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3)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13화 >
서정적인 선율의 시작이었다.
물결위에 어른거리는 만월이 마치 드뷔시의 달빛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았으니. 강현의 손가락이 번들거리는 현위를 섬세하게 수놓자 청중들은 숨을 집어 삼킨 채 무대 위로 눈과 귀를 빼앗겼다. 러시아의 거장 알렉세이의 볼은 연신 실룩였다. 독주회란 무릇 연주자의 자서전과 같은 성격을 띤다. 그가 어떤 음악의 길을 걸어왔는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헌데 그 자서전의 첫 장부터 무반주일 줄이야. 하물며 자작곡이라니.
‘영감들을 전부 기절시킬 셈인가, 건방진 꼬맹이.’
알렉세이는 방심하고 있다 시원하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다른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 선 강현은 항상 그랬듯 거침이 없었다. 그 어떤 인사도, 사회자의 손짓도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선율로 모든 청중을 집중시키지 않았던가. 모두가 눈 깜짝할 새에 강현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그때였다.
지잉―!
잔잔한 호숫가에 파문이 일 듯 날카로운 고음이 콘서트홀의 천장에 닿았다. 메아리치는 선율이 끝나는 순간 강현의 활이 매섭게 보잉하기 시작했다. 하모닉스와 트릴의 연속, 두 개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듯한 선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손가락 마디가 부서지지는 않을까싶을 정도로 32분음표가 오선 위를 몰아치고 있었다.
‘대단해.’
윌리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의 반응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왕립음악원에서부터 최고를 향해 달리던 윌리엄이었다. 허나 샤펠에서 또 다른 벽을 마주했으니. 강현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강현이 강의를 했다는 안나의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이론적인 부분에 한하는 것인 줄 만 알았었다. 지난 삼년간 강현이 바이올린에 매진하지 않았다 생각했기에. 헌데.
꿀꺽―!
도대체 이 가늠할 수 없는 격차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현은 지난 삼년간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더욱 깊어진 선율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강현이 미소 지으며 활을 한 방향으로 빠르게 보잉했다. 손가락이 남들보다 수배는 더 달려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여러 음을 끊어내고 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호흡이 틀어졌다가는 선율이 어긋나는 기교였다. 윌리엄의 양손은 이미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꽉 쥐어져 있었다.
‘고로, 카네기홀을 떠올렸죠?’
히로세는 매니저 고로의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무대 위에선 강현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 카네기홀에 섰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리라. 월광을 머금은 스트라디바리는 오늘따라 유독 번들거린다. 청중들은 그의 보잉에 이미 격한 희열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수십 년 전 카네기홀의 청중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하물며 저토록 어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반딧불처럼 보일만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옳았군요.’
같은 넘버링의 환상과 환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알려진 악기 제작자 안토니오가 남긴 유언처럼 만약 주인이 아닌 자가 이들의 현을 건드리게 된다면 세상을 보는 눈과 선율을 듣는 귀를 잃게 될 것이다. 허나 진정한 주인이 환상의 현을 켜는 그 날.
세상은 위대한 비르투오소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
“후우―!”
어깨에서부터 팔꿈치를 지나 손끝에 이르기까지 뜨겁게 달궈진 칼날이 돼버린 느낌이었다. 지금 찬물을 끼얹으면 아마 수증기가 피어오르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런데도 스트라디바리 ‘환상’은 여전히 현을 번들거리는 것이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남았나보다. 무반주로 연달아 3곡을 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모양. 아무렴, 붉디붉은 울림판의 검은 줄기가 계속해서 나를 탐하지 않았던가.
“현아, 좀 괜찮니?”
백정훈이 조심스럽게 내 상태를 물어왔다.
“난 네가 왜 공연 중간이 아니라, 무반주 곡이 끝나고 인터미션을 가지게끔 구성했는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이해가 된다. 객석의 청중들이 완전히 넋이 나가있어. 연주가 끝났는데도 아무도 못 일어나는 거 있지.”
“그래요?”
“그리고 네 상태 좀 봐, 누가 보면 무대 위에서 싸움이라도 하고 온줄 알겠다. 검투사처럼 아주 잘 벼려져 있어. 협연은 문제없겠지?”
나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백정훈도 커튼 뒤에서 애가 끓었을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짧은 인터미션 동안 바이올린을 바꿔 조율했다. 정말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던 과르네리의 등장이었다.
다시금 무대 위로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앞서 연주한 무반주곡과 새로이 등장하는 백정훈에 대한 찬사이리라.
“어?”
객석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것도 그럴 것이 피아니스트의 옆자리에 있어야 할 페이지 터너가 없었기 때문. 음표가 많고 복잡한 곡일수록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가 있기 마련이다. 연주자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스스로를 무대위의 유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간혹 가다 페이지 터너가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건 오랫동안 연주한 레퍼토리에나 가능한 일. 하물며 서로 합을 맞춰야하는 협연이 아닌가. 찰나의 실수가 나비효과가 되어 무너지기 십상이었으니.
‘형, 준비 됐죠?’
청중들의 의아한 시선들이 이해가 되었다. 반면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들은 흥미롭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백정훈의 기다란 손가락이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빙상장을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건반의 깊이와 백정훈의 호흡이 수많은 청중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다렸던 피아노의 해머가 현을 때리는 순간 활이 들어 올려졌다.
두근 두근 두근.
구슬픈 장대비를 맞고 자라났던 한 떨기의 꽃이 피아노의 울림에 맞춰 감응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정제되어있던 무반주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협주곡. 백정훈의 손가락이 덜 구부러지며 손가락 끝의 살집이 건반을 아주 천천히 눌렀다. 단순한 손가락의 이완이었지만 화려한 기교보다도 웅장한 울림을 주었다.
