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08화 >
“어떻게 오셨습니까?”
중절모를 쓴 노신사였다.
“내 며느리를 좀 보러 왔소만?”
“네?”
갤러리의 여직원은 의아스럽게 반문했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노신사의 얼굴을 알아본 다른 직원이 황급히 뛰쳐나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회장’이라는 말에 처음 응대했던 직원의 턱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장난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왕회장이 있었다.
“아버님, 왜 최비서랑 함께 오시지 않으셨어요?”
“에잉, 내가 어린애도 아니거늘. 한 번씩 이렇게 혼자 오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아버님도 참, 아마 지금 쯤 신입직원 가슴이 철렁했을 거예요. 미현 씨가 금방 아버님을 알아봐서 그나마 다행이죠.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신입직원 놀리셨을 거 아니에요?”
왕회장은 애써 부정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하나같이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는 갤러리였다. 왕회장은 순백의 도화지에 푸른 점이 찍힌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걸 현관에 걸어두면 좋겠구나.”
“아버님은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십수 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이었지만 왕회장은 마치 동네마트를 나온 것 마냥 이것저것 골라댔다. 제일재단 산하의 갤러리였으니 어찌 보면 왕회장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앞으로 재단을 맡아서 하고 싶다고?”
“예, 아버님.”
왕회장은 자신의 며느리가 마음에 들었다. 포부가 상당했다. 제일재단을 맡는 것은 제일그룹의 자금줄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 욕심만 많고 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후안무치한 것이지만 능력 또한 출중하지 않은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미 대장부의 역할을 하고도 남았을 며느리였다.
“오늘 현이가 서초동에 간 것은 알고 있지?”
“예, 아버님. 헌데 현이를 왜 서초동에 보내신 것인지요?”
“어떠한 그릇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직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느냐.”
수십 개의 계열사는 물론 수많은 직원을 거느린 제일그룹이었다. 그 실체를 두 눈으로 직면했을 때 보통사람 같으면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방금 전 일선이에게 연락이 왔단다. 현이가 가장 먼저 어디를 가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
“경영기획부서가 아닐까요?”
“그 정도라면 내 놀라지도 않지. 전략기획실로 가자고 했다는구나.”
왕회장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전략기획실이 어딘가, 제일그룹의 실질적인 두뇌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니. 제일그룹 내에서는 공공연하게 비밀에 부쳐진 부서였다. 과연, 그곳에서 강현이 어쩐 모습을 보일까. 왕회장은 몹시도 궁금했다. 그때였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울꼬.”
바깥에서 웬 영어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왕회장과 임혜라가 함께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김미현과 모델 뺨치는 백인 여성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
‘오랜만이네.’
낡고 바랬지만 훗날과 다름이 없는 구조였다. 제일그룹의 본사는 건설부터 사내구조까지 왕회장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듣기로는 풍수지리는 물론이고 용한 점쟁이가 부서위치를 짜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일까, 조직개편을 하더라도 부서가 이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음.’
여기서 좌측 귀퉁이를 지나 걸음을 옮기면 경영지원부서가 있을 테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경영기획팀이 나올 것이다. 지난 삶 총무 쪽 직원들과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복지지원을 비롯해 돈이 나오는 구석이었으니. 말만 잘해봐라, 비행기 좌석이 비즈니스에서 퍼스트로 바뀌는 건 일도 아니다.
“현아, 혹시 여길 와본 적이 있니?”
아차, 나도 모르게 옛 기억에 들떠서 걸음을 옮겼나 보다. 손일선 사장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나는 에둘러 고개를 저어보이며 들뜬 발걸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손일선 사장은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다. 그나저나.
‘전략기획실이라.’
지난 삶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아닌가. 마치 네바다 주 모하비사막의 51구역처럼 제일그룹 내에서 가장 신비스러움을 담당했던 곳이었으니. 것도 그럴 것이 이들의 얼굴을 자주보기도 힘들 뿐더러 다른 직원들과는 말조차 섞지 않았다. 하물며 전략기획실에는 신입직원자체가 없었다.
대부분 경력직이라 말단이 없는 특이한 부서, 사내에서 떠돌았던 풍문에 의하면 평범해 보이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기무사 대령출신이라거나 전략기획실은 미연방준비은행 출신들이 꽉 쥐고 있다는 말까지. 51구역에 외계인이 있다는 소문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때마침 기획실장이 보고를 하는 날이라 다행이구나.”
처음 찾은 전략기획실이었다. 부서가 어디쯤 위치한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안은 단 한번도 들여다보지 못했으니. 그래서인지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법한 첨단장비들이 설치되어 있다거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게다가 아직은 90년대이지 않은가. 그래도.
‘대단하기는 하네.’
손일선이 찾아왔음에도 전략기획실은 여전히 분주했다. 사원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눈빛이 범상치 않았으니. 아무렴, 웬만큼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손일선 사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기획실장을 보고는 놀람을 속으로 삼키느라 애썼다. 그는 나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난 삶 삼선의원이었던 장인 밑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을 준비할 때 자주 봤던 인물이지 않은가. 각진 턱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 왜 놀랐냐고? 당시 국무총리가 바로 이 양반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대한과 대성그룹, 그리고 준비된 시안에 기재된 외국계 기업들에 대한 향후 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평범한 프레젠테이션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앉아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으니. 손일선 사장을 비롯해서 정체모를 임원들까지. 발표하는 사람 또한 전략기획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기획실장이 아닌가. 교복을 입은 나도 한자리 꿰차고 앉았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손일선 사장과 함께했기 때문에.
