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10화 >
“아유, 강현 학생. 내가 청소해도 되는데.”
세탁물을 수거하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깨끗하게 청소된 방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남에게 속옷 세탁을 맡기겠는가. 지난 삶까지 합치면 이미 오십 줄이다. 하지만 가정부 아주머니는 여전히 미안해하는 모습. 강현이 기특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도 들 테였다.
“아주머니, 저희 집 세탁소 하시는 거 아시죠? 제가 청소랑 세탁안하면 몸이 좀 쑤셔서 그래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강현의 말에 도리어 가정부 아주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오랜 세월 할아버지 집에서 가정부 생활을 해온 아주머니. 당연히 어머니와도 알고 지냈던 세월이 있을 터. 아주머니는 이내 소매로 눈가를 훔치곤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강현 학생,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아줌마한테 말해요.”
마치 아들을 대하듯 아주머니는 살갑게 대해주셨다.
“강현 학생, 아침 먹어요.”
식사 때마다 식탁 위를 가득 매운 음식들을 보고 있자면, 지난 삶이 생각났다. 사법연수원을 다닐 시절 이따금씩 지방에 내려갔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들을 장만하셨지. 하지만 난 항상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어머니의 정성을 외면했었다.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할아버지는 슬쩍 자신의 앞쪽에 있던 고기반찬을 들어 내 앞으로 옮겨주었다.
“많이 먹거라.”
할아버지는 짧은 말 한마디를 하시곤 식사를 계속하셨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아주머니가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각각 한 잔씩 쟁반에 담아 내오셨다. 할아버지를 위한 조간신문은 당연 필수였다.
“현아,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갑작스런 할아버지의 말에 난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외식이라면 굳이 따로 말씀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설마.
‘오늘이 그날이구나.’
재벌 삼대가 초청받는 연회.
재벌가문의 비사로만 전해지던 모임. 대한민국 재벌그룹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인다고 보면 되었다. 그중에서도 창업주들을 제외하곤 전부 기업의 후계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이들이었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사람들이 모이는 것. 지난 삶 재벌가문을 곁에서 봐왔기 때문에 그리 썩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궁금했다. 과연 전설로만 전해지는 연회는 어떠할지.
“현아, 오늘은 할애비랑 회사에 갈 거니 채비해라.”
“예?”
난 오렌지 주스가 사례 들릴 뻔한 것을 삼켜내곤 되물었다.
“욘석, 뭘 그렇게 놀라는 게냐. 일전에 현이 네가 말하지 않았어. 화학이 앞으로 미래화 산업의 재료가 될 거라고 말이지. 그토록 화학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다면 애진즉 회사구경을 시켜줄걸 그랬어.”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등에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땀방울이 맺혔다. 화학에 관심이 많았던 대학시절 들었던 교양과목을 토대로 나름 생각을 밝혔던 게 할아버지께는 특별히 다가왔나보다.
* * *
동주(垌州)
동주화학의 공장부지는 재벌그룹의 계열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괜히 대한민국 화학산업의 선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사회공헌활동의 차원으로 중고교생들의 견학 프로그램도 마련하셨는데 이 덕분에 유능한 인재들이 동주로 모여들기도 했었다. 80년대부터 이러한 활동을 하셨으니 대단하다고 밖에 설명되지 않았지.
“회장님, 오셨습니까.”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서둘러 나와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뒤로는 임원들도 함께였다. 삼촌들이 할아버지와 함께 온 나를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허나 할아버지한테 들킬세라 이내 표정을 수습해 보였다. 하지만 난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지. 어린 조카한테 저토록 위협을 느낄 줄이야, 모지리들.
“현아, 저 곳에 어떤 공장들이 들어설지 아느냐?”
할아버지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토목공사가 한창이었다. 언덕을 깎아내고 지반을 골라 평지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지난 삶 동주화학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지. 도대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갔기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채 오 년도 지나지 않아 외국계자본에 흡수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아마 지금쯤이면.
‘회로소재, 감광제, 편광판들을 만들 공장이겠구나.’
할아버지는 훗날을 예견하시고 전자제품의 부품소재 공장을 만드시는데 박차를 가하셨다. 당연히, 훗날을 생각한다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저 욕심과 무지로 똘똘 뭉친 삼촌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저 공장들을 매각했다고 들었다. 당장에 사업수익이 안 나와서 연구를 포기한 것이지. 이런 바보 천치들이 또 있을까.
“으음. 미래화 산업?”
부러 자세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손자가 디스플레이 원재료를 알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괜히 할아버지에게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
“그래, 맞다. 앞으로 저곳을 시작으로 동주는 새로운 날개를 펼쳐나갈 것이야.”
할아버지는 그 정도 대답으로도 심히 만족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뒤편에 서있던 삼촌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유전무. 자네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화학산업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갑작스런 할아버지의 부름에 큰삼촌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신에게 질문을 할지는 몰랐던 모양. 뒤따르던 임원들이 걸음을 멈춘 채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고부가가치 산업에 중점을 맞춰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회장님께서 추진하신 디스플레이 소재 공장신설은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부가가치라, 화학에서 고부가가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하나?”
마치 수수께끼를 하듯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큰삼촌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사적으로 만나도 무서운 아버지를 공적인 자리에서 이토록 대면할 때면 어린 아이가 된 것 마냥 머리가 멍해지곤 했다.
