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36
435 분란제조기(2)
“흑천부에 도착했습니다.”
“알았어.”
새 옷으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무진은 전용 마차에서 내렸다. 확실히 비싼 만큼 옷이 날개였다. 지금이라도 하늘 위로 날아갈 수 있었다. 맞춤옷이라 딱 맞으면서도 실용성도 뛰어났다. 단, 가격 측면만 놓고 보면 제값을 한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가였다.
“여벌의 옷이 있다는데도 굳이 이런 걸 다 사 주고 말이야. 원, 부담스러워서.”
“총표두께서 입어 주신다면 장주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허장관은 상인으로서 회의감이 들었다. 흑천부에 도착하기 전 도시를 들러 포목점에서 옷을 샀다. 녹림과 마신교와의 전투로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새로 구매해야 했다.
그래도 그렇지.
‘오백 냥이라니!’
남의 돈이라고 아주 물 쓰듯이 썼다. 그래, 그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한데, 정운상단이 운영하는 포목점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석가장에 심각한 타격을 준 정운상단을 대놓고 이롭게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우리가 남도 아니고.
석가장에서 돈을 받은 이상 상도의가 있다면 정운상단은 제외했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은 또 상인이 아니란다. 이게 또 맞는 소리처럼 들려,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사파 새끼들이 돈 좀 벌었나 보네.”
“……제발 언행에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다른 곳도 아니고 흑천부 앞에서 저딴 소릴 하다니, 허장관과 상인들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누가 들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중에 내 동생이 싹 다 정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사파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건 아닙니다.”
“그래 봤자, 사파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예의를 지켜 주십시오. 저희는 총표두처럼 심장이 강하지 않습니다.”
“심약하기는, 알았으니까 다들 마음 푹 놔. 알다시피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아무렴요.”
대체 뭘 안 할 건지 허장관으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마차 안에 조용히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운하게도 지금은 검문이 있기에 마차에서 나와야 했다. 사도십이세에 속하는 흑천부로 들어가야 하는데, 마차 안에서 고개만 까딱하면 그 자체로 문제의 빌미가 되었다.
“깃발 괜찮지?”
“……천하의 명필입니다.”
“거봐, 내 명성이 이 정도야.”
“……대단하십니다.”
악명이겠지.
흑천부를 둘러싸고 있는 사파의 영역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건드리진 않았다. 왜냐고? 만천상회의 깃발 앞에 천하무적 천권 대협이란 별호가 떡하니 적혀 있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다들 학을 뗐지.’
사파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도 천권이란 별호를 보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호기를 부릴 만도 한데, 이번 일로 천운권의 악명은 한층 더 발전했다. 이미 무공의 경지로 보면 절대경이었다. 화경을 뛰어넘은 악명이 아닐 수 없었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대체 어떤 무인이 자신의 별호를 깃발에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새긴단 말인가. 그걸 진짜로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생에 대협이 못 돼서 죽은 귀신이 붙지 않고서야.
그래! 좋다, 이거야.
대협이면 대협답게 행동하면 좀 안 되나?
대체 어딜 봐서 대협이냐고.
흑천부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물자는 적지 않았다. 사파를 대표하는 방파다운 위용을 갖추었다. 거대한 정문과 이 장에 육박하는 담벼락이 넓게 둘러쳐져 안을 볼 수가 없게 했다. 외관에선 고층의 전각들로 이루어진 고각대루(高閣大樓)만 보였다.
“오래 걸리는데, 내가 해결해 줄까?”
“아닙니다. 절대로 괜찮습니다.”
“쟤들이 뭐라고 하면 날 팔아. 알다시피 난 마음이 넓거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자꾸 안다고 하는데, 모르겠거든요.
허장관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지냈으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 것 같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
천운권의 악명을 상기하면 위험한 사람인 건 분명한데, 무인들에게 흔히 보이는 권위의식은 별로 없었다. 자신과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것만 봐도 사람을 가리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때의 날카로움은 또 뭐고?’
