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8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88화 >
“푸른 하늘의 성.”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세계적인 음악 도시이다.
빈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는 왈츠와 도나우강, 그리고 쇤부른 궁전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20세기가 되면서 한 가지가 추가되니, 바로 푸른 하늘의 성이었다.
과거 오스트리아 대귀족이 살던 궁전을 여제 카라스가 매입한 것이었으니.
이로 인해 한때는 오스트리아의 여왕은 쇤부른도 벨베데르 궁전도 아닌 푸른 하늘의 성에 살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을 정도였다.
“애덤, 뭘 그리 유심히 보고 있는 거야?”
“여제 카라스의 가족사진.”
애덤의 손아귀에는 사진 한 장이 들려져 있었다. 바로 세상에 공개된 여제 카라스의 가족사진이었으니.
과거 푸른 하늘의 성을 배경으로 한 채 젊은 여제와 그녀의 아이가 손을 마주 잡고 있다.
“애덤, 현이 여제의 초청을 받아 궁전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어?”
아무렴, 이미 클래식계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아니었던가. 그간 두문불출하며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던 여제 카라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강현이라는 젊은 지휘자를 직접 자신의 궁전으로 초청한 것이었으니.
“벌써 십칠 년이 흘렀군.”
카라스가 푸른 하늘의 성에서 모습을 감춘 세월이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자신이 평생을 일궈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던 그녀였다. 수많은 마에스트로들과 음악가들이 그녀의 선택을 만류했지만 확고한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악도 지휘도 아닌 아이였으니까.
“애덤, 그런데 그 소문도 들어본 적 있어?”
“무슨 소문?”
“카라스의 궁전에 유령이 살고 있다는 말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애덤이 의아한 시선으로 샤론을 바라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확고하다 못해 담담했다.
“카라스의 궁전에는 카라스와 그녀의 비서, 그리고 메이드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지?”
“알고 있어. 여제는 결코 자신의 집에 아무나 들일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 카라스의 궁전에서 일을 했던 메이드의 말에 의하면 궁전에는 수십 개의 방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건 몇 개에 불과한데, 매번 같은 시각에 빈방 중 하나에서 유령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뭐?
“아무도 살지 않는 방에서 말이야.”
* * *
끼리릭.
음산한 소리를 내며 ‘0703’호의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불이 꺼져 있는 탓인지 문 너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하던 그 순간,
우르르쾅―!
번개가 내리치며 창가로 빛이 번쩍였다.
꿀꺽.
허여멀건한 형체가 보였지만 소매로 두 눈을 비벼 보이고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카라스의 말처럼 누군가 살고 있다면 그야말로 이건 큰 실례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다시피 옮겼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뒤통수가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악보를 써야겠다.”
창가를 때리는 장대비 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의문의 ‘0703’호 때문일까. 스산한 악상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오선 위의 음표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끊임없이 그려지니, 예컨대 슈베르트의 마왕을 닮은 비장한 음악이 탄생하리라.
똑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 너머에서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난 악보를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오빠, 아직 안 자네?”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분홍색 파자마 차림의 얼음여왕이 눈앞에 서 있었는데 이럴 때 보면 딱 그 나이대의 소녀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까.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무서워서 혼자 못 있겠어.”
“이상한 소리?”
“응, 오빠는 못 들었어?”
무슨 소리를 말하는 것일까. 문득 창문 밖에 세차게 내리고 있는 장대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장마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빗방울이 굵다. 하물며 때때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천둥 번개까지 내리치는 것이었으니.
“빗소리 말고!”
손유하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도대체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말일까.
설마하니 짐승 소리일까도 싶었지만 이렇게 장대비가 쏟아지는 통에 짐승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분명히 사람 목소리였어.”
“사람 목소리?”
“막 속삭이는 것처럼 무슨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니까.”
유하가 요즘 들어 몸이 허약해진 게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렴,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 순간 불현 듯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가 있었으니.
‘0703호?’
아서라, 여기가 유령의 집도 아닌데 무슨. 혹시나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침대맡에 걸터앉는 유하를 보니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여기서 지새고 갈 기세다.
“오빠,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다 큰 처녀가 아무 데서나 잠을 자겠다고 말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손유하의 표정을 보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마치 겁에 질린 강아지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지난 삶 제일물산에서 임원들을 휘어잡던 얼음여왕의 모습이라기에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질 정도다.
“그래, 침대에서 자고 가. 오빠는 밑에서 잘 테니까.”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악상을 전부 쏟아내려면 이 밤이 지나가도 요원할 것만 같았다.
하물며 손유하가 침대에 누워 있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 또한 편해지지 않는가. 그때였다.
아―!
바깥에서 비명 아닌 비명이 들려온 것이었으니. 손유하가 토끼 눈을 뜬 채로 얼었다.
난 문을 열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유하는 혼자 있는 게 무서운지 종국에는 내 손을 꽈악 잡으며 따른다.
저택의 복도는 벽면에 간격을 두고 희미한 조명만이 있었기에 다소 어두웠는데, 눈에 힘을 준 채 겨우 소리가 났던 근원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실장님?”
김상국 실장이 자신의 발을 부여잡고 앉아 있다.
“나도 모르게 발을 접질러 버렸어. 잠결에 화장실에 간다는 게 그만.”
