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15화 >
“영감탱이, 약혼은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한다. 하물며 재벌가에서는 결혼을 두고 백년대계라고 말할 정도로 중시 여겼으니.
“요즘 뚜쟁이들 한테서 이촌동이 인기라지?”
“그게 무슨 소린가?”
“이촌동 돌담길에 발걸음이 마를 날이 없다던데 말이야.”
암, 독주회가 끝나고 난뒤 강현의 인기는 천정을 치솟고 있었다. 뚜쟁이들의 중매 대상이 되기에 강현의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정략결혼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속된 말로 끼리끼리 해먹는 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시국이 뒤숭숭한 와중에도 동주는 거뜬히 제몫을 해내고 있었으니 이보다 탐나는 신랑감이 있을까.
“괜한 소리 말게, 안 그래도 요즘 시덥잖은 전화 때문에 현자가 골머리를 썩고 있으니 말일세. 오죽하면 우편으로까지 연락이 오겠나. 내 범진이 범경이 장가보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크흠, 이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만. 이 손장원이가 점찍은 것을 중간에 가로채려고 하고 말이지.”
“손가, 누가 들으면 현이가 물건인줄 알겠네?”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사돈. 우리 사이에 이러긴가?”
도리어 억울한 듯이 눈썹을 찌푸려 보이는 왕회장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거나 보게나. 이번에 내가 모은 사진들이니 말일세.”
“또 찍은 겐가?”
“당연하고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찍어놔야지. 유하가 또 언제 한국에 들어올 줄 알고. 알잖나, 아이들은 눈 깜짝할 새에 금방금방 커버린다는 것을.”
응접실 테이블위로 두툼한 앨범 하나가 놓였다. 아직 빈칸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앞쪽은 그런대로 채웠다. 사진 속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중에서도 둘이서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 유독 할아버지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손가, 그나저나 현이는 어디 있는 겐가? 오늘 바둑을 두는 날이 아니었나?”
“바둑수업은 잠시 미뤄뒀다네. 웬만하면 동주에서 현장 감각을 쌓게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현이 정도면 화학 분야가 아니라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일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꽤 괜찮은 선생님이 한명 있거든.”
“선생님?”
왕회장이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문득 영미권 소설 빅브라더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꽤나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다. 주인공은 아이로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어 갑자기 성인이 된다. 소설에서는 어른이 된 주인공이 한 완구회사에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해프닝을 그리고 있는데 어린 아이의 동심으로 그려나간 사업계획 때문에 연일 승진을 거듭하며 사랑까지 쟁취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이나 만화가 아니었으니.
‘내가 오기 전까지 부탁함세, 최 대리.’
최 대리는 보모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것도 그럴 것이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선 사춘기 소년에게 회사 곳곳을 안내해주고 있자니 맥이 탁 풀렸다. 전략기획실 김상국 실장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단박에 경호원들을 불러 내쫓았을 것이다. 헌데.
“이름이 현이라고 했지?”
“네, 맞아요.”
새침데기 같은 강현의 모습에서 최 대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직 어린 아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겁이 없는 것일까. 하물며 걸음을 옮기는 것에도 거침이 없다. 흡사 골백번 회사생활을 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행동하지 않는가. 자연스럽게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는 모습까지.
“대리님은 블랙으로 드릴까요?”
“어, 어 고마워.”
“저 때문에 귀찮으시죠? 보통 신입들이 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잖아요.”
이 능숙한 처세는 뭐란 말인가? 아무렴, 강현의 말처럼 이를 테면 과잉보호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그 누가 신입사원이 왔다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회사구경을 시켜주겠는가. 사수에게 쪼인트를 까이고 욕을 들어가며 업무를 처음부터 배워도 시간이 모자를 판국에.
“대리님은 소속 부서가 어디세요? 전략기획실은 아닌 것 같고 교육담당 부서?”
“어떻게 알았니?”
“인상착의와 말투를 보고 알았어요. HRD교육하시는 분들이 대게 비슷하거든요.”
셜록이라도 되는 것일까. 최 대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것도 그럴 것이 한눈에 척 봐도 어려보이는 사춘기 소년이 자신의 직무를 맞춘 것도 모자라 기업교육 전문용어까지 사용하지 않는가.
“그럼 가시죠, 이쯤하면 다 돌아본 것 같은데.”
강현이 앞장서고 최 대리가 뒤따르는 형국이 되었다. 도착한 곳은 교육부서 끄트머리에 마련된 사무실이었다. 전략기획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김상국 실장이 회의를 끝마칠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했다.
“김 실장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걸 보고 있으면 된다고 하시더구나.”
서류 뭉텅이였다. 최 대리가 슬쩍 보기는 했지만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으니. 허나 강현은 서류 뭉텅이를 받아들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사무실 내에 돌아다니는 붉은 펜 하나를 주워들고는 자리에 앉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최 대리는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달칵―! 달칵
참 경쾌한 소리다. 첫날부터 테스트를 낼 줄이야. 습관적으로 낱장을 넘기며 붉은 펜으로 체크를 해 나갔다. 외국계 기업에 대한 미래 성장가능성을 점친 보고서였다. 일전 회의실에서 갑론을박을 벌였던 내용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상국 실장 입장에서는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조금 실수라도 해야겠지?’
완벽을 기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배우러 온 입장이지 않은가. 서류 뭉텅이의 중간쯤 까지 낱장을 넘기다 볼펜 뚜껑을 닫았다. 훗날 푸른 기왓 집에서 한자리를 단단히 꿰차는 김상국 실장의 실력이 어떠한지 알고 싶었으니. 그때였다.
“현아, 김 실장님께서 부르신다. 가자.”
