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1
Chapter 6. 낙엽. 파리, 엠마오의 그리스도, 코스모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농사를 망한 사람은 내 생애 처음이야.”
싹 날아간 닉시의 고구마밭을 본 길버트의 소감이었다.
초보 농부의 밭은 성장 촉진제란 약물을 맞고 강철 줄기를 얻게 된 해바라기를 제외하고 죄다 태풍에 날아가 버렸다.
그중 수확을 앞둔 고구마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는데, 닉시가 조금이라도 더 커지는 걸 기대하면서 수확을 미루고 있던 탓이었다.
“아니, 고구마가 태풍에 다 죽을진 몰랐지!”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고구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은 어느 정도 수확해서 팔아 버렸단 점이었으나…….
“어떡하지 길. 헬렌이랑 에드가 씨한테 빌린 돈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거야. 당분간 물이랑, 흙이랑, 해바라기 씨만 퍼먹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야말로 쥐어짜도 동전 하나 안 나올 것 같은 상황. 파산이었다.
닉시가 어느새 제 키보다 커진 해바라기들을 부여잡고 우는소릴 했다. 보다 못한 마을 이장이 곰곰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닉시. 혹시 일일 일꾼 해 볼 생각 없어?”
“일꾼?”
“응. 지금이 한창 포도 수확 시기잖아.”
오베르의 가을. 주요 수확물은 포도와 호박, 옥수수와 고구마다. 그중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는 건 포도.
오베르의 포도는 ‘피노누아’라는 솔방울을 닮은 포도인데, 단맛이 엄청나진 않지만, 특유의 산미가 제법 좋았다. 덕분에 와인 재료로 많이 팔리곤 했다.
“일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어때?”
“당연히 가야지. 개같이 일하겠습니다. 맡겨만 줘.”
그렇게 닉시는 마을 이장을 따라 검보랏빛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이 본인의 향긋한 무덤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닉시가 앓는 소릴 내며 밭에 풀썩 드러누웠다.
“고생했어. 여기 일당!”
길버트가 지폐가 든 봉투를 닉시에게 건넸다. 닉시는 다진 오징어처럼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간신히 봉투를 손에 넣었다.
“이건 취업 사기야! 포도 수확 일꾼이라길래 당연히 귀여운 쪽가위를 들고 포도를 따는 일일 줄 알았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에 나오는 우아한 시골 아가씨 같은 모양새를 생각한 닉시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한 건, 나무 상자 안에 가득 딴 포도들을 담아 밭에서 마을 회관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우직한 소처럼 말이다.
“가지치기 말이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냥 가지를 자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이러니까 농사가 망하지. 길버트가 닉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지치긴 말이야, 어떤 게 예쁜 열매를 맺을지, 어떤 걸 잘라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야.”
나무의 모든 가지에서 열매가 난다면 나무도 오래 살지 못하고, 열매도 맛이 없어진다. 그저 그런 나무와 그저 그런 수확물이 되는 것이다.
“그게 왜 힘들어. 그냥 한 놈만 남기고 쓸어버리면 되는 거잖아.”
“힘들지. 가지치기는 죽은 가지를 쳐내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가지를 잘라내는 거니까.”
이 꽃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모르지만 잘라내는 작업.
나무가 잘 자라는 데 필요한 작업이라지만, 농부 입장에선 더 좋은 결실을 위해 욕심을 잘라내는 아주, 아주! 경건한 작업이었다.
“꽃도 못 피워 보고 잘라내야 하니, 그게 얼마나 슬픈데.”
“아들처럼 키웠다더니. 역시 감수성이 풍부하군, 길.”
“닉시 너는 이것도 아쉽고, 저것도 아쉽다고 하다가 결국 다 살려놓고 농사 망칠걸.”
“맞는 말인데 열받네?”
길버트가 큭큭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닉시가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근데 닉시 너,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다니 대단한걸? 엊그제 옆 마을에서 온 일꾼들은 말도 안 하고 도망쳤는데.”
“그 사람은 몇 상자 날랐는데?”
“음, 백오십박스였나?”
“그건 신의 곁으로 가 버린 거야……. 도망친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지.”
닉시가 얼굴도 모르는 옆 마을 일꾼에게 애도를 보냈다.
마을의 주요 수확물이었을 때부터 경계했어야 했다.
