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2
그는 오래전 선생님을 짝사랑했던 풋내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술집에서 그녀를 만났다가, 첫눈에 반해 버렸다고.
하지만 당시 그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반항심이 넘쳐났던 질풍노도의 사나이였기에 차마 그녀에게 고백은 하지 못했다고 했다.
“라울, 거기선 무슨 일을 했었길래요?”
“그때도 바텐더를 하고 있었어요. 지금과는 달리 남의 눈에서 눈물을 빼는 쪽의 바텐더.”
닉시와 비티는 호오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긴, 라울은 여자를 꽤 울렸을 타입이죠.” 비티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이 죄 많은 남자!”
“하하. 죄가 크긴 해요.”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결국 그녀는 약혼자와 결혼해 버렸고.
그 말을 들던 그레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지만, 마지막으로 결국 그분과는 좋은 선생 제자 사이로 남기로 했단 말을 듣곤 크게 안심했다.
다음으로 그레타는 오래전 선생님을 짝사랑했었던 풋풋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눈치 없는 벤자민이 “그거 라울이 했던 말이랑 비슷하군.”이라고 중얼거렸다가 구석에 잠시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
“참. 닉시, 벤자민 씨! 둘은 짧은 신혼 생활도 즐기셨잖아요. 저, 너무 궁금했던 거 있죠! 어땠나요?”
“저도 궁금했는데, 어떠셨나요?”
그레타의 이야기가 끝나고 귀향 갔었던 벤자민이 닉시의 옆에 앉자마자 라울과 비티가 닉시와 벤자민을 지목했다.
“엉? 별거 없었는데. 그냥 객식구 같았어.”
꼭 ‘배추를 뽑았는데 배추흰나비가 나왔어.’ 같은 시큰둥한 대답. 잔뜩 기대에 부푼 사람들의 시선이 푸시식 식어 버렸다.
비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작은 집에서 한 달이나 같이 살았는데. 정말 아무 감정도 안 들었어요?”
닉시는 본인의 집이 작다는 비티의 말에 가슴을 부여잡았고, 벤자민은 애꿎은 모닥불만 뒤적였다.
“이 녀석이 물건을 제자리에 안 두는 것 때문에 화는 많이 냈었지.”
“평소 이야기 말구요.”
“……오밤중에 구운 헤이즐넛을 먹고 싶다고 나가자 하면 화나더군.”
“화낸 이야기 말고 다른 건 없는 거예요?”
어쩜 이렇게 로맨틱하지 않을 수가! 비티가 탄식했다.
감정이고 자시고, 서로 안 맞는 사람들끼리 억지로 부대끼고 살았는데 로맨틱함이 싹틀 리가.
벤자민은 잠시 닉시와 함께 살았을 때를 회상했다.
그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았다.
새벽잠, 그녀가 멋대로 신고 다니다 잃어버린 슬리퍼 한 짝, 매일 머리맡에 두고 잤는데 어디다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 펜들.
건강도 좀 잃은 것 같았다. 그녀 입맛에 맞는 음식들은 대부분 달거나, 맵거나, 셨으니까.
“자자, 사랑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때마침 길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주머니를 뒤졌다.
“실은 제가 오늘 캠핑을 위해서 뭘 준비해 봤거든요?”
짜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작은 나무통. 그곳엔 세로로 길게 접은 종이들이 꽂혀 있었다.
“바다 근처랑 밀밭, 벤자민 씨네 집에 제가 재밌는 걸 숨겨 놨어요.”
“……뭐?”
우리 집엔 또 왜. 벤자민이 반문하자 닉시가 그의 등을 콕콕 찔렀다. “벤자민 앉아 봐, 길이 안 보이잖아.”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캠핑을 더 유익하게 해 줄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오는 거예요. 어때요?”
“재밌겠네요!”
리액션 좋은 비티와 닉시가 먼저 참여 의사를 보였다. 라울도 고갤 끄덕이자 그레타도 좋다 말했다.
“그럼 오베르는 민주주의 지역이니, 다수결의 원칙으로 안건을 진행하겠습니다!”
길버트가 통 속의 종이를 휘저었다.
―달그락.
“레이디 퍼스트.” 길버트가 가장 먼저 그레타에게 통을 내밀었다. 기대하고 있던 두 레이디들이 항의 의사를 내비쳤다. “우우, 구닥다리 마인드의 신사는 물러가라!”
그러자 길버트가 닉시 쪽을 향해 빠르게 윙크했다.
“자아, 고르고 싶은 걸 고르면 돼, 그레타.”
“어, 어. 그러니까…….”
통 속엔 가장 유별나게 튀어나와 있는 종이가 있었다. 누가 봐도 뽑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그레타는 머뭇거리다가 그 유별나게 긴 종이 말고 다른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길버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통의 각도를 틀어, 긴 종이가 그레타의 손에 닿게끔 했다.