‘대단한데.’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될수록 난 속으로 감탄을 연거푸 터뜨렸다. 전략기획실의 명성은 귀가 닳도록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현 정부와 차기 정권이 재계서열 선두권에 위치한 대한과 대성을 과감히 버린다는 것은 물론 미래에 벌어질 시황들을 마치 점치듯 풀어내고 있었으니. 하물며 외국계기업들에 대한 장래평가도 상당수 내가 아는 것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현아, 네 생각은 어떠하니? 김상국 실장의 말이 전부 맞다고 생각하느냐?”
그때 손일선 사장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회의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난 손일선 사장이 내게 왜 이렇게 질문을 해오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기획실장의 얼굴에는 의문스런 기색만이 가득하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제가 생각하기에 전부 맞지는 않아요. 먼저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외국계 기업들의 장래평가에 대해 하나씩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LAS사의 장래평가에 대해 투자대상으로는 낙제점을 주셨는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간과하신 점이 있거든요.”
내 반문에 기획실장의 얼굴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손일선 사장이 말없이 진중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었기에 기획실장 또한 곧장 표정을 지워내고는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론을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의 내용만 보자면 인텔리겐치아의 토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이제 회의실 내의 다른 임원들은 아예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손일선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획실장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묘하게 왕회장의 시선과 닮아있었으니. 날카로운 눈매 속에 욕심이 가득했다.
“이 학생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내용을 미리 공부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이 정도라면 과장을 더해 전략기획실로 영입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김 실장, 외국계기업에 대한 투자 초안을 회장님께서 직접 김상국 실장에게 전해 주었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 순간 손일선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기획실장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 아무렴 그렇다고 어떻게 내입으로 직접 말할 수가 있겠는가. 외국계기업에 대한 투자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을.
* * *
“누나, 괜찮아요?”
내가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업무에 시달렸던 것인지 김미현의 얼굴이 족히 수 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만의 황금연휴를 앞둔 오늘 때 아닌 손님들이 들이닥쳤기 때문.
“참, 현아. 너를 만나러온 외국인도 있었어.”
“외국인이요?”
“다리가 엄청 길다란 게 슈퍼모델 같은 여성분이셨는데 명함도 주지 않고 돌아가셨어, 시끄러운 아줌마가 왔다갔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
시끄러운 아줌마? 금시초문이다. 처음에는 러시아의 안나가 한국에 와서 나를 찾은 것인 줄 알았는데 모델을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안나가 비율은 좋을지라도 모델을 하기에는 키 적인 부분에서 부족하니.
“그리고 손님 한 분이 현이 너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 꽤 화가 난 모양이던데?”
“손님이 또 있다고요?”
김미현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누구인지 말해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대충 누구인지 예상은 가는데.
“오빠아―!”
아니나 다를까,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고양이가 나에게 푹 안기는 것이었으니. 손유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이제는 내가 조금 더 키가 컸다. 곧이어 새침데기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손유하였다. 얼음여왕이 저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미안해, 오빠가 유하 한국에 있는 동안 자주 만났어야하는데 요즘 좀 바빴지?”
독주회 준비 때문에 바쁘기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어쩌다 보니 한국과 봄방학 기간이 달라 평일에는 학교에 가 있어야 했으니.
“알면 됐어, 괜찮아.”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손유하였다. 지난 삶에도 그랬듯이 연애에는 젬병이라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풀어줘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때였다.
꼬르륵.
손유하의 뱃고동소리가 크게 울렸다. 뾰루퉁했던 얼굴이 곧장 잘 익은 홍시 마냥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었으니. 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유하의 머리맡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가 저녁 만들어줄게.”
“만들어 준다고?”
암, 이래봬도 자취경력이 꽤 짱짱하다. 하물며 지난 삶 결혼을 하고나서도 외국을 전전하지 않았던가. 안사람이 손에 물을 묻히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고. 갤러리 별관에는 임혜라 이사장이 매일아침 브런치를 즐기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취사가 가능했다.
“맛있지?”
“응―!”
별다른 별미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된장찌개와 계란프라이가 전부였으니. 하지만 손유하는 산해진미를 먹듯 행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언제 삐졌냐는 듯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밥 한 공기를 더 달라고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많이 먹어야 빨리 크지.”
“걱정 마, 곧 있으면 오빠보다 키가 더 클 거니까!”
미안하지만 이 오라버니는 머지않아 폭풍성장을 한단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끝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오빠, 나 바이올린 가르쳐줘.”
“어?”
“나도 다시 바이올린 켜고 있단 말이야. 그때 오빠가 날 위해서 연주했던 곡 나도 연주해보고 싶어.”
그러고 보니 손유하 또한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던가. 난 작업실에 구비된 연습용 바이올린을 하나 내주었다. 허나 손유하가 연주하기에는 꽤나 어려운 악보였으니. 현을 짚는 손가락은 물론 자세 또한 어정쩡하지 않은가.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았으니 이해는 되었다.
“오빠, 나 좀 도와줘.”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교정해 주려는 찰나.
“아니, 뒤에서 손잡고 오빠가 연주하는 것처럼 해줘. 그렇게 하면 빨리 는다고 하던데!”
“뭐?”
손유하가 부끄러움을 참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듣자하니 단순히 바이올린을 켜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도대체 누가 이 아이에게 사랑과 영혼을 보여준 것일까. 헌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퍽 귀엽지 않은가. 난 웃음을 참으며 손유하의 뒤 편으로 걸어가 어깨와 팔을 마주 댔다. 마치 한 몸으로 연주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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