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p to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39
39화. 입학전야(1)
진가반점의 외상판은 다용도다. 진가반점에서 음식을 먹은 단골 고객의 외상장부로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음식주문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안 알려진 외상판의 비밀은 외상판이 살수 의뢰용으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각 외상판에 적힌 이름은 단골 고객의 이름인 동시에 살수의 의뢰명이기도 하다.
외상은 흰색 종이로 적어서 둔다. 붉은색은 의뢰자가 있다는 뜻이다. 검정색은 의뢰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의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살수가 죽었다는 말과 거의 유사하다. 간혹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도 있으니 검정색이 반드시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비어 있는 주머니는 일이 없으니 의뢰를 받을 수 있는 살수라는 의미다.
우측 상단은 진씨의 주머니다. 그 주머니에 붉은색 종이가 꽂혀 있다는 이야기는 진씨에게 의뢰가 들어갔다는 뜻이다.
진씨는 칼을 잘 다루는 사람이다. 주방용 칼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칼도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점이 문제다.
지금 쯤이면 환갑이 되었을 나이다. 사실 이미 은퇴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진씨다. 그런 진씨의 주머니가 그대로 남아있기에 그냥 주인장이라서 주머니를 걸어둔 줄 알았다. 그런데 진씨의 주머니에 붉은색 종이가 꽂혀 있다니.
‘이 나이에 의뢰를 받는단 말이야? 진씨가 아직 은퇴하지 않은 거야?’
진씨가 의뢰를 받았다는 것만큼이나 눈에 뜨이는 변화가 있다. 며칠 전과 달라진 분위기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의뢰가 한 장이 아니야.’
외상판의 주머니에 꽂힌 붉은색 종이들. 한 두 개가 아니다.
‘이렇게 의뢰가 한꺼번에 많이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다시 찾은 반점 안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졌던 이유는 의뢰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의뢰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반점 안의 살수들이 긴장하거나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얼마 전과 다른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일이 없어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사와 술을 즐기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늘은 적지 않은 살수들이 긴장감과 살기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의뢰를 한꺼번에 한 거지?’
대개 한 두 개의 빨간색 종이가 꽂혀있기 마련인 외상판. 그런데 대충 봐도 열 개 가까이 꽂혀 있다.
더구나 진씨까지 나섰다면 보통의 의뢰는 아니다.
진씨는 진가반점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살수집단인 ‘진살막’의 막주이기도 하다.
그의 별호는 ‘진살숙수’다. 마치 사람을 요리하듯이 사람을 요리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아직까지 진살막 막주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가 직접 의뢰를 받았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누가 진살막 막주에게 의뢰를 한 거지? 아니 그보다 진살숙수가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는 벌써 의뢰대상을 죽이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는 이야기잖아.’
어떻게 해야 고민이 된다.
‘그냥 모른 척해? 아니면 무슨 일인가 알아 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러니 조용히 식사와 술을 즐기고 나가면 문제없는 일이다. 공연한 호기심이 제 수명을 단축시키는 법이다.
‘모른 척하자. 오래 살아서 효도해야지.’
결국 내 선택은 모른 척하기다.
죽엽청주가 나오고 네 명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 정말 맛있는 죽엽청주인데? 무비 너는 어떻게 이런 맛집을 알고 있는 거냐?”
“요리도 나쁘지 않아.”
팽씨 남매는 신나게 술과 요리를 즐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머리 속이 복잡해서 차분하게 즐기는 것이 쉽지 않다.
“무해야, 너 특례입학 정보를 알고 있었잖아.”
“응. 그래서?”
특례입학 정보를 알고 있을 정도라면, 어쩌면 다른 정보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 오늘 낙양에 무슨 귀빈 방문이나 주요인물 같은 사람이 모인다거나 그런 일 있냐?”
“오늘? 주요인물? 귀빈 방문 같은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래? 내일 백정학관 입학일인데, 오늘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아, 내일이 입학일이면 오늘 그분들이 모이겠네.”
팽무해가 뭐가 생각난 모양이다.
“그분들? 누구?”
“교관들. 중원 각지에서 교관을 초빙했다고 하더라. 반 년 동안 우리를 가르칠 교관들이 오늘까지 백정맹으로 모일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 모여서 학과 교육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백정학관 교관이 백정맹 사람이 아니었어? 보통은 교무각 사람들이 가르치잖아?”
수라검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백정맹의 각 조직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잘 안다. 교무각은 백정맹의 모든 교육을 담당한다. 백정맹 소속 직원의 업무 교육을 비롯해 숙수, 재단사, 시비 같은 직업군의 직무교육, 백정맹 출입자에 대한 보안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이 모두 교무각 담당이다. 학관의 학과 교육도 교무각 담당이고, 대개의 학관 교육은 교무각에 소속된 교관들이 담당한다.
“응. 단기간에 개천혈교에 대항할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 교무각의 교관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거지. 중원 각지에서 가장 실력 있는 무인을 교관으로 초빙했다고 하더라고. 일종의 외래교관이나 객원교관 같은 거지.”
외부에서 초청한 교관이라고? 혹시 오늘 일이 그것하고 관련된 것인가?
내 느낌이 둘 사이에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방향으로 흐른다. 진살막이 출동할 정도라면 결코 만만치 않은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 명도 아니고 적지 않은 살수가 출동할 정도라면 대상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고수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교관으로 초빙된 여러 명의 고수들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뢰대상이 엄청난 초절정고수이거나.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본다.
