타를 데리고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곧 그들은 쌉싸래한 향이 나는 가게를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손님 같아 보이진 않는데.」
벤자민 옆에 있던 남자가 제 동료들에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동료들은 벤자민이 앉아 있는 나무 의자 옆, 쉴 수 있는 공간처럼 꾸려 놓은 곳에서 포커를 치고 있었다.
닉시 일행이 가고 난 뒤, 그들은 벤자민의 예상대로 독일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는 화가가 같은 독일인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야 관둬. 저 녀석 일행이 오늘 여기 오실 거물들이시란다.」
「뭐? 정말이야?」
「그래. 일명 검정…… 거미 털이라 했던가?」
「혐오스러운 이름이군. 그쪽 나리들은 그런 별칭을 좋아하나?」
남자들이 벤자민을 훑어봤다. 벤자민은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했다.
「하아. 미리 알았다면 내가 가서 여기 안내라도 했을 텐데.」
「구두도 좀 핥게?」
「구두만 핥아? 발가락도 핥아 드려야지.」
「큭큭. 하긴 손 큰 거물이라도 만나면 팁이 쏠쏠하긴 하지.」
남자들은 시시콜콜 농담했다.
「그나저나 거물급이 경매장에 온 건 오랜만이네. 왜, 요즘 이상하게 도시에 경관들이 많아져서 손님이 줄었었잖아.」
「경관들이 많아졌다고? 왜?」
경관들? 잡담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한 벤자민이 가만히 귀 기울였다.
「나야 모르지. 누굴 찾고 있는 것 같다곤 하던데. 스파인지 뭔지……. 아무튼 그거 때문에 장사 망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말야. 단속한답시고 군대라도 동원돼 봐. 그럼 이 바닥 장사 접어야 해.」
「나라의 돼지들이면 헛간에 가서 얌전히 똥이나 받아먹고 살 것이지…….」
보아하니 스파이 건으로 이곳을 수색하러 온 경관들 때문에 경매장 관계자들은 신경이 예민해진 듯해 보였다.
‘역시 경관들이 신분증에 적혀 있던 이곳을 수색하고 있나 보군. 외부적으로 아직 무슨 일로 수색하는진 알려지지 않은 것 같고.’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괜히 신원을 확인당하면 곤란했다.
벤자민 자신은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적국의 탈영병이었고, 길버트와 그레타는 라울이 숨어 있는 오베르 사람이다. 게다가 농부는 저들이 말하는 나라의 돼지였다. 일단 아직까진.
「그러니까 여기 손님들 검문 똑바로 해. 대충하지 말고.」
「그래, 그래 알았어. 신중하게 행동해도 나쁠 건 없지. 제기랄. 또 졌잖아.」
남자 중 하나가 카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러자 주변 남자들이 킬킬 웃었다.
이윽고 해산하려는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들은 동쪽 출구로 보내. 그쪽에서 검문할 테니까.」
「북쪽은?」
「거긴 어차피 열쇠가 없으면 못 여니까 괜찮아.」
남자가 제 벨트에 걸려 있는 열쇠를 가리켰다. 벤자민은 짤랑거리는 열쇠를 스쳐 지나가듯 흘겨봤다.
‘동쪽 출구.’
「좋아. 나도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지.」
포커를 치던 남자 두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미궁과 거미 마크의 엠블럼이 박혀 있는 점퍼를 집어 들었다. 이곳의 관계자들이 입는 단복 같은 듯했다.
동쪽 출구로 향하는 자들은 셋. 하나같이 덩치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몸싸움을 벌여서 검문을 무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닉시 일행에게 검문하는 곳이 아닌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했다.
‘어쩐다. 그 녀석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벤자민이 곰곰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술집으로 통하는 경매장 입구에서 바텐더가 황급히 내려왔다. 남아 있던 남자가 바텐더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야.」
「헉, 헉…… 방금 ……통과…… 검정 타란툴라 못……나?」
「검정…… 뭐?」
그들은 라틴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벤자민으로선 유추할 수 있는 단어 몇 개만 들리곤 대부분 뭐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짜야……!」
「뭐?!」
바텐더와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그에게 쏠렸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벤자민이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길. 남자가 욕설 따위를 내뱉었다.
