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58화 >
“장피에르 감독이 절 원한다고요?”
임혜라 이사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구나,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장피에르 감독은 처녀작인 유대계 천재 소년이 주인공인 ‘라비안로제’를 시작으로 프랑스 영화계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인물이다. 그의 필모그
래피가 빠짐없이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왜 영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니? 장피에르, 그 친구가 아직 입봉 그러니까 자신의 영화를 아직 만들진 못했지만, 실력이 아주 뛰어난 감독이야. 시각 구도랑 미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이 아줌마가 보장한단다. 알지, 아줌마 화가인 거?”
알다마다, 장피에르 감독이 훗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지난 삶에서도 느낀 바지만 임혜라 이사장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아주 뛰어나다. 어찌 보면 손유하가 왕회장이 아니라 임혜라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일지도.
“영화 내용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장피에르 감독이 굳이 왜 절 원한 건지 의아해서요. 프랑스에도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잖아요. 아니면 가까운 유럽의 교향악단에 부탁해도 되는 일일 텐데요.”
한 마디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다. 프랑스에도 거장이라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분명 있었다. 내가 브뤼셀에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쌓아 올린 명성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개런티를 아끼려고? 아서라, 내가 얼마를 원할지 알고. 더군다나 원한다
면 한국에서 후시녹음을 준비해준다고 하지 않는가. 배보다 배꼽이 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유야 간단하지 않을까?”
“예?”
임혜라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작 시안서의 한 부분을 콕콕 찔렀다.
유대계 천재 소년,
“현이 네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잖아.”
두말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표정이 아닌가. 사레가 들릴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임혜라는 그런 내 모습이 퍽 귀여운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브런치를 먹으면서 해볼까?”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브런치를 먹자는 건지. 지난 삶에서도 익히 느꼈었지만,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 때때로 바게트를 버터에 찍어 먹으면서 보고를 하기도 했었다. 어째 점점 제일그룹 법무팀 차장이었을 적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은 과연 착각일까.
‘입맛이 한결같으시네.’
널찍한 크레페에 치즈와 베이컨, 계란을 반숙해서 만든 프랑스식 브런치 갈레트였다. 가운데 있는 계란 노른자가 소스 역할을 하니 입안에 고소함이 가득 감돌았다. 레몬에이드와 찰떡궁합을 자랑했지. 누가 만들어도 맛있을 음식인데 전문 요리사가 만들었으니 그 맛
이 오죽할까.
“갈레트 먹는 방법도 그 프랑스 친구에게 배운 거?”
나는 당황하여 입에 베이컨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자못 부자연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삶 당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요리 먹는 법을 공부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임작가님,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현아,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무슨 작가님이니.”
임작가님 이라고 하는 것도 어색해 죽겠는데, 아줌마라고 부르라니. 난 못 들은 척 임혜라 이사장을 바라봤다. 그녀는 식사 또한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업 파트너는 물론 부하직원과도 식사를 즐기곤 했지. 어떻게 보면 중국 쪽 바이어들과 성향
이 잘 맞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진학 문제 관련해서인데요. 앞으로 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가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공립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보니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걸 제대로 못 할 거고요. 학교 측에서도 완벽히 저를 케어해주기
는 힘들 거라 생각되거든요. 결국, 사립으로 가야하는데.”
“제일재단 산하의 중학교로 전학을 오고 싶다는 거니?”
“예,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도 장피에르 감독의 작품을 동시녹음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일재단 산하의 중고등학교는 항상 입학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 TO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할아버지나 왕회장에게 말해도 단박에 성사될 일이었지만, 앞으로 실질적인 제일재단의 주인은 눈앞의 임혜라 이사장이 될 테니 초장부터 기름칠을 해두는 것이 나중에
별 탈이 없다. 물론 장피에르 감독의 작품을 걸고 거래를 하는 것이 건방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임혜라 이사장이라면 그 얘기가 달랐다. 오히려.
“현이가 나이는 어리지만, 장사 수완이 대단한걸? 아줌마가 장피에르 그 친구한테 빚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말이야.”
더욱 이 상황을 재미있어할 호걸이었지.
