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5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51화 >
“벌써 한 명이 기권을 할 줄이야.”
스펜서의 볼이 실룩였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기 때문. 설마하니 1차 오디션이 끝난 직후 한 명이 포기를 선언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실력이 부족해 기권을 선언한 것이 아니겠냐고? 어림도 없는 소리, 스펜서가 선정한 신예 지휘자들은 하나같이 각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거장이었다.
“마에스트로, 단원들도 충격을 받았는데 지휘자들은 더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드미트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부연했다. 스펜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자신 또한 강현의 지휘를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지 않았던가.
일사불란하게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편성을 재배치하는 모습은 가히 영화를 보는 듯했다. 예컨대 이름난 거장이라고 할지라도 단번에 그토록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침없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수 씨가 기권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존심이 꽤 강하다고 알려진 지휘자이지 않습니까?”
“자존심이 강하기뿐이겠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웬만한 필하모닉의 수석단원들 조차도 수와는 신경전을 벌이기 싫어한다고 하더군. 고고한 자존심만큼이나 근성이 강하다고 말이야. 객원이라고 할지라도 지휘자로서 프라이드가 어찌나 강한지 말 못 할 정도라고 하니. 아마 그렇기 때문에 포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지.”
드미트리는 마에스트로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 1차 오디션이었지만 강현이 보여준 모습은 지휘자로서의 역량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오랜 세월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이라 손꼽히는 런던 심포니에서 연주한 단원들조차 놀람을 감추지 못했는데 같은 지휘자의 길을 걷는 음악가는 오죽했을까.
“현은 일전보다 훨씬 성장했더군.”
“맞습니다. 솔직히 능수능란하게 편성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이토록 빨리 변화할지는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요.”
일전 런던 심포니에서 지휘를 배웠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도 분명 뛰어나기는 했었지만 이러한 연륜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허나 1차 오디션에서 보여줬던 현의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지휘를 해온 마에스트로처럼 보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 또한 꽃을 피운 현이다. 하물며 지휘자로서의 재능 또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이제는 어디까지 그 재능이 만개할지 궁금해졌다.
“드미트리, 자네라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쳤을 때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착잡하고 슬픈 감정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이번 오디션에서 탈락하는 지휘자들의 심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왕실공연은 지휘자들에게 있어 의미가 지대하니 말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얻지 못할지도 모르죠.”
“맞아,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수는 달랐지.”
스펜서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국의 수는 오디션을 포기하며 마에스트로에게 한 가지 말을 남겼는데 그 목소리가 아직도 마에스트로 스펜서의 귓가에 맴돌았다.
“가야 할 길을 찾았다라.”
* * *
“농담하는 겁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연을 앞두고 그와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가. 특히나 음악가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하다. 하물며 난 수에 비하면 지휘 경력이 미천하다고 표현할 만큼 짧았다.
허나 눈앞의 사내는 도저히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목소리는 진중하기 그지없었으니.
“일단 좀 내려주지?”
크리시가 멋쩍은 표정을 하며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제야 공중에 떠 있던 수가 편안히 바닥을 밟고 섰는데 영 겁먹은 눈동자가 아니다. 도리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자신의 차림새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닌가.
구겨진 넥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곧장 풀어헤치는데 그 모습이 꽤나 자연스럽다.
“오디션은 기권을 했네.”
“기권이요?”
“더 이상 왕실공연에는 흥미가 동하지 않으니 말이야.”
말을 끝마치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꽤나 위험하다. 이는 일전에도 경험한 적 있는 시선이었다. 예컨대 왕회장과 백정훈의 눈빛과 비슷한 맥락이리라.
“가르침에는 나이를 불문한다.”
9개의 성조가 뚜렷한 광둥어였다. 내가 통역 없이도 알아듣자 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물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언어에 통달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군’이라고 부연하는 것이었으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대가는 무엇을 바라나?”
마치 지난 삶 시청했던 유명 드라마 속 명대사 같지 않은가. ‘얼마면 되겠니?’라고 말하던 배우처럼 수의 눈빛도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재벌 2세인 줄 알 만한 대사를 내뱉고는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다.
그에 난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돈이라면 나 또한 부족함이 없었으니.
그때였다.
“부친께서 회사를 경영하시던데 중국 쪽 사업 확장을 원한다면 내가 손을 써주겠네. 일부러 뒷조사를 한 것은 아니네. 그저 음반지에 나와 있는 프로필 중 가족 사항을 봤을 뿐이니.”
“사업 확장이요?”
“자네가 내게 가르침을 준다면, 나 또한 그에 합당하는 보답을 하겠다는 뜻일세.”
지난 삶의 기억을 떠올렸다. 클래식에 관심이 있었지만 ‘수’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명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모든 클래식계 인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나저나.
‘정말 재벌 2세라도 되나?’
아니면 중국 공산당의 고위 관료 집안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으로의 사업 확장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만 예의 그렇듯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다.
“죄송하지만, 지휘를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만큼 보답을 받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부족해서?”
“아니요, 오히려 너무 광범위해서 문제인 걸요. 사업 확장이라는 게 한두 가지 문제가 얽혀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희 부친께서 무슨 사업을 하시는지도 잘 모르실 텐데 말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거절을 표하는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우리 집안도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중국 내에서 원하는 길은 얼마든지 열어줄 수 있어.”
어째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은 것 같지 않은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수는 나를 저택에까지 초대해 왔다. 난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저택까지의 이동은 크리시가 운전을 맡았다.
얼마나 갔을까.