마을의 절반이 포도밭이고, 그 어마어마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포도들은 얼마나 징그럽게 많을지를 생각해 봤어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일을 금방 끝냈어. 이 속도면 일주일 안 돼서 수확이 끝나겠는걸?”
“이걸 일주일이나 더 해야 한다고?”
“그럼. 아직 밭의 절반밖에 수확 못 했는걸.”
떠나간 고구마들이 아른거리는 순간이었다.
닉시가 조용히 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 길버트는 수확하면서 미리 가지치기한 나뭇가지들을 들고 일어났다.
“참, 닉시. 수확 다 끝나면 캠핑이나 할까?”
“캠핑?”
“응.”
길버트가 한 아름 안아 들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밖에서 모닥불 피우고 바비큐를 먹는 거야.”
노동으로 죽어 가고 있던 닉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너무 좋다……. 포도 오늘 다 따 버리면 안 돼?”
“귀한 일꾼이 신의 곁으로 갈지도 모르니까 내일 하자.”
새로운 것, 재밌는 것과 맛있는 것. 호기심 많은 농부 가슴에 불을 지피는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새로운 목표를 찾은 닉시는 이튿날 씨앗&모종샵 에드가의 수레를 개조해 터보엔진 자동수레를 만들었다. 수레의 순간 가속도가 치타와 맞먹었다.
닉시는 그 수레로 마을의 포도들을 순식간에 회관으로 운송했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거지?”
벤자민이 문 앞에 삐딱하게 서서 닉시와 길버트를 바라봤다.
닉시는 대체 뭐 하고 굴러먹다 온 건지, 얼굴에 밴드를 칭칭 감고 있었고, 팔 한쪽엔 붕대를 둘러매고 있었다. 무슨 수레로 포도를 나르다가 너무 신난 나머지 바닥을 굴러서 생긴 영광의 상처랬다. 그는 알 바 아니었지만.
“다시 말해 줘? 그러니까, 너희 집 마당에서 캠핑할 거라구.”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벤자민이 궁금한 건, 이 넓은 마을에서 왜 하필 제집 마당에서 캠핑한다고 난리인가였다.
하지만 닉시와 길버트는 그가 뭐라 반론도 하기 전에 그의 집 마당에 모닥불 자리를 잡고 바비큐장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닉시, 길버트!”
“야호, 비티! 라울!”
때마침 저 멀리서 통나무를 들고 오는 목수와 손에 먹을 재료 따위를 이것저것 들고 있는 바텐더가 보였다.
“그레타도 와 줬구나!”
“아, 저는 라울 씨가 짐 나르는 걸 도와 달라 해서…….”
“어서 와, 여기 앉아!”
닉시가 그레타의 손을 잡고 모닥불 앞으로 데려갔다.
“캠핑이면 통나무 의자랑 소나무 장작이 빠질 수 없죠!”
비티는 들고 온 통나무를 모닥불 자리 옆에 길게 눕혔다. 장의자처럼 앉을 수 있게 윗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내려놓을 때 쿵, 하고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소리가 났지만 목수의 얼굴엔 땀 한 방울 없었다.
“길버트, 고기랑 맥주도 좀 챙겨왔는데 어디 둘까요?”
“우와 라울 씨,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마을 이장과 바텐더가 바비큐 그릴 앞에 먹음직스럽게 다듬은 꼬치 재료들을 꺼내 들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벤자민이 팔짱 끼고 문에 기대선 채 화목한 캠핑장을 바라봤다.
이런 분위기면 아무리 제가 항의해도 그들이 제집을 점거하는 것을 막을 순 없어 보였다.
‘캠핑이라고 하면…… 내일이면 다 집으로 돌아가겠지.’
하루만 참으면 된다. 눈 딱 감고 하루만.
문제는 저거였다.
“와아……. 빅토리아 씨. 이게 뭐예요?”
그레타가 통나무 기둥 하나를 우뚝 세워 놓은 것을 보곤 말했다.
나무 기둥 주변에 잘라 낸 포도나무 가지들을 예쁘게 쌓아 놓던 비티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모닥불이에요!”
“화형대…… 아니구요?”
‘문제는 저거로군.’
벤자민은 모닥불이랍시고 세워 둔 나무 기둥을 바라봤다.
저기에 불을 붙이면 마을 밖에서도 알아볼 만큼 불이 치솟을 게 뻔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은 악마의 불기둥이니, 독일인이 봉화를 피우고 있다니, 떠들어댈 터였다.
