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305
304화 밴쿠버에서(2)
‘다 봤다.’
뭘 해도 정도를 모르고 파고드는 이신은 기어코 자신이 가져온 엄청난 두께의 역사책을 독파했다.
그냥 흘려 읽은 것도 아니고,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인물을 짧게 요약 정리하면서 읽었다.
혹시나 마계에서 이름을 듣게 될 경우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수능 공부하듯이 팠는데도 휴가 첫날에 책 한 권을 끝장 내버렸다.
‘너무 열심히 했나?’
캐나다에서의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서 뒤늦게 든 생각.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서성이는 주디 때문이었다.
수시로 음료나 디저트를 가져다주면서 쉬면서 하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압력을 가하는 주디.
그쯤 되면 아무리 이신이라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니 됐어.’
나이 들어서 오랜만에 한 공부인데, 어째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중·고교 시절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필요에 의해 하는 공부라서 그런 듯했다.
역사를 읽다 보면 실제로 마계에서 만난 인물이 등장할 때도 있는 까닭에 흥미가 더하니 집중이 더 잘 됐다.
완벽한 공부 체질!
아무튼 백과사전처럼 두꺼웠던 책을 하루 만에 독파한 이신은 휴가 둘째 날에 드디어 주디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밖에 좀 다녀볼까?”
“정말요?”
거의 포기 지경이었던 주디가 반색을 했다.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도 하고 식사도 하자.”
“네!”
“애들은?”
“여전히 게임 삼매경이죠.”
“스페이스 크래프트?”
“그럼 뭘 하겠어요. 그것밖에 안 해요.”
“휴가 나와서 그게 뭔 짓인지 모르겠군.”
쯧쯧, 혀를 차는 이신.
주디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저게 휴가 나와서 수능 앞둔 수험생처럼 공부에 매달린 작자가 할 말인가.
함께 나가기 위해 게임 룸에 가보니, 뜻밖에도 세 사람은 평소처럼 낄낄거리지 않고 진지하게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존은 자신의 주 종족인 인류를 플레이하면서 괴물 플레이어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 중이었다.
차이와 장양은 뒤에서 이를 유심히 지켜본다.
“뭐해?”
“아, 선생님. 독서는 끝나셨어요?”
차이가 되물었다.
“어, 너희는?”
“아, 지금 폭스 게이밍 애들이랑 3대 3 대결 중이에요.”
“폭스 게이밍?”
폭스 게이밍(Fox Gaming)이라면 미국의 명문 프로 팀이었다. 마이클 조셉이 소속된 팀 크라이시스와 함께 우승을 다투는 강팀이었다.
“네, 아마드 부티아라고 아시죠?”
“전에 올스타전에서 봤지.”
이신은 월드 SC 올스타전에서 봤던 아마드 부티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드 부티아는 인도 출신의 천재 프로게이머로, 미국에 진출하여 현재 전미 프로리그 최강자 마이클 조셉의 호적수로 평가받는 스타였다.
“걔랑 온라인에서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됐는데요, 마이클 조셉에 대비한 연습 삼아 선생님과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주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푹 쉬려고 모처럼 캐나다까지 왔는데 어째 온통 게임 얘기였다.
“…그래서?”
“우릴 이기면 말씀드려 보겠다고 했죠. 그래서 쟤네랑 연승제로 3 대 3 대결 중이에요. 이제 첫 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는 차이.
‘지금 상대 괴물 플레이어가 아마드 부티아인가? 하여간 잘하는군.’
이신은 존의 플레이 화면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러다가 뭔가가 뒤늦게 떠올랐는지 흠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디가 아주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럼 수고들 해라.”
이신은 흥미진진한 게임 관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식사 때 되면 연락할 테니까 밖으로 나와!”
주디도 게임에 미친 소년들을 뒤로 하고 이신과 함께 집을 나섰다.
“어디 갈까요?”
“네 마음대로 골라. 전에 한 번 와봐서 딱히 궁금한 곳은 없어.”
전에도 주디와 함께 밴쿠버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마 주디가 개인리그 16강에 들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약속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밴쿠버에 끌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번에도 그렇고, 자주 주디의 꾐에 넘어가는 이신이었다. 물론 정말 싫었다면 가차 없이 거절했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간 곳은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였다.
밴쿠버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은 영화관, 무역컨벤션센터, 기타 다양한 숍과 레스토랑이 밀집된 곳으로, 건물 모양이 바다에 정박한 거대한 배와 같았다.
주위로 시원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산책로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비수기에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이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있었다.
사람들이 사인을 부탁하거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종종 요청했고, 이신은 그때마다 기꺼이 응해주었다.
밴쿠버에서는 주디도 꽤 유명인사라, 함께 사진을 찍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주디가 문득 물었다.
“선생님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으세요?”
“미래?”
“네, 앞으로의 계획이요.”
“글쎄.”
이신은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나름대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저는 프로게이머를 은퇴하면 대학에 입학해서 경영 공부를 하려고요. 그리고 e스포츠 분야에 투자해서 사업을 할 거예요. 지수민 부사장님처럼 유능한 사업가가 되고 싶어요.”
“좋군. 관심도 있고 잘 아는 분야니까 잘 할 거야.”
“고마워요. 선생님은 어때요?”
“몰라.”
이신이 답했다.
