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52화 >
염병!
마음 같아서는 큰삼촌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어째, 요즘 일이 잘 돌아간다고 했다. 설마하니 신소재 개발을 멈추자는 사안을 올릴 줄이야. 제 목을 조르는 일인지도 모르고 아주 열심이지 않은가.
“유전무는 그만하면 되었고, 김전무 부터 그라이핀 개발과 관련해 의견을 말해보게나.”
러시안룰렛이 돌아가듯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현재 신소재 개발과 관련해 연구비용이 많이 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밀레니엄은 물론 4차산업의 발달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동주만의 독자적인 탄소 소재를 개발하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간만에, 속이 시원해졌다.
“김전무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누가 그라이핀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경쟁기업만 살펴보더라도 신소재 개발에 힘을 썼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얼씨구?
“맞습니다. 신소재 개발팀의 인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외국계 케미칼에서도 실패한 소재입니다. 하물며 성공한다고 한들 그라이핀을 사용할 수 있는 산업이 많지 않은 실정이죠. 그렇담 동주의 현 상황으로선 한 마디로 계륵이나 다름없다는 뜻 아닐까요?”
큰삼촌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회사는 정글이나 다름없다, 사내정치는 그야말로 정글을 이루는 이끼와 같은 존재. 필수 불가결이며 암묵적 룰인 것이다. 큰삼촌의 동아줄을 잡은 임원들은 회로소재와 감광판 확장을 밀었다. 이유야 뻔했다. 큰삼촌이 회로소재와 감광판을 전담해서 맡고 있었으니.
“현아, 너도 한마디 해 보거라.”
할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임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듯한 시선이다. 하지만 다들 간과하는 게 있다. 동주의 사내가 정글이라면 지난 삶 내가 헤쳐온 길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는 것. 마지막 방아쇠가 내게 주어졌다.
“다들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의 발언이다. 그 어떠한 정치적 결함이 섞이지 않은.
“유하네 할아버지만 봐도 그래요. 다들 반도체 산업이 실패할 거라고 했지만 성공했잖아요. 설령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분명 남는 게 있을 텐데 너무 뒷걸음질 치는 거 같아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간 결국 도태되는 법이잖아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었다. 어린아이의 거침없는 직언에 임원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회의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은 간단하다.
“동주는 화학회사 아니에요?”
“그렇지.”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원초적인 문제를 건드리면 되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왜 화학 공장처럼 굴려고 해요?”
*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쌍화차의 맛에 드미트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의 전통차라기에 한 번 시켜본 것이 화근이었다. 설마하니 시나몬을 넣고 와인을 졸여 만든 뱅쇼와 맛이 비슷할 줄이야. 이걸 다 마시면 기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맛이 별로이십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계란 노른자까지 동동 띄워져 있지 않은가.
“단원분들이 다들 이렇게 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머리가 희끗한 연주자분들을 상상했었거든요.”
머리가 희끗한 단원들도 분명 있었지, 허나 오케스트라는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더군다나 스펜서가 이끄는 악단이 아닌가.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서야 그의 집착과 광기를 따라가기 힘들다. 오죽하면 함께 협연했던 소프라노가 점점 살이 빠진다고 아우성쳤을까.
“전석이 순식간에 매진되었습니다. 솔직히 저희로서도 반응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애초에 국내에 이토록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내한을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시야확보가 충분치 않은 3층 박스 석조차 없어서 못 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
죠.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오늘 저는 마에스트로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니까 말이지요. 마에스트로께서 직접 이사장님을 뵙지 못한 것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한가지 지휘자분께서 혹 협연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지 궁금합니다. 가령 한국에도 뛰어난 음악가들이 있으니까요.”
드미트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사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런던 심포니의 마에스트로께서는 상당히 예민하십니다. 피아니스트 백정훈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지만, 그의 레퍼토리와 저희 심포니의 성향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색한 협연은 결국 호흡을 망가트리게 만드는 법이니까
말이죠.”
예술의전당 이사장은 마른 입술을 쓸어 보였다. 그는 영문학과를 나왔을 뿐이지 클래식에는 정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 심포니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듣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클래식에 관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요즘 런던 심포니의 내한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
은 격. 이때 차세대 거장이라 평가받는 백정훈이 협연한다면 좋으련만.
“참, 그 친구는 어떻습니까?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사장님 안타깝지만, 협연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박에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애초에 서로 성향을 맞춰 레퍼토리를 결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앙상블을 이뤄가며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찰나의 순간에 섬세한 균형이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일주일 남짓 남지 않았는가. 이 기간에 런던 심포니와 협연을 할 연주자를 찾는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었지.
“물론 저도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궁금하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사가 정말 사실입니까? 지휘자께서 입단제안을 했다는 말 말입니다.”
오늘 아침 난 기사 때문이었다.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강현과 스펜서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있었지. 드미트리는 쌍화차를 홀짝였다.
“마에스트로는 거짓말을 하시지 않습니다.”
어느새 그의 앞에 놓인 쌍화차의 노른자가 사라졌다.
* * *
“영감탱이, 정말 현이가 그랬다고?”
왕회장의 눈가에 호기심이 들어찼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나.”
마치 전래동화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왕회장의 눈썹이 들썩였다. 일전 신소재 개발과 관련한 일화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더해질수록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인 것도 같았지만, 하나같이 정교하게 맞물린 발
언이었다. 특히 마지막 말은 가히 압권이었다.
“믿기지가 않는구만.”
왕회장은 숨김없이 감탄을 터뜨렸다.
“헌데 현이는 왜 안 데려왔나?”
