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8
Chapter 5. 가을. 티 파티, 몽유병, 제비꽃 (2)
닉시는 제게 쥐어진 약을 바라보며 멍하니 주저앉았다.
떠나 달란 그의 부탁에 그녀는 끝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그녀의 동료들이 뛰어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못하겠어?”
“…….”
“그럼 이유를 만들어 줄게.”
‘뭐……?’ 뒤늦게 닉시가 고갤 들었다.
벤자민은 닉시를 내버려 두고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 끝에 자신의 전우들이 있었다.
‘……설마.’
닉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변과 길가의 경계. 벤자민은 제키와 필립을 마주쳤다.
급하게 달려온 듯 흐트러진 모습들이었다.
그 몰골이 괜스레 우스워서 벤자민은 픽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는 내가 저 녀석을 파리로 돌아갈 수 있게 설득해 달라고 했지.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더군. 그건 내 몫이 아니라, 너희 몫이잖아.”
“벤자민!”
저 멀리 파도와 빗소리 사이에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시했다.
“넌 내가 저 녀석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거라 했지.”
[부탁드립니다. 닉시가 여길 떠날 수 있게 설득해 주십시오.] [벤자민 씨는 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겁니다.]“틀렸어. 난 저 녀석을 처음 봤을 때부터 꺼지라고 했거든. 매일 꺼지라고,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말을 통 들어먹질 않아.”
“벤자민!”
“그때부터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까지 이렇게까지 성가시게 굴 줄은…… 네 녀석의 친구란 놈은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해. 그렇지?”
“벤자민!”
천천히 옮긴 벤자민의 걸음이 마침내 제키와 필립의 코앞에 도달했다. 닉시가 숨을 색색 몰아쉬며 달려왔다.
닉시는 그와 다섯 걸음 멀어진 곳에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너, 말하지 마.”
“미친 게 아니고서야……”
“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적국의 군인한테 친구가 되자는 헛소리를 할 리 없지.”
적국의 군인.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의아한 기색이었던 두 쌍의 눈이 순식간에 이해와 경악으로, 적개심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벤자민은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벤자민!”
닉시는 저 멀리 가 버리는 그를 붙잡기 위해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제키와 필립이 바로 닉시를 가로막았다.
필립이 닉시의 팔을 붙잡아왔다.
“이거 놔.”
“닉. 방금 저 말. 대체 무슨 소리야.”
“좋은 말 할 때 놔. 니네고 대령이고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닉시!”
필립이 닉시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독일인이라니!”
그답지 않게 격한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맞고 있기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산하게 밀려오는 바닷바람이 쉽게 그칠 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듯 흉흉한 소릴 내며 불어왔다.
“알고서 그랬던 거야? 대체 왜 독일 사람을…… 아니, 아냐. 돌아가자 닉. 역시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냐.”
―솨아아.
그러나 그녀에겐 제 전우들이 지껄이는 말들 따윈 들리지 않았다.
“너도 사실은 언젠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될 걸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파리에 있는 걸 다 처분하지도 않고 도망친 거잖아, 네 업적은? 연구들은? 죽어라 쌓아 올린 것들을 다 포기할 거야? 포기 못 하잖아. 내 말이 틀려?”
닉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필립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말을 이어갔다.
“파리엔 아직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네가 전쟁 전부터 연구했던 유전자 공학 논문도 이제 곧 마무리되는 단계잖아.”
“……그게 뭐 어쨌는데.”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 거라며! 먹을 게 콩 한 쪽밖에 없으면 콩 하나를 엄청나게 키우면 된다고, 힘없는 사람들이 약탈당하고, 먹을 게 없어서 더 약한 자를 죽이고 빼앗는 세상을 바꿔 보겠다며!”
“내가 아냐. 아냐, 아니라고!”
닉시는 소릴 지르며 필립의 팔을 홱 뿌리쳤다.
머리가 펄펄 끓었다. 닉시는 저게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달궈진 사고회로는 머릿속 깊숙한 곳을 들쑤셨다.
그중 그녀는 숨겨 뒀던 조각난 기억을 하나 끄집어냈다.
그녀가 군에 입대하기 전인 6년 전. 천재로 불리던 유명인 시절.
그녀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인간의 신체 부위 재생’을 연구했다.
팔다리가 날아가도 다시 조직과 신체를 재생하는 연구. ‘전쟁이 났을 때 학회에 발표하면 돈을 꽤 모으겠네.’로 시작한, 인간을 파충류처럼 생각하는 그녀만이 할 수 있었던 것.
닉시가 머릴 부여잡았다.
“내가 굶어 죽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내가 언제 그런 걸 하고 싶댔어? 내가? 내가 미쳤다고? 아냐! 내가 아니라고!”
그리고 제 선배이자 닉시의 일방적인 라이벌인 노엘 휴거는 ‘유전자 공학을 이용한 대형 작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강낭콩 하나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먹고살 만한 식물을 만들 거야.] [뭐 그런 시시한 연구를 해요? 가난한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거 팔아 봐야 돈도 안 될 건데.]그럼 제 선배는 저를 보며 그냥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좋아해서 한 것도 아냐! 그건, 그건…… 전부.”
[내가 못 끝내면 언젠가 네가 끝내 줘.] [네? 싫어요. 내가 남 좋은 일 해 주는 사람으로 보이나.]“노엘 휴거, 그 자식 때문에…….”
노엘 휴거의 파편들.
그가 이루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 자식이 이 쉬운 것 하나도 못 이루고 뒤져버렸으니까! 이 재미없는 게 뭐가 좋다고 평생을 매달렸는데, 뭐 하나 세상에 제대로 내놓은 게 없잖아! 망할, 그 망할 노엘 휴거가 제 꿈이랍시고 남겨 놓은 것들이 그냥 썩어 가는 게 꼴 보기 싫었을 뿐이라고!”
“닉…….”
“그 멍청이는 왜 일주일이면 완성할 걸 6년이나 완성 못 해서! 그래 놓고 제가 뭐? 나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웃기지 말라 그래!”
닉시는 바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어 필립과 제키에게 던졌다.
“꺼져! 그딴 거 완성해도 하나도 안 행복해!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돌아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돌아가라고!”
닉시는 필립을 팍 밀쳐내고 벤자민이 사라진 곳을 향해 뛰었다.
제키와 필립은 그녀를 잡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헉, 헉…….”
얼마나 뛰었을까, 저 멀리 그녀의 집과 화가의 집으로 갈라지는 갈림목에 서 있는 화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닉시는 시야를 가리는 빗물을 벅벅 닦아 내며 그에게 달려갔다.
숨이 가빠왔다.
“가지 마.”
그녀는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손목에 힘이 안 들어갔던 건지, 그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들은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젖은 바닥에 내려앉아 눅눅하게 잠겨 들었다.
“이렇게 보내지 마. 응?”
닉시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약통을 다시 벤자민에게 쥐여 줬다.
빗물에 젖은 머리칼 때문에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 손을 꼭 잡은 닉시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기 같은 거 안 해도 되니까, 앞으로 귀찮게도 안 할게. 나보고 그렇게 가라 하지 마.”
영문을 모르겠다. 비 때문일까, 아니면 제게 건넨 약통 때문일까.
일순간 닉시는 벤자민의 제발 가라고 말했던 얼굴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노엘 휴거의 마지막을 찾아냈다.
그래서 이렇게 끝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를 영영 못 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젖은 뒷머리를 감쌌다.
벤자민은 닉시를 천천히 끌어당겨 안았다.
빗소리만 가득했던 공간에서, 그의 품속. 숨소리. 옅은 심장 소리가 들리는 좁은 곳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서로만 존재하는 그런 곳.
“네가…… 네가 날 자꾸 헤집어놔.”
온몸이 차갑게 젖은 와중에도 맞닿은 부분만큼은 뜨겁게 느껴졌다. 데일 것만 같이 뜨겁고 맹렬했다.
“네가 옆에 있으면 미칠 것 같아. 네가. 네가 너무 벅차, 닉시.”
그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수치를 끄집어내는 행위같이. 하나하나 짓이기고 토해 내듯 겨우겨우.
닉시는 그의 팔에 갇혀 있던 제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분명 닉시는 그에게서 과거의 그림자를 보고 그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는데, 막상 그와 마주치자, 그의 품을 꽉 끌어안자, 이상하게 그냥 그였다. 벤자민 리히터.
그제야 닉시는 깨달았다.
그는 과거의 잃어버린 것들이 아니다.
그는 지금 여기 있다.
아직 제 곁에 있다.
닉시는 벤자민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자신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누가 없으면?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 그녀가 대답했다.
누구?, 너 말이야, 벤자민 리히터.
뒷머리를 당겨왔던 손이 닉시의 턱선, 귀를 지나 뺨으로 흐르듯 지나왔다.
이윽고 그의 손이 닉시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닉시는 고갤 들었다. 그제야 벤자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열나잖아.”
그는 희미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따뜻한 표정. 그녀가 처음 보는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표정이 먼 옛날, 노엘의 마지막 얼굴과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가 생각나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는데. 이제 와서 눈앞의 이 사람은 제 선배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니.
“벤자민…….”
새삼스럽게. 그냥 그일 뿐인데.
그냥.
닉시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고개가 앞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호응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이 막혔다.
누가 명치끝을 조여놓은 것 같았다.
이미 뭔가 가득 들어차 비좁은 상자 안에 누가 뜨거운 덩어리를 밀어 넣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왜 저가 먼저 입을 맞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허나 그저 슬퍼서라고 하기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고, 같이 웃어 주자니 어쭙잖은 미소로 상황을 얼버무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냥 그가 제게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함부로 좋아한다는 감정이라 여기기엔 너무나도 경솔할 것만 같아서.
벤자민은 기절하듯 잠든 닉시를 업어 들었다.
