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6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65화 >
서울의 한 대학가, 아직 술잔을 기울이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지만 호프집에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나같이 똑같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한국대학교 독일어 학과 야구점퍼를 입은 학생들이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때였다.
땡땡―!
곰을 닮은 남학생이 맥주잔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 한국대학교 독일어 학과의 자랑 강현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기 위해 다들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심사위원으로 노력하고 있는 강현을 위해 다 함께 건배합시다!”
김대우의 외침과 함께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호프집의 널찍한 벽면에는 이미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지상파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이윽고 기나긴 광고를 끝으로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다큐멘터리가 시작하자 모두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시작이군.”
샤펠의 또다른 저택에는 심사위원들이 모여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보드카, 위스키, 와인잔이 들려져 있었다.
유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오늘은 샤펠에서 합숙하고 있는 12명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세계적인 콘서트홀 보자르홀에서 벨기에 국립교향악단과 협연을 가지는 첫날입니다. 12명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인솔하는 심사위원으로는 강현 씨가 함께해 주셨습니다.]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천장을 장식한 휘황찬란한 양각문양은 밤하늘의 별자리만큼이나 눈을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객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되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과연 카네기홀, 콘서트해보우와 같이 세계 3대 콘서트홀이라고 할 만했다. 그때였다.
두두두둥―!
보자르홀의 위엄에 놀라기도 잠시 웅장한 큰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기에 교향악단의 연주였다.
갑작스러운 연주였지만 어찌나 듣는 이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던지 브라운관 속 12명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마저도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웅장한 교향곡의 끝자락에서 마에스트로 에덴 시므온의 모습이 카메라에 비쳐졌다.
[다들, 교향곡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이게 무슨 소리일까?
모두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 출신의 안나가 틀린 부분을 2개나 찾아내자 브라운관 너머 심사위원들의 입에서 얕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라 할지라도 웅장한 교향곡을 들으며 단숨에 틀린 부분을 찾아낸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하지만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 이번에도 기대해도 되겠지요?]촬영 카메라가 마에스트로 에덴 시므온과 강현의 모습을 번갈아 줌인하고 있었다. 브라운관 너머 심사위원들 또한 의문스러운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쏠린 이목에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 감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촬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촬영 구도를 멋들어지게 잡고 있었다.
이윽고 브라운관 속 강현이 피식 웃으며 운을 띄웠다.
[1악장의 서주에서 큰북을 연주한 단원의 채끝이 흔들렸습니다. 채를 잡은 단원의 손끝이 미세하게나마 이완을 풀어냈습니다. 단순히 실수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아무래도 마에스트로께서 의도한 지시 같더군요.]……!
[또한 호른을 게쉬탑으로 연주할 때 단원의 손이 벨브안을 손으로 완전히 막지 않았어요. 그 탓에 날카로운 금속적인 음색이 아니라 부드러운 음색이 찰나였지만 흘러나왔죠. 아무래도 핸드스토핑을 할 때 의도적으로 3분의 1쯤 비워둔 것 같았습니다.]침묵 속에서 경악한 시선들이 이어졌다. 브라운관 속 12명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물론이고 브라운관 너머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던 심사위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2악장과 3악장 관련해서는 이미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씨께서 말씀하셨으니 언급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4악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마에스트로의 지휘 방향이 틀렸습니다. 하지만 단원들은 동요하지 않고 제대로 연주를 하더군요. 마치 미리 약속한 것처럼 말이에요.]브라운관 속 강현이 피식 웃으며 마지막 종지부를 찍자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던 프랑스의 거장 유고가 입을 쩌억 벌리며 감탄을 터뜨렸다.
히로세는 예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반면 보드카를 마시고 있던 러시아의 빅토르는 ‘믿기지 않는군, 정말’이라며 혼잣말과 함께 강현을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정말 감으로 맞힌 겐가?”
유고의 주름진 눈가에는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심사위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방송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장대한 대서사시인 교향곡의 틀린 부분을 찾기란 여간 쉬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악기에 통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휘에도 통달해야 했다.
더군다나 영상 속 강현은 긴가민가한 기색조차 없었다.
“붉은 펜으로 총보의 틀린 부분을 수정해 나갈 때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네.”
“나도 마찬가지일세, 구스타프께서 그토록 현을 칭찬하던 이유를 알 것 같더군. 등륜, 자네도 많이 놀랐지 않은가?”
“전 이미 7년 전에도 한 번 겪었던 일입니다. 그때 현은 키가 제 허리께에 올 정도로 어린 소년이었지요. 당시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 고집 세던 알렉세이조차도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까요.”
등륜은 매스컴을 통해 7년 전 강현이 타임머신을 타고 작금의 퀸엘리자베스에 출전한다고 해도 우승을 차지할 거라는 말을 했었다.