“먼 미래는커녕 당장 눈앞의 장래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떤 선택이 있는데요?”
“하나는 지금 이대로 한국에 지내는 것. 내년이면 학교도 복학해서 미래를 위한 진로도 병행할 수 있어. 부모님도 그쪽을 원하시고.”
프로게이머로서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삶을 즐기고, 학업을 병행하여서 그 이후의 진로까지 준비할 수 있다.
이는 부모님의 바람까지 충족시키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부모님과는 이제 막 화해를 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의 길을 인정해주셨고, 때문에 자신 역시 아버지의 바람대로 학업을 하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해외 진출이죠?”
“맞아.”
낯선 환경에서 낯선 선수들과 싸우며 새로운 프로게이머의 삶에 도전하는 선택이었다.
엄청난 연봉과 새로운 경험이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대학 복학을 포기해야 하니 부모님이 실망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주디는 별달리 고민도 없이 곧장 말했다.
“당연히 해외 진출을 하셔야죠.”
이신은 뜻밖에도 단언하는 주디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주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전한 선택과 안전하지 않은 선택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예요.”
“왜지?”
“그런 경우 대개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는 길은 안전하지 않은 쪽이에요. 안전한 길은 타협을 했기 때문이고요.”
그 말에 이신은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명쾌한 해답이었다.
“똑똑하네.”
이신은 진심으로 주디에게 감탄했다. 그녀에게 이런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주디는 귀엽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고민을 했거든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서 한국행을 택했을 때 말이에요. 아파서 밴쿠버를 벗어날 수 없는 동생을 놔두고 혼자 꿈을 좇아 떠나는 게 미안하고, 시간 낭비가 될까봐 불안하기도 했어요.”
“…….”
“아빠가 그런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미안하고 불안한 쪽을 택하라고요. 그쪽이 정말 제가 원하는 길이라고요.”
“맞는 말이야.”
“전 그렇게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동생과 부모님께 미안했는데, 다들 절 이해해주고 응원해줬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세요. 분명히 선생님의 부모님께서도 격려해주실 거예요.”
도리어 자기보다 어린 제자에게 조언과 격려를 받은 이신은 문득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이렇게 보니 성인이 맞구나 싶어서.”
“저 어린애 아니라고 했죠?”
뾰로통한 표정을 하는 주디를 보며 이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의외에요.”
“뭐가?”
“선생님은 그런 걸로 고민을 전혀 안 하실 줄 알았는데. 뭔가 선택을 할 때는 거침이 없으셨잖아요.”
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서워서 그래.”
그건 이신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의외의 말이었다.
“미래가요?”
“나이를 먹는 게 무서워.”
“…….”
“당연했던 승리들이 나이 들수록 어려워질 테고, 세계 e스포츠의 수준은 꾸준히 성장하는데 내 성장을 멈추게 되겠지.”
이신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최선을 다해 극복할 거니까.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그게 뭔데요?”
“지금과 같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안전한 쪽을 택하게 되는 거. 나이가 들면 그렇게 타협을 해가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해져 있을 거야.”
“…….”
“내 자신의 한계와 맞닥뜨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이가 든다 해도.”
***
밴쿠버SCC의 코치 존 패트릭은 경기영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라 일컬어지는 맥 존스의 플레이 영상이었다.
하나는 예전의 플레이고, 또 하나는 얼마 전의 경기였다.
둘 다 결과는 승리였지만, 존 패트릭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너무 변했다.’
예전의 맥 존스는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카이저의 신족 버전이라 불릴 정도.
주특기는 3수송기 뚫기.
인류 진영의 두터운 방어를 수송기에 태운 광신도들을 대거 드롭하며 지상군 병력과 함께 일격에 뚫어버리는 필살기였다.
또한 괴물을 상대로는 사략기+암흑사제의 조합이나, 수송기에 태운 대사제의 견제 플레이 등 컨트롤이 요하는 아슬아슬한 전술로 승리를 따냈다.
공격적이고 아슬아슬하다.
그래서인지 엄청난 역전승도 많이 이뤄냈다.
그의 경기는 언제나 곡예처럼 짜릿하고 흥분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뚜렷했던 스타일이 바뀌었다.
‘너무 무난해.’
맥 존스는 평범한 신족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부진이 있었다.
손목부상 때문에 쉰 기간도 있어 아직 회복기이다.
그렇게 핑계 댈 거리는 많다.
하지만 냉정하게 평하면, 나이가 들면서 예전의 날카로움을 잃었을 뿐이었다.
대신 풍부한 경험으로 인한 판단력과 전략 수행 능력은 발군이라 높은 승률을 기록했지만, 예전의 그 파괴적이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팀의 에이스 자리도 같은 팀의 후배 존 도에게 내줬으니 말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1군 주전.
그냥 그걸로 만족해도 될까?
나이가 있으니 이제 그걸로 만족해도 된다고 타협해도 좋단 말인가?
‘그 모습이 네가 원해서 된 모습이 아니라면, 일깨워주고 싶다. 다시 자각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도록. 그렇게 사력을 다해 노력했는데 안 되면, 그때 비로소 타협을 하면 되는 거야.’
각성.
혹은 진정한 좌절.
존 패트릭은 자신이 키운 후계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한계와 대면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신이 그 계기를 주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