저를 향한 적개심 어린 눈빛. 욕설.
무슨 말이 오갔는진 몰라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이 바닥 생활하면서 본 적 없는 애송이들이라 했지. 감히 거물을 사칭해?」
벤자민은 남자의 중얼거림을 듣고 가만히 생각했다.
[호, 혹시 ‘검정 타란툴라’ 님이십니까?] [……그럼 내가 흰개미 새끼로 보여? 알면 빨리 움직여.]순간 벤자민의 머릿속에 아까 바 안에 있었던 소동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가.’
아무래도 농부가 뻔뻔하게 이곳의 단골을 사칭했던 게 들킨 듯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던 벤자민으로선 억울한 처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된 부분이 있었다.
‘이자들은 일을 크게 만드는 걸 원하진 않았지. 소란이 일어나면 경관들이 찾아올 거고, 우릴 경관에게 신고할 수도 없을 테니까.’
이대로 순순히 저자세로 나가면 별 충돌 없이 얌전히 쫓겨날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 농부 일행이 원하는 약초를 찾았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그사이 남자는 벤자민에게 걸어왔다. 그리곤 투박한 솜씨로 그의 코트 깃 부분을 잡아 들었다.
코트 깃을 잡은 거라지만 멱살을 잡은 것과 다른 없는 모습이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벤자민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이봐.”
남자가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하란 대로 하면 괜찮게 넘어갈 수도 있…….’
“벗어.”
“……뭐?”
벤자민이 인상을 구겼다.
“정말 있을 줄이야…….”
닉시는 씹으면 정신 놓을 것 같은 기괴한 이파리들 사이에서 주홍빛의 꽃을 찾아냈다.
그들이 찾고 있는 독초였다.
“……닉시. 이게 그거야?”
길버트의 물음에 닉시가 고갤 끄덕였다.
닉시가 만들어야 하는 약과 치료제의 마지막 재료. 탄라나.
“길.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몽땅 쓸어와.”
“네, 아가씨.”
닉시는 적당히 다른 찻잎들을 구하러 온 척하며, 탄라나까지 전부 구매했다.
길버트가 아가씨의 명령을 잘 따르는 시종처럼 나긋한 낯으로 돈을 냈다.
먹으면 골로 가는 독초임에도 상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것을 팔았다. 그는 그저 본인이 불렀던 가격보다 묵직한 금액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닉시 일행은 가판대의 진열된 풀들을 몽땅 구매했다.
“그럼 맡긴 걸 돌려받으러 가보실까?”
이제 화가만 돌려받은 뒤, 이곳을 뜨면 미션 성공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는걸?’
닉시 일행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골목 한 블록을 지나려고 할 즘이었다.
벽에 기대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길을 막아섰다.
「이 길은 역행해서 갈 수 없습니다.」
「왜죠?」
그레타가 대꾸했다.
「이곳의 법이 그래요.」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턱짓으로 오른쪽 골목길을 가리켰다.
「동쪽으로 가시죠. 거기 출구가 있으니까. 당신네의 친구도 거기 있을 겁니다. 뭐, 별일만 없다면 말이죠.」
별일만 없다면? 그레타가 미묘한 남자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옆에 서 있던 닉시가 조용히 귓속말했다.
“뭐라는 거야, 레타?”
“나가는 문은 동쪽에 있대요. 벤자민 씨도 거기 있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동쪽으로 가면 되겠네.”
닉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레타는 못내 찜찜한 기색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들은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겹겹이 쌓여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난잡한 가게들 사이. 뭔가 묘한 기시감을 느낀 그레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닉시가 그레타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이상하게 같은 목소리가 주변에서 계속 들리는 것 같아서요.”