어젯밤에 계속 콜록거리더니 심한 감기에 든 모양이었다.
그런 주제에 비나 맞고 돌아다니고.
그는 그녀를 업은 채 비척비척 집으로 향했다.
차가운 빗속. 누군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건 아주 오래전 그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제 부모님.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은 동생과 저 둘 중에 자신을 선택했다.
석탄 공장 근처에서 태어난 동생, 테오는 선천적으로 천식이 있었고 몸이 약했다.
불치병 같은 건 아니었다. 약을 먹으면 그럭저럭 일상생활이 가능했으니까.
괜찮았다. 집안이 풍족하다고 느끼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생활을 했고, 적당히 행복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후 상황은 달라졌다.
계속되는 불황과 날 선 공기 속.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벤자민의 부모는 감기약을 먹고 잠든 테오를 안아다가 보육원 벤치에 뉘어두었다.
추운 겨울.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벤자민이 열 살, 테오가 여섯 살이었을 때였다.
“왜요. 왜 테오만 두고 가는데요?”
“벤자민. 잘 들으렴. 테오는 좋은 곳으로 가는 거야.”
“거짓말이죠……? 테오를 버릴 거예요?”
“거긴 지금보다 따뜻하고 먹을 것도 꼬박꼬박 나온단다. 게다가 테오를 낫게 해 줄 의사 선생님도 계실 거야. 그러니 벤자민.”
버둥거리던 벤자민의 어깨를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그시 눌렀다.
그때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들은 테오를 버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테오에게 인사하자.”
인사하고, 가는 거야.
벤자민이 멍하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동생을 버린 와중에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낀다는 건.
지저분하게 엉겨 붙은 눈길을 바라봤다.
눈이 내리는데, 테오는 감기 걸리지 않을까. 지금도 기침하는데. 열이 나면 큰일일 텐데.
‘벤자민.’ 앞서가던 부모님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갤 쳐들면서도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느려지던 걸음이 멈췄을 때.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을 때.
벤자민은 홱 몸을 돌려 보육원으로 달려갔다.
“헉, 헉…….”
테오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벤자민은 동생의 어깨 위에 어지러이 쌓인 눈을 털어내고 동생을 업었다. 그리고 다시 달려갔다. 눈길에 남은 발자국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두 명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게 됐다.
어디에서 잠시 서성인 것 같은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곧 지저분한 흙탕물에 지워져 사라지고 없었다.
쫓아갈 곳이 없어지자 돌아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벤자민은 테오를 업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제집이 아니라며 떠나야 한다고 했던 그곳은 냉기만이 남아 있었다.
언 손을 후후 분 뒤, 벤자민은 아무것도 없는 침대에 테오를 뉘었다.
벤자민은 겉옷을 벗어 테오에게 덮어 주었다. 저는 동생을 업고 오느라 땀 범벅이었기에 괜찮았다.
테이블 위엔 봉투 하나가 있었다. 벤자민은 급한 손길로 그것을 펼쳤다.
미안하다는 짧은 말이 적힌 쪽지와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
벤자민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테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누워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저도 함께 침대에 몸을 말고 누웠다. 동생의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제 부모는 저를 선택했고, 저는 테오를 저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저와 테오는 버려진 것이다.
꽁꽁 언 손이 눈물로 녹아내렸다. 동생이 깰까 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그렇게 끅끅대고 있을 때,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미안해.]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 벤자민은 등 뒤로 색색이는 숨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그날. 테오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테오는 깨어 있었을 거다. 그러니 눈을 뜨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한 거겠지.
버려졌다는 것도 알았고, 형이 자신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둘 다 버려졌다는 것도 알아서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다.
“닉시.”
그가 나직하게 이름을 불러왔다. 그러나 잠든 닉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자고 있을까. 아니면 자는 척을 하고 있을까.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좋아해.”
“…….”
“……좋아해.”
그는 늘 후회할 선택을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 너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걸 후회하겠지.
네가 내 이름을 부르고,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단 말에 모든 게 견딜 수 있을 법도 해진 미련한 자신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널 좋아하게 된걸. 그걸 지금 입 밖으로 낸 걸 후회하겠지.
이번에도 난 후회할 선택을 하겠지. 늘 그랬듯이.
“좋아해.”
동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 적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 저는 시시때때로 후회했다.
한 달에 한 번 오던 부모님의 편지가 석 달에 한 번, 한 해에 한 번, 그러다 오지 않았을 때나, 돈을 벌겠다고 신문팔이나 청소부나 심부름 소년을 자처했을 때나. 죽어라 일을 하고 동생의 약을 사고 나면, 늘 굳은 빵밖에 못 샀던 때나.
처음부터 그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부모님에게 버려지지 않았을지도.
그를 먹여 살리지 않았다면. 혼자였다면, 약값도 들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이렇게 어린 마음에 늘 후회했다.
그럼 그의 착하고 가여운 동생은 늘 저를 향해 방긋 웃었다.
“미안해 형. 난 형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야.”
그는 다행스럽게도 그럭저럭 좋은 화방 주인을 만나게 되어, 화방 일을 돕고 가게의 쪽방 같은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악착같이 살았기에 먹고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동생도 가끔 몸이 괜찮은 날엔 강가에서 캐치볼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나아졌다.
화방 주인이 저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야간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학교엔 가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동생을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게 취미가 됐고, 테오는 신문지 조각 낙서에 불과한 것을 예술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칭찬했다.
음식을 얻어먹으러 다니게 된 성당에서 테오는 본인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성직자가 되겠단 꿈을 가졌다.
동생이 뭘 하고 싶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벤자민은 영어를 배우면서 동생에게 성서를 번역해 줬다.
“형이 있어서 내가 살 수 있었어.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는데. 모두 형 덕분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세상에 죽을 운명이 어디 있어.”
“미안해, 형. 하지만 난 형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야.”
그렇게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어른이 되었을 때, 테오는 그동안 조금씩이나마 용돈을 모아서 산 거라며 그에게 크로키 수첩과 화구를 선물로 줬다.
어느새 익숙해진 마당을 지나 닉시의 집에 도착했다.
벤자민은 가장 먼저 큰 수건 하나를 가져와 닉시의 몸을 감쌌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창고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주전자에 넣고 끓였다.
계피와 레몬. 설탕은 넣을까 말까 하다 결국 조금 과할 정도로 넣었다.
집 안이 어느 정도 따뜻해지자 그는 닉시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빗물에 젖어 붙어 있는 겉옷도 벗겨 내었다.
그대로 놔뒀다간 몸이 식어서 더 열이 오를 것이다. 그는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얇은 슬립 위에 두꺼운 담요를 둘둘 둘러맨 뒤,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그녀를 누인 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펄펄 끓인 뱅쇼와 젖은 수건을 테이블 위에 두고 붉게 상기된 얼굴을 닦았다.
벤자민은 열에 달뜬 닉시의 감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 옆에 제 몸을 뉘었다.
이마는 불덩이 같은데, 차갑게 식은 몸은 좀처럼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형. 콜록…….”
“괜찮아.”
테오는 본인이 아프면 늘 벤자민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그럼 그는 늘 그런 소리 할 바엔 빨리 낫는 거나 생각하라며 핀잔주었다.
이마에 손을 올려서 열을 재고, 입맛이 없을 동생을 위해 따뜻한 수프를 만든다.
약이 써서 죽겠다는 얼굴을 보곤 픽 웃어 주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데. 헤헤.”
그럼 테오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벤자민은 후회했다. 테오를 저버리지 못한 걸.
‘그날. 내가 너를 버렸다면, 너는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정말 어머니, 아버지 말대로 네가 더 행복하고, 아프지 않은 환경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를 구한다는 어쭙잖은 행동이 너를 점점 죽어 가게 만든 건 아닐까.
“형?”
내 선택 때문에 네가 죽은 게 아닐까.
“무슨 생각해?”
내가 너를 죽인 게 아닐까.
벤자민은 가만히 웃었다.
“……아무것도.”
벤자민은 침대에 누워 제 옆에 색색 잠든 닉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 옛날. 좁고 차가운 침대 위에 동생과 웅크려 잤을 때처럼 그는 괜히 뜨거워지는 눈을 대충 문지르곤 잠든 그녀를 응시했다.
‘테오. 넌 늘 내가 없었으면 자긴 죽었을 거라 말했지. 하지만 달라, 테오.’
너야말로 내 삶의 이유였다.
네가 존재했기에 내가 살아갈 이유를 얻을 수 있었다. ‘널 위해서’라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변명을 방패 삼아.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러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저버리지 못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다 결국 사랑하게 되겠지.
벤자민은 닉시를 끌어안았다. 도톰한 이불 아래로 그녀의 작은 몸이 고스란히 안겨 왔다.
그는 기어이 제 체온을 나눠주기로 했다.
곧 두 사람의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 *
아침에 눈을 뜬 닉시는 왠지 제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뻑뻑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바라봤다.
파라오의 관처럼 제 몸을 둘둘 말고 있는 이불. 이불, 담요, 이불들.
그걸 꼭 끌어안고 새근새근 자는 밀크티색 머리칼의 남자.
닉시는 탈피하듯 버둥버둥 겨우 이불 무덤을 빠져나왔다.
일단 잠옷 차림. 얇다. 애매함.
간밤의 기억? 갈림길에서 이 남자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이후로는 기억 안 난다. 이건 좀 위험.
몸 상태. 묘하게 찌뿌둥하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뻐근하다. 완전 위험.
제가 계속 부스럭거려서 그런지, 누워 있던 벤자민이 작게 인상을 쓰며 앓는 소릴 냈다.
“화가.”
“……어.”
“우리 일 쳤어?”
“……아니.”
“그럼 지금 상황을 요약해 봐. 왜 우리가 같이 침대에 있는 거지?”