때마침 차례가 왔다. 만천상회의 깃발을 봤기에 검문을 하는 무인들도 사례를 바라진 않았다. 자칫 거래 시에 부정한 방법이 밝혀지면 책임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파긴 해도, 흑천부는 체계가 있었다.
경사대의 대주 사익도(死翼刀) 왕종경은 언행에 조심스러웠다. 석가장이 대기열에 있을 때부터 마음을 졸였다. 상부에서 선례대로 하라는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바로 들여보냈을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검문은 따로 안 해?”
“천권 대협을 뵙습니다.”
“이거 봐라.”
기특하네.
무진은 왕종경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철호와 서문호도 뒤를 따랐다.
‘후우, 사신이 따로 없구나.’
경사대 경력 십오 년 차의 왕종경은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무인 대부분은 실력과 인품이 비례하는 편이나, 그렇지 않은 예도 적지 않았다. 간혹, 꾀죄죄한 복장의 무인을 제지하는 초보자로 인해 엄청난 출혈을 입기도 한다.
하급, 중급, 상급, 특급으로 위험 등급을 매긴다고 했을 때, 천운권은 초특급이었다. 소문의 반만 사실이라도 건드려선 안 되는 벽력탄으로 최대한 말썽이 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어서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허장관과 상인들도 무사통과했다. 별다른 말썽 없이 운이 좋은 편인데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대재앙이 오기 전 폭풍 전야처럼.
***
호남과 귀주는 흑룡성의 영향력이 강한 축에 속했다. 예로부터 그 일대는 사파의 영역으로 분류가 되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비롯한 대문파가 없기 때문이다.
흑천부는 귀주의 성도가 아닌 정안에 터를 잡고 일대를 지배했다. 성과 성의 경계로 관할 문파가 있으며 귀주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했다.
대궐 같은 고루거각의 최상층.
흑천부의 대소사를 담당하는 묵영전(墨靈殿)이 있었다. 부주의 명령으로 원로, 호법, 장로가 모였다. 핵심 수뇌부가 한자리에 전부 모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
탁자를 가운데 둔 원로, 호법, 장로들의 표정이 미묘하다. 굳이 이런 일로 다 모여야 하나? 회의적인 이들이 절반이 넘었다.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부주!”
흑천부주 구양천극의 물음에 수뇌들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양만으론 사파의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선풍도골의 호인이나, 그의 별호는 암흑신마(暗黑神摩)였다. 별호에 마(魔)가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성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암흑신마의 과거를 알기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흑천부의 현신인 구양세가는 정사 중립에서 사파로 넘어간 세가였다. 당시 가문의 파벌이 정사로 갈리면서 혈전이 있었다. 대공자의 신분이었던 구양천극은 정파의 위선에 질려 사도로 돌아섰으며 반기를 들었던 혈족을 가차 없이 숙청했었다.
나이가 들고, 늦게나마 자식을 낳아 성정이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신마는 신마였다.
사도십이세 중에서도 상위의 문파로 인정을 받는 연유이기도 했다. 신주이십일강의 사마에 속하는 흑천부주를 무시할 세력은 없었다.
“천운권이 본 부를 찾았다지.”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놈은 천지 분간 못 하는 망아지에 불과합니다.”
“그 망아지로 인해 제갈세가와 산동악가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더군. 말썽을 일으켜 봐야 좋지 않으니 시비가 붙지 않았으면 하네.”
“하오나, 일전 놈의 행태는 도를 넘어섰습니다. 이번에도 좌시한다면 관할 세력과 무인들이 동요할 겁니다.”
과거 천운권의 만행을 흑천부에서 외면했다는 낭설이 돌았다. 대외적으론 사태를 악화하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다들 귀찮음이 다분했다. 천운권과 자신들이 동격으로 치부되는 것도 맘에 들지 않고, 애써 제압해도 이득이 적었다.
