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4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45화 >
널찍한 챙을 지닌 밀짚 소재의 트릴비 위로 산타모니카 해변의 뙤약볕이 내리쬔다.
둥그런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중년의 여성은 척 봐도 기품이 넘쳐 보였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한 번쯤은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비단 그녀의 아우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희극인이다.
“엘넌 씨, 먼저 엘넌쇼의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엘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편집장이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엘넌은 선글라스를 살짝 벗어 꽃다발의 색을 확인하고는 코끝으로 물씬 꽃향기를 끌어당기듯 마시고는 감탄을 자아냈다.
“제가 메리골드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구해주셨어요?”
“당연히 엘넌 씨의 열렬한 팬인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엘넌쇼를 10년 동안 한 회도 빠짐없이 전부 시청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엘넌쇼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이자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지닌 방송 프로그램이 되었다. 하물며 웬만한 유명인 아니고서야 출연을 꿈꿀 수 없는 정도다.
우스갯소리로 엘넌쇼에 출연을 하지 않고 미국에서 유명인사라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그 명성이 오죽할까.
그 방증으로 정말 유명도에 따라 게스트 섭외와 방송 시간이 결정될 정도였다.
“엘넌, 먼저 10년 동안 엘넌은 엘넌쇼의 호스트로서 몸이 건강하지 않을 때도 빠지지 않고 녹화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137화 빌게이츠 편에서는 수액을 매달고 방송을 진행했잖습니까? 보통의 톱스타들 같은 경우 그렇게까지 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챙기기 바쁘죠. 하지만 엘넌은 단 한 번도 방송 펑크를 내지 않겠다는 공언을 한 것처럼 무한한 힘을 내시는데요. 그런 원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시청자들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시청자들과의 약속이요?”
엘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10년 전 엘넌쇼의 기획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장수 프로그램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첫 녹화를 했을 때 저는 직감적으로 알았답니다. 이 토크쇼가 제 인생의 한 축이 될 거라는 것을요. 그때 다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든 방송을 펑크 내지 않겠다고. 시청자들과 항상 저녁을 함께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첫 녹화 때 직감적으로 알았다면 아무래도 그때의 느낌이 상당했나 봅니다.”
“맞아요. 벌써 십년이 흘렀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엘넌의 머릿속에는 잘생긴 동양인 청년이 떠올랐다.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유명해진 음악가였다.
“엘넌 씨, 이번 시청자 투표의 결과가 이색적이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아주 흥미로운 결과였어요. 시청자들이 직접 보고 싶은 게스트를 투표하는 것이었는데 설마 이미 엘넌쇼에 출연했던 게스트가 또다시 1등을 차지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게스트로 1등을 차지한 이가 누구입니까?”
“바이올리니스트 현입니다, 바로 엘넌쇼의 첫 게스트였어요.”
편집장은 결과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엘넌쇼를 한 회도 빠짐없이 봤을 정도로 엄청난 광팬이었다.
수많은 셀럽들이 게스트로 나왔지만 그 중 단 한 명만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뽑을 터였다.
어찌 보면 첫 녹화에서의 강현은 그야말로 완벽한 엘넌쇼의 호스트였기에.
“당시에 방송국에서 현 씨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몇몇 관계자들은 저 말고 현 씨를 호스트로 내세워서 현의 토크쇼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 나왔을 정도라니까요.”
“저도 기억납니다. 당시 첫 방영의 인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이후에 있었던 현 씨의 뉴욕 연주회 티켓팅이 완전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었죠?”
“그때 암표 값이 슈퍼볼 암표 값을 상회했을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어요. 설마하니 미국에서 클래식으로 그렇게 인기를 끌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때 저희 조카도 열다섯 살이었는데 현 씨의 연주회에 가고 싶다고 어찌나 노래를 불렀던지, 당시 미국에서 현 씨의 영향을 받아 바이올린을 시작한 키드들도 많았어요.”
엘넌쇼의 첫 방송이 방영되고 난 후 강현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하물며 반짝 신드롬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왕관이 무거워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지만 강현은 달랐다. 오히려 여유롭게 그 상황을 즐기지 않았던가.
“엘넌 씨, 실례지만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만약 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 현, 단 두 명의 게스트 후보지가 있다면 누구를 섭외하실 건가요?”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기회만 된다면 어떻게든 현을 다시 한번 섭외하고 싶어요. 현은 제 인생 최고의 게스트였습니다.”
엘넌은 10년 전 강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산타모니카의 찬란한 햇살만큼이나 눈부셨던 그의 젊은 날을.
* * *
“대표님?”
인기의 변화를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다름 아닌 임혜라 대표였다. 이른 시각부터 국제전화로 연락이 와서는 이제부터 밖에 나갈 때는 항상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니라며 신신당부를 해왔다.
“대표님? 갑자기 왜 그래요? 파파라치 때문이에요?”
