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07
506 담합(2)
의혹이 쌓이려는데,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쯤 하시지요.”
“홍무개, 그대의 짓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공정하게 끝났다면 나설 이유가 없었지요.”
“개방은 공동파와 척을 질 셈인가?”
“흠, 본방을 협박하시는 겁니까?”
영관도장이 참지 못하고 분기를 드러내자, 홍무개의 붉은 얼굴이 차갑게 식으며 되물었다.
흠칫!
공동파가 근래에 잘나가긴 했어도, 개방과 척을 진다면 우열은 분명히 드러난다. 십만 방도를 자랑하는 개방을 무시할 문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빌어먹을!’
말을 잘못하는 순간 개방과 공동파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영관도장은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하물며 홍무개는 후개로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후일 개방 방주가 될 홍무개를 가볍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째서 당신들이 전부 나서는 것이오?”
“모르는 것 같으니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지요. 본 방을 비롯해서 여기 있는 분들은 전부 천운권에게 빚을 졌습니다. 자,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잠시 개입만 해 주면 없던 일로 해 줄 수 있다고 하는데, 도장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거야.”
저들이 천운권과 어떤 식으로 엮였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천운권의 악명을 상기할수록, 저들의 개입이 이해가 되었다.
“일 년입니다.”
“타 문파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않나!”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정녕 이럴 건가!”
홍무개의 통보에 가까운 제안에 영엽도장과 영관도장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일 년의 시간이 주어진 서문세가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지금보다 세력을 키운다면 공동파로서도 부담이 되었다. 하나, 개방, 아미파, 당문, 무당파가 개입한 이상 공동파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게 이기셨어야지요. 차라리 나설 명분이라도 없게 하시지.”
“……그런!”
귀찮아하는 홍무개의 표정을 보자, 영엽도장과 영관도장은 자신들이 일을 번거롭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그렇게까지 천운권과 연관이 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잠시 얼굴을 비치고 끝내기를 바랐는데, 천운권에게 명분을 내어 주고 말았다.
자업자득이라, 영엽도장과 영관도장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동파의 장로들을 전부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하나, 무림대회가 코앞이었고, 자신들만으로도 서문세가를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빌어먹을 천운권!’
분노 이전에 왜 다들 천운권과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깨달았다. 천운권과 연관이 되는 순간, 무조건 사태가 꼬인다. 그러니 저들도 하루라도 빨리 빚을 털어 버리려고 했겠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죽일 놈, 반드시 죽인다!’
나서지 않았음에도 악명이 쌓이는 순간이었다.
영엽도장은 시시덕거리는 서문제덕과 서문극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음을 인정했다.
“돌아간다.”
장로의 명에 돌아선 복마대도 분을 삭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룡대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판 붙어 보고 싶었는데!”
“다음부터는 조심들 하라고!”
공동파가 사라지고 난 후에 서문제덕은 그들을 가문으로 초대했다. 사실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천운권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들이 나섰을까? 다들 문파나 세가에서 영향력이 적지 않기에 이해가 되진 않았다.
홍무개가 나서서 의문스러운 분위기를 풀었다. 동병상련의 애환을 안다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린 그 녀석과 함께하기로 했으니까요.”
“그간 천운권을 잘못 알고 있었나 보군.”
“아닙니다. 알고 있는 그대롭니다.”
“대체 어떻기에?”
“처음 보자마자 제 죽탱이를 날린 위인이거든요. 하하하!”
그게 웃을 일인가?
당연우의 좌우를 철통같이 지킨 천운권의 처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하고 있었다. 형부는 의문이 들면, 일단 주먹부터 드는 유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로 해결이 된다는 점이다. 안 되면 다음부터는 안 할 텐데, 잘 통해서 문제였다.
“형부라면 그러고도 남아요.”
“보면 볼수록 환장할 거예요. 호호호호!”
그건 정상이 아니잖아. 왜 웃어?
서문제덕은 천운권을 다시 보려고 하다가, 안 보는 편이 낫다고 단정 지었다.
‘이게 뭐지?’
알려진 소문하고 다르다는 거야, 같다는 거야? 이상한 형태의 신종 담합이었다.
***
이제야 좀 경지에 맞는 전투 수행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공의 깊이에 비해 부족했던 실전을 깨친 사대천주는 비로소 무인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고달프군.”
“그래도 강해지지 않았나?”
“죽고 싶을 때가 더 많아.”
“후회해 봤자 늦었네.”
사대천주는 강해졌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 벽을 넘지 않았음에도,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지금이라면 북친왕과 반도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왜 그때는 지금처럼 하지 못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경지의 차이로 인한 패배였다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공주께서도 고생하셨소.”
“닥치세요!”
“크흠, 폐하께서 윤허하셨네만.”
“죽고 싶나요?”
밀천의 차기 후계자인 강예의 무공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눈깔부터 발톱까지 무인다운 기세를 흘렸다. 전투에 몰입하면 상대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공주의 수호무사 기희선도 날이 잔뜩 선 검공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든 최선의 수를 날리도록, 자동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쩝!