그러자 벤자민이 불쑥 손을 뻗어 닉시의 이마를 짚어 보곤, 제 머리를 짚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젠장, 감기 옮았어.”
그러니까 벤자민의 말로는 간밤에 비를 맞은 자신이 열 때문에 쓰러졌단다.
놔두면 초상 치를까 봐 집에 데려온 뒤에 몸을 닦이고 침대에 넣어뒀는데, 몸이 너무 차가워서 몸을 데워 주려 끌어안고 있다가 잠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뻐근한 건가. 사실 어제 기억도 잘 안나.”
크아아. 닉시가 뱅쇼 한잔을 쭉 비운 뒤 말했다. 벤자민은 대충 웅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어쨌든 우리 화해한 거지?”
“지뢰 해체나 해.”
“알겠어! 푹 자서 기분도 좋겠다 컨디션도 최상이야! 이런 몸 상태면 뭐든지 다 처리해 버릴 수 있지!”
닉시는 활기차게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간밤의 태풍으로 싹 날아가 버린 고구마밭을 발견했다.
“말이 되냐고오. 내가 얼마나 사랑으로 키웠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아악!”
닉시는 양파 수프를 테이블에 쾅 내려놓았다. 아침에 처참한 밭을 본 이후부터 계속 저 모습이었다.
덕분에 미열이 있는 벤자민은 머리가 울려 죽을 맛이었다.
“천재지변은 뭐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지금이라도 날아간 고구마들을 찾아볼까.”
태풍이 쓸고 간 걸 무슨 수로 찾는단 거야. 그가 담요를 둘둘 둘러맨 채 뜨거운 차를 홀짝였다.
닉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찾으러 가야겠어. 우리 고구마들은 무거운 편이었으니까 엄청 멀리까지 날아가진 않았을 거야.”
말려도 말을 안 들어먹을 게 뻔하니, 벤자민은 그냥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시끄러운 녀석이 사라진 김에 조용히 번역 일이나 하고 있으면 되겠지.’ 벤자민이 평소 서류를 올려 두던 곳을 바라봤다.
“…….”
“너도 우리 고구마들이 걱정된 거지?”
“아냐.”
벤자민은 잃어버린 번역서를 찾기 위해 닉시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가 잃어버린 건 삼 주 동안 번역한 분량의 원고지들이었다. 상식적으로 태풍이 쓸고 갔으니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무려 삼 주 치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걸 다시 처음부터 번역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된다.
“근데 이 파편 말이야.”
닉시는 지뢰 파편을 이곳저곳 만져 봤다. 자세한 건 부품이 녹지 않은 안쪽까지 뜯어봐야 알겠지만, 겉으로 봐선 조잡하기 짝에 없었다.
“직접 만든 건가……? 여태 봤던 거랑은 다른 모양이다?”
닉시는 파편을 벤자민에게 건네주었다. 그도 설핏 파편을 보곤 고갤 저었다. 저도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태풍이 쓸고 간 자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간밤의 피해를 복구하고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닉시는 길을 샅샅이 뒤지며 걸어갔다. 그러다 제 고구마로 추정되는 덩어리를 발견하고 한바탕 눈물을 쏟아 냈다.
종잇조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벤자민도 속으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제비꽃밭이었다.
밭이 평지에 가깝다 보니 돌멩이부터 시작해서 말뚝, 쓰레기, 닉시의 고구마였던 것. 온갖 잡동사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우와. 저런 돌덩이들까지 날아왔었네. 저게 우리 집으로 날아왔으면 꼼짝없이 죽었겠다. 자연의 신비란…….”
닉시가 밭 한가운데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돌덩이들을 보며 말했다.
와중에 제비꽃들은 꿋꿋이 땅에 붙어 있었다. 벤자민이 꽃줄기를 누르고 있는 돌멩이를 치웠다.
“이렇게 큰 돌들이 날아왔는데 밭이 폭파된 흔적들은 없군.”
“응?”
“이 밭에 지뢰가 있었다면 돌들이 굴러다니면서 땅에 묻혀 있던 지뢰를 터뜨렸을 거란 말이야. 근데 흔적이 하나도 없어.”
“어라, 그러게?”
그의 말을 듣고 닉시가 주윌 두리번거렸다.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제비꽃밭. 날아온 돌 때문에 움푹 팬 흔적은 있어도, 지난밤 지뢰가 터졌던 자리처럼 타고 터진 것 같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 * *
길버트는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손가락을 까닥였다.
뭔가 수상했다. 꼭 작은 벌레 물린 것 같은 기분. 콕 집어서 여기 물렸다 할 순 없는데 어딘가 계속 간질간질하는 게.
길버트의 집. 그가 영문 모를 찜찜함에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제키가 불쑥 나타나 고갤 들이밀었다.
“스위티, 뭐 해? 고민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
“태풍 때문에 고심하시는 거겠지.”
뒤이어 들어온 필립이 제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왔다.
“아. 일어나셨군요. 간밤엔 죄송해요. 회관을 정비한다고 해 놨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비가 샐 줄은 몰랐네요.”
간밤에 비가 쏟아지면서 제키와 필립이 머물던 방 천장에서 빗물이 샜다.
회관 안을 정비하긴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많이 비가 쏟아질 것은 예상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태였다.
덕분에 제키와 필립은 길버트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아닙니다. 이장님 집 침대가 더 편해서 좋았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우리 방도 비가 샜는데 다른 방은 괜찮나 모르겠네. 그 옆방의 여우랑 풍뎅이 닮은 사람들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제키와 필립의 방은 빗물 때문에 엉망이었는데 교수와 연구원, 상인의 방은 조용했다.
간밤에 걱정돼서 문을 두드려서 깨우긴 했다. 하지만 교수가 나와 자신들의 방은 괜찮다며 한사코 손을 흔들었다.
‘이따 한번 점검해 봐야겠네.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는데.’
[로버트 씨, 그렉 씨. 나머지 한 분은 어디 계시죠?]길버트는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 나머지 한 분?] [네. 요즘 통 안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라프를 말하는 거군. 아라프라면 지금 방에서 쉬고 있네. 환절기만 되면 감기에 걸리는 타입이거든.]‘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이렇게 안 보일 수가 있나? 같은 일행인 교수와 연구원은 어딜 가나 빠지질 않고 나타나는데 말이지.’
“근데 스위티.”
제키가 또 고갤 불쑥 들이밀었다. 길버트가 퍼뜩 회상에서 벗어났다.
“혹시 여기 마구간은 편자도 직접 만들어?”
“편자요?”
말의 발굽을 말하는 거면, 아니었다. 마을에 대장간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을에 말이라고 해 봐야 두 필밖에 없었고.
“아뇨. 없습니다. 왜요?”
“그래?”
제키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마을 회관의 제 방 창문에서 보이는 작은 마구간을 떠올렸다.
마구간에서 나는 냄새라고 해 봐야 말 냄새. 말 여물 냄새, 말똥 냄새. 하여튼 말들과 관련 있는 냄새여야 할 터였다.
“근데 요 며칠 미묘하게 철과 불. 화약 냄새가 났거든. 말 편자도 직접 만드나 했지. 근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말을 기계로 개조하실 셈인가?”
보통 사람이면 맡지 못했거나 맡았어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냄새들이다. 하지만 제키는 그런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상황에서 바짝 긴장해야 하는 냄새들이었으니까.
“그런 냄새 근처엔 늘 폭탄 같은 게 있거든. 뭐 내 기우일 수도 있지만! 하하.”
“잘 아시네요.”
“뭘, 직업병이지.”
결혼 정보 회사에서도 폭탄 같은 것을 취급하는 건가. 길버트는 눈을 깜빡였다.
폭탄이라…….
“어라, 그러고 보니…….”
길버트는 제 미묘한 이질감의 도화선을 찾아냈다.
“마티아스 씨.”
“왜, 스위티?”
길버트는 주머니에서 감자 하나를 꺼냈다. 태풍에 날아갔던 걸 주워 온 것이었다.
“이거 한번 받아 보실래요?”
“응?”
길버트가 감자를 휙 던졌다. 제키는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길버트는 다시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제키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것을 돌려주었다.
“그럼 이젠 이게 폭탄이라 생각해 주세요.”
“엥?”
길버트는 불시에 감자를 그녀에게 휙 던졌다. 그러자 제키는 기겁하며 감자를 피했다.
제키에게 버림받은 감자가 저 멀리 벽에 맞고 툭 떨어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왜 피하셨죠?”
“엉? 그야 네가 저걸 폭탄이라 했으니까?”
“보통 그렇죠?”
그런데.
길버트는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떡할 거야, 이 개새끼들아! 책임져!]갑자기 제키 마티아스의 멱살을 잡은 닉시가 지뢰 파편을 들고 난동을 부렸을 때. 그녀가 그것을 들고 휘두르자 주위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났었다.
그때 뒤로 물러나지 않은 사람은 다섯 명.
닉시를 말리던 저나 필립 휴거. 그리고 닉시에게 멱살을 잡혔던 제키. 그리고 연구원과 교수.
“……마티아스 씨.”
“네, 넵?”
“닉시가 지뢰 파편을 마티아스 씨에게 던졌을 때, 왜 피하지 않으셨나요?”
“어……. 피하면 달링이 더 열받아서 날뛸 게 뻔했거든.”
“터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키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릴 긁적였다. 옆에 있던 필립 휴거만이 길버트의 질문을 이해한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야. 그게 터지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이란 게 있잖습니까.”
제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직업병 비슷해. 많이 봤으니까. 그래서 알지.”