‘게다가…….’
그는 괜스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과거의 잔향. 언젠가 봤던 희미한 기억 속, 타오르던 무언가. 큰불을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악몽.
“…….”
벤자민이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나무 기둥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런 그를 닉시와 길버트가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
닉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곤 길버트에게 속삭였다.
“길, 길. 저것 봐. 화가가 자기만 안 부른다고 심기 불편해하는 거.”
“호오, 이게 먹힐 줄은……. 정말 이대로 가면 벤자민도 바비큐 파티에 동참하겠는걸?”
“말했지? 이게 바로 너구리 잡는 방법이라구.”
이름하여야 굴속에 숨은 화가를 끄집어내는 방법.
그의 집 앞에 잔치를 벌인 다음, 그들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에 화가가 제 발로 뛰쳐나오게 하는 방법이었다.
잔치도 벌이기도 전부터 저렇게 꽁해 있는 모습은 의외였지만 아무렴, 자발적 아웃사이더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데엔 성공한 셈이었다.
“자. 다음 단계는 길, 네 차례야.”
닉시가 길버트의 손에 꼬치 재료들을 쥐여 준 뒤, 벤자민 쪽으로 밀었다.
길버트가 중대한 명령을 받은 것처럼 고갤 끄덕였다.
“벤자민이 정말 참여할까요?”
옆에서 채소를 다듬던 라울이 물었다. 그럼요! 닉시는 확신했다.
“화가는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는데, 의외로 길의 말은 순순히 들어주거든요. 마을 실세를 향한 은연중의 충성 같은 거죠.”
의외로 사회생활을 잘한단 말이지. 닉시가 중얼거렸다. 라울이 그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건 아닐 거예요. 예전에 벤자민이 그런 적 있었거든요. 제 동생이 살아 있으면 길버트 또래였을 거라고. 그래서 약한 거 아닐까요?”
“참나,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긴. 서로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는구만.”
닉시의 예상대로 길버트는 벤자민을 구슬리는 데 성공했다.
단, 불은 작게 피우는 것으로. 바닷바람 때문에 불이 더 커질 수 있었고, 그러다가 제집에 불이 붙는 불상사는 막고 싶다는 이유였다.
마을 젊은이들의 캠핑은 닉시의 생각보다 활기찼고 소란스러웠다.
닉시가 잘 구워진 꼬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향긋한 불 향이 밴 고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녀가 라울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길버트는 벌꿀을 넣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사람들에게 돌렸다. “밤의 바닷바람은 차가우니까요.” 코끝은 서늘한데 몸 안쪽만 뜨뜻했다.
저문 해를 대신해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는 모닥불에선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렸고, 비티는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며 우쿨렐레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C코드밖에 치지 못하는 연주자였다.
“그럼 불러 주세요.”
마을 이장이 비티의 눈높이에 맞춰 동요를 신청했고 닉시는 센스가 할아버지 같다고 야유했다.
닉시는 시끌벅적한 풍경을 바라봤다.
비티와 길버트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돌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바비큐 그릴 옆에 서 있는 라울은 비티에게 몇 마디 거들며 맥주를 마셨다.
닉시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레타는 아직은 어색한 건지 다 먹은 꼬챙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벤자민이 흘긋 그레타를 바라봤다. 그리곤 모닥불에 굽고 있던 마시멜로를 건넸다. 그레타가 깜짝 놀란 토끼처럼 흠칫 놀랐다.
“아, 가, 감사합니다.”
본인이 너무 소스라치게 놀란 것에 부끄러워진 건지 그레타의 귀가 새빨개졌다.
‘왠지 낯설다 했더니 화가와 목장 아가씨의 조합은 처음 보네.’
주변의 떠들썩한 공기와는 다르게 둘이 있는 공간만 정적이었다. 어색한 기류가 눈에 보인다면 바로 저기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그레타가 먼저 마시멜로 꼬치를 보며 벤자민에게 무어라 말했다. 뭐라 말한 건진 닉시는 듣지 못했다. 비티의 동요 열창이 한창 클라이맥스였기 때문에.