파파라치들이라면 이제 이골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평소 다니지 않았던 길로 다니면 그다지 위험한 존재들도 아니었다. 실상은 사진을 찍는 이들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현아, 어제 첫 방영했다는 엘넌쇼 안 봤니?
볼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리허설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지금 미국에서 난리도 아니야. 한국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해서 미국 대형 엔터테인먼트에서 직접 사람들이 오겠다고도 하고, 기자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정도라니까. 엘넌쇼가 완전히 대박이 났어.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엘넌쇼가 훗날 유명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 방영부터 대박이 났다니. 설마하니 나 때문인가 싶었다. 그때 임혜라 대표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신신당부했다.
-현아, 지금 미국에서 너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오늘은 밖에 안 나가면 안 될까? 그럼 어떡하니? 한국에까지 지금 이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 아줌마가 뉴욕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진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표님, 오늘 정훈이 형이 미국에서 공연이 있잖아요.”
-그럼 꼭 경호원들 대동하고 돌아다녀, 차도 다 준비했으니까. 평소처럼 혼자서 운전하지 말고 말이야.
백정훈의 미국 공연이 잡힌 날이었다. 오랜만에 백정훈이 피아니스트로서 다시 무대에 서는 날이라 무척이나 기대를 하고 있었다.
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도대체 엘넌쇼의 첫 회가 얼마나 인기를 끌었기에 한국에 있는 임혜라 대표가 이토록 호들갑일까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겼겠지만 임혜라 대표의 진심 어린 조언에 어쩔 방도가 없었다. 아무렴, 여장부처럼 항상 냉철한 임혜라 대표가 이 정도로 신신당부를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허나 TV를 켜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ABA 방송국의 야심찬 기대작 엘넌쇼가 화제 속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특히 첫 회의 게스트로 출연한 바이올리니스트 현에 대한 문의가 전국적으로 폭주 중입니다. 이미 현의 미국 공연이 잡히지 않았냐는 물은 물론이고, 앨범 시장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앨범이 품절되어 웃돈에 거래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합니다. 특히 빌보드 싱글 차트 30위권에 기록되었던 Gang hyun symphoy no.1이 10위권으로 급상승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어젯밤 화제를 몰고 왔던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연주 영상을 다시 볼까요?
진행자의 흥분한 목소리처럼 브라운관 속에는 강현의 연주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 *
백정훈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긴장한 몸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피아니스트로서 다시 서는 무대였다. 건초염을 앓아 한동안 연주회를 열지 못했다.
뉴욕에서 연주회가 결정된 까닭은 간단했다. 스승인 마에스트로 막심 이바노프가 현재 뉴욕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백정훈은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오늘 있을 연주회를 위해 지난날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레퍼토리를 수없이 변경하고 피아노 의자 위에서 살다시피 연주를 했었더랬다.
마치 과거 처음 피아노를 배웠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까?’
사실 백정훈은 단 한 명의 청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음악적 세계관을 보여주었고 가치관을 심어주었던 음악가이자 친구 강현을 말이다.
강현에게 티켓을 보내놨지만 과연 연주회장까지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것도 그럴 것이 미국 내에서 강현의 인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으니.
‘월드스타라…….’
한국 언론에서는 벌써부터 강현을 두고 월드스타라는 말까지 매스컴에서 공공연히 사용할 정도였다.
아무렴, 빌보드 차트 10위권 내에 진입했던 가수는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했으니. 하물며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클래식의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에서 탄생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백정훈입니다―!”
백정훈이 무대에 오르자 객석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지휘자로서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는 오랜만에 서는 무대였다. 실로 감회가 남달랐다. 쇼팽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이만큼 떨리지 않았으리라. 참을 수 없는 전율이 턱시도의 어깨를 타고 흘렀다.
백정훈 객석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 의자 위에 착석하자 객석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백정훈의 무대를 기다렸다. 과연 어떠한 연주를 선보일지 무척이나 기대하는 듯한 시선들이 이어졌다.
‘할 수 있을까.’
백정훈은 건초염을 앓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한때 피아노를 완전히 포기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강현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을 수가 있었다.
아직도 강현과 함께 했던 협연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두 연주자가 마치 끈으로 연결 된 것처럼 서로 교감하지 않았던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선율이 흡사 왈츠를 추는 것처럼 말이다.
강현을 떠올리자 백정훈은 건초염을 앓는 손가락이 점차 긴장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어떤 흥분감까지 느껴졌다. 연주회 장소가 뉴욕이라서 일까. 왠지 강현과 함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객석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묘한 청중.
현혹적인 글리산도처럼 깊은 시선이 매끄럽게 백정훈과 마주쳤다.
-형, 잘할 거야.
모자를 깊게 눌러쓴 청중이었다.
분명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없게 깊게 모자를 눌러썼지만 백정훈은 모자 속에 드리워진 깊은 눈빛을 보고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단 한 명의 청중이라는 것을.
그 순간 백정훈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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