그래.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면 굳이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파편이 혹시라도 ‘터지지 않을 걸’ 알고 있는 사람.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
교수와 연구원. 그들은 이 지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 * *
“화가, 여기가 아마 압력관일 거고 이 밑에 홈이 용수철이 들어가는 부분이야. 그 옆에 녹아내린 건 압력관을 고정하는 고무판으로 보이고. 이걸 보면 금속 외피 안에 기폭약이 들어가는 곳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지? 이 조각이랑 이 조각을 합쳐 보면 이만큼이 탄약이 들어갈 부분이란 건데 이 공간이 좀 이상해. 분명 구조는 지뢰 같긴 한데 폭약 들어가는 부분이 너무 적고, 또 봐 봐. 여긴 뇌관이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모르겠으니까 요약해서 말해.”
“이거 가짜야.”
닉시가 정의 내렸다. 파편 분석에 들어간 지 10분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가짜라면…… 폭발이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거야 쉽지. 그냥 일반 폭탄을 뻥 터뜨려 놓고 그럴싸한 플라스틱 모형 지뢰를 뿌려놓는 거야. 그리고 사람이 모이면 밭에 지뢰가 있어요! 소리치면 되는 거고.”
그렇군. 벤자민은 커피를 마시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다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지금 그게 가짜란 말은 밭에 지뢰가 있다는 것도 가짜란 건가.”
“그렇겠지. 너도 아까 제비꽃밭 가 봐서 알잖아.”
확실히 밭엔 잡동사니들과 돌덩이들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뭔가 터진 것 같은 흔적 하나 없었다. 터진 흔적이라고 해 봐야 농작물 쓸려나간 농부의 속 정도.
제비꽃밭에 지뢰 같은 건 없는 듯한 광경이었다.
“흐음. 누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거기 지뢰가 있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겠지.”
“……어라? 그거 난데?”
“……네가 거짓말했나?”
“아직도 머리 아파? 왜 결론이 그렇게 나.”
닉시가 툴툴대며 벤자민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벤자민은 닉시의 손을 슥 밀어내고 담요에 몸을 깊게 뉘었다.
“커피 대신 뱅쇼 마시라니까? 와인 세 개를 다 때려 박아서 저렇게 많이 만들어 놨으면 먹어야지.”
“싫어.”
쓸데없는 고집에 닉시만 답답해 가슴을 퍽퍽 쳤다. 벤자민은 커피를 홀짝였다.
급한 대로 만들어 두긴 했지만 단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있는 와인을 다 털어 넣은 이유는 닉시의 술주정이 아주 엉망인 걸 알고 다신 그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가 컸다.
“이런 가짜에 속다니. 내 눈썰미를 속이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억울한걸.”
문득 커피의 씁쓸함을 머금고 있던 벤자민이 테이블 위에 놓인 뭔가를 바라봤다. 분홍색 설탕 시럽 같은 것.
“……눈썰미 좋다고 말하긴 힘든 것 같은데.”
“응?”
“이것도 가짜니까.”
그가 집어 든 것은 사랑의 묘약. 언젠가 축제 때 좌판에서 다량으로 탈탈 털어 구매했던 것들이었다.
“뭐? 아냐. 나름대로 사랑을 느낄 수 있게는 해 준다니까?”
“그래 출산 유도…… 어쩌고 호르몬 때문에 말이지.”
벤자민은 물약을 집어 들었다. 다시 봐도 끈적하게 생긴 분홍빛 액체. 이것 때문에 저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그럼 먹어 보든가.”
“뭐?”
“한번 먹어 보면 알 거 아냐. 사랑에 빠지는지, 아닌지.”
닉시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작은 유리병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먹어 본 적이 있긴 하다. 성분을 분석하려고 한두 병쯤 먹어봤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사랑에 빠질 만한 누굴 두고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사랑 같은 거 잘 모르는데.”
“이게 진짜라면 알게 되겠지. 가짜니까 마셔도 모르겠지만.”
“아 진짜. 알겠어 마시면 될 거 아냐 마시면!”
그녀가 병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달짝지근한 액체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으……. 장미 시럽 맛.”
입안이 텁텁해지는 맛에 그녀는 벤자민이 마시던 커피를 빼앗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는 깔끔하게 비워진 제 찻잔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정확히 44분 후.
닉시는 여전히 어이없단 얼굴로, 번역서를 끄적이고 있는 벤자민을 빤히 바라봤다.
“…….”
“…….”
“그래서 어떤데.”
“심장이 뛰긴 해.”
“안 뛰면 그게 더 문제인 거 아닌가?”
“아니, 빨리 뛴다고.”
“주성분이 카페인인 약이랑 커피까지 마셨으니 당연하지.”
“좀 더운 것 같기도 해.”
“감기가 덜 나았군.”
“너한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창가에 앉아 있으니까.”
닉시가 눈을 깜빡였다.
“……진짜 가짜인가?”
벤자민은 여전히 시선을 종이에 둔 채 짧게 대꾸했다.
“가짜지.”
오 그렇구나. 그동안 아니라고 열심히 변호한 사람치고 태연한 대답이었다.
벤자민은 시원찮은 그녀의 반응에 눈을 작게 찌푸렸다. 드디어 자기 말이 진실이란 걸 증명했는데, 뭐랄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표본이 하나라 그런 걸 수도 있어. 어차피 이 지뢰 파편이 가짜란 것도 말해 줘야 하니까 겸사겸사 길이나 보고 와야겠다.”
―탁.
벤자민은 책을 덮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닉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왜냐고 물어보듯 고갤 갸웃했다.
“왜? 할 말 있어?”
팔을 붙잡고 놀란 건 오히려 벤자민 쪽이었다. 저조차 이유를 모르고 반사적으로 붙잡은 거니.
그는 조금 늦게 더듬더듬 이유를 덧붙였다.
“……너 감기 아직 안 나았어. 괜히 돌아다니다가 또 쓰러진 걸 주워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뭐야. 길버트 보러 간다니까 질투해?”
닉시는 그런 그의 변명이 무색하게 짓궂게 물었다.
그가 정색하며 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시하던 차에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던져진 것처럼 표정이 화악 밝아져 있었다.
닉시가 벤자민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뭐야, 화가! 날 좋아해?”
“싫어해.”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닉시는 붉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제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어라. 이거 효과 좀 있는 것 같아. 방금 심장이 철렁했어.”
“거절당하면 흥분하는 성격인가 보지.”
“어…… 그런가?”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밀어냈다.
그의 하찮은 노력이 겸연쩍게도 닉시가 다시 그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그럼 화가 다시 해 봐! 내가 싫다고 꺼지라고 해 봐!”
“싫어.”
“왜! 한 번만 날 매도해 보라고!”
“싫다니까, 저리 안 비켜?”
벤자민이 들이민 닉시의 얼굴에 손바닥을 턱 올렸다.
들이대고 밀어내는 의미 없는 씨름이 이어졌다. 승자는 힘이 좀 더 센 화가 쪽이었다.
벤자민은 담요로 제 몸을 보호하듯 방어했고 그 철벽에 팽개쳐진 닉시가 씩씩대며 항의했다.
“말 진짜 더럽게 안 들어! 한 번만 거절해 주면 어디가 덧나?! 이런 거 보면 노엘 선배랑 똑같다니까.”
노엘. 익숙한 그 이름에 벤자민이 씨근덕대던 것을 멈췄다.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저 이름의 주인 때문에 닉시가 매일 밤 소리 없이 운다는 걸 알고선 괜히 심란해져서 필립 휴거에게 노엘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던가.
그 덕분에 닉시와의 계약 결혼이 사기라는 걸 들켜 버렸고, 저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게 됐고.
여러모로 저답지 않게 조급하고 어설피 행동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너…….”
“뭐!”
그냥 저가 궁금했던 건 결국 이 사실 하나뿐이었는데 말이지.
“그 사람, 좋아했어?”
“뭐?”
벤자민은 그녀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번역서를 펼쳤다.
명쾌한 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어도 괜스레 어떤 답이 나올지 초조했다.
“글쎄……? 좋아하고 자시고 애초에 난 누굴 좋아한다는 걸 잘 모르겠다니까. 물론 노엘이 내 인생에 많이 껴있는 사람이긴 해. 열두 살부터 함께 부대끼고 살았으니 지독한 악연이라고 할 수 있지.”
“…….”
“근데, 음…… 선배가 없어도 잘 살아 있고, 아 물론 죽었을 땐 좀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해. 선배가 날 싫어한다고 해서 슬프지도 않았어.”
벤자민은 꽉 쥐고 있던 펜에 힘을 풀었다. 영문 모를 안도감이었다.
“내가 그 꽉 막히고 뭔 생각하는지 모를 사람을? 하하. 배고프다고 아무나 주워 먹었다간 답답해 죽어. 자꾸 잔소리하지, 사람 속 터지게 하지. 하다못해 꿈에도 안 찾아오는 매몰찬 인간을 왜.”
“닉시.”
“엉?”
벤자민이 커피잔에 뱅쇼를 따랐다.
“너 몽유병 있더라.”
“뭐어? 진짜? 내가?”
그가 고갤 끄덕였다.
안 믿긴다는 얼굴에 벤자민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읊었다.
밤에 갑자기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본다고. 그러다 픽 쓰러져서 잔다고.
그 속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찾는다는 것이나 운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계속 침대 아닌 곳에서 일어나서 그냥 잠버릇이 험한 줄 알았는데.”
“그건 험하다기보다 제정신 아니라고 봐야지.”
“그래서 네가 집에 오고부턴 멀쩡히 침대에서 일어났던 거구나. 난 긴장해서 그런 건 줄 알았거든.”
긴장 같은 걸 하긴 하는군. 그가 닉시의 황당해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그날 밤. 자신이 뜬금없이 가슴에 머릴 들이밀고 있는데도 당황하지 않았던 거구나. 닉시가 생각했다.
“그럼 네가 맨날 피곤해하던 것도 내 몽유병 때문이었어? 근데 그걸 왜 이제 말해 줘?”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왠지 그랬다.
그녀와 아무 사이 아닌 주제에 알아선 안 될 비밀을 엿본 것만 같았으니.
