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4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41화 >
“이 부분이 어떻게 틀렸다고 확신하지?”
악보의 틀린 부분을 바로 짚어낸 소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오로지 귀에 의존해서 음표를 적어 내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파가니니가 만들어놓은 함정에 발이 빠지신 거죠.”
“함정?”
“이번 영화를 맡은 파가니니는 아주 장난기가 심한 친구 같거든요. 분명 누군가 청각에 의존해서 자신의 악보를 따라 써 내려갈 거라고 생각했겠죠. 영화 속과 같은 선율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제로 음표가 이랬을 거예요.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소년은 능숙하게 펜을 빌려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마른 모래알에 파도가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오선 위에 음표를 그려 나간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소년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마음에 들었던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영상 속에서 파가니니는 알려진 기술과는 다른 주법을 사용했어요.”
“다른 주법?”
“예컨대 활로 긋는 궁주와 왼손으로 퉁기는 피치카토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활과 현을 서로가 시기하듯 날카로운 선율을 만들어냈죠. 그 방법도 말씀드릴까요?”
줄리어드 음악원장 요제프는 놀람을 속으로 감추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의 음악적 지식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악보의 틀린 부분을 바로 짚어내는 것은 물론 파가니니와 관련해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마치 올리버 학과장과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연륜이 느껴지는 게 아니겠는가.
“어떤 주법을 사용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영화 속 동시 녹음을 맡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희대의 천재였으니.
소년은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고 요제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른손에 쥔 이 펜이 활이라 생각하고 허공의 현을 왼손가락으로 짚어볼게요.”
“설마 이 대목은?”
“네, 선상 위에서 춤을 출 때 연주하는 장면입니다.”
요제프는 상대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켜왔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무형의 바이올린이 실제 연주를 하는 것처럼 눈에 들어차지 않는가.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파가니니가 어떠한 방법으로 연주를 했는지 지금 이 순간, 소년의 손가락이 다시금 재현해 내고 있었다.
“제가 이제 나가봐야 할 거 같으니 마지막으로 악보의 남은 부분은 여기 적어드릴게요.”
“뭐?”
요제프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설마하니 자신조차도 떠올리지 못한 악보의 남은 부분을 소년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맙소사―!
악보를 받아 든 요제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엔딩크레딧이 전부 올라갔음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 요제프는 결국 영화관 직원이 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옆자리에 앉았던 소년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귀신처럼 사라지고 난 뒤였다.
* * *
“미안해, 유하야.”
강현의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손유하를 내버려 둔 채 옆자리에 앉았던 노신사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던가.
파가니니의 선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청중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왠지 눈치가 보였다.
“그럼 나랑 같이 저녁 먹어―!”
“저녁?”
“응, 사실 오빠랑 같이 가고 싶었던 식당이 있단 말이야.”
강현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볼에 잔뜩 바람을 넣은 채 토라진 유하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기 때문.
뭔가 거창한 것을 말할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소박해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무렴, 날아가는 참새 날갯짓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때라지만 얼음여왕의 이러한 모습은 항상 색다르게 느껴졌다.
‘제일물산.’
남자들도 버거워한다는 제일물산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가. 강현은 지난 삶 마주했던 손유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머리맡을 쓰다듬었다.
“그래, 같이 먹자.”
한편 손유하의 얼굴은 다시 설익은 홍시처럼 귀 끝부터 점차 붉어졌다.
“어?”
“오빠가 좋아할 거 같아서 골랐는데 별로야?”
“그럴 리가!”
강현은 고개를 완강히 가로저어 보였다. 어째 한인타운도 아닌 곳에 떡하니 한식당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간 느끼한 치즈와 기름기로 가득했던 음식들로 고생했던 혀에 군침이 돌았다.
손유하가 이곳을 그토록 찾아오고 싶어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강현이 그 누구보다도 한식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으니.
“오빠, 여기 된장말이가 정말 맛있어―!”
강현이 한입 크기로 잘린 두부와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넣자 손유하가 감상을 기다리는 듯이 눈을 빛냈다.
강현은 말 대신 한 번 더 한 숟가락 더 크게 떠 그대로 입안에 넣어 보였다. 그 바람에 양 볼은 터질 듯 밥 알갱이와 된장찌개로 가득하다.
그제야 학수고대했던 손유하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유하야 또 하고 싶은 건 없니?”
“말해도 돼? 나 사실 오빠랑 야경도 보고 싶은데.”
“야경?”
아무렴, 이역만리 타국에서 힘들게 공부를 하는 유하에게 야경 하나 보여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학생들끼리 뉴욕의 야경을 보는 게 위험하지는 않냐고?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라, 재벌 집안의 후계자인 만큼 그에 걸맞은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뉴욕의 야경 스팟은 여러 곳이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손유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시가지와 브리클린 브릿지가 보이는 덤보였다. 훗날에도 유명하지만 지금도 관광명소로 꽤 유명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강현이 손유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고마워, 오빠.”
“고맙기는 뭘.”
“아니야, 정말 고마워―!”
강현은 손유하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어찌 보면 아직 어린 나이지 않은가. 허나 또래에 비해 생각이 훨씬 빨리 트였으니.
하물며 타국에서 홀로 생활한다는 것이 성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분명 오늘이 그녀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힘들 때마다 돌이켜 볼 수 있는 사진첩처럼 말이다.
화려한 뉴욕의 네온사인 아래, 브루클린 브릿지의 강변이 노을 지고 있었다. 유람선이 강변 위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고 선선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강현이 손유하의 작은 손을 더욱 확실하게 마주 잡았다. 그 순간 손유하는 자신의 떨리는 심장이 수면 위의 흔들림보다 심할 것이라 확신했다.
