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12화 >
“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중년의 서양인, 새뮤얼 가드너는 강현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아시아 국가를 여행차 들른 적은 있지만,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도착한 외지外地에서 유일하게 온정의 손길을 뻗어준 어린 신사. 재벌가문만 모인다는 연회에서 그 소년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가드너씨?”
난 중년인의 이름을 잊지 않고 말해주었다.
“제 이름 기억하는 군요. 그때 제가 어린 신사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압니까?”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두 사람이 반갑게 대화를 나누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것도 그럴 것이 강현의 영어발음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 지난 삶 독종이라 불리며 법학을 수학했던 강현. 외국어라고 다를 리가 있겠는가, 원어민 못지않은 발음은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새뮤얼과의 대화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미스터 손. 실례했습니다. 제가 어린 신사를 만나서 너무 신이 났나봅니다.”
새뮤얼 가드너는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손일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고 왕회장도 마찬가지. 오히려 새뮤얼과 강현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듣고는 흡족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유회장, 자네가 손자교육을 정말 잘 시켰군. 유학 다녀온 내 자식 녀석들보다도 외국어 발음이 훨씬 좋지 않나. 눈을 감고 들으면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분간이 안갈 지경이야.”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지난번 김기사에게 살짝 전해 듣긴 했지만 이렇게나 영어를 잘할 줄은 몰랐던 모양. 할아버지는 기특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씀하셨다.
“현아, 잠시 어른들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으렴.”
친구들?
아아, 재벌3세들을 말하는 것일테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지배인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새뮤얼 가드너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는데 그보다 손일선의 시선이 눈에 띄었다. 과거 저런 눈빛을 본적 있었지. 손일선 특유의 시선이다. 가지고 싶은 인재를 보았을 때 발하는 안광.
‘꿈 깨셔, 이번 생에는 당신 밑에서 일안해.’
나는 정중하게 할아버지와 왕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지배인을 따라나섰다. 그러고 보니 새뮤얼이 어떤 사람인지 듣지를 못했네, 도대체 누구기에 재벌삼대가 모이는 연회에 초청 받은 거지? 하물며 손일선과는 꽤나 친분이 두터워보였는데.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무렵.
“다 왔습니다.”
지배인이 직접 보석이 박힌 문잡이를 열어주었다.
허.
연회속의 연회장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밖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호텔 직원들이 와인잔이 아닌 과일 음료가 담긴 잔을 옮기고 있다는 것과 연회를 즐기고 있는 이들의 연령대가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 뿐. 지배인은 안내를 끝마치자 정중히 뒤돌아섰다.
따갑다싶을 정도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이름만 대면 알법한 기업의 3세들. 어린 녀석들이 어른들을 보고 배운 것인지 벌써부터 파벌을 만들고 인맥을 쌓고 있다. 제 딴에는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일 테지만 내 눈에는 가소로워보였다. 더군다나 이중에 절반이상이 훗날 이름조차 유명무실하게 되니.
“오빠!”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
흰 드레스를 입은 손유하였다. 나도 정장을 차려입고 보타이를 했을 정도로 구색을 갖추긴 헀지만 손유하 만큼은 아니었다. 흡사 시상식 무대에 오르는 여배우처럼 귀티가 철철 흘러넘친다. 헌데 얼음여왕에게 듣는 오빠소리라니, 지난 삶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머리가 다 쭈뼛 선다.
“보고 싶었어!”
손유하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지난 삶 얼음여왕이라 불리던 제일물산 손유하 사장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말로 설명 못할 괴리가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11살의 앳된 소녀 일뿐. 그나저나.
‘의외네.’
재벌삼대가 모이는 연회.
정확히는 재벌가문에서 후계자로 인정받은 이들만 참석할 수 있는 모임.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이 왕회장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었지만 손유하는 예상외였다. 왕회장은 슬하에 총 삼남이녀를 두었는데 이미 손자들은 열 손가락을 전부 채울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손자들을 전부 재치고 손녀가 오다니.’
역시 왕회장은 이런 점에서 할아버지와 성향이 달랐다. 장자승계가 아닌 철저한 약육강식. 이러한 점이 제일그룹을 재계 서열1위로 확고히 유지시키는 것이 아닐까.
* * *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박선영은 심장이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재벌가문의 손녀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하던 차 뜻밖의 제안이 날아들었다. 연회자리에서 손유하와 함께 협주곡을 연주하지 않겠냐는 제안. 반주를 위한 피아노 건반을 칠 사람은 많고 많았지만 유하가 박선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서 문제였다.
단 한 번의 반주였지만, 페이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
박선영은 당연히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했지만 피아노 연주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기에. 제 아무리 손유하가 재능이 탁월하다지만 아이니 만큼 아직 경험이 모자르니 잘 타이른다면 어렵지 않게 커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저, 저 사람은 대한철강 구회장이잖아.’
평범한 가족모임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모임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직원 대기실 문틈사이로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예사 인물들이 아니었다. 재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번쯤은 아홉시 뉴스나 신문기사에서 얼굴을 봤을 법한 얼굴들의 연속.
꿀꺽.
박선영은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실감했다. 가슴이 거칠게 뛰는 것이 우황청심환을 먹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차라리 손유하라도 함께 있었으면 좋으련만. 피아노 반주로 박선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울 때는 언제고 얼굴 한 번 안보이네.