난 서류뭉텅이를 챙겨들고는 최 대리를 따라나섰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인물이었다. 지난 삶 임원들의 리더쉽 교육을 담당했던 제일그룹 교육담당자였으니. 중년이 되어서나 젊었을 때나 공통점이 있다면 줄을 잘 선다는 것이다. 아무렴, 정글 같은 회사 속에서도 계속해서 살아남았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최 대리님, 다들 눈빛들이 장난 아니죠?”
전략기획실에 처음 들어선 것일까. 최 대리의 어깨와 목이 바짝 긴장해 있었다. 과장을 더해서 저러다 일자목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 내 딴에는 긴장을 풀어주려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더욱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으니. 아무렴, 전략기획실은 하나같이 베테랑들의 향연이었기에 이해도 되었다.
“고마워, 최 대리.”
“아닙니다, 다음에도 부탁할 일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누가 보면 교육담당이 아니라 전략기획실 말단직원인 줄 알겠다. 최 대리는 과장스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걸음을 옮겨 나갔다. 난 가타부타 말없이 서류 뭉텅이를 김상국 실장에게 건네었다.
“흐음.”
낱장을 넘기던 김상국 실장의 눈이 점차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중간쯔음 가서 더 이상 체크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자 의아한 낯빛이 되었다.
“이름이 강현이라고 했지?”
“네, 실장님.”
“일부러 실수를 한 것이야? 것도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김상국 실장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지.”
* * *
신입사원들에게는 항상 딜레마가 있다. 모르는 업무가 있으면 이걸 물어봐야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물어야하는 것인지 하는, 고심 끝에 한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질문에 사수는 한심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아무개 씨는 어린 애냐고? 왜 성인이 되어서 자기 할일을 능동적으로 일처리를 못하냐고.
그런 의미에서 전략기획실은 다들 능동적인 사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테랑은 베테랑이라는 건가.’
다들 경력직이라 하나같이 일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것이 코스피 장이 마감하기 직전 여의도 증권빌딩을 보는 것 같았으니. 눈보다 손이 빠르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전략기획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부서냐고? 쉽게 말하면 수문지기 같은 곳이었다. 제일그룹 내에 흐르는 거대한 자금의 줄기를 조절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헌데.
‘저건 아닌데.’
사수 역할을 맡은 오태석 대리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제 딴에는 아주 공을 들인 보고서였지만 척 봐도 아니었지. 듣기로는 BOA출신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국내 시황에는 눈이 어두운 것이 확실했다.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목 마르면 탕비실에 가서 오렌지 주스라도 한잔해. 정 심심하면 교육부서 가서 최 대리한테 회사 구경이라도 더 시켜달라고 하고 말이야.”
오태석 대리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막내가 들어온다고 해서 들떴을 터인데 졸지에 보모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그렇다고 함부로 할수도 없을 것이다. 일전에 손일선 사장과 함께 전략기획실을 찾은 적 있었으니. 항간에는 나를 두고 제일그룹의 데릴사위라는 소문도 돌지 않는가.
“네, 그럼 주스라도 한잔하고 있겠습니다.”
“어?”
틀린 부분을 애써 가르쳐줘서 뭣하겠는가. 하물며 전략기획실이라고해서 이등병처럼 눈치를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시기는 달라도 제일그룹 짬밥으로 치면 내가 이들보다 더 되었으면 더 되었지 모자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긴 아직 허허벌판이네.”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한잔 뽑아서는 옥상으로 올라왔더랬다. 훗날이 되면 이 시멘트바닥에 정원이 생긴다. 고층빌딩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곤 했지. 따분하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왕구렁이 영감님이 그래도 신경써준 것을. 애초에 학생에게 일을 맡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 하물며 나도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어억, 허억.”
커피를 홀짝이며 한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은 오태석 대리가 옥상으로 뛰어 들어왔다.
“말도 없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일층부터 너 찾아다니느라고 혼쭐났다.”
“시간 때우고 있으라면서요?”
오태석 대리는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내가 옥상 벤치에 누워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모양. 그래도 꽤나 걱정한 모양새이지 않은가. 혹여나 김상국 실장에게 불호령이 떨어질까 무서웠던 것일 테지.
“대리님 보고서 재검토 해보세요.”
“뭐?”
이 정도면 되었다. 스쳐지나가듯 말했기에 오태석 대리의 눈가에는 황당함이 서려있었다. 아무렴, 나라도 황당할 테지. 하지만 보고서를 올렸다 재차 반려당하고 나면 내 말이 생각 날 것이다.
“이제 회의시간 아니에요?”
“어, 어.”
“어서 내려가시죠.”
오태석 대리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전략기획실 내부에서 깍두기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덕분에 기획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긴 하다. 제일그룹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전략기획실의 내부회의에 고등학생이 참석하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하물며 이들은 대부분 나를 없는 사람취급하고 있었으니.
“오 대리, 드디어 찾았구만.”
회의실에 도착했을 무렵, 날카로운 시선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어떻게 보면 업무시간 내에 자리를 비운 것이었으니. 알게 뭐람, 어차피 조막만한 손에는 보고서 한 장 안 맡기는 곳이 아닌가. 그때였다,
“회의를 진행할 사람이 드디어 도착했군.”
“네?”
“모두들 보게나, 강현이 이 보고서의 주인일세.”
그 순간 상석에 앉은 김상국 실장이 서류 뭉텅이를 집어드는 것이 아닌가. 일전 손일선 사장 앞에서 나와 갑론을박을 벌였던 투자 보고서다. 아무래도 왕회장에게 이 보고서의 실체를 전해들은 모양.
“과연, 신입이 우리를 어떻게 설득할지 한번 보자고.”
김상국 실장에는 얼굴에는 호기심과 장난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이 보고서를 만든 것이 어린 학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겠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보이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암, 김상국 실장은 물론 왕회장조차도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현장경험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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