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46화 >
“당장 판권을 계약하셔야 합니다!”
강성욱의 온몸을 관통한 전율이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방증으로 수화기를 붙잡은 손이 엷게 떨리고 있지 않은가.
“흐암, 성욱아. 그게 무슨 소뤼야?”
수화기 너머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제통화였다. 한국은 지금쯤 새벽녘일 것이다. 국장의 혓바닥이 잔뜩 꼬부라진 것이 간밤에 약주를 거하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부연했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 한시가 급했으니.
“이번 퀸엘리자베스 다큐멘터리 판권 계약해야 한다고요!”
사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CP라기보단 관광객의 마음으로 찾은 브뤼셀이었으니. 허나 보자르 홀에 당도하고 나서야 알았다. 엄청난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이름난 거장들이 브뤼셀을 찾은 것은 물론, 제일그룹 왕회장도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
대한민국 재계의 거두.
이게 무슨 경운가 싶었다.
애당초 한국에서 클래식은 그다지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었으니. 하물며 지금은 명칭이 달라졌지만 제일그룹 산하 신문사의 부장급들이 마치 신입처럼 직접 취재를 위해 브뤼셀을 찾은 것이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나자 여실히 증명되었다.
“오늘 제가 봤던 걸 빠짐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아이의 연주에 청중은 눈과 귀를 빼앗겼고 종국에는 그들의 영혼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명을 하는 자신도 손에 진땀이 맺힐 정도인데 상대편이야 오죽할까, 아마도 지금 즈음이면 벗어뒀던 안경을 다시 쓰고 있을 터였다.
“강피디. 한국에 그런 신동이 있었다고? 백정훈 말고 말이야?”
꼬부라진 혀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흥분을 한껏 머금고 말하는 국장이었다. 국장이 일컬은 피아니스트 백정훈 또한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며 차세대 거장이라 평가받았지만 대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다를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국장님, 간결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물며 제일그룹 왕회장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지 않던가.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가 그 아이를 주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연소 퀸엘리자베스 대상의 영예를 거머쥐었으니.
“내일 강현이란 이름이 언론에 대서특필될 것입니다.”
*
“흥―!”
일순 손유하가 날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홱 하니 돌렸다. 잔뜩 성난 콧방귀는 덤이다. 아무래도 브뤼셀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 터였다. 이럴 때 보면 저 얼음꼴통도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그나저나.
‘푹신푹신하네, 역시 일등석인가.’
문득 지난 삶이 떠올랐다.
서부지검 부장검사로 있을 적에도 비즈니스석이 최대였지, 일등석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다. 공직자로서 내규가 그러했으니. 제일그룹 법무팀에 들어서고 나서는 일등석을 종종 이용했지만.
과거에는 수십 년이 걸렸던 이 자리가 지금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와인 한잔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아직 이 어린 몸뚱이는 알콜 분해효소조차 만들어내지 못할 터였다. 더군다나 보는 눈도 저리 많으니, 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까슬까슬하다.
어느새 굳은살이 박히고 손끝은 뭉툭해졌다. 나로서는 반가운 변화였다. 샤펠에서의 나날이 깊게 배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건 그렇고.
‘진짜로 가져갈 줄이야.’
일말의 기대는 있었다. 하지만 콩쿠르가 끝나자마자 귀신같이 스트라디를 회수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니. 돈으로 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사람 잘 다루는 손일선 조차 두려워한 상대가 아니었는가. 어떻게 저 왕구렁이 같은 영감님을 설득 시킨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오빠아.”
그때 손유하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조금 전 콧방귀를 끼며 성을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 언니 좋아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미간을 좁힌 채 잔뜩 고민하는 기색이지 않은가. 누가 보면 하이틴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다.
“유하야, 외국에서는 인사 대신 뽀뽀도 해. 그리고 오빠랑 그 언니는 친구야. 친구.”
친구라는 말에 유하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감정이지만 이토록 쉽게 풀릴 줄이야. 훗날 제일물산을 다스리는 카리스마와 추진력은 도대체 언제 생기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맞다, 오빠 조금 있으면 생일이지?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나도 안 챙기는 생일을 기억까지 하고 있다니. 유하는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짧은 발로 왕회장이 앉아있는 앞 좌석까지 단숨에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왕회장이 미소 지으며 유하를 맞이했다. 비행기를 탈적에만 해도 울상이던 손녀딸이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뒷말에 왕회장이 눈을 크게 떠보였다.
“현이 오빠한테 그 바이올린 주면 안 돼요?”
역시 저 똑똑한 것!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
* * *
마에스트로 구스타프를 대접할 때에는 찻잔에 꽃잎을 띄우는 것이 이제는 으레 당연한 일이 되었다. 따뜻한 홍차의 풍미가 입안을 감돌며 가을바람의 여운을 떨쳐낼 즈음.
