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10화 >
“마실 나가기 딱 좋은 날씨구나.”
햇볕이 쨍쨍한 오뉴월, 평소 같았으면 평창동에서 바둑과외를 진행했을 시각이었지만 지금 손아귀에 잡힌 건 바둑돌이 아닌 골프채였다. 독주회 연습에 매진하느라 바깥바람 쐴 일이 없는 나를 위해 왕회장이 직접 자리를 만든 것이었으니.
“김 실장, 자네 차례야.”
왕회장의 말에 전략기획실 김상국 실장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캐디에게서 골프채를 건네받았다. 얼어붙은 모습이 마치 골프를 처음 하는 사람 같아 보일 정도다. 것도 그럴 것이 왕회장과 함께 가평 컨트리클럽 라운딩을 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하물며 손일선 사장도 함께니 모르긴 몰라도 아마 긴장이 배로 될 것이었다.
‘옛날 생각나네.’
명품 분재는 물론이거니와 진귀한 고목들로만 골라 왕회장이 손수 꾸며놓은 가평CC였다. 지난 삶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나 또한 지금의 김상국 실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제일그룹 내에서는 이런 전설도 있었다. 가평 라운딩을 3번 이상 돌게 되면 어느샌가 임원이 된 자신을 볼 수 있다고. 훗날에는 사내정치와 동아줄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 아닌가. 헌데 도대체 이번 삶에서는 몇 번이나 와 보는 것인지.
“김 실장, 그렇게 투박하게 쳐서야 쓰겠나. 지금 이게 내기 골프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처럼 박력 있게 해보게. 상대편인 나까지 거들고 있지 않은가.”
“예, 회장님 시정해 보겠습니다―!”
“현아, 같은 팀인데 뭐 할 말 없느냐? 이러다가 오랜만에 현이한테 밥을 다 얻어먹게 생겼구나. 흐흐.”
왕회장의 격려 아닌 격려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김상국 실장이었다. 어쩌다보니 부자끼리 한 팀을 이루고 나와 김상국 실장이 같은 팀이 되었다. 왕회장의 홈그라운드인데 밸런스가 너무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아서라, 골프공을 친 짬밥으로 치면 나도 세미프로 못지않았다.
“김 실장님. 제가 한 말씀만 올리자면 드로우를 치실 때는 오른쪽 허리를 좀 더 안쪽으로 빠르게 회전시키세요. 그리고 오른 발을 살짝만 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경직되어 계시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그립 잡는 법부터 다시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사람의 귓가에 말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직된 스윙 끝에 힘없이 날아간 골프공이 홀컵을 찾은 것 마냥 벙커에 빠졌으니. 김상국 실장이 낙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반면 왕회장의 입가에는 함박미소가 피었다.
“현아, 이걸 어째 진퇴양난이구나?”
마치 바둑과외에서 당했던 수모를 갚아주기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모습이지 않은가. 애초에 바람을 쐬자며 가평에까지 나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함께 팀을 이룬 김상국 실장은 전략기획실에서의 모습은 어디간것인지 골프장에서는 영 숙맥이나 다름없었으니.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운동을 잘할 것처럼 생겨서 구기 종목에는 영 손재주가 없는 사람들 김상국 실장이 딱 그런 과였다. 하지만.
“걱정 마십쇼.”
이럴 줄 알고 계속해서 손과 손목을 계속해서 풀어주었다. 골프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마추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벙커샷인데 반해 프로들은 벙커샷을 어프로치보다 간단하게 생각한다고. 마치 바이올린을 쥔 것처럼 물 흐르듯 스윙자세를 잡자 클럽페이스와 내 시선이 마주했다. 힘을 빼고 회전하는 것 같았지만 웬걸.
팟―!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골프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
꼬르륵―!
노릇노릇한 닭갈비 냄새가 뱃고동을 자극한다. 어째 가평에서 라운딩을 돌고나면 꼭 찾는 곳이 이 닭갈비집이었으니. 오늘도 역시 맛은 끝내준다.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법무관 시절 강원도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정한 닭갈비가 여기있었노라고.
“에잉, 현이 한테는 못 당해내겠구나. 오랜만에 김 실장 덕분에 현이에게 밥을 한 끼 다 얻어먹나 싶었는데 말이야.”
김상국 실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손일선 사장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함께 라운딩을 몇 번 돌아본 적 있었으니 내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마음만 먹으면 18홀을 80타 안에 끝낼 수 있었으니.
