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21
120 협객인 줄(3)
우우웅!
적서린이 아름다운 외모만으로 신녀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다음 대 아미파의 신검으로의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능히 검후에 어울리는 재목으로 평가를 받는다.
으득!
물러서지 않는 벽 같은 적서린의 기도에 미소를 짓고 있던 임연홍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아 왔던 응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항상 자신의 앞길을 막아섰던 주제에 자애로운 척 서푼의 위로를 건넸던 적서린.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르면서.
“뭘 꾸물대고 있어요! 어서 제압하지 않고!”
“알았으니 그만 땍땍거려.”
복면인을 이끄는 자가 히죽이며 적서린을 노렸다. 동시에 복면인들은 무애를 노려서 시선을 흩어 놓았다.
“이런 악독한!”
“역시나 여물지 않았군.”
중독되지 않았다면, 사저가 곤란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해 봤자 전투에선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전투에선 현재의 전력과 결과만이 중요했다.
채채채챙!
적서린의 검과 복면인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구파의 정통 검법에 웅후한 공력이 실려 위력을 더했다. 마도나 사도처럼 길을 잃지 않고 직선으로 향하는 검공이라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가고, 또 가게 되면 마도와 사도는 따르지 못할 검공이 탄생한다.
큭!
부딪칠 때마다 적서린은 흔들렸다. 본문의 검 중에서도 난해하다고 알려진 난피풍검법을 펼쳤지만, 제 위력을 내기는커녕 일방적으로 밀렸다.
“……무애 사저!”
공력에서 밀린 적서린은 무애 사저에게서 떨어졌다. 복면인은 애초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 적서린이 흔들릴 만한 상황을 만들어 손쉽게 제압하려는 것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절대 방심하지 않는 자였다.
스윽!
복면인 중 하나가 무애의 목에 검을 갖다 대었다. 차가운 예기에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부르르 떠는 무애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있음을 무의식중에도 느꼈다.
“검을 거두어라! 거절한다면 네 사저의 목이 바닥을 구를 거다.”
적서린은 검을 맞대 보고 알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도, 복면인을 감당하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중독된 상태에서 겨우겨우 막아 내고 있는 처지였다. 압도적으로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상대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무애 사저, 나는 아미파의 무인으로 죽겠어요!”
어차피 굴욕을 당하고 죽을 터. 그럴 바에는 싸워서 죽든지, 자결을 택할 것이다.
“말로는 안 통하는군.”
적서린의 각오를 느낀 복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임은 분명한데, 다루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각오가 반드시 통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아니다.
“중년의 매끄러운 몸뚱이가 어떤지 보고 싶군. 무애의 옷을 모조리 벗겨.”
“악독한 놈들!”
치를 떠는 적서린이었다. 무애 사저가 자신의 눈앞에서 능욕을 당한다는 걸 상기하자, 결의를 다진 각오가 흔들렸다.
찰나의 틈을 복면인은 놓치지 않았다.
스왁!
베인 상흔에서 핏물이 튀었다.
휘청!
밀려 나갔다. 검형이 흔들린다. 상처를 무시하고 연이어 검을 뿌리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복면인이 검에 사정을 두었던 점도 작용했다.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끈질기군. 하지만 잠혼독을 견디긴 힘들 것이다.”
복면인의 말대로 적서린의 안색이 퍼렇게 질려 가고 있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독이 발동한 것 같다.
“능욕을 당할 바엔 죽겠다.”
“그게 맘대로 될까?”
자결을 택하지만,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복면인이 본격적으로 검공을 끄집어내자 속절없이 밀렸다.
설상가상으로 무애의 가사가 벗겨지고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매끄러운 두피가 떨렸다.
우드드득!
절체절명, 닭 모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참.’
-나는 분명히 말했다.
‘연결 상황이잖아, 이건.’
-비겁한 변명이다.
당문의 일을 해결하고 나니,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우연일 가능성은 일 할도 되지 않는다. 당문의 소식이 놈들에게 전해졌을 테고, 낄 데 안 낄 데 끼어든 건 사실이니까.
다행이라면, 모든 일이 계획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우연이 연이어 겹쳤다는 것도 맞았다.
하나, 우연이 연이어 겹치면, 때론 운명처럼 필연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날 죽이려고 본격적으로 수를 썼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날 우습게 봤네.’
-그랬다고 봐야겠지.
‘최소 구대성천은 전부 끌고 왔어야지. 흠, 그래도 안 되겠지만.’
-짜증 나지만, 인정해 주마.
