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51화 >
“바이올리니스트를 추천해달라고?”
찻잔에 띄워진 꽃잎이 흔들렸다.
“안목이라면 자네도 뛰어날 텐데 굳이 뒷방늙은이인 내게 부탁하는 이유가 뭔가?”
“뒷방늙은이라니요, 당신은 영원한 마에스트로입니다. 구스타프.”
“베를린필의 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베를린필의 사자, 유리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수석 자리를 채우려는 거면, 평소 눈여겨 봐뒀던 연주자를 올리면 되는 일이 아닌가? 베를린에는 그만한 실력자들이 많을 텐데 말이지.”
“애석하게도 그 자리를 감당해낼 만한 이가 현재로선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 평가받는 베를린 필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단원들의 실력 또한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다. 괜히 한 명, 한 명이 각국의 거장이라 칭송받는 이들이었겠는가.
“신예 중에서는 어떠한가?”
“마에스트로, 외람되지만 병아리가 감당할 자리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를 단원으로 맞을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그만한 깜냥이 된다면 말일세.”
일순 유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구스타프의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따뜻한 얼그레이를 마시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모스크바, 줄리어드, 왕립음악원 그 어디를 가도 마에스트로께서 말씀하신 신예는 찾지 못했습니다. 단 두 개의 악기가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음악적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물며 수십 개의 악기가 어우러지는 오케스
트라는 그 무게감이 엄청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니 번데기 앞에서 마치 주름을 잡는 것 같습니다만.”
“괜찮네, 계속 말해보게나.”
“모차르트, 야샤 하이페츠, 외젠느 이자이가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고서야 그 어떤 신예가 그만한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베를린 필이었다.
“퀸엘리자베스의 소문을 들어봤겠지?”
아아, 설마 그 허무맹랑한 소문을 말하는 것일까. 클래식계를 뜨겁게 달궜던 이야기. 하지만 유리는 관심조차 없었다. 고작 해봐야 열네 살의 어린 아이, 분명 실력은 있을 테지만 미디어의 과장섞인 부풀림으로 포장한 것이 분명하다.
“그 아이는 진짜네.”
*
꿀꺽―!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검찰에선 90년대를 ‘사’짜들의 전성시대라 했지만, 재계에서는 달리 불렀었지.
‘황금의 시대.’
격동의 80년대를 지나쳐 모든 것이 폭등하던 때이지 않았던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이다.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고자 정부가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내놓자, 거짓말처럼 시장의 자금은 주식시장을 향했다. 오죽했으면 이때 여의도 주식꾼들의 콧
대가 월스트리트 증권가 못지 않다 했겠는가.
“손가, 현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
할아버지?
“암, 내 심심해서 농 한 번 해봤네.”
왕구렁이 영감님까지?
아무렴, 어린 아이가 국내 상장된 회사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 하물며 그 아이가 점찍어준 회사가 연일 폭등을 기록한다면 매스컴에 나와도 이상치 않을 일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바둑도 아닌데 훈수를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3저호황이 끝나고, 3고시대로 들어섰지 않나. 주가가 회복을 하고 연일 치솟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 달리기가 계속될지 아무도 모르지. 더군다나 경상수지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적신호가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하네.” 괜히 재계의 거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역시 왕회장이네.’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은가.
주식 이야기가 끝날 즈음.
“참, 현이 학교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유수의 음악원들이 앞다투어 받으려 들 텐데?”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손유하는 계속된 경제 이야기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 한테는 자장가보다도 더 지루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몸이 근질근질했다. 할아버지와 왕회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끼어들고 싶
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확, 외국계 기업을 추천해버려?
“마음 같아서는 유학을 보내고 싶네만 욘석이 말을 들어야지.”
“다행이구만, 혹시나 유하가 따라간다고 성화를 부리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
모스크바, 상해, 줄리어드, 왕립 그 어디에서 부른다고 해도 달갑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니.
“유학?”
어느새 잠에서 깬 손유하가 던진 한마디였다.
* * *
“김치를 먹어본 적이 있냐고요?”
스펜서는 황당한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딱 한 번 먹어보기는 했습니다.”
일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대접을 받았었지만, 취향에 맞지는 않았다. 지금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내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 내연하는 국가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것은 관례 중 하나였다. 만약 내연이 아니었더라면 까칠한 성격상 인터뷰는 따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러브콜이 왔지만 거절하고 한국행을 택하셨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인터뷰어가 화들짝 놀라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개중에는 한국 클래식계에서 런던 심포니에 로비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시아의 클래식 강국인 일본이 아닌 클래식의 불모지인 한국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으니.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큰 형이 한국전쟁에 해군으로 참전했었죠. 형의 피가 흐른 땅이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참전용사!
처음 듣는 이야기에 볼펜의 움직임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물론, 녹음기가 켜져 있긴 했지만,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들은 수첩에 적어놓는 편이 나중에 정리할 때도 훨씬 이로웠으니. 벌써 헤드라인을 장식할 기삿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마에스트로, 한국의 음악가 중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과거에 활동하셨던 피아니스트는 물론 쇼팽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백정훈의 이름도 들어봤습니다.”
“혹 이번 퀸엘리자베스 최연소 대상을 차지한 강현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아십니까? 듣기로는 추천장을 써주셨다는 말이 있던데요.”
들리는 풍문이었다. 강현의 추천장을 써준 이가 다름 아닌 스펜서라는. 물론 진위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듯 스펜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기만 하겠습니까.”