* 누가 제일재단 산하의 중학교 아니랄까봐 교복 재질부터가 남다르다. 맨들맨들 한 것이 살에 촤르륵 감긴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내가 예술중학교로 전학을 가지 않는 것에 걱정을 표하셨지만, 한사코 내가 괜찮다 하니 포기하신 눈치다. 아무렴, 런던 심포니와 베를
린필 그리고 현의 여왕에게까지 제안받은 마당에 음악을 수학하기 위해 예술중학교를 찾아간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
“다 왔어, 강현 학생.”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학교는 으리으리했다. 90년대였지만 홀로 21세기를 달리는 듯한 시설들이다. 과연 국내 굴지 기업의 자제들이 앞다투어 제일중학교로 진학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인맥이 훗날을 좌지우지하게 될 정도로 크게 작용하니 항간에는
한국대학교보다 가기 힘든 곳이 제일 중고등학교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기사 아저씨의 배웅을 받고 학교로 들어서니 교무실에서부터 나를 마중 나온 선생님이 있었다.
“강현 학생.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제일중학교의 교장인 김규성 선생님이에요.”
일전 대성중학교에서 면박을 당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이지 않은가. 내가 퀸엘리자베스에서 최연소 대상을 수상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보다 이들에게는 임혜라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오히려 너무 부담스럽게 대하는 탓에, 내가 다 송구스러
울 정도였으니.
“자, 다들 주목.”
담임 선생님과 함께 배정받은 반으로 들어서자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다들 하나같이 이름난 기업의 자제들일 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찮다. 동경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이따금 질투 어린 시선도 느껴졌다. 개중에는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들도 많
았는데 아마 이것이 언론의 힘이겠지. 그 탓에 남자아이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다. 사내놈들이란, 어쩔 수 없나 보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삼켜내며 학생들을 향해 첫인사를 건넸다.
“현아, 전학 첫날부터 중간고사 시험인데 괜찮겠니?”
담임 선생님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고르고 고른 전학 날이 중간고사 시작이었던 것. 편법을 쓰면 전학 시기를 미룰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괜찮아요, 틈틈이 공부했어요.”
일전 중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확실히 지난 삶보다 머리가 더 잘 돌아갔다. 물론 과거에도 어느 시험에서건 수석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때는 항상 독종이라는 별명이 뒤따르지 않았던가. 지금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예컨대 컴퓨터로 치자면 연산속
도와 정보처리량이 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초능력적인 수준은 아니었고 남들이 보기에 조금 놀랄 정도. 그 덕에 가정 과목 등을 제외한 국영수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삶은 사법고시를 볼 것도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차라리 키나 조금 더 빠르게 컸으면 좋겠다. 누가 들으면 배불렀다고 한 대 쥐어박혀도 할 말이 없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 이윽고 내 손이 시험지의 마지막 낱장을 넘겼다.
* * *
아침부터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난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어젯밤 아버지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던 보고서들을 슬쩍 살펴봤었으니. 전부 신소재 ‘그라이핀’과 관련된 연구 보고서이지 않았던가. 물론 내가 화학식을 봐야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만은
아버지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나는 숫자가 있었다.
연구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었던 것일 테지. 신소재 개발을 담당하게 된 아버지가 당연히 고민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설령 성공한다고 한들 그라이핀을 사용할 곳이 정말 있는지 의문이었기에.
“아버지, 해볼 때까지는 해봐야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할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라이핀은 앞으로 동주의 생사를 책임질 신소재였다. 지금은 몰라도 훗날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니.
“현이 네가 회의할 때 여긴 화학공장이 아니라 화학회사이지 않냐고 했다며?”
어느새 소문이 그까지 났나 보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곤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우리 아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실을 애비가 돼서 모르면 안 되겠지. 항상 현이를 보고 배우는 것 같아 고맙구나. 그런데 현아, 오늘은 학교에 안 가니? 교복 차림이 아니구나.”
“아침에 갤러리에 들러야 해서 아마 오후쯤에 등교할 것 같아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음악영화 동시녹음 건 때문에요.”
제일재단 산하의 사립중학교라 그런지 좋기는 좋았다. 출석 인정이 수월했기 때문. 아무래도 내가 퀸엘리자베스에서 최연소 대상을 차지한 이력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더군다나 신문과 뉴스에도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었으니 학교 측에서도 학생의 역량 발휘라는
명목하에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는가. 물론 그 뒤에는 임혜라가 든든히 버티고 있어 더 수월하게 진행된 감이 있지만.
