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19화 >
악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보에를 쥔 수석 단원이 ‘A’음을 길게 불어준다. 단원들은 오보에의 음에 맞춰 각자의 악기를 조율하기 바쁜 와중 악장은 그들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악장의 의자는 다른 이들의 의자보다 높다. 그의 활을 항상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야하기 때문. 악장의 오른 손은 현악기군의 전체를 담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무겁지만, 화려하게―!”
악장은 현악기 단원들의 음색을 조절한다. 활의 아랫부분으로 현을 눌러 추상적인 음색을 만들어 내는 것. 곡의 성향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추상적인 음색을 조절하는 것 또한 악장의 몫이다. 차가운 눈동자가 단원들의 활을 쫓았다. 활의 방향이 틀린 이들을 귀신같이 알아내 날카롭게 지적하지 않는가. 드미트리가 이토록 날을 세우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각 파트마다 신입 단원들이 새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케스트라는 전쟁과 같다고.
제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설령 다른 교향악단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무대가 달라지면 신분도 달라지는 법. 신입단원들은 갓 부대에 전입을 명받은 신병처럼 바짝 긴장해 있었다. 것도 그럴 것이 런던 심포니의 심장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때였다.
단원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공기가 변한다는 말이 있다면 믿겠는가.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처럼 들리는 것 같았으니. 런던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 스펜서의 등장에 신입단원들이 바짝 마른 입술을 쓸었다. 눈빛이 어찌나 매서운지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단 한 군데였다. 분명 저 날카로운 지휘봉의 끝에서 전쟁이 시작되리라.
“마에스트로, 고생하셨습니다.”
드미트리는 연습이 끝난 후에도 신입단원들의 평가를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결과는 뻔했다. 악장인 자신이 봐도 만족스럽지 못한데 지휘자인 스펜서가 만족할리가. 어차피 천천히 손과 발을 맞춰가야 하는 것이 오케스트라다. 헌데, 오늘따라 마에스트로가 유독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휘 중간에 손끝을 모은 채 ‘첼로―!’ 라고 소리치며 실수한 신입단원을 귀신같이 노려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기대가 되십니까?”
“무엇이 말인가, 드미트리.”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오는 것을 기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요. 단원들도 현을 다시 볼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스펜서는 애써 부정하지 않은 채 콧잔등을 쓸었다. 사실 스펜서 또한 다른 단원들과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강현이 런던과 베를린 중 가장먼저 런던을 먼저 선택했을 때 뛸 뜻이 기뻤으니. 얼마 전 열린 독주회로 더더욱 탐이 나는 재목이었다.
“나의 오랜 친구 스펜서, 잠깐 들어가도 되겠는가?”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지휘실 너머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스펜서의 오랜 지기이자 영국 왕실의 왕세자였으니. 드미트리는 익숙하게 새뮤얼을 맞이했다. 일반인들은 얼굴을 보기 힘든 왕세자였지만 그는 실상 런던 심포니를 자주 찾았다.
“자네가 또 웬일인가, 민생에 신경을 써도 모자를 판에.”
“어허, 내 자네에게 선물을 주려고 이토록 한걸음에 달려왔건만.”
“선물?”
새뮤얼이 턱하니 회색 신문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헌데 영자신문이 아니라 한글로 되어있는 신문이었다. 신문을 펼쳐들자 스펜서의 의아한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헤드라인에 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수라장이 된 사고현장 속에서 할아버지를 등에 업은 채 걸어 나오는 현의 모습이.
“새뮤얼,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겐가?”
앞선 두 글자는 분명 현의 이름이 분명했다. 일전 한국을 찾았을 때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뒤의 문장은 무슨 말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새뮤얼은 스펜서가 가리키는 문장을 영어로 말해주었다.
“HERO.”
*
스피오 스피오 맴맴―!