마치 서로 줄을 잡아당기듯 끊임없이 앙상블이 이어졌다.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사이가 찢어질 정도로 연습한 곡이지 않았던가. 백정훈은 내 움직임을 아주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그 순간 거미를 닮은 손가락이 현위를 미친 듯이 움직였다. 마치 현이 찢어져나갈 것 같은 운궁법이었으니. 백정훈의 턱 끝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훔쳐주기라도 하듯 시원한 바람이 커튼을 펄럭이게 만들 때였다.
지잉.
참아왔던 숨을 터뜨리듯 피오레가 개화를 시작했다.
* * *
“모두 방금 보았습니까?”
중국의 거장 등륜은 연신 자신의 눈을 옷소매로 비벼대고 있었다. 벌써 2번째 인터미션이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만큼 진한 여운이 온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마지막 협주는 정말 신기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바이올린을 다루는 사람을 실제로 볼 줄이야. 바이올리니스트 현은 정말 삼년 새에 엄청나게 성장했군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말이에요.”
상해 국제음악원의 교수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학과장인 등륜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인해 결정된 한국행이었다. 처음에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의 독주회라기에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자국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허나.
오만과 오판이었다. 대한민국에 이토록 거대한 콘서트홀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거니와 객석에 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음악가들이 아닌가.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만 알았다. 것도 그럴 것이 다소 폐쇄적인 상해 국제음악원의 특성상 삼 년 전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강현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때 등륜이 슬며시 옆자리에 앉은 교수를 바라봤다. 굵은 눈썹이 인상적인 차기 학과장이었다.
“왕교수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바이올리니스트 현과 피아니스트 백정훈의 협연 말입니다.”
“믿기지 않지만 피아니스트 백정훈이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앞장서 이끌고 말이지요. 일반 청중들은 모르겠지만 웬만한 음악가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겁니다. 둘 사이에 기량차이가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놀랐습니다. 저는 여태껏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거장을 말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백정훈을 꼽았기 때문입니다.”
왕교수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삼 년 전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고는 해도 지난 기간 동안 소식이 없던 바이올리니스트 아닌가. 하지만 첫 시작부터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에 이르기까지 꽉 말아 쥔 손아귀를 풀 수 없었더랬다.
곧이어 술렁이던 객석이 삽시간만에 고요를 머금었다. 무대 위로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올라서고 있었기 때문.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담담한 눈빛에 모두가 숨을 집어삼켰고 청중들의 눈에는 진한 희열과 설렘이 차오르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떠한 연주를 보여줄 것인가. 그 순간 중국의 거장 등륜은 직감했다.
“앞으로 아시아의 판도는 한국이 가져갈 것 같군요.”
그 말에 상해 국립음악원 교수들 중 그 누구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
“브라보―!”
레퍼토리가 끝나고 이어지는 환호와 갈채는 당연한 것이다. 가끔 보면 레퍼토리의 끝까지 얌전을 떨어야하는 것이 덕목인지 아는 청중들이 있는데 그러기 보다는 격렬하고 몰아쳐 환호하고 휘파람을 부르는 편이 나았다. 음악가는 그러한 갈채에 전혀 인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진한 여운의 끝에서 이천오백명이 넘는 관객들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동시에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로 홀 전체를 울렸다. 감격에 찬 외침이 커튼 뒤로 걸어가던 바이올리니스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소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미소 지으며 뒤돌아서자 여성 관객들이 꺄―!하며 비명 같은 고음을 내질렀다.
금발의 샤론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백정훈은 이처럼 거대한 함성과 환호에 얼떨떨해하는 반면 강현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타고난 것처럼. 그때였다.
“청중 분들이 저를 원하시는 만큼 앙코르로 보답하겠습니다.”
능숙하게 청중들을 대하는 강현의 모습에,
“완벽한 무대매너까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샤론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수없이 이러한 공연을 겪은 백전노장 같지 않은가. 그 옛날 야사 하이페츠도 이렇게 말했더랬다. 환호가 이어지는 끝까지 활은 내려오지 않는다고. 강현이 걸음을 옮기자 온몸이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번에는 어떠한 곡을 들려줄 것인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늦지 않아야 할 텐데.”
환상적인 앙코르 공연이었다. 이번 독주회로 인해 수많은 칼럼과 기사들이 쏟아지리라. 클래식계가 들썩일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샤론은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러한 독주회가 단발성에 그치고 말다니.
“어떻게든 인터뷰를 따내야해, 저번처럼 시끄러운 아줌마라고 말했다가 나를 기억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말이야.”
강현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모델 부럽지 않은 기럭지에 뚜렷한 이목구비에 찰랑이는 금발은 꽤나 인상적이지 않은가. 아무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독주회가 끝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으니. 오늘이 지나면 강현에 대한 외신의 평가는 달라질 것이 자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
조심스럽게 대기실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독주회가 금방 끝마쳐서 바깥이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인회직전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허나 막 문을 열고 들어선 샤론은 망부석처럼 굳고야 말았으니.
‘도대체.’
마음 같아서는 문을 도로 닫고 싶을 정도였다. 기가 쎈 샤론이었지만 이토록 수많은 거장들을 한자리에서 대면한 적이 있었던가.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를 시작으로 히로세와 스펜서, 그리고 유리. 그 외에도 러시아의 알렉세이, 중국의 등륜이 함께 앉아있었으니. 뒤편으로 서있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물론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백정훈이 마치 신입사원처럼 한껏 긴장을 머금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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