“그럼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말해 주는 건데?”
“말해도 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차이인 거지.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굳이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말해 봐야 왜? 왜? 하는 질문만 계속 던져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가 감추고 싶은 비밀에 도달할 게 뻔하니까.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됐다고.
비가 쏟아지던 어제. 굳이 저버리려는 걸 본인이 버리지 말라고 쥐여 주었으니. 비밀에 간섭하고 싶어졌다고.
“닉시.”
“엉.”
“……성가신 녀석.”
“갑자기 또 왜……. 나 가만히 있었어…….”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눈앞엔 여전히 알 수 없단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닉시가 있었다.
그 얼빠진 얼굴이 웃겨서 벤자민은 조용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 * *
“지뢰가 가짜였다?”
“응.”
마을 이장 길버트와 부부 사기단이 라울의 술집에 모였다.
길버트는 닉시가 내린 결론에 뭔가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은 말이지 닉시. 안 그래도 나도 걸리는 게 하나 있어.”
“뭔데?”
마을 이장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꽤 놀라운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놀러 온 교수 일행들이 수상하다는 거야?”
“응.”
갑자기 보이지 않던 일행 중 한 명.
평소 교수 일행에게 잘 붙어 있던 마구간지기 파스칼 씨의 마구간에서 나는 화약 냄새.
가짜 지뢰와 지뢰가 있는 땅을 저렴한 가격에 사려고 하던 두 남자.
“그러고 보니 마티아스 씨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
길버트는 조금 전 제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렇단 말은…….”
“미리 가 있었거나 그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
벤자민이 짧게 요약했다.
“아무튼 지금 가장 수상한 사람은 교수랑 연구원이고. 가장 수상한 곳은 마구간이란 말이네.”
하지만 물증이 확실히 없는 이상 섣불리 따지고 들 순 없었다. 길버트가 끙 앓는 소릴 냈다.
“마구간을 불시에 쳐들어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응? 왜 못 들어가?”
“뭐? 그야 몰래 들어갈 순 없잖아. 갑자기 들어가겠습니다 하면 당연히 수상하고. 허락을 구하고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
“역시 길은 너무 도덕적이라니까.”
닉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이런 건 비도덕적인 녀석한테 맡겨!”
* * *
“어이쿠 발이 미끄러졌네.”
―쾅!
제키가 마구간의 문짝을 걷어찼다. 나무판자로 된 문짝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믿고 맡기라기에 길버트는 제키 마티아스에게 사람을 회유하는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녀는 그냥 문짝을 잘 부수는 것뿐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뒤에서 제키의 만행을 바라보던 길버트가 중얼거렸다. 닉시는 괜찮다는 듯 길버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물론. 사고잖아.”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합의금은 여기 둘게요!”
“죄송합니다! 제 친구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
제키는 지폐 몇 장을 여물통 위에 올려놓곤 마구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닉시와 필립이 따라 들어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익숙한 모양새들이었다.
“근데 달링. 일단 부수라 해서 부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나쁜 짓 하는 거야.”
“그건 내가 선수지. 이참에 말도 훔쳐 갈까?”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말 두 마리가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크게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평범한 울타리들과 여물 놓는 창고. 괭이.
닉시가 여물 속을 발로 휘적이고 있을 무렵, 벤자민이 닉시를 불렀다.
“이봐. 여기.”
“오호라.”
농기구가 잔뜩 쌓여 있는 작은 테이블 위. 그곳엔 작은 공구함 같은 게 놓여 있었다.
플라스틱과 무른 구리 조각들. 작은 나사와 스프링. 마구간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스프링……. 굵기나 길이나 딱 요 파편에 쓰인 거랑 비슷하네.”
닉시는 들고 있는 지뢰 파편에서 스프링을 뽑아냈다. 그을린 것을 빼면 모양도 크기도 굵기도 같았다.
역시.
“이걸 만든 사람은 마을에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럼 어떡할 거야, 닉시?”
길버트가 물었다. 닉시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범인이 제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어야지!”
▶ 오늘의 수확
사랑의 묘약―가짜 판명!
▶ 총평
근데 이상하네. 후광이 비쳤던 것 같기도 하다니까? 백내장인가?
* * *
농산물 경매가 이뤄지는 창고의 구석.
세 명의 남자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기랄.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로버트가 벽을 주먹으로 쾅 쳤다. 그의 옆엔 그와 마찬가지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연구원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상인이 있었다.
“아라프! 말이 다르잖아!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보다 돈 많고 순진한 녀석들이 많다고!”
교수의 호통에 상인이 진땀을 빼며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사실이었어. 내가 만든 물약도 다 팔린 거 봤잖아……! 저렴한 가격도 아니었는데 그걸 한꺼번에 사 갔다구.”
“제기랄…… 돈만 많은 촌뜨기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로버트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일이 잘못돼도 매우 잘못되고 있었다.
그와 연구원이 오베르에 오기로 한 건, 이곳에서 열린 여름 바자회 이후였다.
정확히는 상인 아라프가 드디어 자신의 사랑 뭐시기 물약이 다 팔렸다고 요란을 떨었을 때.
카페인과 화학 용액. 장미 설탕으로 이뤄진 조잡한 불량식품.
아무리 물건에 ‘사랑’을 붙이면 잘 팔린다고 하지만 그런 걸 사 주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했다.
“근데 그게 다 팔렸다니. 어떤 돈 많은 멍청이가?”
“들어 보니까 도시에서 온 철없는 농부라고 했어.”
연구원은 상인이 들떠서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안 팔린 걸 다 팔렸다고 거짓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다 밭 하나씩 갖고 있더라고. 제법 풍족해 보이는 마을이었어.”
“오호라.”
듣자 하니 돈 냄새가 좀 나는 곳 같았다.
시골이라 그런가. 뭔지도 모를 물약도 턱턱 사는 거 보면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것 같고.
“우리 한탕 할 곳을 찾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마을에 아주 큰 평지가 있어. 근데 주인이 없는 빈터래.”
주인 없는 터. 미련해 보이는 마을 사람들. 세상 물정 어두운 시골.
연구원 그렉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거, 안 그래도 내가 정부 기관 쪽에서 연줄이 있는데 말이야. 나치 잔당 놈들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한적한 곳에 군사 시설을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
딱 맞지 않는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마을 사람들을 꾀어서 땅을 저렴하게 매입한 뒤, 정부 기관에 팔아 버린다.
빈터라고 했으니, 적당히 학교나 병원을 지을 예정이라 하면 대부분 옳다구나 좋아할 것이다.
땅을 팔지 않겠다 까탈스럽게 굴어도, 적당히 돈 몇 푼 쥐여 주면 될 것이다.
물론 이쪽은 나라에 땅을 파는 거니, 시골 사람들에게 던져 준 것 이상의 이득을 보겠지만.
“근데 끝까지 안 판다고 뻗대면 어떡하지, 그렉?”
“뭘 어쩌겠어. 폭탄이라도 심어놓고 터뜨려 버리는 거지.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
“오베르.”
오베르로 향하는 마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순조롭게 일이 풀릴 줄 알았다.
“……그 여자가 우리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어.”
로버트는 샛노란 금발에 행동반경이 큰 여자를 떠올렸다. 매일 옷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촌뜨기 농부.
마을에 하나씩 있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릴 때마다 나타나 사사건건 방해였다.
처음은 마을에서 돈이 궁한 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마을 이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마구간지기 파스칼. 마을 이장 때문에 자기네 말 농사를 망쳤다며 투덜대는 남자였다.
입이 가벼워 보이고 돈이 궁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바람 넣는 앞잡이로 쓰기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파스칼에게 돈을 쥐여 주면서 그를 꼬드겼다.
“저, 정말 제게 이 돈을 주신다고요?”
“이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죠. 이 마을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만한 좋은 요건을 가지고 있는데 농사나 짓고 있는 게 아쉬워서요. 뭐…… 경마장 같은 걸 지어도 좋을 텐데.”
그 말을 들은 파스칼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경, 경마장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나리! 그런 곳이면 저희 마을이 제일 적합하죠! 땅도 넓고 평평해서 마차나 철도 까는 데 힘이 들지도 않고, 말도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란답니다!”
그렇게 저들에게 유리하게끔 마을 사람들을 동조하게 만들란 조건으로, 파스칼에겐 적당한 보수와 먼 미래에 지어질 경마장 지분을 나눠 줄 것을 약속했다.
말뿐인 거래에도 촌사람은 벌써 지주라도 된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러모로 발전할 구석이 많은 지역을 찾아서 투자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파스칼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끼워 주시는 거죠? 제가 이 마을을 추천해 드렸으니?”
“크흠.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그렉이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시작부터 일이 쉽게 풀렸다고 생각할 무렵. 그 여자가 나타났다.
“뭘 두고 봐요?”
그 뒤론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내 코에 고추를 뿌린 그 여자…….”
그렉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아직도 인중을 찡그리면 알싸한 고추 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다음에 만났을 땐 마을 회의 때.
파스칼의 열렬한 노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의견이 ‘그래도 파는 게 낫지 않나!’ 쪽으로 기울었을 때였다.
“근데, 그 땅에 좋은 거 만들어 주겠다는 건 알겠는데. 좋은데 나쁜 걸 만드는 거면 어떡하려고요?”
그 여자가 심드렁히 말했다. 뭘 모르고 그냥 휙 던진 말 같았다.
하지만 하필 다 넘어온 타이밍에 그들의 꿍꿍이를 아는 것 같은 말을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다 넘어왔던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걸 느꼈다.
더 일을 질질 끌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아라프. 네 쓰레기 같은 발명품 중에 터지는 거 있나?”
“터, 터지는 거? 노루잡이 폭탄은 있는데…….”
“그럼 그거 내놔.”
“조립식이라 조립해야 해!”
“그럼 빨리 조립해!”
