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5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56화 >
“쯧.”
빅토르가 소리 내어 혀를 찼다. 그는 노골적으로 강현을 무시하듯 흘겨봤다.
반면 강현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공연히 테이프 오디션을 도와주고 있던 퀸엘리자베스 측의 직원 에바만이 긴장을 머금고 있었다.
“연주를 보는 안목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이 영감탱이가 뭐라는 거야?
“내가 일일이 이런 기초적인 문제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이렇게 기본도 못 알아보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심사위원석에 앉혀 놓다니 본인 스스로가 퀸엘리자베스 명성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강현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빅토르는 중년의 나이였지만 언행과 처세를 보자면 그의 나이가 의심될 정도였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해서 꼭 뛰어난 건 아니다. 지난 삶에도 누누이 보지 않았던가. 정치인으로서 자질은 물론이고 능력조차 없는 이들이 타고난 탯줄 하나만 믿고 날뛰는 것을.
“선생님께서 왜 이 참가자를 탈락시켰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현의 물음에 빅토르가 다리를 꼬았다. 그는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강현을 흘겨보고는 혀를 찼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들썩였다.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는 연주는 필요 없네. 웜업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음색이 변할 수는 있어도 감정만큼은 유지해야 하는 것이 연주자의 숙명이지. 하지만 이 참가자는 악보에 나타나는 감정표현을 자기 멋대로 곡해해서 해석하고 있어.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침착하게 나아가야 할 때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지 않나? 연기로 치면 감정과잉인 게지!”
빅토르는 비릿하게 조소를 머금고는 부연했다.
“그럼 자네는 왜 이 참가자를 통과 시켰나?”
한번 들어나 보자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강현의 입에서 되도 않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면 빅토르는 망설이지 않고 윽박을 지를 것이다.
고약한 눈매가 번들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척 봐도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의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은가.
“콩쿠르에 임하기 위해서는 분명 작곡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곡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석적인 연주를 펼칠 거면 왜 콩쿠르가 왜 존재하는 겁니까? 시벨리우스나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 모차르트가 자신의 뜻과 다른 감정으로 본인의 곡을 연주했다고 해서 해당 바이올리니스트를 질타할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이 참가자는 감정과잉이 있을지언정 곡의 바리에이션을 정확히 이해하고 연주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작곡가라면 박수를쳐줬을 겁니다. 이런 과감한 시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이 참가자가 자신의 생각을 지운 채 작곡가의 의도만을 해석해서 연주했다면 분명 앞선 통과를 했던 참가자들 못지않은 연주를 보여줬을 겁니다.”
강현이 보기에 이 앳된 남학생은 손목을 이용하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고난도의 바리에이션뿐만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등장하는 비브라토를 자기 색을 살려 더욱 강조했다. 작곡가의 해석과 다르게 펼쳐낸 감정의 홍수 또한 분명 자신이 의도한 연주이리라.
그때 에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해당 참가자는 두 개의 연주 영상을 보냈습니다. 똑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인데 방식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아마 심사위원이 하나의 연주 영상만 보고 판단한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요?”
“네, 첫 번째 연주가 끝나고 곧바로 같은 곡을 또다시 연주합니다.”
에바의 말 그대로였다. 첫 번째 영상이 끝나자마자 앳된 남학생은 해당 곡을 또다시 연주했다.
하지만 첫 번째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같은 곡이었지만 마치 다른 곡을 연주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렴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히 해석한 연주였으니 그럴 수밖에.
‘발칙하네.’
강현은 영상 속 앳된 남학생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첫 번째 연주를 과감히 선 보인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빅토르와 같은 심사위원이 두 명이었다면 가차 없이 연주가 시작하고 1악장이 지나가기도 전에 탈락이라는 말이 떨어졌을 테니.
“크흠.”
빅토르는 헛기침을 해보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눈가는 심통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런 상대에게 일일이 승복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나이라도 어렸다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불혹을 넘은 중년의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떻습니까?”
강현의 되물음에 빅토르가 콧잔등을 쓸어보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앳된 남학생이 통과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강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바를 바라봤다. 더 이상 여기서 입씨름을 하며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아직 강현과 빅토르가 선별해야 할 테이프는 상당했기에.
에바가 서둘러 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럼 다음 참가자 보시겠습니다.”
강현의 엷은 미소와 함께 빅토르의 고약한 팔자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 * *
“건방진 놈!”
빅토르가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거칠게 털어 넣었다. 검버섯이 핀 손등은 혈관이 두드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제깟 놈이 운이 좋아서 한번 맞힌 걸 가지고 말이야.”
거드름 피우던 애송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설마하니 참가자가 그러한 사실을 의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직원이 미리 알려줬던 것일까?”
보드카가 목구멍을 타고 화하게 넘어갔다. 빅토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니 애송이와 에바라는 직원이 꽤나 친분이 있지 않던가. 자신을 물 먹이기 위해 충분히 둘이서 작당모의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암, 그렇지 않고서야 수십 년 동안 음악을 해왔던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테니.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프랑스의 거장 유고였다.