요즘 매미 울음보다도 전화기 소리가 많이 울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한 장의 사진 때문. 우연도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었을까. 언론은 과장을 좋아한다. 하물며 불에 탄 자동차가 먹구름을 뿜어내고 아수라장이 된 사고현장에서, 얼굴에는 검댕을 묻힌 채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또 한 손으로는 눈물기가 가득한 어린아이를 이끌었으니 오죽할까. 퓰리처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찍힌 사진이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전화 받느라 바쁘시죠.”
“아니에요. 강현 학생이 칭찬 받을 일을 한 건데요 뭘, 회장님께서 잠시 전화기 코드 빼놓으라고 하셔서 한 동안은 괜찮을 것 같아요.”
가정부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그저 다리를 다친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걸어 나온 것뿐이었고 기사에 난 구체적인 상황도 그러했지만. 이미 소문은 과장되다시피 부풀려졌다. 항간에는 내가 불타는 자동차의 문짝을 맨손으로 뜯어내서 사람을 구했다는 말이 돌 정도이니. 때문에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주느라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어머니,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어요. 김기사 아저씨가 보셨으니 알 거예요. 기사가 이렇게 크게 난 건 정부 차원에서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가 더 용이하니까 그렇게 한 걸 테고요. 경제도 안 좋은데 8차선 도로에서 연쇄추돌이 일어난 것을 크게 보도하기 보다는 국민의 영웅적인 행동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요.”
“그래도 현아 다음부터는 이렇게 위험한 일에 나서면 안 된다. 엄마는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운데 한편으론 걱정 되서 그래. 알았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더랬다. 이따금 힐끔대는 시선은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것도 그럴 것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대부분이 동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위인상이라니.’
전 학년 조례 때 강단에 올라서 교장선생님께 직접 상장을 수여받았다. 학교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를 인정한 것이라 했다. 그 날 선생님들과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삶 한국대학교 법학과에 합격을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현아, 이름을 개명해야하는 거 아니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현이 누나.”
“이 팬레터 좀 봐, 서태지 부럽지 않다 야. 이제부터 현이 너를 강태지로 불러야겠어.”
김미현의 우스갯소리처럼 그날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반인 팬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들이 아닌 나 자체를 좋아하는 팬들이었다. 90년대 말을 강타했던 농구선수들의 인기를 아는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내 소속을 어찌 알았는지 갤러리로 날아오는 팬레터의 숫자가 상당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미현이 누나가 혀를 내두를 정도.
“현아, 정말 이러다가 팬클럽이라도 생기는 거 아닐까?”
미현이 누나가 농담반 진담반이 섞인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정말 팬레터의 숫자만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으니. 아서라, 이런 종류의 인기는 단호하게 사양이다. 하물며 바짝 타오른 인기는 장작불과 같아서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현을 위하여, 팬클럽 이름으로 어떨까?”
아니, 이 누나가?
* * *
“아이고, 우리 장한 손녀사위 왔는가―!”
오랜만에 평창동에 할아버지와 함께 들르니 흰 앞치마를 두른 왕회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중식도만 쥐어준다면 곧장 홍콩영화에 출연해도 이상치 않을 만큼 완벽한 주방장의 모습이었으니. 뒤따라 나오는 임혜라 이사장의 얼굴에는 못 말리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손가, 도대체 그 옷차림은 뭔가?”
“하하, 사돈. 사위 사랑은 장모라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씨암탉을 잡아봤네. 우리 손녀사위가 엄청 장한 일을 하지 않았나.”
“손가, 계열사 사장들이 자네 지금 모습을 보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걸세.”
아무렴, 제일그룹 내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왕회장이었으니. 지난 삶 제일그룹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다큐멘터리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왕회장은 마치 마피아의 보스처럼 무서운 분이셨다고.
“어때, 입맛에는 다들 맞는가?”
각종 귀하다는 한약재를 넣고 푹 고아낸 삼계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격일 것이다. 재료가 좋아도 음식을 하는 이의 실력이 부족하면 허사인 경우가 많은데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안에 넣었더니 눈이 번쩍 떠졌다. 왕회장의 손맛이 이리도 좋았단 말인가.
