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8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87화 >
“에덴, 마지막으로 그녈 만난 게 10년 전이었어. 그렇지?”
“예, 마에스트로.”
꽃잎이 띄워진 찻잔이 흔들렸다.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의 눈가에는 짙은 추억이 서려 있었다.
20세기를 진두지휘했던 수많은 마에스트로가 있지만 그중 가장 대표되는 지휘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구스타프와 카라스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우위를 가리긴 힘들었지만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여제가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될 줄이야.”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여제 카라스가 명실상부 제일로 손꼽혔을 것이라고.
아직도 청중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음악가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다.
하물며 구스타프조차도 20세기의 정점은 자신이 아닌 여제 카라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설마하니 여제께서 아시아를 찾아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듣기로는 현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워.”
구스타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1983년 카네기홀에서의 마지막 지휘 이후 여제 카라스는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사람 같았다. 구스타프 자신과도 전화통화로만 대화를 나눴을 뿐 실제로 만난 것은 10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카라스가 현에 대해 흥미를 느낀 모양이야.”
아무렴, 갑작스레 연락을 해 강현에 대해 물어온 카라스였다. 시름시름 메말라가던 장미꽃이 그토록 환한 목소리로 연락을 해올 줄은 미처 몰랐다.
“현을 처음 만나게 된다면 여제께서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현과의 첫 만남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브뤼셀의 수수께끼를 전부 맞힌 장본인이지 않은가. 어렴풋이 한두 개를 맞힌 게 아니라 악장의 틀린 부분을 전부 찾아낸 그였다.
아마도 수십 년간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맞힌 처음이자 마지막인 참가자로 기억될 것이다.
“에덴, 난 현을 보자마자 카라스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켰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아이의 무궁무진한 음악적 재능이 카라스와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했지. 과거 서른 살의 내가 열다섯 살의 카라스를 처음 봤을 때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으니까 말이야.”
젊었을 적 카라스가 구스타프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단 사실은 클래식계에서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르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항간에는 구스타프가 그녀의 재능을 시기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으니.
“그녀는 이미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가 가진 지휘의 모든 것을 습득했어. 야샤 하이페츠와는 다른 의미의 천재였지. 헌데 현을 보고 있으면 바이올린을 켤 때는 야샤가 떠오르고 지휘를 할 때면 카라스가 떠올랐어. 마음 같아서는 나도 지금 당장 오스트리아로 날아가고 싶을 정도야.”
극찬이 아닐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과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지만 에덴 시므온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목도한 강현은 그만큼 놀라운 존재였기 때문에.
과연 오스트리아에서 어떤 칸타타가 울려 퍼질지 두 사람의 눈동자에 궁금함이 서렸다.
* * *
꿀꺽―!
목울대가 소리를 내며 크게 출렁였다. 것도 그럴 것이 마에스트로가 말했던 ‘0703’호가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으니.
문짝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스산한 기운까지 감도는 것 같다.
열어볼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다 비슷할 것이다. 청개구리 심보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문고리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다른 방문에는 호실 같은 게 전혀 적혀 있지 않은 반면 이 방문에만 ‘0703’이라고 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심장 고동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문고리를 향하는 순간.
“그 방문은 여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어깨 위로 손 하나가 턱 하니 올려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마에스트로의 비서 마야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닙니다. 식당에서 마에스트로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번에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0703’호의 존재를 묻고 싶었지만 마야는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렴, 입을 꾹 다문 채 앞장서 길을 안내하고 있지 않은가.
힐끔힐끔 나를 돌아보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혹여나 내가 뒤돌아서 방문 앞으로 갈까 봐 그런 것 같았다.
지글지글.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상차림이다. 흰 쌀밥은 물론이고 갖가지 한식 반찬들과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가 화룡점정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손유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술 뜨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요리 솜씨가 월등하다.
“유하야, 유학 가서 요리라도 배웠니?”
“원래 요리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배웠어. 취미야!”
얼음여왕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그도 그럴 것이 겉모습과 사회적 지위만 보자면 평생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봤을 것 같지 않은가.
그 방증으로 임혜라 이사장의 요리 솜씨는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라면을 끓여줬었는데 면은 설익고 국물은 한강을 만들어 놨었더랬다.
“현은 참 좋겠어요.”
“네?”
“앞으로 함께할 배우자가 이토록 요리 솜씨가 뛰어나니까 말이에요. 유하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던지 저희 주방장이 놀랐답니다. 자기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라고 칭찬을 하더군요.”
마에스트로의 칭찬에 손유하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음식 맛은 정말 훌륭했다. 손유하가 요리사임을 몰랐다면 오랫동안 한식을 조리한 할머니의 손맛이라고 믿길 만큼.