“여, 여기서?”
그들이 머무는 곳은 마을 회관이었고, 이곳은 마을 사람들과 마을 이장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게다가 바로 옆방에 그 성가신 여자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럼 그 마구간지기의 마구간을 빌리든가!”
그 뒤로 상인 아라프는 마구간에 틀어박혀 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희에게 이 지대를 싸게 넘기시죠. 이곳에 마을을 위한 시설을 세우면서, 땅에 묻혀 있는 지뢰도 함께 제거해 드릴 테니 말이죠.”
그들의 계획대로 제비꽃밭에 지뢰가 있단 말을 하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꾸 땅 이야기에 어물거리던 마을 이장도, 그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서류를 내밀었다. 서명만 하면 완벽히 일이 마무리될 서류였다.
그런데.
“제가 할게요.”
준비했던 계약서가 그녀의 엉터리 계약서로 탈바꿈됐다.
“지뢰 해체. 제가 한다고요.”
그때쯤, 그녀는 그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제기랄. 어쩌다 그런 미친 여자가 꼬여서. 이봐 아라프, 땅을 계약할 때까지 그 여자를 어떻게 할 좋은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야?”
손톱을 씹던 그렉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라프가 흠칫 놀랐다.
“어떻게 하다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없애 버리든 묻어 버리든 눈에서 치워 버릴 방법 같은 거 말이야!”
아라프가 안절부절못하다 제 주머니에서 폭탄 하나를 꺼냈다.
“이걸 써 볼까?”
“멍청하긴! 일을 더 크게 만들 셈이야?”
“나리들!”
때마침 그들이 심어 둔 바람잡이꾼 파스칼이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마을 이장이 땅에 대해 마음을 정했다고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고 있답니다.”
파스칼의 말에 연구원, 교수, 상인은 헐레벌떡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회관엔 마을의 어르신들을 주축으로 젊은 마을 이장, 그리고 그들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여자와 그 여자의 끄나풀들이 있었다.
‘설마 벌써 지뢰 해체를 끝낸 건가?’
로버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애초부터 저건 지뢰라고 만든 게 아닌 모형인 데다가, 엉망진창 발명 실력을 갖춘 아라프가 만든 거니, 아무리 천재라 해도 분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마 가짜라는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로군. 암암. 잘 알고말고.’
닉시가 교수 일행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지뢰 해체 의뢰를 맡았던 닉시 양이 할 말이 있다 해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소집의 원인 닉시입니다!”
길버트의 말에 닉시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여러분들을 갑자기 오라고 똥개훈련 시킨 건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뢰를 해체할 능력이 못 되더라고요!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해체를 못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여러분!”
전혀 죄송하지 않은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교수 일행들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닉시를 바라봤다.
“하지만 지뢰를 해체하기로 계약은 했잖아요. 못 하면 여기 이 둘이 대신 위약금을 물기로 했구요.”
“그랬어?”, “어.” 제키와 필립이 서로 속닥였다.
“그 계약은 지킬 거예요. 저는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근데 지뢰도 못 해체하지 못하는데 그 위험한 땅을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닉시는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땅을 사면 해결될 문제더라고요.”
“뭐, 뭐라고?”
그렉과 로버트가 경악했다.
“맞잖아요? 그런 위험한 땅을 방치하느니 누가 사서 관리하는 게 낫지. 그래서 지뢰 해체 기간을 무제한으로 늘리는 대신, 제가 그 밭을 사서 그곳을 관리하겠습니다!”
그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교수 일행은 어버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키.”
“응, 달링.”
“내 결혼선물로 뭐가 필요한지 물어봤지?”
[달링. 결혼선물은 뭘 줄까?] [음. 고민해 볼게. 얼마까지 돼?] [달링이 나를 생각하는 만큼?]제키는 본인의 잊고 싶은 과거 발언을 떠올렸다.
“그랬……는데, 너 그 결혼, 사기……”
닉시가 웃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제키에게 겨누었다. 제키가 화들짝 손사래 쳤다.
“그, 그랬지!”
“나 있잖아. 결혼선물로 제비꽃밭이 가지고 싶어.”
닉시가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주문하는 소녀처럼 환히 웃었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경악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로버트는 픽 웃었다.
그 땅을 사기 위해 본인들이 제안한 돈은, 본인들이 모아놓은 자금을 8할 이상 투자해서 제안한 금액이다.
즉, 일반인이 사겠다고 척척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뭘 모르나 본데, 철없는 촌뜨기가 100년을 일해도 만져 볼 수 없는 돈이라고.’
“음…….”
그 생각을 증명하듯 제안을 들은 산타, 제키 마티아스도 약간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양심 없어, 달링? 네 특허권 팔면 되잖아.”
“그걸 어떻게 팔아. 내가 시궁창에서 구르면서 죽어라 쌓아 올린 업적인데.”
“하여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키가 방긋 웃었다.
“그러지 뭐. 난 섬이라도 사 달라 할 줄 알았는데. 밭이면 싸게 먹혔네!”
“뭐, 뭐?!”
“이장님. 지불은 현찰만 됩니까?”
제키는 안주머니에서 뭔갈 꺼냈다. 금괴였다.
그 번쩍이는 황금빛에 마을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촌뜨기들이 어떻게 그만한 돈을?
교수와 연구원이 놀라던 것도 잠시. 본인들 눈앞에서 밭이 통째로 넘어갈 상황에 그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 지뢰가 나왔다니까? 그런데 그런 위험한 땅을 본인의 말 하나 못 지켰다고 대뜸 사 버린다고?”
“그래! 산 다음 관리는 어떻게 할 셈인 거지?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한테!”
“관리 같은 거 안 할 건데요?”
닉시는 제키에게 받은 금괴를 길버트에게 건넸다.
길버트가 그 반짝이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곳은 그냥 그대로 둘 거예요. 제비꽃이 자라야 설탕 절임을 해 먹을 수 있거든요.”
“대체 그런 멍청한 소리가…… 그 땅이면 그런 금괴 하나 이상의 가치가 있는데!”
교수가 길버트가 들고 있는 금괴를 가리켰다. 길버트의 잇자국이 생생했다. 순금이었다.
그 땅을 미리 사들여서 정부에 팔기만 하면 저런 금괴 하나보다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다. 그런 것도 모르는 멍청한 농부들도 답답한데, 그걸 사는 이유가 고작. 고작 제비꽃 설탕 절임 때문이라고?
“흐음, 금괴 하나 이상으로……라고요?”
닉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이미 분노로 눈이 돌아 버린 로버트와 그렉은 닉시의 차분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외쳤다.
“그래! 그 땅은 금괴 하나 이상의 값어치를 품고 있다고! 저 땅에 뭐가 들어서는지 너희 같은 녀석들은 몰라! 거긴 군사 기지가 들어설 곳이라고! 나라에서 지금 나치 잔당 소탕을 위해 국력에 돈을 쏟아붓고 있어. 지금 좋은 땅을 사둬서 팔면 나라를 상대로 장사를 할 수가 있다고! 하, 너희 같은 서민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군사 기지?”
때마침 의자에 앉아 다릴 꼬고 있던 필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키에서 나오는 날 선 듯한 범상치 않은 기운에 마을 사람들이 길을 터 주었다.
필립이 남자들 앞에 멈춰 섰다.
“그런 소릴 어디서 들었지?”
“하하. 이제 와서 솔깃한가 보지? 내가 전임으로 있는 파리 르소본 대학교수가 군사학을 전공하고 있지. 그분한테 미리 들은 거다. 네놈들은 생에 한 번 만나 볼까 한 대단한 분이지.”
“파리 르소본 대학 군사학 담당 교수라면…….”
제키가 흐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이온 라먼 전 소령?”
그 말을 들은 교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어떻게…….”
제키는 바로 앞에 있는 교수와 필립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투덜댔다.
“어이, 도련님. 동기 관리 좀 잘해. 기밀 정보를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니잖아.”
“기밀 정보라.”
설핏 치켜뜬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그자는 진작 뇌물 혐의로 파면됐을 텐데. 여태껏 현역인 척 행세하고 다녔단 말이지?”
“어라? 그랬어?”
“그래. 애초에 우리가 그런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흘릴 리 없잖아.”
“이, 이 자식이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그렉이 덥석 필립의 멱살을 쥐었다. 제키가 즉각 그렉의 팔을 붙잡았지만, 필립이 그녀를 저지했다.
그렉은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려 했다. 그러나 꼼짝하지 않았다. 필립은 그저 ‘해 볼 테면 어디 한번 해 보든지’ 싶은 얼굴로 가만히 연구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꼬맹이가 이런 힘이……!’
상황이 이상했다. 마치 자신들에게 정보를 흘린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행동.
게다가 그 사람이 본인들의 부하직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
머리가 차갑게 식어갈 무렵 그렉은 필립의 구겨진 옷깃 안. 재킷 안쪽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소령을 뜻하는 계급장. 군인의 증표였다.
저절로 손이 풀렸다.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 설마…… 관계자……?”
그것을 본 건 그렉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 있던 로버트도 사색이 되어 제키와 필립을 번갈아 봤다.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교수와 연구원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제기랄! 우리가 이러려고 이 마을에 공을 들인 게 아니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본전은커녕, 빈손으로 쫓겨나게 생겼잖아?’
그때, 로버트 교수의 눈에 저들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아라프가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만든 수제 폭탄을 두 손으로 꼬옥 쥐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땅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대로 허탕만 친 채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요. 땅은 저 아가씨가 산 걸로 하죠. 하지만 아직 지뢰를 해체하지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저희가 아직 터지지 않은 지뢰를 찾았습니다.”
그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이 허억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멍청하긴.’ 이건 아라프가 만든 가짜 지뢰였다. 터질 리도 없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자들에겐 충분히 위협될 수 있는 것이었다.