“김 실장,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라운딩을 돌아야 겠어. 다음에는 나랑 팀을 하지. 내가 아주 혹독하게 퍼팅하는 법을 가르쳐 줄 터이니. 허허허”
김상국 실장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감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계열사 사장이라고 한들 웬만한 인물이 아니면 저만치 왕회장의 신임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 김상국 실장은 그야말로 계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김상국 실장을 부른 까닭이 뭘까, 아무 이유 없이 친목을 다지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김 실장, 오늘 내가 왜 바쁜 자네를 가평까지 부른지 아는가?”
왕회장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운을 띄우는 것이었으니. 진중한 분위기에 김상국 실장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목울대를 출렁였다. 어찌나 긴장을 하는지 맞은편에 앉은 나에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각진 턱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늑대 같은 사내였지만 호랑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였으니.
“새로운 신입사원을 소개시켜주기 위해서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전략기획실에는 ‘신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다른 현장에서 구르고 굴렀던 걸출한 경력직들이었으니. 하물며 김상국 실장이 신입사원을 소개 받을 짬밥인가, 것도 닭갈비집에서 말이다.
“이 친구일세.”
그때 왕회장이 내 어깨에 손을 척하니 올렸다.
“김 실장, 현이와는 이미 일면식이 있었더랬지? 회의실에서 서로 갑론을박을 벌이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 정도 배짱과 담대함이라면 합격선은 될 테고 욘석이 겉모습은 어려 보여도 속은 아주 늙은 여우나 다름없다네. 아니지, 가끔 가다보면 호랑이 같은 모습도 보이니 조심하고 말일세. 나이가 많다고 해서 봐주는 친구가 아니거든. 하물며 나와 바둑을 둘 때조차 접대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에잉.”
“할아버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은가. 헌데 왕회장의 황당한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김상국 실장은 물론 손일선 사장 또한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은 찰나.
“현아, 이제 할애비랑 바둑을 두는 것은 잠시 멈추자꾸나.”
“네?”
“일주일에 한 번, 김 실장을 만나러 가거라.”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을 끝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순간 왕회장은 마치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할애비와의 이론 수업이 끝났으면 이제는 현장학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 * *
“미현 씨, 벌써 매진 됐다고요?”
임혜라 이사장은 보고를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일반 콘서트홀도 아니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지 않은가. 객석만 해도 이천오백석이 넘는 대규모였으니. 하물며 예매 방법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전화와 오프라인 단 두가지 였다. 헌데 한 시간도 안 돼서 전석매진이 될 줄이야.
“예매비율이 외국쪽이 꽤 높네요?”
“예, 작가님. 저희도 지금 너무 얼떨떨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빠르게 파악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대충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독주회가 열리지도 않았을 때부터 러브콜을 보냈던 이들이 아닌가. 그래도 이건 상상을 뛰어넘는 규격외의 수준이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은 클래식의 불모지라 불릴 만큼 관심이 없었던 곳이다. 검증되지 않은 첫 독주회에서 콘서트홀의 전 좌석을 채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이토록 외국에서까지 열렬히 환호할 줄은 몰랐다.
그 쪽 시각으로 치면 새벽이었을 텐데도 전화가 끊이지 않고 폭주했다고 하니. 이를 의문스럽게 여긴 기지국에서 긴급출장을 나왔을 정도이니 강현의 인기가 임혜라 이사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었다.
“저희 쪽도 아직까지 예매전화가 계속오고 있지만 예술의전당 쪽에도 계속해서 해외문의가 온다고 합니다.”
“예매문의가요? 이미 매진일 텐데.”
“아니요, 대부분이 콘서트홀의 예비객석을 더 늘려줄 수 없냐고 요청을 하는 문의전화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무서운 수준이지 않은가. 도대체 해외에서 강현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졌기에 이정도일까. 사실 임혜라 이사장은 몰랐지만 강현의 인기는 다방면으로 뻗어있었다. 데뷔부터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한 것은 물론, 작곡가 HYUN으로서의 흥행과 신비스러움은 이미 수차례 입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떻게 전석매진 소식을 알았는지 신문사에서도 이번 독주회에 대해 기사게재 요청이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현의 독주회가 기부성격을 띄고 있고 엄청난 외국 관광객들의 유입이 예상되다 보니. 성공적인 클래식 문화가 한국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본다고요.”
