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04화 >
accelerando(점점 빠르게)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죽음의 끝에서 울려 퍼졌던 머릿속의 메시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움직였다. 관악기가 귓가를 빠르게 두드리고, 첼로의 선율이 오밀조밀하게 울려 퍼진다. 트럼펫의 여운이 끝나자, 바리톤의 환희가 울려 퍼진다. 심장박동 만큼이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흑색 구형 라디오에서 교향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얼마나 반복해서 들었던 것인지, 카셋트 테이프가 늘어나 있었다. 방증으로 미묘하게 선율의 빠르기가 다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교향곡의 한 장치처럼 들렸다. 시대를 아득히 초월할 만큼 뛰어난 교향곡이라는 뜻.
진한 여운과 함께.
환희의 찬가가 끝났다.
강현은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반개했다. 여태껏 교향곡을 계속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청중으로서. 그제야 교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개중에는 김대우가 통통한 손바닥을 흔들며 강현을 반겼다.
“넌 누구니?”
젊은 여선생이다. 앳된 외모와는 달리 눈빛과 목소리에서 강직함이 가득하다. 강현은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향곡을 감상함에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을 터인데,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1학년 7반 강현이라고 합니다. 교향곡 소리에 저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습니다.”
강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네가 대우가 말하던 그 친구구나, 이번에 일학년 사이에서 전교일등 했다는. 선생님은 이삼학년 음악을 맡고 있는 강혜정 선생님이야. 반갑다. 이제 우리 동아리 가입하려고?”
김대우의 눈동자가 빛났다. 하지만 세탁소 일을 도와주는 것만 해도 벅차다. 더욱이 클래식이라는 취미생활을 즐기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리다.
“죄송합니다.”
강현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강혜정의 눈가가 묘하게 휘어졌다. 호기심을 품으며.
방금 전 문을 열고 들어왔던 강현의 모습을 강혜정은 잊지 않았다.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마치 카네기 홀에 앉아있는 청중처럼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교향곡을 감상하고 있었다. 표정은 무엇보다 감미로웠으며 선율에 맞춰 귓가가 쫑긋쫑긋 움직이기까지 했다. 더욱이 합창이 끝나고 반개한 눈동자에는 진한 여운과 함께 환희가 서려있었다. 분명, 평범한 아이는 아닌데.
“그러지 말고, 오늘은 동아리 활동 참여해보고가.”
강혜정은 손짓으로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늘 선생님이 바이올린 연주도 보여주거든, 참. 강현이 너, 바이올린 배웠다며.”
강현은 김대우를 바라봤다. 김대우가 곰돌이 푸 같은 모습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동네방네 소문을 떠들고 다녔구나. 녀석 참.
“배우기는 배웠지만 짧은 시간동안 한 것이라, 하나도 기억나질 않습니다. 더욱이 재능도 없었고요.”
뒷말에 씁쓸함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강혜정은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내가 보기엔 강현이 넌 재능이 있어.”
“예?”
“청중으로서의 재능.”
베토벤 교향곡을 감상했던 모습이라면 분명 청중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다. 뛰어난 청중일수록 음악의 진가를 아는 법이니. 강혜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강현은 그 사이에 김대우의 옆으로가 앉았다.
“우리 선생님 바이올린 연주 엄청 잘해.”
김대우가 작은 목소리로 강혜정을 자랑했다.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기에 테이프를 틀 줄 알았건만, 자신이 직접 연주를 하려는 모양이다. 손 떼 묻어 보이는 바이올린 케이스에 제법 흥미가 동했다.
강혜정은 케이스에서 오래된 바이올린을 꺼내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턱과 어깨가 악기를 지탱하고 왼손은 악기에 살짝 가져다댄다는 느낌이다. 손가락뿌리가 지판과 수평을 이루고 엄지아랫부분에 무게를 실었다. 마치 몸의 일부분이 된 것 같은 모습.
가볍게 쥐고 있던 활이 들어 올려졌다.
지잉.
처음은 부드럽게.
현과활이 맞닿는다.
마치 얼어붙은 대지를 걷고 있듯 조심스럽다.