강해져서 좋긴 한데, 성격이 파탄 나고 있었다. 유년기부터 천선경을 이룬 밀천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서 공주를 돌봤던 사대천주이기에 입맛이 썼다. 무공을 배우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무공을 배우더니 사람으로서 망가지고 말았다.
‘이거 잘하면 칼부터 날리겠군.’
공주는 언제 어느 때라도 검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톡! 건드려도 수백의 검형을 쏟아 내려고 했다. 무엇보다 황천경이 육성을 넘었다. 오성을 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육성에 이르다니, 자질부터 말이 안 되었다. 후계자로 낙점을 지었지만, 정말 무지막지한 성장이었다.
“에이씨, 다 죽여 버릴 테다!”
“……공주, 언행이 과하시오.”
“닥쳐,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요!”
“우리도 같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 낭군님이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봐요. 딱 거기 서요. 단칼에 곱게 잘라 줄게요.”
흐억!
사대천주가 안 되겠다 싶어서 염산호에 부탁했지만, 되레 분노를 자극한 꼴이 되고 말았다.
훈련장 안에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강예의 살벌할 칼질에 공간이 난자당하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순식간에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될 팔자였지만, 염산호의 대응도 만만치는 않았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보신은 강예의 검기를 코앞에서 피해 내고 있었다.
“안 서냐?”
“서면 반 토막이 나잖아요!”
“곱게 나는 편이 서로에게 좋잖아요, 낭군님!”
“웃으면서 다가오지 마세요!”
강예의 변화에 염산호도 책임을 통감하고는 있었다. 사부님의 등쌀에 못 이겼다지만, 주동자 중 한 명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대천주의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준 것이다.
사랑싸움은 칼로 물을 벤다지만, 당사자가 되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거, 되게 시끄럽네. 너희들 그만 좀 촐싹거려라. 다 죽을래?”
움찔!
운기행공에서 깬 철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으르렁거리자 강예와 산호는 일순간 정지가 되었다. 이 안에 사람 같은 위인은 없다지만, 그 안에서도 두 번째로 지독한 인간이 바로 철호였다. 태진은 그나마 나은 편이나, 철호가 화를 내면 강예도 눈물을 쏙 뺐다.
“오라버니, 저 되게 사랑스러운 강예예용!”
“누가 내 앞에서 교태 부리래! 적당히 해라.”
“이건 다 산호 때문이에요!”
“이번만 봐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광년도 광놈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는구나. 따지고 보면 누가 더 미쳤는지가 중요했다.
응, 오라버니가 맞나?
나이는?
주먹이 나이를 초월했다.
태진과 서문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제정신인 인간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안 그랬던 산호도 요즘 들어서 깐죽대는 걸 보면 의심이 들었다.
“정상이 없어요, 정상이.”
“강해지는 대신 인성을 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 앞에선 그런 말 하지도 마! 형.”
“아무렴요. 저는 정상적으로 죽고 싶습니다.”
태진은 서문 형도 정상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한테 훈련을 받으면 무언가 하나씩 잃어 갔다.
‘나는 아냐!’
절대.
기희선과 눈이 마주친 태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매번 볼 때마다 부전자전이라고 해서 화를 돋웠다. 사내대장부로서 정정당당하게 비무로 승부를 봤음에도, 기희선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졌으면 인정해야지!
‘내가 뭘 어쨌다고?’
태진의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본 기희선은 울화가 치밀었다. 저 인간은 자신이 한 짓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졌다고 했는데도 턱주가리를 날리는 위인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고! 그러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니 더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렇게나 여자, 남자의 생각이 많이 다르긴 했다.
드륵!
문이 열리자 전원 행동을 멈추고 숨마저 죽였다. 인성 파탄의 원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친히 행차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긴장을 할까?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존재감 하나만큼은 고금천하제일이었다.
좌우지간 집중이 되었으니 나쁘진 않다. 해야 할 말도 있고, 마무리는 하고 가야 했다.
“분위기가 좋구나.”
“모두가 아버님의 배려와 응원 덕분입니다.”
“사부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든든합니다.”
태진과 철호가 손금이 사라지도록 손을 비비며 먹이를 주는 주인 앞에 선 개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뒤를 염산호와 서문호가 질세라 바짝 따랐다. 얼마 전까지 어색해했던 강예와 기희선도 다르지 않았다. 사대천주마저 ‘허허!’거리며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했다.
하아,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공주와 사대천주는 인생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주먹이 왈패였다. 툭! 하면 나가는 주먹에 맞고 어처구니없이 나가떨어져 봐라. 저 인간 앞에서는 자존감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다. 강해지면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데, 강함의 척도는 일관성이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본격적인 마신교 전용 특별훈련에 들어가기로 하겠다.”
“예?”
또 뭔 특별훈련이야.
지금까지 해 온 지독했던 훈련들은 특별하지 않았나? 왜 자꾸 특별한 훈련이 생기는 거냐고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빨리 가라!’
‘황실은 우리가 지킨다!’
‘꺼져욧!’
황궁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진이 머무르는 편이 낫겠지만, 그러다간 다들 피가 말라 죽을 것 같았다.
공주와 사대천주는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선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끊임없이 분골쇄신해야만 터전을 수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