* * *
“도대체 누구였을까.”
줄리어드 음악원장 요제프는 주름진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혼잣말을 내뱉듯 의문을 토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시선에 악보 한 장이 들어왔다. 영화관에서 보았던 의문의 소년이 써 내려간 악보였다.
“이탈리아의 베르디, 영국의 왕실음악원, 모스크바, 아니면 상해?”
요제프의 입에서 세계 최고의 음악원들이 줄지어 흘러나왔다. 것도 아니라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줄리어드 음악대학의 학부생일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후회가 되었다. 이토록 요제프가 아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치 파가니니가 쓴 것처럼 확실하고 기품 있는 악보였다. 음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에 등장했던 선율이 머릿속으로 재생되었다.
단 한 번의 청음으로 악상을 파악해 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란 말인가.
“나라도 불가능하지.”
한평생 음악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요제프마저도 백기를 들 정도였으니. 가히 탐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이었다.
하물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치 마법에 홀리는 것처럼 소년의 말을 경청하게 되지 않았던가.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요제프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도대체―!”
요제프가 신경질적으로 다시 한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봤지만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았기 때문. 영화관이 어두웠기도 했지만 얼굴보다는 목소리와 악보에 더 시선이 갔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깊은 눈동자일 것이다. 호수를 보는 것처럼 맑고 투명해 잔상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때였다.
“원장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올리버 학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으니. 올리버 학과장이 요제프를 찾은 이유는 이러했다.
일전 보았던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교단에 세우겠다는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함이었으니.
“학과장 그게 무슨 말이오,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교단에 세우다니?”
“모스크바에서도 이미 학부생들과 교수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던 음악가입니다. 나이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음악가로서의 모습을 염두에 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화 ‘파가니니’의 선율은 그야말로 전율을 돋게 하기 충분했으니.
하물며 나이를 떠나 음악가로서의 모습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맞았다. 영화관에서 봤던 그 소년이라면 나이가 무슨 대수겠는가.
올리버는 요제프의 담담한 모습에 의아함을 머금었다. 이토록 쉽게 설득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
“원장님,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건 뭡니까?”
“이번 파가니니 영화를 촬영하면서 찍은 메이킹 필름이라고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연주가 등장합니다.”
장피에르 감독에게 부탁해 메이킹 필름을 비디오테이프로 받았다. 아마 이것을 본다면 요제프 원장의 마음을 확실하게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올리버 학과장은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메이킹 필름이 재생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당탕탕 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장님?”
브라운관 속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기립한 요제프였다.
* * *
“키가 컸나?”
몸에 딱 맞춰 제작했던 정장이 조금 짧아진 느낌이 들었다. 지난 삶을 떠올려보면 고등학교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키가 크기 시작했으니 착각은 아닐 터.
그나저나 앳된 얼굴에 정장은 여전히 익숙지가 않았다. 어찌 보면 지난 삶 한평생을 넥타이 부대로 살아왔었거늘.
줄리어드 음악대학.
세계 최고의 음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공연예술학교이지 않은가. 설마하니 내가 이곳에 초청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리우드에서 마주했던 노교수들이 어찌나 전화를 걸어오던지 한동안 김상국 실장이 곤란해했을 정도였다.
“현아, 미국에서 정말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니?”
“아직은 일러요.”
김상국 실장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바바라 채광이 탐사지역을 확실하게 조사하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으니.
하물며 국내에 있는 욕심 많은 삼촌과 이모가 낚싯바늘에 확실하게 걸리게 만드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 누가 말하지 않았는가. 서두를수록 실수를 하는 법이라고.
“가만 보면 현이 너는 어째 여유는 타고난 것 같다.”
“여유요?”
“웬만한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하거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담력이 없으면 초조해지게 마련이니까. 그런 점에서 현이 너는 믿음이 완강해. 그게 아니고서야 뉴욕까지 와서 데이트를 하다니. 오죽하면 내가 현이 너한테 연애를 한 수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 다 들더라.”
김상국 실장이 아침부터 농을 던져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삶 국무총리였던 김상국 실장은 결혼을 늦게 하는 편이었지.
각진 턱에 날카로운 눈매가 포인트인 꽤나 매력적으로 생긴 얼굴이었지만 말과는 다르게 도통 연애는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아무렴, 그 정도 야망이 없고서야 푸른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호텔 로비를 벗어날 무렵이었다.
“오빠아―!”
손유하가 멀찍이서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양손에는 도시락까지 들려있었다. 시간 때를 제때 맞춰온 것이 김상국 실장에게 물어봤던 모양.
“유하야, 학교는?”
“개, 개교기념일이야―!”
“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하루쯤 농땡이를 피워도 괜찮을 나이지 않은가.
그동안 끊임없이 수학을 해왔을 테니, 머리도 식힐 겸 이참에 함께 줄리어드에 견학을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손유하는 잔뜩 신이 난 채 손수 만들었다는 도시락을 자랑해 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기자기한 내용물을 보니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줄리어드에서 오빠랑 계속 같이 있지는 못하는데 괜찮겠니?”
“괜찮아!”
“그래?”
견학을 가는 것이지 놀러 가는 입장은 아니었으니.
그때 유하가 ‘안나 언니가 모스크바에서 오빠가 강연하는 걸 얼마나 자랑했다고―!’ 하며 부연해 왔다.
그제야 유하가 아침부터 부리나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안나가 봤던 내 모습을 자신 또한 보고 싶었던 것일 터.
그 순간 졸지에 운전기사가 되어버린 김상국 실장이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리 봐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얼마 전에 봐 놓고도 저렇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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