“오빠, 나 바이올린 가르쳐 줘!”
대뜸 바이올린을 가르쳐 달라는 손유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면서 의자에 앉아있었다. 굳이 이곳의 재벌3세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은 없었기에. 더욱이 그들 또한 나에게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일그룹의 손유하 때문일 터. 손유하는 훗날의 별명처럼 재벌3세들에게 까칠하게 굴었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그러지 않는 것 같다.
“유하 너는 이미 선생님이 있잖아?”
재벌 중에서도 재벌이라고 불리는 제일그룹의 3세. 사교적인 취미라고 할지라도 걸출한 실력의 음악 선생님이 붙었을 텐데 굳이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뭘까.
“아니야. 선생님도 오빠처럼 겨울을 불러내지는 못한다고.”
“겨울?”
“응, 오빠가 연주하면 진짜 겨울이 오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일전 손유하 앞에서 연주를 할 때는 너무 몰입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겨울을 불러냈다고 말하다니. 내가 마법사도 아닌데, 아이의 상상력은 역시 대단하다. 그나저나 할아버지집 오렌지 주스도 엄청 맛있었는데, 여기는 그 이상이네.
* * *
“현아,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느냐.”
할아버지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친구라, 재벌3세들과 한 바구니에 있어봤지만 절대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지난 삶 그토록 바라고 바랬던 자리임에도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거북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은 아니지, 어쩌다보니 손유하와 친해졌으니까.
“그래, 이 자리의 사람들이 훗날 필요한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거라. 단 자신이 필요한 사람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구분하는 게 좋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인맥은 그 무엇보다 필수로 작용했으니.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계속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뭘까. 정말 날 후계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얼씨구, 큰삼촌의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자, 그러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속칭 어른들의 대화가 끝난 시각이었다. 다른 공간에 모여 있던 재벌3세들이 본래의 연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저녁식사가 시작될 즈음이었는데 할아버지와 내가 앉는 테이블은 공교롭게도 왕회장 일행과 함께였다.
나는 왕회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는데 손일선이 계속해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옆에 앉아있는 새뮤얼 가드너도 마찬가지. 큰삼촌은 경계하던 표정을 곧장 지워내곤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런데.
‘유하가 안보이네?’
응당 왕회장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야할 손유하가 보이질 않았다.
“유회장, 식전에 우리 손녀가 연주를 하나 할 게야. 요즘 바이올린을 켜는 것에 재미를 붙였거든.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실력이 꽤나 걸출해.”
왕회장의 자랑 섞인 말에 손유하의 행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미 연회장의 가장 앞쪽에 배치된 단상위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피아노가 옮겨져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터벅.
손유하와 박선영이 걸음을 옮겨 나왔다. 손유하의 품에는 자기 키에 딱 맞는 바이올린이 들려져 있었는데 순백의 드레스까지 더해지니 정말 콩쿨 대회라도 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헌데 함께 나온 피아노 연주자가 상당히 긴장한 게 눈에 띈다. 아무렴, 일반 청중도 아니고 대한민국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인물들이 한데 모인 것이었으니 이해는 간다.
머리가 희끗한 지배인이 사회자를 대신해 자리를 지켰는데 절도 있는 그 모습이 마치 19세기 유럽의 음악 살롱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실력이 꽤 늘었네.’
바이올린을 쥐는 자세며, 기교, 보잉까지. 일취월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이제는 사교적인 취미로 배우고 있다는 수준을 상회한지 오래인 듯 하다. 연달아 협주곡 2곡을 연주했는데 마지막 곡은 비발디 사계 겨울 3악장 이었다. 혼신을 다하는 연주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단순한 재롱잔치인줄 알았겠지.’
손유하가 누군가, 제일그룹 왕회장의 손녀이다. 더군다나 재벌삼대가 모이는 모임에서 당당히 3세의 자격으로 참석하지 않았는가. 아마 테이블 여기저기서 며느리감으로 탐내고 있을거다. 더군다나 저토록 바이올린을 잘 켤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대단하군, 손회장.”
할아버지가 손유하의 연주를 보고는 나지막이 감탄했다. 연주가 끝나자 왕회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 가득이었는데 사랑스러운 손녀가 저토록 바이올린을 잘 켜니 얼마나 대견할까, 손일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아무리 세상을 다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식칭찬이 제일인거다.
연주를 끝낸 손유하는 단상에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독주회를 끝낸 바이올리니스트 같았다. 이거이거 오늘 손유하에게 홀린 재벌3세 꼬꼬마들이 제법 되겠는데.
“아주 잘했다. 유하야.”
손유하는 왕회장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칭찬세례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다름 아닌 나에게 향해있었다. ‘얘가 또 왜 이러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들어찰 즈음.
“오빠 차례야!”
응?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다짜고짜 내 차례라는 말에 왕회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와 손유하를 번갈아 바라봤다.
“유하야, 그게 무슨 소리니?”
왕회장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손유하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현이 오빠가 바이올린 연주 엄청 잘한단 말이에요.”
두서없이 내뱉는 손유하의 말에 왕회장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손일선 그리고 심지어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새뮤얼 가드너까지 나를 바라봤다. 이 대책 없는 꼬마 숙녀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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