“예?”
“이번 한국 내연을 결정한 것에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현입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인터뷰어가 침을 꼴깍 삼키며 흥분한 것이 눈에 보였다.
“마에스트로, 혹시 한국에서 단원을 모집한다면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을 오케스트라에 영입할 의사가 있으십니까?”
립서비스를 기대한 질문이었다. 강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아직 열네 살에 불과했으니. 더군다나 세계에서도 명성이 혁혁한 런던 심포니이지 않은가. 수석 지휘자 스펜서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런데.
“이미 제안을 했었습니다.”
인터뷰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다큐멘터리로 한창 뜨거운 강현이지 않은가, 헌데 물밑에서 이러한 제안이 오가고 있었다니. 뒤이어 믿기지 않는 말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지,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이 마에스트로의 입단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 말입니다.”
스펜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생애 가장 뜻깊은 날이었으니.
*
“현아, 유학 생각은 없느냐?”
할아버지는 평창동을 다녀온 뒤 요 며칠 계속해서 유학을 언급하셨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바이올린을 배울만한 음악원이 없었으니.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오 년 이다, 오 년.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건강검진은 정기적으로 받고 계시죠?”
“욘석이 말을 돌리기는, 할애비 건강검진이야 매번 받고 있지 않으냐. 이번에도 아무 이상 없다더라. 요즘 현이 덕분에 좋은 일이 많아서 그런지 오히려 혈압도 많이 진정됐다고 하더구나.”
나비효과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일까.
“그런데 할아버지 아까부터 뭘 보고 계세요?”
집무실 책상 앞에서 할아버지가 서류를 빤히 들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유하네 할아버지가 건네준 것이지, 어째 보고 싶으냐?”
할아버지는 일전 전상무 때의 일이 생각난 모양인지 내게 덥석 뭉텅이를 건네주었다. 일전 할아버지가 왕회장에게 부탁했던 자료들이었다. 부동산은 물론이고 주식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흐름이 축약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일필휘지의 서예를 마주한 것
처럼 뭉텅이가 위엄이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
‘이 부분은 틀렸는데.’
아차, 나도 모르게 볼펜을 달칵거리며 첨삭을 해줄 뻔했다. 아마도 제일그룹 전략기획실에서 작성한 서류일 것이다. 지난 삶에서도 그 부서는 이러한 일들을 전담해서 했었으니.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하늘과 땅만
큼. 고심이 깊어지려는 찰나.
똑똑.
비서 누나가 들어와 임원 회의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뭉텅이를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소파에 앉았다. 임원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어찌 보면 자유시간이 생긴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나저나 그동안 뭘 한다?
그때였다.
“현아, 함께 회의실에 가보겠느냐?”
예?
*
“회장님, 현이가 이런 자리에 오는 것은 좀. 다른 임원들도 그리 썩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큰 삼촌이 이따금 눈을 흘기며 나를 노려봤다.
어쩌라는 건지, 나도 좋아서 온 게 아닌데 말이다. 누가 따분한 임원 회의에 자발적으로 참석을 하겠는가.
헌데 다른 임원들은 나를 보자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하도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많이 마주쳤던지라 어색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요즘 신문이며 TV며 내 얼굴이 많이 비치지 않았던가. 손주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는 이도 있었다.
“유전무, 자네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게나.”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큰삼촌은 입을 꾹 다문 채 뒤로 물러났다.
회사마다 고유의 회의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도 훗날에나 만들어졌지 보수적인 문화의 90년대야 오죽했겠는가, 거의 일방적인 전달에 가까웠다. 그러한 점에서 동주는 꽤 미래지향적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회의의 주재자가 생각이 트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전무도 한번 의견을 말해보게나.”
한가지 사안에 대해서 임원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으셨다. 보통 회장직에 있으면 회의에 참석하기는커녕, 말미에 얼굴을 비추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직도 회의를 주도해서 나가지 않는가. 역시나 근면 성실한 기업인이었다. 이러니 창업구성원
들이 아직도 함께 하는 것일 테지.
“다음 안건은 신소재 ‘그라이핀’과 관련한 사안을 발표하겠습니다.” 그라이핀. 동주를 살린 탄소 신소재였다. 외환위기의 풍파까지 비껴가게 할 정도로 대단했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직 고민이 많은 듯했다. 초기 개발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일 거다. 지난 삶 망해버린 동주에 대해 알아봤을 때 방대한 비용에 나 또한 놀랐었으니.
어찌 보면 왕회장이 반도체 분야에 도전한 것만큼이나 혁신적이었다. 그러니 외국계 자본이 눈에 불을 켜고 동주를 흡수했겠지.
“회장님, 지금이라도 그라이핀 개발을 멈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확장하고 있는 회로 소재와 감광판에 더 힘을 실어주시는 게 어떨런지요? 신소재 개발은 아무리 봐도 시기상조로 보입니다.”
뭐?
“맞습니다, 회장님. 유전무의 말처럼 회로 소재와 감광판에 더 힘을 싣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자제품이야 해가 지날수록 수요가 거듭되고 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신소재 산업을 펼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할아버지는 잔뜩 미간을 좁히고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시다. 설마 나비효과가 여기서도 발생한 건 아니지?
안됩니다, 할아버지. 진행 시켜야 합니다! 밀어붙이세요!
아오, 이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라이핀이 바로 동주를 살릴 키워드라고 말해야 하나.
“흐음.”
그 순간 말석에 앉아있던 나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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