이것이 정파와 사파의 다른 점이었다. 이득이 되지 않으면 단순히 명예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나 패했을 때의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을 테고.
하나, 지금은 좀 사태가 묘하다. 일전에 천운권은 사파의 영역에서 활개를 쳤을 뿐이다. 흑천부와 관련은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마찰은 빚지 않았다. 반면 흑천부 내에서 말썽을 일으킨다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야 했다.
구양천극도 저들의 마음을 알고는 있었다. 일견 타당하나, 흐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외부의 소행인지, 내부의 소행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대들은 흑천부가 쪼개지기를 바라는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천운권이 지나간 자린 전부 풍비박산이 난 후 세력을 잃었다. 그게 과연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설령 의도한 바가 있다고 해도, 천운권 따위가 어찌하겠습니까?”
“천운권의 배후에 무림맹이 있는데도.”
“무림맹도 천운권의 만행을 마냥 감싸지는 못할 겁니다.”
일견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검제와 취선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신검마협이 무림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검절이 물러난 이후 무림맹은 저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천운권이 그간 해 온 일들을 보면 유용한 도구로서 활용성이 컸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묘하게도 아까웠다.
“무림맹이 아니더라도 놈은 화경에 이르렀어.”
“세간에 알려진 소문이 과연 진실이겠습니까.”
“아직도 실감을 못 하는군. 이건 부주로서 내리는 명령일세. 사소한 다툼이야 넘어갈 수 있어도,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부주!”
구양천극은 천운권으로 인해 분란이 생기길 원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석가장과 거래를 트고, 문제가 생겼었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일으켜 봐야 좋지 않다고 봤다.
‘골치 아프군.’
사도십이세의 연합체인 흑룡성의 기류도 이상했다. 이럴 때 분란을 일으켜 봐야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흑천부주의 경계와 달리 수뇌부는 천운권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천운권의 악명을 뭉개 버리고 싶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겠어.’
과거의 위명을 알기에 신마의 나약한 모습은 의외일 수 있으나, 예견된 수순이었다.
***
허장관과 상인들은 물품의 품목과 수량을 계약한 문서와 비교하여 흑천부 산하 상운관(商運關)의 검수를 받았다. 물량이 적지 않은 관계로 확인하는 데 반나절은 걸렸다.
그동안 무진은 흑천부에서 내어 준 접객실에서 식사를 했다.
밥을 먹은 후, 당연하게도 침상에 누웠었다. 두 시진 동안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접객실에서 나왔다.
무진은 제자들과 흑천부를 활보했다. 사파의 거두인 흑천부의 구조도 파악할 겸 둘러봤다. 확실히 정파의 문파와 달리 실용적인 편이었다.
세월을 간직한 명문 정파는 과거의 유산을 남겨 두는 경향이 강했다. 그에 반해 흑천부는 적의 침투와 방어에 용이한 구조였다. 전각과 담장이 절묘하게 맞물려 침입 자체가 어려웠다.
무진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다.
“멈추시오. 외부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거야?”
“패를 보여 주십시오.”
“자.”
흑패를 확인한 무인은 뜻밖의 표정을 짓다가 사색이 되었다. 상대를 알아차린 것이다. 흑천부는 손님의 등급에 따라서 흑청적(黑靑赤)의 색이 다른 패를 내어 주는데, 흑패는 최상위 등급이었다. 오늘 흑패를 내어 준 사람은 하나였다.
“천……권 대협이시군요.”
“붙여.”
“천권 대협을 뵙습니다.”
“훌륭해.”
곧바로 수정한 무인의 재빠른 대처를 칭찬한 후, 금지를 물어보았다. 흑패를 지닌 이상 흑천부의 심처를 제외하면 자유로웠다. 무진은 문지기의 대응에 만족하며 안내인으로 삼았다. 속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문지기 갈호상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모른 척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