“빅토르,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나?”
유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빅토르를 바라봤다. 오늘 있었던 일은 이미 에바를 통해 들은 뒤였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빅토르의 성격상 쉽게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빅토르, 현을 인정하게. 그는 단순히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만을 지닌 음악가가 아니야.”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닙니까? 애송이 녀석이 조금 잘한다고 해도 어차피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유고, 여태껏 음악계에는 천재라는 이름 허울을 지닌 채 수많은 음악가들이 나타났다 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애송이 녀석이 진짜로 뛰어난 천재인지 아닌지는 아직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자네는 이미 그 친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빅토르는 대답 대신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도대체 자네가 현을 싫어할 이유라도 있는 겐가?”
“니콜라이의 자리를 뺏어간 녀석입니다. 그만한 실력이 되지 못한다면 이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는 니콜라이를 모욕하는 꼴이 돼버리지요. 언제부터 퀸엘리자베스가 어린아이 놀이터가 된 겁니까. 히로세는 현이라는 애송이 녀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는 아닙니다. 오히려 불신하지요. 천재라는 녀석들이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설마 자네의 동생 요제프 때문에 그러나?”
빅토르는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동생 요제프 또한 한때 천재라고 불리며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감했다.
“신동이나 천재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저 남들보다 재능이 약간 뛰어난 이들일 뿐입니다. 요제프 또한 그러했지요. 하지만 녀석은 남들이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는 것에 중독되어 그 가면을 못 벗은 것뿐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본선이 되면 알게 되겠죠.”
빅토르는 또다시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부연했다.
“애송이 녀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 * *
메이플 시럽과 슈거파우더를 뿌린 와플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직 바깥의 기온은 쌀쌀했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설렁탕에 밥을 말아 먹으면 속까지 든든할 텐데 현실은 와플이다.
강현이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현, 할 만한가요?”
히로세가 어느 샌가 다가와 있었다. 강현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너무 많은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 귀가 즐겁습니다.”
사실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연주를 봐야 하지 않는가. 물론 혼자 본다면 힘들지 않았으리라. 옆자리에는 고약한 인상의 빅토르가 항상 함께했으니.
그래도 다행이라면 오늘이 테이프 오디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다.
“올해 퀸엘리자베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참가를 신청했어요. 본선에 오르는 이들은 그들 중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죠.”
“경쟁이 엄청 치열하겠네요.”
작년 식중독 사건으로 인해 대회가 연기되지 않았던가. 단순히 따져보았을 때 경쟁률이 2배로 올랐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거다. 전 세계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가신청서를 내었으니.
벨기에에서도 국가적인 행사로 지정한 것은 물론이고 공영방송에도 벌써부터 얼굴을 내비치고 있지 않은가.
“저희는 이미 어제부로 테이프 오디션을 끝마쳤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고 선생님과 함께 오디션을 심사하셨죠?”
“유고와 의견이 갈리는 일이 없어서 순탄했답니다. 현은 어떤가요?”
강현은 잠시 말문을 멈췄다. 따지고 보면 빅토르와 의견이 갈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 봐야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
“의견이 갈리는 일은 적은데…….”
“의견이 충돌하면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 군요?”
“저는 수긍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히로세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않아도 상황이 어떠한지 뻔히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다른 심사위원과 짝을 이루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히로세와 헤어지고 곧장 테이프 오디션이 진행되는 장소로 향했다. 복도에서 빅토르와 마주쳤지만 빅토르는 여전히 강현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쫌생이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강현도 예상했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긴장을 머금어야 하는 건 에바였다. 강현과 빅토르는 마치 서로 맞지 않는 화학물 같아서 조금이라도 자극이 이뤄지면 큰 폭발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에바, 고생했어요.”
장장 여섯 시간 동안 오디션 장소에서 움직이지 않고 연주 영상을 시청했다.
중간 휴식시간을 가질 만도 했건만 두 사람이 논스톱으로 달린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함께 있기 싫었기 때문이었으니.
다행이라면 오늘은 의견이 마찰을 빚지 않았다는 것이다. 빅토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같이 사라져 있었다.
‘맥주나 한잔 마실까.’
호텔 지하에 위치한 펍으로 가서 맥주나 한잔 기울일까 생각이 들었다. 여섯 시간 동안 편치않은 사람과 한자리에 있다 보니 목구멍이 답답했다.
강현은 호텔 로비를 지나쳐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왈칵!
강현은 자신의 목을 감싸 안은 의문의 물체에 당황했다. 자연히 저도 모르게 엎어치기를 하려고 상대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지난 삶 검사로 살았던 삶이 지금에서야 빛을 발하는 것이다.
헌데 호텔 로비에 치한이라니?
“현!”
그 순간 멱살을 잡힌 상대가 다급하게 외쳤다. 강현은 그제야 보았다. 출렁이는 백금발과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초록 눈동자를 말이다.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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