“아, 아무래도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선발해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덩달아 작은삼촌조차도 긴장을 하는 게 보였다. 임원들 또한 침을 꼴깍 삼키고 있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도대체 대학에서 뭘 배웠기에 할아버지의 질문에 저토록 일차원적인 답변을 내놓는 거지? 아무리 주먹구구식 경영이 횡행했던 90년대이지만 전무자리에 까지 올라간 사람이 저토록 어버버 거려서야.
그때 할아버지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강현이 너는 정답을 알고 있느냐라는 물음 같았다. 난 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정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화학은 다른 산업과 캐시카우가 다르니.’
애초에 전자, 자동차 산업과는 궤가 다른 화학산업. 매번 새로운 제품을 발매하고 공장컨베이어를 신축하는 기존산업들과는 달리 화학은 기초소재를 토대로 미래 산업의 기틀을 계속해서 쌓아올린다. 한 마디로, 기존의 인재들을 육성하는 것이 새로운 인재를 창출하는 것보다 훨씬 필요했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지난 삶 제일그룹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법무팀에서 봐왔던 비사들 때문이었다. 훗날 제일그룹은 당연히 케미컬기술에도 손을 미쳤는데, 당시 경쟁그룹 화학공학자들을 데려오기 위한 스카웃 전쟁이 장난 아니었지. 총성 없는 전쟁터라고 들어봤는가, 내가 바로 그 한복판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큰삼촌을 한번 흘겨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큰삼촌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고, 작은삼촌은 자신에게까지 질문이 돌아오지 않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거 같단 말이지.’
작은삼촌의 뒤편에 서있는 임원하나가 유독 눈에 익네.
* * *
“현아, 할애비 방이 어떠하냐.”
할아버지는 손수 회장실을 안내해주었다. 다른 기업들의 회장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정도로 소박했다. 크기가 작다는 것이 아니다. 책장에 손 떼 묻은 책들하며 오래된 책상,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지는 소파까지. 할아버지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오래된 책상위에는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족들 사진이었다. 특히,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들고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역시,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시는구나.’
회장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현아, 경영이라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진중한 얼굴로 물으셨다. 이거이거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래도 종전 큰삼촌의 미덥지 못한 대답 때문에 할아버지도 많은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뭐라고 답해야할까.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거 아니에요?”
간단한 대답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14살 소년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대답이기도 했다. 난 사업에 그다지 큰 욕심이 없었다. 이미 지난 삶 허영이 가득했던 시절을 보냈지 않는가, 또다시 물욕과 권력에 집착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할아버지.”
그래도 과거를 바꿀 수만 있다면 단 한 가지는 바꾸고 싶었다.
“지난번에 유하 할아버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분에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이라고요. 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큰삼촌과 작은삼촌은 전무자리 조차 분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동주화학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훗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것이 옳았으니.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다.
“우리 현이가 나이가 많았으면 정말 좋았겠구나.”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때 내 시선을 잡아끄는 물건이 보였다.
“할아버지, 턴테이블이네요?”
과거에 사용되었던 LP턴테이블. 카셋트 테이프와 CD의 보급으로 인해 구시대의 문물로 사라졌던 물건이다. 비록 수십 년 전의 과거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턴테이블을 사용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아마 미사리 쪽 라이브카페에 가면 있지 않을까.
“현이가 턴테이블을 아는구나, 여기 LP판도 많단다.”
할아버지는 턴테이블 옆의 서랍을 열어주셨다. 그 안에는 LP판이 가득 차 있었는데 하나같이 먼지한 톨 없이 깨끗히 정돈되어 있었다.
“할애비는 이곳에서 음악을 즐겨듣는단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현이 LP판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할아버지는 수많은 목록 중 LP판 하나를 집어 드셨다. 앨범 자켓에 글귀하나 없는 푸른색의 무지였다. 무슨 노래일까 궁금해 하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위에 LP판을 올려놓았다.
툭.
턴테이블의 톤암이 LP판의 나이테와 닿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날로그적인 모습에 잠시 시선이 빼앗겼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선율에 정신이 차려졌다. 차분한 바이올린의 선율과 피아노 건반소리.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1악장.”
어찌 보면 악성樂聖 베토벤의 개성이 잘 묻어나오는 바이올린 곡. 상쾌하고 달콤한 음률이 귓가를 간질이듯 파고들고 바이올린의 선율과 피아노 반주가 조화를 이룬다. 서로가 마치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듯 빨라지고 느려지고 템포를 함께한다. 마치 개나리가 피어오르고 얕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씨를 보는 듯하네.
허나.
‘전문가는 아니구나.’
피아노 건반이 바이올린을 따라 가주고 있었다. 미묘한 차이. 바이올린의 선율이 느려지고 박자가 엇나갈 때마다 피아노가 귀신같이 그 빈자리를 매꾼다. 현격한 실력의 차이가 있으면 발생하는 현상. 그러나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어지간한 바이올리니스트의 봄과 비교해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능숙하다.
연주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곡명을 알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신 모양.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였지만 클래식에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14살의 아이가 곡명을 알기는 힘들었으니. 혹시 이 곡을 누가 연주했는지도 알까.
“이 연주.”
꿀꺽.
“어머니가 하신 거죠?”
할아버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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