어?
낯익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심지를 벗어난 교외였다. 일전에 경험한 적 있던 거대한 철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었으니.
분명 금왕그룹 소유의 저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 의아한 시선에 수가 시선 너머 저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가문의 저택일세.”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수가 금왕그룹의 하나밖에 없는 장남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수가 내 시선에 들어찼다. 그제야 ‘수’라는 이름을 기억 못 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지난 삶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재벌이었기에.
경악 뒤로 거대한 철문이 굳세게 닫혔다.
* * *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겠다.”
스펜서가 세 명의 지휘자들을 바라봤다. 1차 오디션에서 수가 기권을 한 것은 의외였지만 미국의 마일즈와 유럽의 매튜는 금방 수긍했다. 그만큼 강현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
“같은 교향곡을 두고 세 명이 차례로 연주를 한다, 순서는 당일 제비뽑기로 정할 것.”
짧고 간단명료한 문제였다. 허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같은 교향곡을 지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다. 그렇게 되면 세 명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 또한 명명백백하게 세 사람의 차이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마일즈와 매튜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하니 같은 곡으로 심사를 볼 줄을 몰랐기 때문.
하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총보를 받아 드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현, 자네는 잠시 남도록.”
스펜서는 현을 불러 세웠다. 일전 드미트리에게 들었던 교향곡을 완성했다고 들었기 때문. 강현에게 볼 수 있냐고 물으니 문제가 없다고 답해오지 않았던가.
매튜와 마일즈가 떠나간 자리에 현과 스펜서만이 남았다.
“형식이 특이하군?”
“기존의 형식대로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실제로 들어보시면 더 놀라실 거예요.”
강현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스펜서는 악보를 받아 들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십 개의 오선 위에 펼쳐진 악상의 향연은 그야말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악기의 편성은 물론이고 2악장과 4악장의 쓰인 파트의 추가, 그리고 혼성4부 합창에 이르기까지.
정녕 어린 소년이 이러한 악보를 써 내려갔다는 것이 믿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백정훈과 마찬가지로 스펜서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초연은?”
“아직 따로 생각한 장소는 없어요. 왕실공연이 끝나고 괜찮다면 런던 심포니의 단원분들에게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스펜서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만약 다른 단원들 또한 지금 강현의 말을 듣는다면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만큼 매혹적이고 눈을 현혹시키는 악보란 뜻이다.
스펜서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단원들을 소집해 이 교향곡의 초연을 진행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인원이 다소 부족했다. 이러한 대규모 관현악편성은 쉽사리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교향곡의 표제는 어떻게 되나,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지휘실로 가서 나와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야겠어. 시간 괜찮겠나?”
“마에스트로,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
스펜서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교향곡은 서사의 개념으로 수많은 생각과 이념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명곡의 주인들은 전부 생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흥분이 될 수밖에. 살아 있는 작곡가에게 직접 교향곡의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닌가.
허나 강현은 아쉬워하는 스펜서를 뒤로한 채 묘한 말을 덧붙였다.
“과외를 약속한 시간이거든요.”
* * *
수는 강현이라는 소년이 놀라웠다. 국적과 나이를 떠나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적 지식을 교류할 때면 마치 동년배를 넘어서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졌다. 음악적 재능은 물론이고 그 깊이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도련님, 현 씨가 도착하셨습니다.”
하물며 일전 집사가 만났다던 신비한 소년이 강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때마침 강현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형형한 눈빛은 물론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를 보자면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이 나는 것만 같았다.
수는 그제야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언젠가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이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던 말 말이다.
“수 씨, 제가 내어드린 숙제는 잘하셨습니까?”
수는 마른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냈다. 성인이 되어서 고등학생에게 과외를 받는 모양새 아닌가.
하지만 강현이 선생님으로서의 모습이 되었을 때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틀린 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짚어주는 것이 그야말로 귀신같았다.
“이 부분은 해석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2악장의 서두에서 격렬하고 저항하는 선율을 의미한다니요. 제가 내어드린 악보에서는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다음 과외 전까지 제출하세요.”
악보의 해석은 작곡가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저토록 확실하게 말하는 이유는 악보의 주인이 바로 강현 자신이기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토록 어린 소년이 이러한 악보를 그려 나갔다는 것이.
그 뒤로 엄청난 재능의 벽이 느껴졌다.
“다시.”
강현이 오케스트라를 대신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수가 피아노를 바라보고는 지휘 단상에 선 것처럼 지휘를 했다.
국제 콩쿠르의 심사 방법으로 자주 쓰이는 지휘법이 아니었던가. 허나 수는 강현의 시선이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들보다 더욱 강렬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몇 번이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처음으로 돌아갔다. 강현의 피아노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믿길 만큼.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유려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반면 수의 팔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이었으니. 벌써 몇 시간 째 쉬지 않고 계속 지휘를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잠깐 쉬도록 하죠.”
“현, 계속하지.”
“수 씨, 지휘를 계속한다고 해서 실력이 좋아하지는 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운동도 인터벌일수록 근육이 더 잘 붙는다는 걸요. 그리고 한동안은 제가 못 올 거예요. 마지막 오디션의 과제가 떨어졌으니까요. 그러니까.”
늙은 집사는 두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뫼시고 있는 도련님이 저토록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무표정일지 몰라도 오랫동안 도련님을 모셔온 늙은 집사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찰떡같이 알고 있었다.
그때 피아노 의자에 앉은 강현이 말을 하자 도련님의 볼이 기꺼운 듯 실룩였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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