“역시 아버님 손맛은 예나 지금이나 엄청 나요.”
“그렇게 맛있더냐?”
“네, 아버님. 저는 이 맛을 따라하려고 해도 절대 안 되더라고요.”
임혜라 이사장이 감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으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칭 미식가라 할 수 있는 그녀조차도 놀랄 정도로 맛 만큼은 가히 최고였다.
“암, 내가 함경북도에서 도매업을 안했다면 식당을 했을 게야. 서울에 처음 내려왔을 때 너희 시어미에게 내가 해준 음식이다. 윗동네에서는 닭을 보기가 참 힘들었거든. 매번 토끼나 꿩만 먹다가 닭고기를 삶아주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겨우내 산등성이에서 채취한 골리수를 육수에 가미했지. 몸이 허약한 임자를 위해서 말이야.”
왕회장의 삼계탕에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지 않은가. 그 순간 왕회장이 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으니.
“내가 이 삼계탕을 우리 ‘식구’한테만 꼭 해준다네. 안 그러느냐, 며늘아가?”
“당연하죠, 아버님. 저도 일선 씨와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 처음 대접받았는데요.”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자칫했으면 사레가 걸릴 뻔했다. 물 잔을 들어 겨우 입을 축이자 임혜라 이사장이 웃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나를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이 확실했다. 식사가 끝나고 티타임을 즐길 즈음 임혜라 이사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아, 이제 여름 방학 동안 해외에 나가 있는 다고?”
“네, 한 달 동안은 런던과 베를린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곳에서 유명한 음악가분들도 만나고 세계 유수의 악단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
“재능이 많아도 너무 많구나. 이러다가 우리 손녀사위를 다른데 뺏기는 것은 아닌가 몰라. 사돈, 하루라도 빨리 약혼식을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왕회장의 장난에 할아버지가 맞장구를 쳐주셨다. 웬걸, 회사에서는 영락없는 회장님의 위엄을 선보이시는 두 분이 꼭 만나면 개구쟁이들처럼 짓궂지 않은가. 그때였다.
“현아, 앞으로 VH컴퍼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
“김 실장에게 전해 듣기로는 네 사업수완이 만만치 않다는데 말이다. 아주 뛰어난 지휘자의 기량을 갖췄다고 말이야. 지금 상황을 보면 네 작은 삼촌과 이모는 지분을 팔 것이 확실시 되었지만 어찌 보면 조족지혈이지,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큰 삼촌은 아니지 않느냐?”
가끔가다 왕회장이 이토록 날카롭게 질문을 해올 때가 있었다. 난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할아버지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동주를 지켜내기로. 허나 동주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큰삼촌의 지분이 필요했으니. 본래 동주의 후계는 큰삼촌이 이어받는 것이었으니 어렸을 적부터 지분이 체계적으로 증여가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씁쓸한 입맛을 감추기 위해서 인지 찻잔을 들었다.
“지금이야 유회장이 있으니 네 큰 삼촌이 가만히 있겠지만 훗날은 아니지 않더냐. 경영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는 것이다. 똑똑한 현이 너라면 알고 있겠지?”
암, 돈 앞에 핏줄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물며 큰 삼촌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과정이었으니. 제일그룹만 봐도 피보다 돈이 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지 않았던가. 지난 삶 손일선이 어떻게 제일그룹을 집어삼켰는지 알고 있다. 왕회장이 죽고 난후 손일선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의 동생을 그룹에서 쳐내는 것이었으니.
“현아, 할애비들이랑 내기 어떠냐?”
“내기요?”
“그래 일전처럼 말이다. 그때는 내기의 보상이 바이올린이었더랬지. 이번에는 네 할아버지와 내가 합심해서 보상을 줄 것이야. 허나 그만큼 문제가 어려워지겠지.”
그때 왕회장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것이었으니.
“앞으로 이년 안에 동주의 지분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