대부분이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방송분을 보고는 다들 동의했다. 에덴 시므온 또한 말하지 않았던가. 이미 자신의 수수께끼를 7년 전 어린 강현이 전부 맞혔었다고.
강현은 흡사 청문회 자리에 초청된 것 마냥 끊임없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심사위원들까지도 강현에게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종국에는 프랑스의 유고와 중국의 등륜을 비롯한 각국의 거장들에게 퀸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끝나고 자신들의 나라로 놀러 오지 않겠냐는 초대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자네, 잠깐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청문회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빅토르가 강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빅토르와 마주 보고 앉았다. 빅토르는 짐짓 뜸을 들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먼저 사과를 하지, 자네를 애송이라고 했던 것을 말일세.”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강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싶었지만 빅토르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현은 자세를 앞당기고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쳐 보였다. 아무렴, 빅토르의 연륜에 비하면 강현은 새 발의 피였으니.
“난 신동이나 천재라는 말을 믿지 않았네. 아마 다른 음악가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게야. 하지만 자네를 보다 보니 내 가치관이 점점 변하는 걸 부정할 수가 없겠더군.”
빅토르는 강현에게 보드카가 담긴 잔을 건네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만월이 가득 차올라 창가를 아스라이 장식할 때까지 대화가 계속되었다. 브뤼셀에 온 이후로 이토록 빅토르와 대화를 많이 나눈 것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잖아?’
그저 고집센 노인으로만 생각했던 빅토르였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강현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가.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이어나갔다.
“현, 여억시 자네엔 음악에 대해서 잘 알아.”
취기가 오른 빅토르의 주사는 의외로 귀여웠다. 혓바닥이 짧아지며 계속해서 미소 짓는 것이었으니.
결국 먼저 잠에 든 사람은 빅토르였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보드카를 연신 마신 그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강현이 그를 들쳐 업고는 침대 위에 눕히자 거짓말처럼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바로 자기는 글렀네.”
황소가 투레질을 한다면 이런 소리일까. 강현은 피식 웃으며 누워 있는 빅토르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안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몸을 눕혔지만 쉽사리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아무렴, 이제 무대가 채 이틀도 남지 않지 않았으니. 다른 참가자들 또한 마찬가지인 심정일 것이다. 눈꺼풀을 덮어보아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음표가 떠오르지 않는가.
어느새 밤하늘을 가득 비췄던 만월이 점차 사라지고 희끄무레한 빛이 지평선 너머 나타나고 있었다.
“후우.”
결국 안나는 외투를 챙기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샤펠에 풍겨오는 새벽 바람을 맞고 있다보면 자연스레 상념 또한 사라질 것이다.
지잉.
그 순간 안나는 자신의 귀를 파고드는 선율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샤펠의 정원을 지나 맞닿은 숲속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이었다.
잠깐 주춤거렸지만 이내 다시 들려오는 선율에 안나는 수풀을 헤치며 홀린 듯 앞으로 나아갔다.
나뭇잎들이 사각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늘어뜨려 안나를 바라봤다.
기다란 수풀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새벽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간드러지는 하프의 선율처럼 반주를 맡았다.
꿀꺽.
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쫄쫄쫄 흐르는 계곡가의 물흐르는 소리와 함께 선율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어둠에 가려 정확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얼굴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홀감에 젖어 단 한 명의 청중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만월이 가득 찼던 밤하늘 위로 여명이 차오르고 있었다.
해무처럼 흩뿌려진 안개 사이로 바이올리니스트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숲속의 선율 아래에서 또각또각 유리구두와 같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소매로 눈을 비빈 채 앞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해무를 뚫고 바이올리니스트를 향해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빛을.
두근두근두근.
일순 안나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희뿌연 안개 사이로 불쑥 선명한 뿔이 나타났다.
안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어스름 사이로 차오르는 여명과 함께 등장한 정체는 순백의 사슴이었다.
도대체.
안나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순백의 사슴은 정말 공기 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안개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두근두근.
신묘한 후광이 선율과 함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순백의 사슴은 마치 숲속의 영도자처럼 모든 소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안나는 왠지 모를 성스러움을 느꼈다. 예컨대 과거 그리스도를 마주했던 이들이 이러한 느낌이었을까.
그 순간 순백의 사슴은 마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인사를 하듯 얼굴을 부벼댔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이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여명과 함께 바이올리니스트의 전신에 신묘한 후광이 타고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 같았던 시공간 속에서 안나가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눈을 감았다 뜨자.
“안나?”
숲속에서 홀로 연주를 하고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강현은 안나가 수풀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안나는 그것보다 방금 전 보았던 순백의 사슴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순백의 사슴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찬란한 여명만이 강현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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