마에스트로 또한 입맛에 맞는 모양인지 한식을 꽤나 잘 드신다.
장시간 비행을 하고 온 터라 시장이 반찬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금세 게눈 감추듯 김치찌개가 바닥을 드러냈다.
“차는 제가 대접하도록 하죠.”
마에스트로가 직접 일어나 찻병을 기울였다. 은은한 분홍빛을 띠는 홍차가 찻잔에 졸졸 따라지는 것이었으니.
찻잔을 들어 다 함께 입을 축일 때였다.
“마에스트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물어보세요.”
“저택을 처음 찾았을 때 마에스트로께서 0703호의 방문은 절대 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그 순간 마에스트로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마치 오랫동안 고민을 하듯이 잠겨 있던 눈은 찻잔이 식어갈 무렵 떠졌다. 뒤이어 뜻밖의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곳에 사람이 살기 때문이에요.”
* * *
김상국 실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임원의 말을 떠올렸다.
항암 바이러스 신약을 개발하고 오스트리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칼빈 제약회사가 사분오열되기 직전이라고 하였으니.
“어딜 가나 경영권이 문제군.”
칼빈 제약회사의 사장이 죽고 후계자 자리를 놓고 두 명의 아들이 치열하게 경영권 공방을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임원들이 한시바삐 강현을 만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앞으로 칼빈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분이 강현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설마 현이는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건가.”
김상국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무렴, 투자의 신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 예측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미심쩍음이 싹을 틔우고 있었으니.
것도 그럴 것이 강현은 여태껏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투자들을 연이어 성공시켰다.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것처럼.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속된 말로 돈방석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경영권을 노리는 칼빈 제약회사의 두 파벌은 얼마가 되었든 간에 강현의 지분을 매입하려고 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이득과 실리를 따지는 것이 투자회사의 목적 아닌가.
“현이라면 어떻게 나오려나.”
전략기획실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봐온 김상국 실장이었다.
하지만 강현만큼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 평범한 투자자라면 이득과 실리를 따져 두 파벌을 이용해 자신의 값어치를 끝없이 상승시킬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강현이 보여준 모습을 상상한다면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러다 최연소 재벌이 되는 거 아니야?’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화학 산업의 선두를 달리고 동주를 제외하더라도 VH컴퍼니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수익률이 어찌나 뛰어나던지 항간에는 VH컴퍼니를 가리켜 재야의 고수들이 다 함께 합심해 설립한 투자회사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전혀 물욕이 전혀 없어 보이니 그것이 문제였다. 때때로는 세상살이에 해탈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허나 그럴수록 금전과 명예는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왔다. 마치 운명처럼.
* * *
“제약회사 측 임원들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래, 사정이 꽤 급해 보이더라고. 웬만해서는 형제 중 맏이 쪽으로 우리가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다는 눈치였어. 둘째는 애초에 제약개발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나 봐.”
설마하니 김상국 실장에게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칼빈 제약회사 측 임원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급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렴, 경영권 분쟁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그나저나 현아, 여기는 왜 이렇게 넓니. 처음에 보고는 궁전인 줄 알았다니까.”
과거 오스트리아 대귀족이 살았다고 했으니 궁전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김상국 실장이 머물 만한 방도 이미 마에스트로께서 마련해 주셨다. 아무렴, 빈방의 숫자를 세 보자면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펴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참, 현아. 내 소개를 매니저라고 했더라?”
“부하직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괴리감이 있잖아요. 음악을 배우러 온 입장인데 말이에요.”
“크흠,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칼빈 제약회사 말이다. 그쪽에서는 아주 너를 만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것 같던데 말이야. 아마 조만간에 동생 측에서도 연락이 올 거야.”
뜻밖의 고민거리였다.
다른 투자회사 같았으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박수를 치며 반겼을 일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동주의 경영권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남의 회사에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물며 제약회사는 지난 삶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분야였으니.
“일단 칼빈 제약회사 측에는 제가 만나자고 의사를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연락도 말라고 하세요. 아마 강경하게 말하면 그쪽에서도 지레 겁을 먹고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
김상국 실장이 예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지금 당장 내게 급한 것은 마에스트로 카라스에게 음악을 배우는 거였다.
김상국 실장이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고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겨 있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하는 것이었으니. 들어오라는 말을 했지만 기척이 없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봤지만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마에스트로가 말했던 ‘0703’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걸음부터 옮기고 있었으니.
얼마나 걸어갔을까.
“찾았다.”
한 번 찾아와봤던 곳이라 그럴까. 이번에는 손쉽게 ‘0703’이라 쓰여 있는 문 앞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문을 보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켜졌다.
마에스트로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방문 너머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니.
평소 같았으면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고는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덜컥.
‘0703’호의 문 너머에서 문고리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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