전부 다 알고 찾아왔다면 어림도 없는 전력이니까. 고작 이런 놈들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이쯤 들어 봤으면 사정과 전말은 뻔했다. 아미파와 청성파에 심어 놓은 놈들의 씨앗일 테고, 당문의 일이 틀어지면서 사천을 흔들기 위한 같잖은 이간질이었다.
우드드득!
더 들어 볼 필요가 없어진 무진은 잡고 있던 목을 순순히 으스러뜨려 주었다. 여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놈의 얼굴에서 억울함이 새어 나왔지만, 죽은 소 대가리처럼 혀를 길게 내뺐다.
휘익, 철퍼덕!
무진은 시체를 오래 가지고 노는 고약한 취미는 없었다. 잡고 있던 시체를 바닥에 던지고 빡빡이 스님을 향해 쇄도했다.
목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긴 했어도 방비가 되었다.
다만, 무진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네놈…… 크억!”
“병신.”
딱 봐도 적이지, 아군이겠냐!
말을 왜 시켜.
여유로운 놈, 여유롭게 뒈져라.
무진은 놈의 등 뒤를 주먹으로 강타하고, 병풍처럼 서 있던 복면인 두 놈의 머리를 좌에서 우로 찼다.
퍼퍽, 뿌거거걱!
섬광처럼 빠르고 강력한 각법이었다.
복면인은 복면을 쓴 채로 대가리가 박살 나며 본인을 증명조차 못 한 채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
사사사삭!
무진은 멈추지 않고 번개처럼 돌아서며 주먹을 뻗었다.
퍼어어엉!
권심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와류가 권풍에 실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동료를 잃은 자들에게는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푸에에엑!
사람이 폭사하며 사방으로 핏물이 튀는 장면은 생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권풍에 맞으면 보통 이렇게 된다. 소림의 백보신권이 칠십이종으로 잘 포장이 되어서 그렇지, 제대로 발휘한 백보신권에 적중하면 사람 신체가 남아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붉은 선혈이 햇살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적광을 비췄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던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무진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임연홍을 마주했다.
“……오지 마! 난 아미파의 무인이라고!”
“미친년.”
가라고 하면 안 가고, 오라고 하면 안 오는 무진이었다. 하물며 오늘 처음 만난 미친년의 말을 순순히 들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그리고 아까 한 말 다 들었다.
개 같은 년이 어디서 사람인 척하고 있어! 개도 자기를 귀여워해 준 주인은 물지 않는다고 했어. 사저가 오냐오냐 잘 길러 줬으면 고마워해야지, 어딜 손가락을 물어!
‘안 그러냐, 마왕?’
-나 들으라고 한 소리냐?
‘눈치 빠르네.’
-이런 개자식이!
사육사에게 길러진 마왕이 분노했지만, 무진은 우선순위를 잊지 않았다.
“죽엇!”
기습에 놀랐던 임연홍이 돌연 멸절검을 펼치며 무진에게 달려들었다. 멸절검은 아미파의 팔대검에 속하는 살상력 짙은 검법이었다.
스륵!
무진은 찌르고 들어오는 검의 궤적을 고스란히 읽어 내며, 타고 들어가 임연홍과의 간격을 좁혔다.
헉!
멸절검의 극의 단천명(斷天命). 천수를 끊어 내는 수를 이토록 간단히 회피하며 제공권을 내어 줄 줄은 몰랐다. 위기감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반격을 하기도 전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퍼어어어억!
주먹에서 전달된 권경이 모래 위에 뿌린 물처럼 빠르게 흡수되어 오장육부를 강타했다.
우웩!
식도를 타고 넘어온 이물질이 임연홍의 입에서 쏟아졌다.
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 고기네.”
스님은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무인은 고기를 먹어야 했다. 힘을 쓰려면 고기 섭취는 필수다. 화식을 금하고 선식만으로 경지에 이르기도 하나, 극히 희박했다. 무인은 화식과 육식을 통해야만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털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임연홍을 발로 받쳐서 일으켜 세운 후 복면인에게 던졌다.
쐐애애액!
적서린을 철저하게 공략하며 농락했던 복면인은 철호, 나릉, 육칠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무진이 마차를 끌고 오는 동안, 양쪽으로 돌아서 움직였다. 기습적인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은 복면인을 노렸었다.
퍼어어억!
포환처럼 날아간 임연홍에게 일격을 허용한 복면인은 크게 휘청하며 빈틈을 내어 주었다.
“……이놈들!”
숨이 턱 하고 막혔던 복면인은 화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황소처럼 돌진해 들어온 놈의 일격에 어깨를 내어 주었다.
푸아아아앙!
가공할 파괴력.
내력으로 감싼 육체에 금이 가며 내상까지 입었다. 대라무위신공으로 내력을 운용하여 스며든 권경을 해소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휘이익!