‘개천혈교에서 백정학관 지원자를 살해해 지원자를 포기하게 하려던 계획은 나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어. 그래서 이번에는 교관을 죽여서 교육에 차질을 빚게 한다는 계획? 놈들로서는 백정학관의 교육을 연기만 시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거잖아. 지옥혈왕이 백정맹의 방해를 받지 않고 준비를 할 수 있는 기간만 벌어도 되니까. 흠,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야.’
개천혈교에서 동원한 일류 살수 여섯이 내 손에 죽었다. 개천혈교에서 준비한 살수는 모두 죽은 상태. 그래서 낙양에서 동원 가능한 살수를 이곳 살수의 거리에서 수배해서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 도착하는 교관들이 백정맹에 들어가면 암살 기회를 잡기는 불가능해지니, 백정맹에 들어가기 전에 살해하려는 것일 수도.’
단순한 가정에 불과하지만 이곳 낙양 살수의 거리에 관한 경험이 있는 내 추론은 어쩌면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술과 음식을 즐긴다.
“무비야, 여기 술도 좋고 음식도 좋은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애. 뭔가 살기가 느껴지는 곳 같아.”
팽유진은 주변 손님들에게서 살기를 느꼈는지 얼굴을 가까이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분위기는 좋지 않지. 그래서 사실 여자들이랑 올만한 반점은 아니야. 비취하고 왔을 때도 잘못 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비취가 다시 오자고 할 줄은 몰랐지.”
“일단 여자는 우리 둘밖에 없잖아. 그리고 손님들이 전부 무인 같아. 다 칼을 차고 있어.”
제대로 봤네. 팽유진이 의외로 관찰력이 있네.
사실 이 반점 손님 중 반 이상이 살수니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다.
‘저건?’
점소이가 나오더니 주머니에 꽂아둔 종이를 교체한다. 네 개의 주머니가 붉은색 종이에서 검정색 종이로 교체된다.
‘네 명이 실패했다는 소리잖아?’
외상판은 의뢰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상황판 노릇도 했다. 10여 명이 의뢰를 받았는데, 네 명이 검정색 종이로 교체되었으니 네 명은 의뢰 수행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살수에게 의뢰 실패는 사실상 죽음이나 다름 없다. 아마도 네 명은 죽거나 회생불능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대상이 누구기에 살수 네 명이 실패한 거지?’
하긴 살수가 다수 동원된 것만으로도 의뢰대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상황판의 종이색이 바뀌자 진가반점에 있는 손님들의 눈빛과 분위기가 다시 바뀐다. 모두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 네 명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의뢰대상이 꽤나 강력한 고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마 동시에 네 장이 검정색 종이로 바뀌는 경우는 살수들도 자주 보지 못 하는 상황일 것이다.
탁자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의 표정이 바뀐다. 외상판의 주머니에 꽂힌 종이의 색깔 변화에 따라 아직 의뢰를 받지 않은 살수들의 표정들이 바뀌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팽씨 남매는 그저 술맛에 감탄할 뿐이다.
“이야, 여기 죽엽청주는 끝내준다.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
“오빠, 여기가 분위기는 별로인 것 같아. 자주 올 곳은 못 되는 것 같아.”
“응? 그래? 그럼 너는 빠지면 되지. 나랑 무비랑 오면 되지.”
“유진아, 나중에 오고 안 오고는 나중 일이고. 일단 오늘은 즐겨야지. 우리의 백정학관 입학을 축하해야지.”
“맞아. 일단 오늘은 축하주를 마시는 거잖아. 오늘은 즐겨야지.”
당비취와 팽유진은 백정학관 입학 축하주라는 말에 다시 흥을 올린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
“응? 왜? 오늘처럼 좋은 날 왜 술을 적당히 마셔?”
내가 약간의 충고를 하자 당비취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에 들이댄다.
“무인은 항상 적의 습격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야. 어제처럼 오늘밤에 또 누구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잖아. 맹 밖에서는 조심해야 해.”
“아, 맞다. 무비 말이 맞아. 반점 나가자마자 놈들 공격을 받은 적이 있지. 알았어. 적당히 마실게.”
오늘의 분위기를 감안해서 한 말이지만 이미 한 번 습격을 당한 당비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진가반점을 나서는 네 사람.
“들어가. 내일 입학식에서 보자.”
“응. 오늘 즐거웠어.”
세 사람이 백정맹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낙빈루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백정맹에서 좀 떨어진 거리를 지나는데 감지되는 소리.
‘병장기 소리? 백정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진가반점에서 봤던 풍경이 떠오르면서 호기심이 발동된다.
‘빌어먹을 호기심은 수명을 단축하는 길이라는데. 그래도 궁금하잖아.’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 챙─ 채채챙─
소리는 이동하고 있었다. 도주를 하면서 전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마침내 도착한 현장.
한 명의 무인을 두고 세 명이 공격 중이다. 딱 봐도 세 명은 살수들이다. 복장이나 무기 초식이 살수다.
그리고 그들 세 명에게 포위당한 상태로 대응하고 있는 한 사람.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의 눈빛은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수라검신 때 봤던 한 청년의 모습을 떠올린다.
‘저 인간이? 설마 저 인간이 이번 백정학관의 교관으로 초빙되었다는 건가?’
중년이 되었지만 젊은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내.
“헉헉! 놓쳐서는 안 된다. 저 자가 백정맹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복면을 썼지만 소리 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진씨였다. 진살막의 막주인 진살숙수!
‘저 친구가 백정맹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거잖아. 맞네! 저 친구가 백정맹 교관으로 초빙된 것이. 백정맹주,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백정맹에서 저 친구를 교관으로 초빙하다니.’
나는 백정맹 맹주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수에게 쫓기고 있는 사내는 백정맹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