“아저씨, 매번 감사합니다.”
“뭘요, 요즘 강현 학생 때문에 어르신 얼굴이 많이 밝아지셔서 다행이에요. 그럼 점심 끝나고 데리러 올게요”
갤러리에 도착해서 들어서자 일전에 봤던 앳된 여직원이 나를 맞아주었다. 일전의 일 때문인지 내게 무척이나 친절했는데 난 여전히 모르는 척으로 일관했다.
으레 노크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서니 임혜라와 한 외국인이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현아, 빨리 왔네? 약속 시각보다 매번 이렇게 빨리 오면 이 아줌마가 미안하잖니. 참, 인사해. 현이 너를 보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날아온 장피에르 감독이란다.”
설마하니 장피에르 감독이 직접 한국에 방문할 줄이야. 당연히 조감독이 오거나, 음향감독이 올 줄 알았는데. 얼어있는 내게 장피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장피에르입니다.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현.”
“영광입니다. 강현이라고 합니다.”
임혜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시선이 점점 왕회장과 닮아가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장피에르, 모자라면 더 먹어요. 쉐프의 갈레트는 정말 환상적이니까.”
역시나 브런치로 시작하는 아침이었다. 물론 단순한 식사자리가 아니라 영화 동시녹음과 관련한 계약사항이 구두로 오가는 자리였지. 어찌 보면 임혜라는 중개인 자격으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고. 살다 보니 임혜라 이사장이 주선하는 계약에 갑으로 앉게 될 줄이야. “현, 나는 기성 바이올리니스트들과 마찬가지의 적정선에서 개런티를 책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현이 요구하는 모든 편의 사항은 모두 수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놀라운 제안이었다. 입에 머금고 있던 짜디짠 베이컨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물론 여기서 개런티를 더 올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신인에게 기성급의 개런티를 책정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모든 편의를 고려해준다고 하니 파격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본래라면 긴장감 속에서 밀고 당기는 오묘한 맛이 있는 계약조정의 장이었지만 지금은 웃음꽃이 만개했다.
장피에르는 영화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로서의 제작은 처음이다 보니 ‘라비안로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터였다. 하물며 따지고 보면 완전한 상업영화라기보다는 감독 개인의 취향이 물씬 담긴 영화가 더 맞았다. 덕분에 훗날에도
항상 명작으로 손꼽혔던 것일 테지.
“난 주인공인 모세가 수용소에서 마지막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 아주 기대돼요. 그 장면을 촬영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죠. 모세가 바이올린을 켜면 철창 안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앞다투어 바라보는 거예요.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의 선율을. 현도 제작 시안
서를 받아봤을 테니 무슨 장면을 말하는 건지 알죠?”
암, 나도 아주 좋아하는 명장면이었지. 오죽하면 그 장면만을 수십 번 돌려봐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났겠는가. 그탓에 비디오방 아저씨한테 혼쭐이 났었지.
“장피에르, 저도 그 장면이 정말 기대가 돼요. 바이올린을 켜는 걸 손짓으로 묘사하는 장면을 말씀하시는 거죠? 철창 안의 사람들과 주인공이 휘파람으로 선율을 만들어내고 말이에요.”
일순 장피에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죠, 현?”
어?
장피에르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알 수 있었다. ‘라비안로제’ 종장의 초안은 내가 알고 있는 명장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제작 시안서의 콘티가 두루뭉술하게 표기되어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기에 난 당연히 무형의 바이올린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고! 곧장 표정
을 수습하기는 했다만 이미 장피에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따가운지 목이 탈 정도였지.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는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그래요! 따지고 보니 오래된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는 것보다 자유를 갈망하는 두 손으로 무형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더 좋네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던 걸까요!”
뭐?
“어떻게 보면 수용소 안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는 바이올린이 하나씩 들어차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자유를 갈망하는 마지막 선율은 그들의 휘파람으로 대체하면―!”
그 순간 모든 영감을 깨달았다는 듯이 장피에르가 나를 덥석 껴안았다. 얼굴에는 감격한 기색이 역력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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