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16화 >
보고의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신입사원들이 흔히 하는 실수중 하나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나와서는 국어책의 지문을 읽듯 보고서를 따라 읊기만 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쓰는 추상적인 단어와 확실하지 않은 어감은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신을 하게 만든다.
“김 실장님,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김상국 실장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들을 덮어둔 채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김상국 실장의 얼굴에는 흥미로움이 만연한 가운데 나머지 직원들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이들은 일전 나와 김상국 실장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들 보고서의 내용은 이미 검토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누차 여러분들께 설명해가며 보고서를 이해시키기 보다는 여러분들께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제게 물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요지는 보다 빠르게 핵심을 전파하는데 있으니까요.”
오태석 대리를 비롯해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불쾌함이 가득했다. 알게 뭐람, 애써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장황하게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렴 내가 정말로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겉모습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 학생이었으니 앞으로의 관계를 쇄신시키기 위해서라도 용단이 필요했다.
“크흠,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얼추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부분들을 집어넣은 것 같지만 대부분이 허황된 장래를 점치는 내용들입니다. 솔직히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이 정도 해외시황을 파악한 것만 해도 박수를 쳐줘야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자리는 동아리가 아니라 회사의 명운을 걸어야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특히 ADAM사의 투자가치와 LAS사의 장래평가에 대해서는 허황되다 못해 소설이라고까지 생각됩니다만.”
왕년에 안기부에서 한 가닥 했을 법한 인상의 중년인이다. 아무렴, 출신성분들 조차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들의 집단이었으니. 만약 내가 손일선 사장과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팽 당해 회사 밖으로 쫓겨났겠지. 장내에 서슬 퍼런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저는 전혀 허황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간과하신 것 같은 부분들을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간과한 점? 계속 하세요.”
“첫 번째로 ADAM사의 투자가치에 대해 낙제점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주력 생산품이 그저 허울 좋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이시겠지요? 아직은 실효성이 없으며 현재로서는 서명 시스템에 관해 단순한 약속의 연장선이라고 밖에 생각 안 하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는 다릅니다. 이제 기업 관리에 대한 서명시스템은 더욱 더 광범위하게 변할 것입니다.”
컴퓨터의 보급이 확산되고 있는 시기였다. 서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음처리와 같은 약속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변하면서 보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높아질 것이 자명했다. 그 일례로 훗날 미국에서는 IT보안으로 인한 손실이 연간 수백억을 넘어선다. 발 빠른 기업들은 이미 오프라인 보안 아닌 온라인 보안에 대해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볼까요?”
김상국 실장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갑론을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안기부 출신의 중년인이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내게 계속해서 반문을 해오는데 아무렴 내가 그 정도 눈빛에 기가 죽을 쏘냐. 서부지검에서 먹었던 짬밥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오태석 대리를 포함해 다른 이들은 이미 반쯤 넋이 빠진 표정이다. 그때였다.
짝―!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와 함께 김상국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름 모를 중년인의 얼굴은 어느새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것도 그럴 것이 하는 말마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꼬박꼬박 대답을 해오니 도중에 멈출 수도 없고 보는 눈은 많고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직원 모두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김상국 실장이 남은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보였다.
“난 포커페이스인 김 팀장이 저렇게 흔들리는 걸 처음 봤어. 저 사람이 저래 봬도 전략기획실의 불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항상 말을 아끼는 양반인데 말이야. 방금 전 현이 너와 토론을 벌이는 게 꼭 네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았죠?”
“설마 의도한 거였니?”
아무렴, 지난 삶 서부지검에서 웬만한 고위관직들은 거진 다 상대해 보지 않았던가. 검찰 은어로 깔개라는 것이 있는데 엉덩이가 무거운 피의자들을 대상으로 조서를 꾸밀 때 사용하는 말이다. 신문을 할 때 상대의 머리맡으로 들어가 살살 긁으며 내 페이스에 말려들게 하는 것이 내 주특기였다.
*
“정말 그랬다고요?”
손일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사장님. 김 팀장이 회의에서 흔들릴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앳된 외모만 아니면 경쟁기업에서 경력자를 스카웃 해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능수능란했습니다. 애초에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더군요. 마치 수없이 이러한 상황을 겪어본 베테랑처럼 말입니다.”
김상국 실장의 보고를 듣는 손일선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너무도 완벽한 아이지 않은가.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젊었을적부터 제일그룹 장학생이라는 명목 하에 인재들을 끌어 모았던 분이 아니신가.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뛰어난 강현의 모습에 매료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았으니.
“그런데 사장님, 요즘 신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강현과 동일인물인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김 실장께서는 모르셨습니까?”
“설마 했습니다. 사실 클래식을 즐기는 입장도 아니거니와 바이올린 신동이라고 불리는 현과 강현이 동일인물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으니까요. 저도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마 팀원들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을 겁니다.”
암,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뛰어난 사람들은 많다.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도 있지만 한 분야에만 한할 뿐 다른 분야에 한해서는 일반인만 못한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 허나 강현의 경우는 달랐다. 마치 백전노장처럼 모든 것에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가. 하다못해 연못의 황금 잉어들조차도 손일선보다 강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김상국 실장이 물러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장실의 인터폰이 울리더니 수화기를 든 손일선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그래, 유하야. 미국은 잘 도착했고?”
봄방학이 끝나 다시 유학길에 오른 외동딸이 아닌가. 금지옥엽 같은 외동딸의 목소리에 손일선의 목소리마저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수화기 너머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는 손일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는다.
“현이? 현이는 지금쯤 평창동에 있을 테지. 아니면 갤러리나…”
웬걸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게 뻔했지만 손일선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왕회장의 총애에 질투가 나서냐고? 아서라, 어차피 제일그룹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어있으니. 하물며 그토록 뛰어난 인재라면 왕회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총애했을 것이다. 손일선이 강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딸인 유하가 강현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기 때문.