나릉의 가벼운 발길질이 복면인의 뒤통수를 노렸다. 간신히 고개를 숙여 회피했지만, 육칠의 무릎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노리고 계획한 합격이었던 것처럼, 호흡이 찰떡궁합이었다.
뻐어억!
무릎에 까인 복면인의 입술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솟구쳤다. 고개가 크게 젖히자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철호는 무쌍일점포를 발출했다.
푸아아아앙!
무쌍일점포는 철혈사자권의 후반식으로, 위력만 놓고 보면 가장 강했다.
쿠다다다당!
청성의 절예, 칠십이파검 절광(絶光)을 본능적으로 펼쳐 막아 냈지만, 복면인은 충격에 휘말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파파파팟!
수치스러운 행동에도 복면인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일어서기도 전에 육칠의 장력이 요소요소를 노렸다.
“……이 비겁한 놈들!”
흥, 뭐래!
철호, 나릉, 육칠은 신경도 안 썼다. 이기면 장땡이라는 무진의 신조를 철석같이 믿었다. 싸움에 비겁함이고 나발이고, 지면 끝장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무인으로 탈바꿈했다.
“독이나 쓰는 놈이 비겁은 무슨.”
독을 써서 아녀자를 능욕한 후 죽이려고 했던 놈들이 비겁을 운운하다니, 웃기는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처지에 따라 사람은 양심을 간단히 버렸다.
응?
서슬을 건드리는 예리한 기감이 발동했다. 무진은 순간의 감각을 믿었다.
“물러서.”
……예?
무진은 강제로 철호, 나릉, 육칠을 밀어냈다. 그 순간 기광을 번뜩인 탁광운의 소매에서 무언가가 쏘아져 나갔다.
“죽어랏!”
검게 칠해진 작은 쇠구슬이었다. 빠르고 위력적이긴 해도, 굳이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체를 안다면 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꽈아아아아아아!
발화된 쇠구슬이 폭발하며 천지가 개벽했다. 가공할 화염이 순간적으로 퍼져 나갔다. 화염풍과 쇠구슬이 결합한, 일대를 소멸할 가공할 병기였다.
우우우우우웅!
그러나 폭발은 반 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무진의 패력이 공간을 뒤덮더니, 폭발한 쇠구슬을 잡아챘다.
솨아아아, 팟!
활화산처럼 터져 나갔던 폭발이 기공의 막에 둘러싸여 압축되었다가 촛불처럼 꺼져 버렸다.
아!
철호, 나릉, 육칠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탄을 숨기고 있을 줄 전혀 예상을 못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순간 덮쳐 왔던 화염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
‘……굉천뢰!’
이를 알아본 육칠의 놀람은 인간적인 영역을 넘어섰다. 청성파의 금용 폭암기로 규정된 굉천뢰였다. 벽력탄에 비견된다는 설이 있었다. 그걸 공력으로 뒤덮어 소멸시켰다.
놀라기는 복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도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굉천뢰이기 때문이다.
“어, 청성일검 탁광운이잖아.”
“본문에서 가만있지…… 쿠웩!”
복면이 벗겨지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많이 놀라진 않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청성파의 개입은 예상한 대로였다. 그저 청성파가 자랑하는 오대신성의 일좌인 청성일검일 줄 몰랐을 뿐이다.
‘대체 어디까지 스며든 거야?’
다른 이들과 달리 개방에 속한 육칠의 속내는 타들어 갔다. 당문을 시작으로, 청성과 아미에까지 암중 세력이 숨어 있었다. 이들의 목적과 세력에 오한이 들었다.
커어억!
탁광운이 새우등처럼 휘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치명타를 입은 그는 나릉, 육칠, 철호의 합격에 제압되어 발버둥 쳤다.
꽈악!
무진은 제압된 탁광운의 목을 잡은 후 투심마안을 발동했다. 알고 있는 영역 내에서 대답하면 된다.
“난 아무것도…… 크아아아아악!”
“알아. 잡놈이 뭘 알겠어.”
기대를 내려놓은 무진은 마음이 편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 아는 게 쥐뿔도 없었다.
부르르르르르!
사정없이 몸을 바르르 떨면서 전신의 핏줄이 솟아올라 터질 듯이 부풀다가 가라앉았다.
크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무진은 대수롭지 않게 숨통을 끊어 주었다.
우드드득!
이어서 기절해 있던 임연홍을 깨웠다.
“살려 주세요…… 제 몸을…… 드릴…… 쿠웩!”
어딜 더러운 몸뚱이로, 누구 결혼 생활 망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