흐음. [덜 구워졌어요. 웰던으로 다시 구워 주세요.] 아니면 [저 이거 안 좋아해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벤자민이 그레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과오를 저지르다니. 셰프로서의 수치입니다, 아가씨. 머리 박겠습니다…….]그레타는 머뭇거리다가 벤자민의 귓가에 뭔갈 속삭였다.
귓속말? 멍하니 그들의 대화를 추측하던 닉시가 눈을 깜빡였다.
그레타의 귓속말을 들은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그는 고갤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그레타도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양새만 봐선 ‘여기 너무 시끄럽군요, 둘만의 장소로 가실까요?’ 같은 분위기다.
그들은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바비큐 그릴 쪽으로 걸어갔다.
닉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티 잠깐만요.”
닉시가 열창하던 비티의 입을 덥석 틀어막았다.
웁! 갑자기 입에 고깃덩어리가 들어온 비티는 놀란 눈으로 닉시를 바라봤다. 손뼉을 치다가 갑자기 손에 꼬치들이 쥐어진 길버트도 마찬가지였다.
벤자민과 그레타는 그릴 앞에 섰다. 그곳에는 고기를 굽고 있던 라울이 있었다.
벤자민은 엄지를 들어 제 등 뒤에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레타를 가리켰다.
“이 자가 좋아한다더군.”
헉. 비티와 길버트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이렇게 그레타의 짝사랑을 탄로 낸다고?
그러자 그레타가 벤자민의 옷자락을 쥐었다. 교묘하게 가려져서 라울에겐 표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옆에 있던 닉시는 볼 수 있었다.
입꼬리를 싸하게 내린 그레타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너의…… 마시멜로를.”
벤자민도 등 뒤의 한기를 느낀 건지 어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의아한 표정이던 라울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하.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에요, 그레타 양.”
“네, 네! 혹시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럼요.”
“휴. 오베르가 멸망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요……. 벤자민 씨에게도 그레타의 유구한 짝사랑 역사를 말해 줘야 할 때가 왔네요.”
비티와 길버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닉시도 덩달아 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게. 난 또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그레타의 무서운 손아귀에서 벗어난 벤자민이 피곤하단 얼굴로 고갤 돌렸다.
닉시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던 터라 불시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닉시는 흠칫 놀랐다. 꼭 몰래 훔쳐보다 들킨 것 같은 희미한 당혹감도 들었다.
벤자민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다가왔다
어색해 죽을 지경이던 공기에서 살아 돌아오니, 몸이 절로 가장 편해 보이는 장소를 찾았다. 그에게 편하고 익숙한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집.
하지만 지금은 집 출입금지령이 내렸으니, 다른 편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은 그곳이었다.
벤자민은 닉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모르겠으나 저를 보고 뜨끔한 표정과 자꾸 뭐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매우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래도 텐션 높은 마을 이장이나 초면에 가까운 목수 옆보단 부대끼고 살아 봤다고 그녀의 옆자리가 제일 편했다.
“……뭐 할 말 있나?”
그 켕기는 시선을 견디다 못한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어? 어, 아니? 아닐걸?”
“아니면 아닌 거고 아닐걸은 또 뭐야.”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멋쩍으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아니 그게. 나 지금 속이 되게 답답했거든?”
“뭘 잘못 먹었겠지.”
“아니, 아니. 아까 음…….”
닉시는 언제부터 제 속이 갑갑했는지를 떠올렸다.
분명히 화가가 그레타에게 마시멜로 꼬치를 건넸을 때부터…….
그러자 거북한 걸 떠올렸다는 듯 명치 끝이 조여 왔다.
“화가. 혹시 나 마시멜로 알레르기가 있는 걸까.”
“유감이군.”
벤자민이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잘 익힌 마시멜로를 베어 물었다. 달큰한 설탕 향기가 풍겼다.
‘이상하다. 화가가 먹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아깐 왜 그랬지? 혹시 조건성 알레르기?’
‘먹고 싶은 건가.’
닉시가 저와 마시멜로 꼬치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벤자민이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닉시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입에 넣었다.
말랑거리는 하얀 당분 맛. 알레르기 같은 건 없었다.
‘그럼 왜지?’
그래.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겐 제법 덜 퉁명스럽게 군다는 걸 알고 얄밉기도 했다. 그레타의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자 친절히 몸을 숙여 줬던 것처럼.
‘그럼 혹시 사람을 차별하는 화가가 괘씸한 마음?’
“화가, 혹시 한 대만 맞아볼래?”