그제야 손유하 또한 긴장이 놓이는지 손아귀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어, 유하랑 같이 있었어? 설마 이 야심한 시각에 둘이서.”
“이게 다 실장님 때문이잖아요. 실없는 농담 그만하시고 언제까지 화장실 앞에 앉아 있을 거예요?”
김상국 실장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어째 지난 삶 보았던 국무총리 김상국과는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허당 같은 모습이었으니.
긴장이 풀려 실없는 웃음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때쯤, 또다시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뭐지?
마치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 * *
“HYUN?”
칼빈 제약회사 부사장 제라드 칼빈은 강현의 이름을 읊조리며 미간을 좁혔다.
항암 바이러스 신약 개발로 인해 제약회사의 주가가 천정을 치솟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 중요한 시국에 하필이면 신약 개발과 관련한 지분을 외국인이 가지고 있다니.
“다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지만 말고 의견을 말해봐.”
제라드의 표정은 거만하기 짝이 없다. 것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에 어부지리로 부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그의 배다른 형제인 또다른 부사장 존 칼빈에 비하면 망나니나 다름없었으니.
“부사장님, 투자회사들이 원하는 것은 저들의 이득과 실리이니 결국 그 값에 응당하는 대가를 치러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라드는 임원의 의견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돈놀이를 하자는 거라면 존 쪽도 만만치 않아. 그쪽에서도 이 사람의 지분만 흡수하면 제약회사가 자신들의 것이 되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말이야. 좀 더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어? 일단 VH컴퍼니라는 회사의 연혁에 대해서 읊어봐.”
VH컴퍼니의 연혁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라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그저 운으로 칼빈 제약회사에 투자를 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니 엄청난 투자회사였다.
바바라 채광에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세계의 IT 기업에 다각적으로 투자까지 하고 있는.
“현이라는 대표의 정체가 도대체 뭐야?”
제라드는 의문을 뱉어냈다.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여태껏 걸어온 VH컴퍼니의 발자취가 그러했다.
듣기로는 몇몇의 부하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대표의 독단으로 움직이는 투자회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투자자금을 융통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허나 VH컴퍼니의 선택을 보자면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 * *
스피오 스피오 맴맴―!
여름날의 아침은 매미의 합창 소리로 시작된다.
널찍한 연못에는 저수지마냥 소금쟁이들이 기다란 다리를 자랑하며 떠다니지 않는가.
정원에서는 이미 마에스트로와 손유하가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다운 할머니와 손녀 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모습이다.
“그림이 따로 없네.”
마에스트로의 저택에서 보이는 풍광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었으니.
창문을 열고 다가오는 바람을 맞으면 세안을 하지 않았음에도 개운한 느낌이 든다. 그때였다.
“현아, 잠시 준비하고 나와 봐야겠는데?”
“왜요?”
“칼빈 측에서 부사장이 직접 너를 만나보고 싶다고 왔어.”
어째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다. 내가 찾아가기 전까지는 약속을 잡지 않겠다고 말해놨지만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반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물며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카라스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한 모양.
“마에스트로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제가 직접 나가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티타임을 즐기고 계시는 마에스트로께 방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편안한 복장으로 차려입었다.
아무렴, 사업적인 방문이었지만 뜻하지 않는 약속이었으니. 불청객을 맞이하는 데 정장 차림으로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아, 마에스트로께서 괜찮다며 응접실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 여기 있는 동안은 자신의 집처럼 사용하라고 말이야.”
“일단 제가 마에스트로께 한 번 더 말씀을 드려볼게요. 너무 실례되는 행동 같아서요.”
아무렴, 마에스트로가 날 어여삐 여긴다고 할지라도 넘으면 안 될 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에스트로는 여느 때처럼 맘씨 좋은 할머니의 표정으로 응접실을 사용하라 권했다.
괜스레 바깥까지 나갈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이 넓은 응접실들을 놔두고 말이다.
결국,
“통역도 대동하고 왔네요?”
응접실에서 칼빈 제약회사의 부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옆에는 독일어를 통역해 줄 통역사까지 대동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
“일단 실장님은 나가 계세요. 저하고 부사장하고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네요. 통역사는 그대로 두시고요.”
반질반질하게 머리를 올린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널찍한 응접실에는 어느새 부사장과 나, 그리고 통역사만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잠시 정적이 찾아왔을 때였다.
“정말 이 꼬맹이가 VH컴퍼니의 대표가 맞다는 말이야? 확인해 봐.”
부사장이 건방진 말투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으니. 표정은 항상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독일어를 몰랐다면 전혀 몰랐을 내용이었다.
“도대체 이 꼬맹이가 카라스와는 무슨 인연이 있기에 여기서 묵고 있는 거지. 정말 신기하구만. 나이가 열아홉밖에 되지 않았는데 투자회사의 대표라니 말이야.”
부사장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설마하니 내가 이토록 어릴 줄은 몰랐던 모양. 아니면 실제로 내 뒷배에 또 다른 거물이 버티고 있는 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떤 대가를 원하는지 물어봐, 우리 쪽에서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말이야.”
통역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정중하게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아마 언어를 재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부사장이 엄청나게 예의 바르고 정중한 사람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순간,
“꼬맹이가 바라는 게 많은데 괜찮겠어?”
내 입에서 유창한 독일어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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