“마에스트로, 몸은 괜찮으십니까?”
벨기에 교향악단의 종신 지휘자 에덴 시므온이 조심스레 구스타프를 살폈다. 에덴 또한 한 명의 거장으로서 무시 못 할 명성을 누리지만 구스타프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였다. 구스타프는 살아있는 전설이자, 에덴에 처음 지휘를 가르쳐 준 스승이었기에.
“정말 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미리 귀띔해 주셨으면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요.”
부쩍 연로해진 몸 때문에 투병 생활을 하던 스승이었다. 설마하니 그와 닮은 아이를 봤다는 말 한마디에 비행기를 타고 브뤼셀로 오실 줄은 미처 몰랐다.
“에덴, 정말 놀라운 아다지오였어. 그렇지?”
“예, 마에스트로.”
강현의 무반주 소나타를 말하는 것이었다. 브루흐의 작품과 반대되는 선율을 지닌 바흐의 곡이었다. 격렬하고 애절한 아다지오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부드러운 음색의 시칠리아노와 빠른 음색의 프레스토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통해 바흐의 곡을 재해석 했다. 과감하고 대담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수수께끼를 맞추었다고?”
에덴의 이야기를 들은 구스타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처음 샤펠의 수수께끼를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 설마하니 야샤를 닮은 아이가 수수께끼를 풀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친구가 살아있었다면 그 정도로 왜 호들갑이냐 했겠지만.
“앞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그 아이가 바이올린을 제외한 다른 악기를 다루고 편곡은 물론 작곡에도 능숙해진다고 생각해보렴. 음악은 모든 것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지.”
에덴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아이의 재능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 아이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까지 기대가 되는구나, 얼른 자라주면 좋을 텐데.”
지휘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다. 마치 모든 사물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방심하고 있다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해일이 그의 몸을 휘감듯 본능적으로 거대한 선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켜고 싶구나, 에덴.”
어깨 통증 때문에 벌써 십수 년째 제대로 바이올린을 켜지 못한 마에스트로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주름진 얼굴과는 상반될 정도로 눈동자가 형형했다. 그 아이로 인해 뜨거워진 가슴이 손끝을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린 것만 같았다.
“참, 그 아이라면 보았겠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마에스트로.”
구스타프는 샤펠의 여명을 떠올리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
지글지글―!
아침부터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신선로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 임금님의 수라상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손수 준비하신 음식들이었다.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날 대해 주시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는 어느새 단짝 친구처럼 꼭 붙어 음식을 준비하시기 바빴다. 허나 잔칫집에도 불청객은 있는 법이었으니.
“손맛은 내가 더 좋으니까, 잡채는 내가 하죠.”
이모와 삼촌 내외들도 자리했다.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봤을 법한 이모가 일을 거들겠다고 두 팔을 걷어부쳤다. 아무래도 잡채는 빼고 먹어야겠다.
“자, 다들 들자.”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자 모두 식사를 시작했다. 부모님까지 왔으니 처음으로 가족 모두가 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는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셨다.
“현아, 콩쿠르에서 대상 탔다면서, 정말 축하한다.”
큰삼촌은 형식적인 축하 인사를 건네었고.
“우리 진석이도 이번에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요 아버지. 글쎄, 학교에서 얼마나 기대가 큰지 교장 선생님이 직접 진석이한테 힘내라고 했대요.”
이모는 여전히 자기 자식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작은삼촌은 별다른 말 없이 식사 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것이 일전에 이마가 깨진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었다.
“현아, 이번에 대상 탔는데 상금은 얼마니?”
상금?
있기야 있었지, 금액이 꽤 컸던 것 같은데 또 명장이 만든 바이올린도 몇 년 동안 무상으로 임대 해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병역면제라는 거대한 타이틀 앞에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 음악대회는 그런 게 없나? 해외에 나갔다길래 엄청나게 큰 대회인 줄 알았더만.”
이모가 은근슬쩍 조소를 흘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클래식 콩쿠르에 대한 인식이 없다시피 한 시대였다. 과거에도 한국인 음악가가 국제 콩쿠르에 입상했지만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던 적도 있었으니. 쇼팽 콩쿠르 준우승 백정훈을 시작으로 차츰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클래식은 그저 돈 많이 드는 취미 정도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띵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 신문이 왔네.”
음식을 준비하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서둘러 나가려고 할 때였다.
“아주머니, 제가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명을 단단히 전해 받은 모양인지 유진석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는 그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할, 할아버지!”
유진석이 화들짝 놀라며 조간신문을 부여잡고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신문을 받아들고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이윽고 이모와 삼촌 내외의 눈이 부릅떠졌다.
다름 아닌 신문 일 면에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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