“땅은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이 지뢰를 해체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뢰 해체 의뢰 비용만 저희에게 주신다면 그 땅을 안전하게 만들어 드리죠. 어떠십니까?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조건 아닙니까?”
그때, 닉시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본인에게 그것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태연해 보이는 닉시의 얼굴에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약간 흘러내렸다.
“조, 조심해서 다뤄 주세요, 아가씨. 잘못하면 아가씨는 물론이고 이 회관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아하 그래요?”
‘고작 농부 따위가 본다고 뭘 알겠어? 비명만 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닉시는 가만히 그 폭탄을 바라봤다. 마구간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디자인.
역시 폭탄 소동을 일으킨 범인은, 이 눈앞의 남자들이었다.
‘목표는 땅을 사서 투기하려는 목적.’
군사 기지? 닉시는 속으로 비웃었다.
군대가 싫어서 탈영했는데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을 군사 기지로 만들겠다니. 감히 저 앞에서 간도 컸다.
군대를 전역하며 누구 콧대를 부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지금은 예외다.
“근데 이거, 모양이 특이하던데. 어디서 만들어진 거죠? 지뢰를 해체하실 수 있다니. 그럼 제조법이나 제조지는 당연히 꿰고 있으실 거 아녜요?”
“그거야 당연히……!”
프랑스 어딘가에서 만들어졌다며, 아무 곳이나 이름 대려던 교수가 필립과 제키의 눈치를 봤다.
저들은 군인들이다. 그럼 당연히 군사 물품을 눈이 닳도록 봤을 것이고, 제가 아는 어떤 곳의 이름을 대도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 이건 독일제입니다. 독일의 동부 공장에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제조된 거죠.”
“독일제?”
필립과 제키가 그것을 받아 이리 보고 저리 봤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이걸 본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이걸 본 자들은 대부분 이 지뢰에 당해 죽었을 테니까요.”
“뭐. 확실히 처음 보는 구조긴 해.”
제키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확신 없음을 간파한 교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떠벌떠벌 말을 이었다.
“그럼요. 나치 놈들이 심어놓고 간 게 틀림없어요. 이 지뢰의 해체 법을 아는 자는 거의 드물죠. 나치 놈들이면 알지도 모르지만.”
“여기에 나치가 숨어 있을 리도 없잖습니까?”
연구원도 코웃음 치며 말을 붙였다.
“아하, 그래요?”
근데 그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분명 심각한 상황으로 흘러가야 할 분위기가 묘해졌다.
폭탄을 들고 있던 제키가 휘파람을 불었고, 뒤에서 길버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픽 웃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제키가 큭큭 웃으며 들고 있던 폭탄을 벤자민에게 건넸다.
“이봐, 독일인.”
독일인?! 교수와 연구원이 경악했다.
“이게 독일제인가?”
결국 돌고 돌던 폭탄의 마무리는 저다. 벤자민은 폭탄을 받아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장난감처럼 생긴 것이었다. 화약이나 금속의 무게도 거의 안 느껴지고.
독일제고 뭐고 가짜 폭탄이다.
‘하지만…… 이게 가짜란 걸 말하면 저 말이 많은 농부가 여기 있을 명분이 없어지니.’
“이상하군. 내가 지뢰 심는 일을 하긴 했지만, 우리 부대에서도 이런 지뢰는 취급하지 않았는데.”
“이, 이 자식들이……!”
처음부터 알고서 저들을 골탕 먹이려고! 교수가 발끈했다. 하지만 그가 욱함과 동시에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당연하게도 마을의 독일인이 한 발언 때문이었다.
“벤자민이 아니라는데?”
“독일인도 모르는 거면 대체 어디서 만들었다는 거야?”
“……저 사람들도 모르는 거 아냐?”
사람들이 술렁였다. 남자들의 낯빛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 사이를 길버트가 끼어들었다.
“자자.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네요.”
마을 이장은 해사한 얼굴로 남자들을 바라봤다.
길버트의 환한 얼굴과는 달리 남자들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듯 흙빛이었다.
“어떠신가요? 밭은 이미 팔리고 없는데, 마을 관광을 더 이어가시겠어요?”
* * *
한바탕 ‘제비꽃밭 소동’이란 시끌벅적한 사고를 겪고 난 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낸 기념으로 라울의 바에서 소박한 기념 파티를 열기로 했다.
재즈를 좋아하는 바텐더의 취향에 따라 이름만 거창한 ‘오베르 재즈 음악 파티’, 말 그대로 재즈 음악을 틀어 놓고 밤새 술을 퍼마시는 파티였다.
물론 술만 먹지 말고 바 중간을 넓게 터놓은 곳에서 약간 유행 지난 스윙 재즈 댄스나 왈츠, 퀵스텝 따위를 춰도 좋았다.
그게 아니라면 마을 어르신들처럼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손뼉 쳐도 좋았고.
라울의 술집이 열리는 느지막이 해가 질 무렵. 바에서 재즈 파티가 열린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라울의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재즈 음악 파티라니. 옛날 생각나지 않아 도련님?”
그중엔 제키와 필립도 있었다. 군복 대신 평소엔 잘 입지도 않는 정장을 빼입은 그들은 무료로 주어지는 칵테일을 손에 들고 바 안을 구경했다.
“난 너랑 이런 파티에 온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 했지, 제키 마티아스.”
“그런가? 아. 네가 아니라 안나랑 왔었던가? 미안, 미안. 키가 비슷해서 착각했지 뭐야.”
제키가 장난스럽게 넉살을 부리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필립은 팍 인상을 구기며 제키를 밀어냈다.
재즈 파티답게 분위기는 적당히 들떴고 적당히 시끄러웠다.
제키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한창 시끄러워진 중앙을 바라봤다.
그곳엔 맥주 빨리 마시기 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호호 웃는 얼굴의 할머니.
“자, 준비…….”
시작! 보기만 해도 화장실 가고 싶어지는 양의 맥주였다. 그러나 연륜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듯 어르신들은 빠르게 맥주잔을 비웠다.
“승자는 샬롯 할머니!”
“와 매튜 할아버지, 대체 언제 이기실 거예요.”
승자가 정해지자, 주변 사람들은 책상에 엎드려 우는 할아버지의 등을 토닥였다.
이번엔 다른 쪽으로 고갤 돌렸다. 마을 이장과 바텐더. 그리고 노을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친한 사이인지 서로 웃고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제키가 그곳을 빤히 바라보자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네 이상형 레이더인지 뭔지가 작동하나 보지?”
“어, 어? 들켰어? 왜 예쁜 사람을 보면 기분 좋잖아.”
“여자면 다 좋은 거겠지.”
필립은 칵테일을 홀짝였다.
“왜 이래. 나라고 아무나 좋아하는 거 아냐. 나 눈 높다고.”
하기야. 제키 마티아스가 새로운 달링이라 데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미인이었다.
키 큰 미인, 키 작은 미인, 귀여운 미인, 섹시한 미인.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
그리고 저는 남자고.
‘태평한 녀석.’
필립은 칵테일 안에 들어 있던 체리를 씹었다. 달콤할 줄 알았는데, 묘하게 떫었다.
“달링은 언제 온대?”
“곧. 옷을 갈아입고 온다 했으니까.”
“그렇구만.”
제키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른 미인을 찾아냈다. 검은 머리칼을 단발로 자른 어려 보이는 미인.
하지만 그 소녀는 바텐더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쉽네. 눈매가 내 취향인데. 제키가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사람들 말야. 좋은 사람들 같지?”
“닉을 받아 준 사람들이면 안 좋은 사람들이기 힘들지.”
“그게 좋은 사람들이란 거지.”
시끄럽고 들썩이는 사람들.
그들은 마을 사람이 아닌 저들에게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방금 딴 거라며 본인들이 수확한 것들을 곧잘 먹여 주곤 했다.
닉시가 떠나기 싫어할 만도 했다.
사람은 각자 마음속에 평화라는 꿈의 안식처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늘 터지고, 깨지고, 구르고, 다치기만 했던 전쟁터에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런 정 많고 평화로운 곳을 발견하면 누구든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울타리 없이 떠돌던 들개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길들여지듯, 본인들이 알고 있던 그녀도 울타리라 할 곳을 찾은 것이다.
길들여진 거다. 비로소 평화로운 안식처를 발견한 것이었다.
“여러분! 저 왔어요!”
때마침 입구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닉시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주파수가 높은 편이라 시끄러웠던 바 안에서도 쩌렁쩌렁 잘만 들렸다.
그녀는 제법 세련된 드레스 따위를 입고 있었다.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연보랏빛 드레스.
“우리 마을 최고 재롱꾼이 왔구만!”
“이봐 닉시! 맥주 빨리 마시기 내기 어때!”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듯 닉시를 환영하는 말을 건넸다.
“좋아요! 다 상대해 드리죠, 차례차례 덤벼요!”
닉시는 누군가의 소매를 잡아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독일인이었다.
가짜 남편 행세가 아직 유효했던 건지, 그는 닉시와 비슷한 디자인의 차콜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얼굴 가득 집에 가고 싶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활기 넘치는 닉시와는 정반대의 남자를 보곤, 제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컨셉 꽤 오래가네. 달링도 참.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지?”
필립도 동감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그때, 느릿한 재즈만 흘러나왔던 노래가 때마침 빠른 템포로 바뀌었다. 닉시와 독일인이 딱 바의 중앙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마치 지금을 노렸다는 듯 마을 사람들이 중앙을 터주었다. 누군 손뼉을 쳤고, 누군 환호성을 질렀다.
저를 향한 갑작스러운 환호에 닉시는 눈을 끔뻑였다.
“뭐야 갑자기? 뭐예요? 깜짝 이벤트?”
“뭐긴, 재즈 음악 파티잖아 닉시!”
“신혼부부끼리 춤 안 춰 주나?”