지잉.
다음은 Allegro(빠르게).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던 활이 부서지는 빙상 위를 헤쳐 나가듯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차가운 바람에 맞서 싸우려는 듯이 활이 쉼 없이 움직였다. 현위를 춤추는 손가락은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슬아슬한 선율의 반복 이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선율에 맞춰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곡조가 변한다.
클라이맥스가 다가올수록.
활은 끊임없이 현과 맞닿는다. 현을 잡은 손가락은 마치 얼음을 부수며 달려 나가듯 재빠르게 뛰어나가고 있다. 결국.
지잉.
마지막 얼음을 깨부수며 연주는 끝이 난다.
놀라웠다.
이전의 삶속에서 클래식음악을 자주 들었다 자부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물론, 바이올린 독주회 또한 심심찮게 참여했다. 취미라기보다는 상류사회에서의 교양을 갖추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강혜정의 바이올린 실력은 평범한 음악선생의 실력이 아니다.
“비발디 사계 겨울 3악장.”
강현의 입에서 나지막이 곡명이 흘러나왔다.
비발디의 사계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서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들어봤을 법한 클래식이다. 바이올린 독주회에서도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 여태껏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계를 들어봤지만 이정도 충격을 준 이는 없었다.
“대우 말처럼, 강현이가 클래식 좋아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보네. 어땠어, 선생님 바이올린 연주?”
강혜정은 케이스에 바이올린을 다시 눕히며 말했다.
학생들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자신들의 담당선생 실력이 이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에 우쭐해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머릿속을 계속해서 옭아매는 장면이 있었다. 정확히는 곡조가 변하는 시점에서 활이 움직일 때였는데.
“선생님.”
강현의 시선이 강혜정의 오른손에 닿았다.
“혹시, 오른 손 검지를 다치신 적이 있나요?”
“어?”
강혜정이 일순 당황을 머금고 되물었다. 강현은 자신이 느꼈던 불협화음에 대해 털어놓았다.
“선생님께서 무의식적으로 활을 쥘 때 검지 손가락에 힘을 더 주시는 것 같아서요. 매번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곡조가 변할 때 말이에요.”
미묘한 변화가, 찰나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어, 어떻게 알았니?”
강혜정이 토끼 눈을 하며 놀랬다.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강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자신 또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다. 분명 과거를 돌이켜보면 재능 또한 없었다. 헌데,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선율이 마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어느 부분이 어색한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그냥 그런 것 같았어요.”
강현의 단순한 답변에,
“그냥?”
강혜정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 * *
학생들이 모두 가고 난 다음이었다.
강혜정은 자신의 오른 손을 내려다봤다. 현을 짚는 왼손은 물론 활을 쥐는 오른손 또한 굳은 살이 가득하다. 하지만 오른손에는 상처가 있었다. 겉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 상처.
“후.”
빈 교실 안을 가득 매울 만큼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라서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촉망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사고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수년간 활을 쥘 수조차 없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갈무리가 되고나서야, 상처가 희미해졌고 어색하게나마 바이올린을 다시 켤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오랫동안 재활을 한 끝에 다시 예전처럼 바이올린을 켤 수 있었다. 예전보다야 못했지만 웬만한 바이올리니스트만큼 뛰어나다 자부했다. 허나 그 아이는 자신조차 몰랐던 결함을 찾아냈다. 이미 재활을 하며 습관처럼 굳어졌던 버릇. 돌이켜 생각해보면 곡조를 변하는 시점마다 활에 힘을 더 주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신기하단 말이야.”
청중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날뿐더러, 직관력 또한 뛰어난 아이다. 자신이라면 과연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오른손도 아닌 오른손 검지라고 콕 짚어 말할 정도로.
“불가능해.”
강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몸에 녹아버린 습관은 본인뿐만 아니라 상대방조차도 찾기 힘들다. 상대방이 음악에 관한 직관이 뛰어나지 않는다면 불가능 한 이야기다. 더더욱 자신이 연주했던 곡은 곡조가 단 한 번만 변한다. 그 시점을 놓치지 않았다니.
파가니니라면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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