‘아하. 그렇군.’
닉시가 그의 노골적인 레이디 퍼스트와 윙크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레타와 라울을 밀어주려는 거로군!’
“우와! 그레타와 라울은 밀밭 당첨이네요! 이 계절의 밀밭은 아주 좋죠. 노란 물결이 절경일 거예요!”
무해한 얼굴이지만 속은 시커먼 길버트는 그렇게 라울과 그레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밤길이 어두우니 둘이 꼭 붙어 있어야 해요 알겠죠?”
“길버트…….”
“나중에 봐.” 마을 이장의 앙큼한 작전을 당하고 난 뒤야 알아 버린 라울은 길버트의 머릴 헝클어뜨리며 속삭였다.
“그럼 갈까요, 그레타 양?”
“네, 네!”
둘은 작은 등불을 하나 들고 사라졌다.
“후우. 미션 성공. 자, 자 다음 뽑으실 분?”
“본론 끝났다고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닉시가 통을 대충 휘적이는 길버트를 보고 말했다. 그는 푸스스 웃어 보였다.
남은 사람들은 동시에 쪽지를 뽑아 들었다.
“어머, 저는 벤자민 씨의 집이네요.”
비티가 말했다.
길버트가 제 몫의 쪽지를 펼쳤다. 이젠 제법 잘 쓰게 된 제 글씨체가 보였다.
“저도네요.”
“그렇다면…….”
같은 장소를 뽑게 된 비티와 길버트가 동시에 닉시와 벤자민을 바라봤다.
둘은 썩은 호박 같은 표정이었다.
닉시는 하필 절반의 확률 중, 제발 걸리지 마라 생각한 곳이 걸린 건가 하는 썩음이었고, 벤자민은 본인 집이 코앞인데 왜 본인이 본인 집을 못 들어가는가, 그리고 닉시의 종이를 확인한 뒤엔 ‘또 이 여자와 한 쌍이다.’ 하는 제 썩은 운에 대한 탄식이었다.
“뭐야 화가 너도 바다야?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만 쫓아오랬지! 내가 그렇게 좋아?”
“누가 할 말을.”
“헉, 네가 좋냐고?”
“……지긋지긋하다 진짜.”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길버트가 빤히 바라봤다.
종이 위에 예쁘게 적힌 단어. 길버트는 뺨을 긁적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안 따라오면 버리고 갈 거야! 난 전력 질주해서 갔다 올 거거든.”
닉시가 바닥에 출발선을 그었다.
가다가 중간에 못 가겠다고 우는소리 할 거면서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벤자민이 그 출발선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려 했을 때였다.
“벤자민.”
길버트가 성큼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제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저랑 바꾸실래요?”
“…….”
벤자민은 제 앞에 놓인 종이와 그것을 내민 길버트를 번갈아 봤다.
그들 사이에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평소 같았으면 타이밍 신기하다며 웃어넘길 별거 아닌 침묵이었으나…….
‘어라. 내가 왜.’
길버트만이 제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당혹스러운 말과 그로 인해 찾아온 침묵에 펄쩍 뛸 지경이었다.
“그, 러니까 산책을 좀 하고 싶기도 했고, 벤자민 씨네 집 안에서 산책할 순 없는데, 또 이 시간의 바닷바람이 좋잖아요!”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릴!’ 길버트가 속으로 외쳤다.
닉시와 벤자민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닉시가 음흉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야, 길. 그런 거였어?”
길버트가 뭐에 뜨끔했는지 모르게 흠칫했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닉시는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바다가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말하지!”
그리곤 그대로 벤자민의 손을 끌어와 두 손을 꼭 붙잡게 했다.
―꼬오옥!
순간 길버트의 목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닉시!”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털어냈다. 덕분에 허공엔 벤자민의 손만 덜렁 남아버렸다.
“갑자기 손을 잡게 하면 어떡해!”
“우와 길버트, 너 얼굴이 으깬 라즈베리 같아! 혹시 불쾌했어?”
벤자민이 남겨진 제 손을 벙벙하게 바라봤다. 이유도 모르게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을 입은 기분이었다.
하아. 길버트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건 아닌데.”
“그럼 거북했다든지?”
“같은 말이잖아.”
길버트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잘됐다. 안 그래도 갑자기 튀어나온 말을 어떻게 얼버무릴지 고민이었는데.
“……그냥 빨리 갔다 와, 닉시. 바다에 숨겨 놓았던 거 멜론이거든. 고래가 물어가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 할걸.”
“뭐어, 진짜?! 화가! 빨리 와!”