막 저 멀리 출구로 보이는 곳이 보였다. 그 앞에는 경매장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남자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 몇몇이 서 있었다.
닉시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
“닉시?”
길버트가 그런 닉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같은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해서 눈에 띄지 않게 주변을 훑어봤는데…….’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지.
닉시는 길버트와 그레타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릴 미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닉시의 말에 길버트와 그레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우리한테 길을 안내해 줬던 남자 기억해?”
이곳의 관계자로 보였던 남자. 닉시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 남자를 찾아냈다.
가는 길이 같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저가 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느리게 걸어도 거리가 좁혀지거나 멀어지지 않는 건 이상했다.
게다가 이렇게 수많은 골목 중, 우연히 계속 본인들과 길이 겹친다는 것은, 일부러 본인들을 쫓아오려는 것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하지 닉시.”
“흩어지자. 누굴, 왜, 노리는 건지 알아야 하니까. 길버트. 너는 그레타를 데리고 동쪽 출구로 나가. 만약 돈을 노린 거라면 너를 쫓아갈 거야. 네가 아까 가게에서 돈을 내는 걸 봤을 테니까. 그게 맞다면 그냥 순순히 돈을 줘. 다치는 것보단 거지가 되는 게 낫잖아.”
“그건 그렇지…….”
“만약 닉시 양을 쫓아간다면요?”
“나를 쫓아온다면…….”
‘군과 관계될 확률이 높겠지.’
“글쎄? 내 미모에 반한 사람 아닐까?”
닉시는 너털웃음 지었다. 길버트가 맥 빠지는 소릴 냈다.
닉시가 말 대신 손가락으로 저 멀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 갈림길을 가리켰다. 저쪽까지 걸어가면 곧장 흩어지자는 제스처였다. 길버트와 그레타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그들은 평범하게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지금이야!”
이윽고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동시에 반대편으로 갈라져 뛰었다.
「젠장!」
닉시 일행을 뒤쫓던 남자가 작게 욕지거리하며 어디론가 손짓했다.
그러자 그 구역을 담당 중이던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 둘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흩어진 닉시 일행을 뒤쫓았다.
「비켜, 비켜!」
「으악, 뭐야!」
닉시는 뒤쪽을 흘금 바라봤다. 가장 처음 자신들을 미행했던 남자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겨우 한 명? 나머지 둘은 길버트 쪽을 쫓아간 건가?’
돈을 노린 거면 굳이 제 쪽으로 따라붙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처럼 주머니도 가방도 없는 얇은 옷차림을 본다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뻔히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군 관계자라기엔 이상했다. 그들은 저 남자들처럼 소란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
‘둘 다 아니라면 대체 뭐지?’
닉시는 급히 몸을 꺾어 곧장 우측 골목으로 들어갔다.
인파 사이에서 그녀를 따라가던 남자가 다급히 골목 안으로 뒤따라갔다.
좁은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어딨지?」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그때, 골목 간판 위쪽에 올라가 있던 닉시가 뛰어내려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콰앙!
그녀는 곧장 체중을 실어 남자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커헉!”
머릴 땅에 처박은 남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절했다.
“후우.”
닉시가 손바닥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얘네가 왜 우릴 쫓아오는 거지? 미아 보호 차원에서 나온 건 아닐 거고. 설마 화가가 깽판이라도 쳤나.”
닉시는 머릴 긁적였다.
지금 생각해 봐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여길 뜨면 다 해결될 문제였다.
“길버트랑 그레타는 잘 따돌렸으려나.”
그녀는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을 때였다.
“어, 언니…….”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있던 거지 몰골의 꼬마가 고갤 들었다.
꼬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 바구니에서 지저분한 녹색 사탕을 건넸다.
방금 닉시가 남자 하나를 기절시킨 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사탕 하나…… 먹을래요?”
추레한 몰골. 앙상하게 마른 몸. 비굴한 눈빛.
어디선가 많이 봐온 익숙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