“아니.”
벤자민이 질색했다.
“아니면 귓속말하는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나는 건가?”
“심각하군.”
“화가! 한번 해 봐!”
그가 뭘?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귓속말.”
내가 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눈앞의 농부는 또 뭐 이상한 것에 꽂힌 듯했다.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고집에 익히 당해 봐서 알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냥 한 번 해 주고 마는 게 낫다는 걸.
벤자민이 고갤 숙였다. 그리고 짤막하게 속삭였다. 너 입에 마시멜로 묻었어.
“진짜?”
그가 기울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고갤 끄덕였다.
닉시는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혓바닥을 사방으로 날름거렸다.
그는 잠시 그 몰골을 외면할 것처럼 굴다가, 자꾸만 허탕 치는 그녀의 혓바닥이 측은했던 건지 손가락을 들었다.
여기. 입가를 콕콕 가리켰다. 닉시는 소맷자락으로 그가 가리킨 부분을 벅벅 닦아 냈다.
‘이상하다.’
귓속말해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물론 혈압은 좀 상승한 듯했으나 미미한 정도였다.
‘그럼 아깐 왜 그렇게 기분 나빴던 거지. 그냥 화가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봤을 뿐……. 어라, 나 방금 기분 나빴던 건가?’
닉시가 고갤 들어 제 옆에 앉아 있는 화가를 바라봤다. 그는 꼬챙이로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화가가 다른 사람이랑 있어서 기분이 나빴다고?’
* * *
“이런 낭만적인 장소에서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죠.”
해가 저물고, 찬 바람이 불 무렵. 비티가 다섯 잔째 맥주를 비우며 운을 뗐다.
“사랑 이야기요?”
여기 있는 사람 전부 솔로인데 사랑이라니. 길버트가 어리벙벙하게 대답했다.
“사랑?”
비티의 이야기에 눈을 밝히고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닉시.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은 사랑이 다 죽은 벤자민. 딱 봐도 오랜 경력직 같은 라울은 그저 웃고 있었고, 풋사랑을 진행 중인 그레타는 본인의 사랑 이야기라도 끄집어낸 듯 부끄러워했다.
“어머, 다들 부끄러워하긴.”
“다들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 웁…….”
“쉿, 길. 분위기 읽자.”
닉시가 길버트의 입에 큼지막한 감자를 집어넣었다.
“그럼 저부터 시작할게요.”
“좋아!”
비티는 맥주잔을 마치 확성기인 것처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사실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답니다.”
“푸웁 컥, 캑, 뭐어?! 데려와! 지구에서 존재를 지워 버리게!”
“지금은 아니지만요.”
“아, 그, 그렇구나! 다행이야!”
“그 남자가 다른 여자랑 결혼했거든요?”
“뭐……? 데려와, 지구에서 존재를 지워 버리게.”
“닉시, 좀 조용히 해.”
비티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결국 가족과 다툰 뒤, 고향을 떠나 오베르에 정착했다고 말을 이었다.
“제가 먼저 자릴 잡고 그 사람도 제가 있는 곳으로 오기로 했었죠.”
그 뒤로 연락이 끊겼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때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 했단 걸 알게 된 건 오베르에 와서 그 남자를 기다린 지 3년이나 지난 뒤였다.
비티의 이야기를 듣던 닉시가 한참을 흐음…… 고민했다. 이윽고 그녀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역시 사형시키자.”
“교수형.”
“빨리 죽이는 것보다 천천히 죽이는 게 좋지 않을까, 벤자민?”
“자르는 거예요……!”
“뭐, 뭘 말이야, 그레타.”
길버트가 화들짝 놀라며 그레타의 양털 깎이를 압수해 갔다.
그들의 일단 죽이고 보자는 결론에 비티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잔 한가득 채운 맥주를 꿀꺽 삼키곤 듣기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곳에서의 생활도 맘에 들어서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그 녀석이 행복한 게 갑자기 싫어지면 말해.”
파탄 전문, 불행의 씨앗, 재앙의 여신 닉시가 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비티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그럼요. 이렇게 깜찍한 닉시도 있고요.”
“까, 깜찍? 호, 혹시 비티 날 좋아해?”
“물론이죠!”
가볍게 취한 그들이 좋니, 싫니 지지고 볶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비티 옆에 있던 라울이 이야기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하하,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재미없을지도 모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