길버트의 말에 닉시가 아직도 맹하니 제 손을 바라보고 있는 벤자민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이 굶주린 치타의 속도로 사라진 뒤에도 길버트는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길버트! 벤자민 씨 집에 숨겨 둔 보물 찾았어요. 이 귀여운 크루아상들 맞죠?”
화가의 집엔 언제 들어갔다 나온 건지, 비티가 크루아상들이 소담하게 쌓여 있는 빵 바구니를 들고 왔다.
“어머. 뭐 해요, 길버트?”
길버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작은 나이프로 장작으로 쓰고 있던 포도나무 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잘린 잔가지들이 바닥에 하나둘, 쌓여 갔다.
“음……. 가지치기 중이요.”
“그렇군요! 길버트도 목공에 흥미가 있나요? 제가 좀 알려 드릴까요?”
가지 하나가 매끈해졌다. 길버트는 그것을 보며 픽 웃었다. 이미 죽은 가지를 가지고 가지치기라니. 웃기기도 하지.
“아뇨. 저는 영 못 해 먹겠어요.”
“왜요? 하면 잘할 거 같은데.”
그는 예쁘게 다듬은 가지를 불 속에 털어 넣었다.
“잘라 내는 게 꽤 아플 것 같아서, 시작할 엄두도 안 나요.”
* * *
벤자민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눌어붙은 닉시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방금까진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려놓고, 파도 소리가 들리자마자 ‘못 가겠소!’ 드러눕다니.
이 속도면 일주일은 지나야 간신히 파도를 구경할 것이다. 갓 태어난 거북이도 이것보단 빠른데. 그가 한쪽 다리를 굽혀 쭈그려 앉았다.
“일어나. 고래가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뭔 소리야, 이런 작은 해변에 고래가 어떻게 나와?”
방금까지 본인이 말했잖아.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닉시를 내려다봤다.
그런 시선 따윈 가뿐히 무시한 그녀가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잡고 닉시를 일으켜 세웠다.
“후우. 좋아. 마음의 준비 다 했어.”
그가 걸음을 옮겼다.
“으, 아악,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좀 천천히 가!”
하지만 닉시의 아우성에 겨우 갯지렁이 헤엄치는 속도 정도로 타협할 수 있었다.
“바닷물에 너무 오래 있어서 멜론이 짜게 되면 어떡하지?”
닉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와 붙잡은 손에서 톡톡, 손가락 두드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은 그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멜론에 생햄을 올려 먹기도 하니까 적당히 짜게 되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새삼 붙잡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큰 손이 제 손을 폭 감싸고 있었다.
담백함이 느껴지는 온기. 바다만 오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불치병 환자를 지탱해 주기 위함일 뿐인 손.
닉시가 그의 손에 폭 잠긴 손을 쫙 펼쳤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미끄러지듯 교차해 다시 꼭 쥐었다.
“…….”
“…….”
“혹시 불쾌해?”
닉시는 희미하게 붉어진 그의 귀를 가리켰다. 벤자민이 고갤 돌렸다.
“어.”
“내가 거북한 거야?”
“그래.”
닉시는 교차했던 손을 풀기 위해 다시 손가락을 펼쳤다. 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순 없었다. 그가 굽힌 손을 펼치지 않았기에.
불쾌하면 손을 떼면 되는데, 굳이 굳이 붙들고 있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그런 거지, 본인이 괴로운 걸 즐기는 타입.’
닉시가 그렇게 결론 내릴 무렵, 저 멀리 ‘나 여기 있다!’ 외치는 듯한 깃발 하나와 그 아래 예쁘게 놓여 있는 멜론을 발견했다.
다행히 바닷물에 닿진 않았다.
“으쌰!”
닉시가 무서운 바다로부터 쟁취해 낸 멜론을 옆구리에 끼웠다.
이대로 돌아가서 라울에게 베이컨을 구워 달라 해야지. 햄은 없지만, 베이컨과 함께 먹으면 비슷할 테니까.
그녀가 이제 돌아가자 말하기 위해 고갤 들었다. 벤자민은 저 너머의 캄캄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금 그녀의 손등에 그의 손가락이 톡톡 노크했다. 이번엔 뭘 그리 오래 생각하는 건지 꽤 오래 손가락을 두드렸다.
―톡, 톡.
―쿵, 쿵.
그가 두드리는 규칙적인 진동이 심장 콩콩 뛰는 감각과 비슷해졌다.
그러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서로의 울림을 나눴던 날.
비가 쏟아지던 그때, 서로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나서 영문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을 때.
―쿵, 쿵.
“너한테 말 안 하고 있었던 게 있는데.”
“어, 어!?”
닉시가 화들짝 놀라 얼빵하게 대답했다. 그가 영문을 몰라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날…….”
“그, 그날?!”
“……불쾌한가?”
닉시의 얼굴이 화난 문어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가 붙잡고 있는 손에 슬쩍 힘을 풀었다.