“춤이요!?”
마을 사람들의 짓궂은 장난에 닉시의 눈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옆에 서 있는 독일인은 아예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있었다.
“푸핫! 저것 봐, 필립!”
제키가 필립의 등을 퍽퍽 때리며 폭소했다.
둘은 안절부절못하다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닉시는 뭔가 다짐했다는 듯 독일인의 손을 꼭 쥐었다.
독일인은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그들은 음악에 맞춰 얼토당토않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마구 웃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번진 웃음은 이윽고 필립의 입가까지 닿았다.
고무풍선 인형 둘이 씨름하는 것 같은 춤.
발은 뭔가 버둥거리며 스텝이랄 것을 밟긴 하는 것 같은데, 둘의 상체는 뻣뻣이 굳어 있었다.
그러다 독일인이 발을 밟혔는지 크게 움찔했다.
잠시 뭔갈 속삭이던 그들은 이윽고 뭐에 열을 올리는 건지, 이제 스텝인 척 서로의 발 밟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결혼한 사이 아니라면서, 조만간 할 사이처럼 보이잖아.”
제키가 픽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들의 춤은 춤이 아니라 패싸움 같아 보였다. 하지만 닉시의 웃는 얼굴은 제법 보기 좋았다.
사랑이란 걸 하는, 풋내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있잖아, 필립.”
“응.”
“내가 입대했을 때, 하얗고 조그만데 눈은 보석같이 반짝이는 녀석 하나가 있었거든.”
닉시 이야기로군. 필립이 고갤 끄덕였다.
“얼굴도 조그만 게 눈은 또 그렇게 커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꽤 미인이었어. 첫눈에 저 녀석이랑은 친해지고 싶다! 생각했지.”
제키는 닉시를 처음 만났을 무렵을 떠올렸다.
제 동기가 자신의 동생이나 다를 바 없는 녀석이라며 소개해 준 후배.
첫인상은 예쁘장한 녀석이었다. 전체적으로 가냘파 보이는 모습에 또 표정은 도도하니, 좋다고 쫓아다니는 녀석들이 한 트럭이겠거니 싶은 그런 사람.
그녀는 반갑다며 제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너 눈이 짝짝이구나? 다벤치가 정의한 황금 비율의 56%밖에 속하지 못하네.]“아무튼 그 녀석이 저가 가장 따랐던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울던 날이 있었어.”
노엘 휴거가 죽은 날.
저는 닉시라는 사람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전쟁터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울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노엘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꾸 과호흡이 와 숨을 헉헉대면서도 저가 우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후로 닉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정신은 어디 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 실없이 굴었다.
“나는 그 녀석을 웃기려고 별 지랄을 다 떨었지. 괜찮다고 달래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여 보고, 그 녀석이 읊는 지겨운 화학 공식도 들어도 주고.”
그 후로 제 노력이 먹힌 건지, 시간이 해결해 준 건지 몰라도 어쨌든 평소 같아졌다.
몽유병이 생겼지만.
“왜냐면 그 녀석은 우는 것도 예뻤는데…… 웃는 게 정말 예뻤거든.”
제키는 저 멀리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환히 웃고 있는 닉시를 바라봤다.
예뻤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다.
귀여운 후배이자, 제 동기가 제게 잘 부탁한다고 늘 신신당부했던 사람.
사실 저나 필립이나,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이 곪아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부여잡고 운다 해서 나아질 리 없었으니까.
같은 퍼즐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리 비비적대 봐야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긴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그래서 언젠간 우리는 서로를 떠나 본인들만의 안식처를 찾으러 갈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떠날 준비가 안 된 건 오히려 자신들일지도 몰랐다.
“슬슬 파리로 돌아가자, 필립.”
“……그래. 쌓여 있을 서류들을 생각하니까 슬슬 머리 아파지던 참이었어.”
필립 또한 순순히 수긍했다.
제키가 기특한 동생 다루듯 필립의 머릴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필립은 그녀의 손을 짜증스럽게 털어냈다.
“또 우리 둘만 남았네.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래?”
필립이 반문했다. 엉. 제키는 게으른 낙타처럼 대답했다.
“난 괜찮은데.”
“엉?”
“제키.”
“왜.”
“예쁘단 소리가 좋아, 아니면 멋있단 소리가 좋아.”
갑자기 무슨 소리지. 제키가 머릴 긁적였다.
“어……. 나는 둘 다 좋은데. 왜?”
“그럼 내 맘대로 한다.”
“뭐?”
필립이 들고 있던 칵테일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키의 소매를 잡고 바의 중앙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이윽고 닉시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닉시가 그들을 보곤 환히 웃었다.
필립은 고갤 끄덕여 준 뒤, 뒤돌았다.
아직까지 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빠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휴.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고. 필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경고하지만, 지난번처럼 날 들어 올리거나, 빙글 돌게 만들면 정강이를 차 버릴 거야, 제키.”
“어, 엉?”
필립은 제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를 제키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때마침 노래가 느릿한 왈츠곡으로 바뀌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 * *
다음 날 아침. 닉시는 종이 한 장을 들고 마을 회관의 필립과 제키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나 독일로 귀화했어. 그러니까 대령보고 찾지 말라고 해.”
필립은 막 겉옷을 입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제키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이게 뭐야. ?”
“화가도 동의했고, 내 성을 따르기로 했어. 나는 독일로 귀화하게 됐고.”
“넌 성 안 쓰잖아.”
“응. 그래서 화가의 성을 지워 버렸어.”
“걘 대체 무슨 죄냐…….”
조잡하게 만든 서류였다. 관청에 넣어도 ‘이게 뭡니까?’ 하고 당황할 만한 서류.
하여간 아직도 저들이 자길 질질 끌고 갈 저승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키가 키득키득 웃었다.
옷을 다 갖춰 입은 필립이 제키의 어깨너머로 서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독일로 귀화했다 하면 대령이 더 눈 뒤집혀서 데려오라 난리일 텐데.”
“그러니까.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주냐? 부대 뒤집힐 일 있나.”
제키는 그길로 서류를 쫙쫙 찢기 시작했다. 공들여 준비한 건지 닉시가 으악! 소릴 내며 기겁했다.
“뭐 하는 거야! 진짜 결혼한다니까?”
“이런 걸 전해 줄 순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잘 생각해 볼게.”
“응?”
제키는 닉시를 꽉 끌어안았다.
종잇조각을 허망하게 움켜쥐고 있던 닉시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것에 놀란 건지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혼 같은 거 안해도 돼.”
“제키…….”
그녀는 천천히 닉시를 떼어 놓았다.
저를 보는 눈이 여전히 멍청해서 귀여웠다. 제키는 그녀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악!” 쓸데없이 매운 손길에 그녀가 코를 부여잡았다.
“자, 잠깐 그렇다는 말은…….”
필립과 제키는 미리 싸둔 짐가방을 들어 보였다.
“엉. 오늘 파리로 돌아갈 거야. 물론 필립이랑 나랑만.”
“진짜?”
야호! 그녀가 기쁨으로 방방 뛰며 제키와 필립을 끌어안았다.
그들이 닉시를 본 뒤, 가장 환호 넘치는 표정이었다.
“야…… 너무 기뻐하는 거 아니냐? 열받게.”
그러나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들은 제법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 점심. 결단력과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게 급한 군인 둘은 바로 오베르를 떠나기로 했다.
마차 정거장에는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닉시와 벤자민. 마을 이장 길버트와 라울이 서 있었다.
길버트가 제키에게 갓구운 빵과 우유. 그리고 잇자국 난 금괴를 돌려줬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고마웠어, 스위티.”
“아쉽네요. 두 분이 계셔서 이번 달 매상이 가게 연 이후 최고를 찍었었는데.”
“저도 라울 씨의 버터 빵을 못 먹게 된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 다음엔 파리에서 가게 열어 주세요.”
제키와 라울이 뜨거운 우정의 주먹 인사를 나누고, 필립과 길버트가 간단히 목례했다.
“벤자민 씨.”
필립이 벤자민에게 성큼 다가갔다.
“저는 당신을 인정 못 합니다.”
그는 제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닉시를 잘 부탁합니다.”
내가 애야? 난 알아서 잘할 거라고. 닉시가 뒤에서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벤자민은 닉시의 꿍얼거림에 픽 웃곤 필립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가 끝난 뒤, 필립은 간단히 목례했다.
문득 벤자민은 그와 악수한 손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느꼈다.
언제 쥐여 준 건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건 제 상관인 클레망 아서 대령의 이름으로 된 소개서입니다. 이걸 가지고 파리로 오시면 어떤 곳을 가든 무료로 숙박이 가능할 겁니다.”
벤자민은 깔끔한 필기체로 서명된 수표와 비슷한 소개서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소개서 뒷면엔 낯이 익은 마크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건…….”
로부스 박물관의 마크였다.
“로부스 박물관의 관계자 입장도 가능할 테니, 사용하시려면 사용하십시오.”
필립이 휙 고갤 돌렸다. 여전히 찬바람 쌩 부는 태도였다.
그는 한참 동안을 우두커니 서서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두 손으로 소중히 덮어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그들이 부른 마차가 도착했다.
“그럼 달링, 나중에 봐.”
“응. 은퇴하면 놀러 와! 꼭 은퇴하면 와야 해!”
“매몰차긴. 안 데려갈 거라니까.”
제키와 필립이 마차에 올랐다.
닉시를 데려가려고 준비했던 텅 빈 캐리어엔 마을 사람들이 잔뜩 챙겨 준 과일, 도시락, 농산물들로 가득 채워졌다.
“돌아가는 길이 무겁네. 고생 꽤 하겠어.”
제키가 말했다. 필립이 구석에 놓인 못생긴 농작물을 보곤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
닉시가 겨우 건진 고구마 몇 개였다. 그녀 나름의 애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