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07화 >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곡을 연주해도 될까요?”
손선예의 얼굴이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 마냥 활짝 피었다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작은 성당에 준비된 바이올린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아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
피아노 의자에 앉자 의문스러운 눈길이 쏟아졌다. 나를 모르는 이도 있는 반면 왕회장과 할아버지의 눈빛은 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과연 내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연주할지 의문스러운 모양. 조심스럽게 건반덮개를 벗겨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피아노다. 허나 성당에서 관리를 잘해온 것인지 조율은 물론 백건반과 고음구간의 건반들의 깊이가 일정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실을 맺는 날입니다. 화창한 봄날의 날씨만큼이나 너무도 멋진 날 두 분의 앞날에 행복한 나날만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는 날도 있겠지만 두 분이 함께라면 걱정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부족하나마 제가 한 곡 올리겠습니다.”
사실 두 분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 손선예가 임신 중이었으니까. 훗날 일반인과 결혼한 것도 모자라 속도위반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재계에서는 유명했으니. 아무렴 어떤가, 하물며 그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장차 유명인이 되지 않는가. 이름이 나와 같아 더욱 기억에 남는다.
‘새 생명을 위해.’
레지에로, 팔의무게를 유지한 채 건반 위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예민해진 감각을 타고 흘러간 신호가 피아노 내부의 해머를 움직여 현을 때린다. 첫 음절에 좌중의 시선이 모아졌다. 때로는 예민하게 달궈진 손가락 끝이 건반을 짚고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마치 어린 아이의 발걸음처럼 경쾌하며 가벼운 손놀림. 그때였다.
레가토, 음악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손가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각 음과 음 사이를 연결하듯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아주었다. 피아노가 환호하듯 아름다운 선율을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점차 손가락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88개의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하는 움직임에 청중들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흑건으로 이루어진 무대 위에서 기다란 거미가 화려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리라.
‘한 번 더―!’
손가락이 마치 튕겨지듯 경쾌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매끄러운 이완에 마치 건반을 눌렀는지 안 눌렀는지도 모를 정도. 시원하게 부는 여름날의 바람 앞에 잔잔한 아이의 웃음소리처럼 느껴진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감각이 팔꿈치를 지나 손톱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달리듯 종착역에 다다른 손끝이 마지막 선율을 울리자 청중들의 눈가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마도 마지막 찰나 귓가를 파고든 선율 때문일 것이다.
“남은 연주는 앞으로 두 분께서 만들어 가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여백을 남기듯 연주를 하며 마지막 부분을 남겨두는 것이었다. 진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 새로운 생명의 웃음소리를 위해.
*
“현이는 우유로 주랴?”
어째 이제 내 입맛까지 알아버린 왕회장이었다. 피로연을 끝마치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평창동 대저택이었다. 하지만 응접실에 초대를 받은 인물은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손유하가 전부였으니 왕회장의 자식들은 닭 쫓던 개 마냥 마른 입술을 쓸어야만했다.
“어찌 보면 유회장, 내 자식들도 자네 자식들과 다르지 않구만. 식을 하는 와중에도 서로 견제를 하며 시선을 교환하지 않던가.”
아무렴, 재벌가의 후계경쟁은 총성 없는 전쟁터라고 하지 않는가. 특히나 왕회장의 삼남 손홍원의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 왕회장의 눈밖에 난 것도 모자라 사업수완조차 없어 일평생을 백수로 사는 인물이었으니. 이번 결혼식에서 무슨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요량인지 왕회장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하지 않던가. 할아버지는 그 모습에서 분명 작은 삼촌의 모습을 느꼈으리라.
“손가, 자네는 그래도 그 모두를 아우를만한 인물이 있지 않아.”
“그래, 다들 내 눈치보다도 일선이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더군. 나는 저물어가는 태양이라는 게지.”
왕회장의 입가는 말과는 다르게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것도 그럴 것이 뚜렷한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던가. 만약 손일선이 없었더라면 정말 형제의 난을 방불케 하는 후계경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데 할아버지가 은연중에 나를 슬쩍 바라보는 것은 왜일까.
왕회장은 나와 손유하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후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달리 보면 손유하를 손일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런데 현아, 언제부터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던 게냐?”
그 순간 왕구렁이 영감님이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불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왕회장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손유하 또한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 중 네가 바이올리니스트인 걸 모르는 이들은 현이 널 이름난 피아니스트 신동쯤으로 생각하더구나. 할애비도 감쪽같이 속을 뻔 했지 않느냐. 원래 음악가들이 모든 악기에 능통해야한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연주곡이 아주 좋더구나. 도대체 곡명이 무엇이더냐?”
봄의 왈츠를 닮은 자작곡이었다. 이미 작업실에서 수많은 악보를 봤던 손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했지만 할아버지와 왕회장은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설마하니 내가 피아노곡까지 자작곡을 만들어놨을지는 몰랐던 모양.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곡명도 없이 단순히 넘버링만 한 곡이었다.
“영감탱이, 그거 아는가. 선예가 이번에 낳을 아이 이름을 오늘 정했다고 하더군.”
“손가, 선예가 임신을 했었나?”
“내 참 정신이 없어서 말 못했구만 그래. 남들 입에 오르내리면 흉이될까싶어 말을 삼가다 보니 자네한테까지 비밀로 한 셈이 되었구만. 벌써 삼 개월이라네.”
토끼눈이 된 것을 보아하니 유하도 몰랐던 모양. 결혼식장에서는 품이 넓은 웨딩드레스 덕분인지 전혀 티가 나지 않았으니.