“현이를 찾는 손님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네. 참, 자네도 한 번 봤던 사람이지. 런던 심포니의 지휘자 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손가. 이것도 좀 봐주게나.”
유회장은 서류 가방에서 뭉텅이를 꺼내 왕회장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일전에 자네에게 준 자료가 아닌가?”
“한번 다시 들춰 봐.”
왕회장은 뭉텅이를 다시 읽어내려가며 눈을 크게 떴다. 군데군데 붉은 볼펜으로 희미한 방점이 보였기 때문. 마치 무언가 망설인 것 같은 흔적이었다.
“현이가 무의식적으로 볼펜으로 찍어둔 부분일세, 난 도통 봐도 뭔지 모르겠더군. 자네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 가지고 와봤네만.”
“허어, 뭔지 알 것 같구만.”
전략기획실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제일그룹의 핵심적인 부서라고 칭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항상 확실한 통계를 내려놓는 곳은 아니다. 시장의 흐름은 때때로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칙적으로 흘러갔기에.
“확률이 낮은 것들만 찍어놨어. 전부는 아니지만, 앞쪽 몇 개는 분명히 그렇구만. 방점이 몇 개밖에 없으니 이걸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지.”
희미한 방점을 찍은 것이니, 무의식적으로 볼펜이 움직인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어린아이가 전략기획실의 두뇌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오늘 들었던 이야기 때문일까 희미한 방점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왕회장은 일순 자신이 내걸었던 제안을 떠올렸다. 동주를 화학 기업중 시가총액 7위 안으로 입성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왜일까,
“영감탱이,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지.”
바이올린을 뺏길 것만 같다.
*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난 삶에도 자주 왔던 곳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90년대에는 아직 파이프오르간이 없었다는 점과 설계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2천 명을 아우르는 널찍한 객석이 확보되어 있었지만, 설계를 잘못한 탓일까? 군데군데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객석은 물론 울림통이 존재하는 곳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완을 통해 나아지기는 하지만 지금은 영 개선이 덜 된 모습이다. “아저씨, 한 시간쯤 뒤에 다시 오시면 돼요.”
김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스펜서를 만나러 왔다. 한국에 내연한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리허설 날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 공연이 일주일도 채 안 남지 않았던가, 한창 예민할 시기였다.
역시나.
“오랜만이군, 현.”
깊은 눈두덩이와 치켜 올라간 눈썹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브뤼셀에서 봤을 때와는 딴판이다.
“따라오게나.”
가타부타 인사만 나누고는 곧장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콘서트홀로 향하는 내내 스펜서가 볼을 실룩였다.
“여길 만든 설계자가 내 앞에 있었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줬을 거네. 현을 봐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당장 영국으로 돌아갔을 거야.”
아무래도 콘서트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현, 환상은 잘 가지고 왔겠지?”
“물론입니다, 마에스트로.”
누구의 명인데 거절할까, 어찌 보면 스펜서가 추천장을 써준 덕분에 병역면제를 얻어내지 않았나. 히로세와 마찬가지로 두 거장에겐 마음의 빚이 있었지.
“좋아,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네.”
“예?”
콘서트홀의 문이 활짝 열리자.
친구들?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이네, 모두 인사하지. 자네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현이다.”
단원들이 신기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반응은 벨기에 교향악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나이에 대해서 감탄하는가 하면 여자 단원들은 내가 생각보다 엄청 귀엽게 생겼다는 둥 중간중간 마에스트로의 뮤즈를 눈앞에서 볼 줄이야! 하면서 감탄을 터뜨리는 이도 있
었다. 자칫하면 귀엽다고 볼이라도 꼬집을 기세라 영 부담스러웠다.
그때 스펜서의 깊은 눈두덩이가 날 직시했다.
“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이번 내연에서 자네와 협연을 하고 싶어. 일전 내가 추천장을 써줬던 것은 잊지 않았으리라 믿네. 물론 보수를 안 주겠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일전 내게 객원 단원을 제안했을 때만큼이나 스펜서의 제안은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욱 놀라웠다. 명실상부한 런던 심포니였다. 어느 누가 협연을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벨기에 교향악단과의 협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또 협연이라니. 심장이 거칠게 뛰었
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냉정해졌다.
“마에스트로, 건방진 말일 수도 있겠지만 단시간 내에 합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콩쿠르도 아니고 정식 공연인데 말입니다. 제안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무대는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케스트라의 지론이다. 더군다나 돈을 받고 티켓을 팔지 않았는가. 엉성한 협연을 보여주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욕이자 오케스트라의 명성에 흠집을 남기는 일이었다. 마에스트로가 완강히 밀어붙인다고 할지라도 자존
심 강한 단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지. 오히려 나 때문에 곤란해하는 마에스트로를 보기는 싫었다.
“나라고 무턱대고 자네와 협연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이미 단원들에게는 말을 해놨네, 방법은 간단해. 자네가 여기 있는 모두를 만족시키면 되네.”
도대체.
객석에 앉아있는 단원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라는 것이 원체 임기응변이 중요하지 않나. 만약 자네가 이 자리에서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연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내 미련도 단박에 접어두지. 부담가질 필요 없네. 여기 있는 모두가 자네의 독주
를 듣고 싶어 하니. 어때 자신 있는가?”
그 순간 바이올린 케이스를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어떻게 부담이 안 될 수 있겠는가, 결국 깐깐한 미식가들의 입맛을 모두 맞출만한 요리를 선보이라는 것이었다. 스펜서가 한껏 달아오른 내 모습에 피식 웃었다.
정말 이 영감님은 매번 놀라운 제안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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