닉시가 허둥거리며 손사래 쳤다.
“아니! 어, 아니, 아니 불쾌한 건 모르겠는데, 울렁거려.”
너무 오래 보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니까 바다를.’
아무 생각 없다가 괜히 떠올리고 나니, 의식하게 돼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바다를!’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군.’
한편 시시각각 찡그렸다가, 풀렸다가, 도로 일그러지는 닉시의 얼굴을 본 벤자민은 빨리 돌아가야겠다 판단했다. 손에 힘을 주었다.
해변가에서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목구멍 아래서 팔딱이던 심장도 진정됐다.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하고 있었던 게 뭔데.”
닉시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벤자민은 제 셔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종이봉투였다.
“그게 뭔데? 러브 레터?”
“네 친구한테 받았어.”
“……내 친구한테 러브 레터를 받았다고?”
“아니.”
그가 봉투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익숙한 직인이 찍힌 빳빳한 종이. 티켓이었다.
그것이 뭔지 알게 된 닉시의 눈이 멜론만큼이나 커졌다.
‘망했다.’
“파리로 가는 티켓.”
필립이 파리로 돌아갈 때 화가에게 주고 간 것이었다.
대령의 직인이 찍혀 있는 파리행 열차 탑승권 두 장과, 로부스 박물관의 입장권.
저게 화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파리로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를 보기 위해.
“의뢰 대금을 네 친구가 대신 치를 줄은 몰랐지만, 이제 파리로 가면…….”
“자, 작물 수확 끝날 때까지만!”
닉시가 허둥거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망했다.’
[……필립.] [응.] [혹시 대령한테 그림 하나만 찾아 달라고 할 수 있어? ……라고…….]예전에 필립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림을 찾았다는 답장은 아직 없었다.
화가에겐 ‘필립이 박물관 무료입장권을 준다 했어! 그러니까 그 답장이 오면 가자!’라고 답장을 기다리는 척 시간을 벌면 될 거라 여겼는데…….
‘저건 언제 주고 간 거야!’
일 처리의 끝판왕. 신속 정확의 아이콘 필립 휴거가 미리 선수를 쳐놨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림을 찾지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저것만 주고 가면 어떡하냐고!’
이렇게 된 이상, 닉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언제까지? 그녀의 친구들이 그림을 찾았다고 연락할 때까지.
“작물 수확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주라! 알잖아, 나 농사 망한 거! 지금 심어놓은 작물이라도 수확하지 않으면 나 정말 파산이야.”
그림을 찾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닉시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지구 종말의 때를 떠올리곤 마른침을 삼켰다.
벤자민은 그의 과한 허둥댐이 이상하다는 듯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뭐, 그래.”
이윽고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갤 끄덕였다. 그녀가 이상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리고 벤자민은 어차피 그럴 셈이었다.
표가 있단 걸 보여 준 건, 혹여나 성격 급한 이 여자가 표를 또 사 올까 걱정돼서 알려 준 것뿐.
지금 당장 파리로 갈 맘은 없었다. 번역 의뢰가 아직 남았고, 파리에 가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돈도 어느 정도 모아야 했다.
“돌아가자.”
“어, 어!”
닉시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아왔다.
벤자민은 저 멀리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자신의 집을 바라봤다.
캄캄한 밤하늘을 메운 탁한 연기. 새빨간 불꽃.
그 앞에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오베르의 젊은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것저것 이유를 덕지덕지 붙여 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 * *
다음 날 아침. 닉시는 왁스로 꽁꽁 도배해 놓은 편지를 우편배달부의 손에 단단히 쥐여주었다.
“부탁해요.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오, 오늘요?”
“네. 지금 당장이요. 내일은 없어요. 내일 편지를 부치면 미래의 저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요.”
우편배달부의 손에 쥐어진 건 닉시가 필립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정확히는, 제발 렌브란트의 그림인 를 빨리 찾아달라는 SOS 구조 요청.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우편배달부가 허둥지둥 자전거에 올랐다.
‘만약에 그림을 못 찾으면…….’
일단 화가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불행하게도 화가가 프랑스 시민이 아니라, 저를 재판에 부치진 못하겠지만 이번에야말로 절교를 선언할 것이다.
오베르같이 작은 마을에서, 절교 소식 같은 자극적인 이슈라면 반나절 만에 마을 전체에 퍼질 것이다.
그럼 닉시는 ‘사기꾼 닉시.’ 아니면 ‘등쳐먹는 닉시.’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게 될 것이고. 그녀의 오두막은 계란, 토마토, 페인트들을 가득 처맞게 되겠지.
즉, 오베르의 평화로운 삶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을 구해야 해…… 이건 내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닉시가 중얼거리며 오늘 수확한 작물들을 상자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