“그래, 유하야. 아빠한테도 전화 자주하고.”
금지옥엽 키운 외동딸의 한결 같은 반응에 서운한 마음을 감출 길 없는 손일선 이었다.
* * *
초복이 다가와서 그런가 날씨가 무척 더워졌다. 점심 무렵부터 이촌동 저택 안은 이미 삼계탕 삶는 구수한 냄새로 가득하다. 상경하고 난 뒤 이토록 더운 적은 처음이라 오랜만에 정원에서 아버지와 웃통을 벗고 서로 등목을 해주고 난 뒤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현아, 많이 컸구나?”
때 아닌 불청객이 이촌동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작은 삼촌과 이모 내외였다. 설마 삼계탕 삶는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일전에 실패 했던 할아버지의 용서를 재차 빌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범경이 네놈은 또 제주도에서 왜 애비 허락도 없이 올라 온 것이냐?”
“아버지, 제가 당뇨 때문에 매달 한 번 씩 육지에 오는 거 아시잖아요.”
이전처럼 다짜고짜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을 보니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옆에 선 이모 또한 한 몫 거들 생각인지 끼어 들 타이밍만 살피고 있었다.
“크흠, 현아. 어서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하자꾸나. 현자는 손회장 몫 삼계탕까지 좀 챙겨 놓고 말이야.”
하지만 쉽게 당할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니.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작은 삼촌과 이모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지지 않는가. 아무리 봐도 날을 잡아서 작은 삼촌을 제주도가 아니라 대마도에 보내자고 건의라도 해야겠다. 당뇨가 있으니 인슐린만 잔뜩 챙겨주면 될 테지.
“다 왔습니다, 회장님.”
푹 고아낸 삼계탕을 보온병에 싸들고 평창동을 찾았다. 아무렴, 평창동에 삼계탕 하나 삶을 가정부 아주머니 없을까, 매번 임금님 수랏상 부럽지 않은 식단이 짜여지는 곳 아닌가. 할아버지가 내 손을 이끌고 평창동을 찾은 까닭은 간단했다. 임혜라 이사장과 손일선 사장이 동시에 해외로 출장을 나간 지금 왕회장 혼자 큰 집에서 꽤 적적해 하고 있을 것이기에.
“아이고, 영감탱이. 뭐 이런 걸 다 바리바리 싸왔나?”
“혼자 있으면서 밥이라도 거를까봐 내 직접 가지고 왔네. 그러니까 주책 떨지 말고 체력도 정정한 양반이 새장가라도 가라니까.”
“거 참 됐네, 그렇게 좋으면 본인 먼저 든 뒤에나 말씀 하시게.”
삼베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정원을 가꾸던 왕회장이 내 손에 들린 보온병을 보고는 손뼉을 마주쳤다. 이럴 때보면 영락없는 동네 맘씨 좋은 할아버지다. 널찍한 식탁위에 어머니가 싸 주신 보따리를 풀었다. 어찌나 잘 고아졌는지 뼈와 살이 혀 놀림 한 번에 스르륵 발리지 않는가.
“현아, 요즘도 서초동은 잘 다니고 있느냐?”
“예, 할아버지.”
“총 몇 번 다녀왔누?”
처음 서초동을 찾은 뒤 두 달이 지났으니 종잡아도 열댓 번은 넘었더랬다. 처음에는 삭막하게 대하던 전략기획실 직원들도 점차 나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아무렴, 첫날부터 회의실에서 팀장하고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벌였으니.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면면을 말해 보거라.”
“면면이요?”
“그래, 네가 보고 느낀 점을 말이다. 이제 얼굴을 꽤 마주쳤으니 현이 네 안목이 어떤지 한번 들어 봐야하지 않겠느냐.”
안목이라고까지 할 것이 있겠는가, 어차피 난다긴다하는 수재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이들만 골라 만든 곳이었으니. 하지만 다들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오태석 대리는 팀원으로서는 알맞지 않지만 개인으로서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에요. 전체적인 시황을 읽는 것보단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차트를 읽어나가는데 활용도가 높죠. 반면 김정원 팀장의 경우에는 급작스런 변화에 대한 코멘트는 좀 늦지만 전체적인 시황을 읽는 눈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요.”
“대리는 숲 대신 나무를 보는 반면 팀장은 나무대신 숲을 본다?”
“네. 어찌 보면 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상성이 잘 맞는 조합들이에요. 한쪽이 부족한 부분을 나머지 한쪽이 채워주니까요. 나머지 사람들도 말씀 드려요?”
차근차근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면면을 말해주었다. 물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공적인 자리에서의 모습들이었다. 대화가 끝나갈 즈음 삼계탕 그릇도 바닥을 보였다. 왕회장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는 누구더냐?”
“아무래도 김상국 실장이겠죠? 전략기획실을 총괄하니까요.”
“그럼, 만약에 김 실장을 훗날 다른 자리에 앉힌다면 어디가 좋겠느냐?”
김상국 실장은 아주 뛰어난 인물이다. 지난 두 달 동안 접해본 바로는 지난 삶 단편적으로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니. 김 실장은 충성심이 높고 항상 철두철미했다. 하물며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생각하니, 계열사 사장 자리에 앉히기에는 그 추진력이 아까웠다.
“아무래도 푸른 집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뭐라?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왠지 공적인 자리가 잘 어울리시는 분이거든요. 지적이고 강단 있는 생김새도 그렇고요.”
왕회장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감탄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봤다. 아무렴, 지난 삶 김상국 실장이 국무총리를 맡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한 말이 나비효과가 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