“선예가 아이 이름을 ‘현’이라고 하겠다고 하더군. 식장에서 현이를 보고는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야.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장차 강현이처럼만 컸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영감탱이, 우리 장녀의 꿈이 너무 큰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구렁이 영감님이 바라마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아이이니. 우유 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현아 이번에 여는 네 독주회의 후원기업이 어딘지 아느냐?”
“제일그룹 아니에요?”
“그래, 바로 할애비 회사다.”
제일재단 산하의 갤러리에서 소속되어있다 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왕회장의 주름진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 스며드는 것이었으니.
“시간 괜찮을 때 할애비 회사에 한번 들리거라.”
“네?”
“왜 오기 싫으냐? 후원하는 기업이 어떤 곳인지는 한번 봐야하지 않겠어?”
싫다기 보다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난 삶 그토록 갈구했던 제일그룹이지 않았던가. 한때 충성을 다했던.
* * *
“상쾌한 공기―!”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백인 여성이 두 팔을 창공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비즈니스석이긴 했지만 오랜 비행에 온몸이 구겨진 종이만큼이나 찌뿌둥했다. 그라모폰의 편집장 샤론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찾다 아직 공항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도 애덤과의 내기에서 졌으면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야. 그나저나 설마 그 꼬맹이가 바이올리니스트 현이었을 줄이야.”
샤론은 일전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찾았던 것을 떠올렸다. 이름 모를 레스토랑에서 아주 맹랑한 꼬마를 만나지 않았던가. 벌써 3년 전의 이야기다.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했다.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 또한 극찬을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제 독주회를 연다고 하니.
금발의 미녀가 걸음을 옮기자 수군거리던 공항이 삽시간만에 조용해졌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까지 힐끔힐끔 샤론을 쳐다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샤론이 걷는 곳이 곧 런웨이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또각.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하이힐 소리만이 공항에 울려 퍼졌다.
“다 왔습니다, 손님.”
“고마워요, 미스터 택시.”
친절한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갤러리였다. 예민한 음악가의 작업실이라고 보기에는 특이한 곳이었다. 하물며 듣기로는 갤러리의 주인이 아시아의 부호라고 하지 않았던가. 바이올리니스트 현조차도 로열가문의 일원이니 이해가 되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갤러리의 여직원이 샤론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외국인이 종종 방문하기는 했지만 이토록 모델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 햇살에 반사되어 출렁이는 금발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으니. 하물며 이곳은 초대장이 없고서야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만나러왔습니다.”
샤론이 영국식 발음으로 현을 만나러왔다고 전하자 곧장 갤러리 안쪽에서 또 다른 여직원이 나왔다. 그녀는 샤론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능숙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임혜라 갤러리의 직원 김미현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바이올리니스트 현은 잠시 외출중입니다. 어떻게 전해드리면 될까요?”
여직원의 물음에 샤론은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벗으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여직원의 눈이 크게 떠졌을 정도.
“시끄러운 아줌마라고 전해주세요.”
*
물길을 거슬러 고향을 찾아온 연어가 이러한 느낌일까. 지난 삶 서초동 제일그룹 본사에 들어서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던가. 권력과 물욕에 사로잡혀있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갈 즈음이었다.
“음, 어떻게 왔니?”
로비를 안내하는 여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아무렴,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모습이라서 그렇지 잡상인처럼 보였다면 여직원이 아니라 경호원이 출동했을 것이다. 난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왕회장이 가르쳐준 대로 말했다.
“강현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그 순간 여직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곧장 데스크로 가서 인터폰을 하는 것은 물론 방금 전 친누나처럼 다정하게 굴었던 모습을 감쪽같이 지워낸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로비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었으니. 누가 보면 제일그룹에 아주 중요한 바이어가 온 것 같았다. 도대체 왕구렁이 영감님이 뭐라고 지시를 내린 거야?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전과 별다를 바 없는 본사의 구조였다. 물론 지난 삶에서는 건물이 증축되고 좀 더 세련되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이다. 직원이 바짝 긴장한 채로 나를 안내해주는 것이었으니. 정글이라고 표현할 만큼 거대하고 미로라고 생각될 만큼 복잡한 제일그룹 본사였지만 난 눈을 감고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훤한 곳이었다.
‘이리로 가면 분명.’
그제야 직원이 왜 이렇게 긴장을 머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같았으니.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히 느껴질 때가 있다. 상관을 찾아 갈 때면 추운 날에 몸이 쪼그라 드는 것처럼 이유 없이 긴장되니. 하물며 이 거대한 제일그룹의 차기 주인이 될 사람이 있는 곳이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구나, 현아.”
손일선 사장과 이토록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지난 삶에는 있었지만 그때는 감히 눈조차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더랬다.
“회장님께서 현이 네가 회사를 견학해보는 것을 추천하시더구나. 동주에 왔다고 생각하고 마음껏 구경하라고 말이야.”
도대체 왕회장이 무슨 생각인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쉽사리 판단하기 힘들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었으니. 손일선이 형형한 안광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이 시간이 지나고 벼려지다 보면 왕회장 못지않은 호랑이가 될 것이다.
“현아, 어느 부서를 가장 가보고 싶으냐?”
지난 삶에 연이 닿은 법무팀을 가고 싶냐고? 아서라, 추억이 깃든 물건도 없는데 그곳을 가서 뭣하겠는가. 사실 제일그룹을 다닐 적 가고 싶은 곳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왕회장이 만들었고 손일선이 완성시킨 곳, 제일그룹의 두뇌라 불리는 곳.
“전략기획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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