아무렴, 달러가 한 푼이라도 아쉬운 시기이지 않은가. 음악인으로서 이토록 외화벌이를 하는 인물은 현재 강현이 유일할 것이다. 만약 제일그룹이 아니었다면 신문사에서는 몇 번이고 기사를 게재했을 정도로 탐나는 소재이다. 어찌 보면 경사스러운 날이지 않은가. 그런데.
“미현 씨, 지금 현이는 어디에 있죠?”
*
“현장학습이라.”
골치가 아프다 못해 머리가 지끈지끈 해왔다. 왕구렁이 영감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니. 또 한편으론 가슴이 설레기도 하는 것이 참 이율배반적인 상황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략기획실은 지난 삶에서도 꼭 가고 싶었던 부서였으니. 하지만.
‘쯧.’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지. 독주회가 당장 다음 주이지 않은가. 왕회장은 말을 떨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서야 상념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나저나.
“아!”
아―!
소리를 지르자 천장까지 닿은 울림이 다시 메아리쳐서 울려 퍼진다. 아직까지 리모델링이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 콘서트홀이었다. 그래도 초창기에 비해 예술의 목욕탕이라는 오명은 벗었지만 아직까지도 2, 3층 외진 부분에는 중저역 대역이 울리는 것이었으니. 이런 부분은 미리미리 체크를 해놔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방비를 할 수가 있다. 원래라면 예술의전당 관계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전문적인 음폭 측정기계가 없고서야 힘든 일이었다.
“여기에요, 이사장님.”
게다가 알다시피 내 귀는 무척이나 예민하지 않은가. 하물며 리허설 겸 콘서트홀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예술의전당 이사장은 나를 아예 귀신 바라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강현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도 찾기 힘들어서 애먹는 부분을 이렇게 집어내는 걸 보면 그 사람들도 놀랄 겁니다. 그나저나 관객들이 3층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군요. 항상 2층 박스석에만 있다보니 이렇게 경사가 높은줄 몰랐습니다.”
“그냥 사무실에 계시면 제가 좌석 넘버링만 적어서 말씀해드릴 텐데요.”
“아닙니다, 강현 씨가 직접 돌아주신다는데 함께 해야지요.”
런던심포니 앵콜공연이후로 내 열렬한 팬이 되었다는 이사장이었다. 영문학과를 졸업에 클래식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지만 런던심포니 이후로 열정이 남달라졌다고 한다. 그 방증으로 예술의전당이 나날이 리모델링을 거듭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천석이 넘는 규모의 콘서트홀을 전부 파악했을 때였다. 이사장은 숨이 차보였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내 뒤를 따라다녔다. 덕분에 다른 직원들은 죽을 맛일 것이다. 이사장이 나서서저토록 열심히 하니 눈치가 보일만도 했다.
“강현 씨는 안 떨리세요? 이 콘서트홀에서 유명한 연주자 여럿이 독주회를 열었지만 그중에서 안떠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저도 떨려요, 이사장님.”
“강현 씨는 뭔가 달라보이는 데요?”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이사장의 말처럼 수천 석의 광활한 객석을 보고 있음에도 떨리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욱 컸으니.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 겁을 먹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예술의전당 직원 한 명이 이쪽을 향해 황급히 뛰어왔다.
“강현 씨, 손님이 왔다는데요?”
“예, 이사장님.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편히 보러 가세요.”
“아니요, 강현 씨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갤러리가 아니라 예술의전당으로 내 손님들이 직접 찾아왔다니. 내가 여기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알고? 의아한 기색을 품은 채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뜻밖의 인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으니.
“현, 독주회를 여는데 우리한테 표를 안 줘?”
“오랜만이야, 현. 난 솔직히 독주회보다도 현의 찜닭이 기대 돼.”
“에릭, 친구를 앞에 두고 그렇게 먹을 것을 탐하면 안 됩니다. 중국에서는 비만은 게으름의 친구라고 했어요.”
샤펠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아닌가. 영국의 윌리엄, 중국의 장옌, 그리고 바이킹족을 닮은 북유럽의 에릭까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놀라서 말을 이을 수 없을 때였다. 어깨너머로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뒤늦게 손님 한 명이 더 도착했다.
“현―!”
출렁이는 백금발과 초록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 안나가 내게 반가워하며 안기는 것이었으니. 목울대가 절로 출렁이는 것이 이제는 아가씨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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