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44
44. 콘 아르도레 (Con ardore, 열정적으로) -4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떡볶이는 예상대로 반응이 좋았다.
“성현! 맛있어요!”
애초에 매운맛을 좋아한다는 엘리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또 툴툴대며 불만이나 표할 줄 알았던 최지은도 맛있는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분식집 떡볶이랑 좀 다르네?”
나름 너무 매워할까 봐 우유도 챙겨왔는데, 그 우유는 개봉조차 되지 않고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셋은 맛있게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가맹점까지 내는 맛집답게 정말 맛있었다.
“카페라도 갈래요?”
“좋아.”
엘리나가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부터 좀 부드러워진 태도로 그녀를 대하기 시작한 최지은.
다행히도 엘리나 역시 그녀의 그런 변화를 인지한 것인지 아까보다 더 유순한 태도로 이런저런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문득, 나는 이 순간이 바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라면 지금도 땀을 줄줄 흘려가며 피아노 앞에서 곡을 연습하고 있을 시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반쯤 타의로 잡게 된 저녁 약속 덕분에 나는 이번 주 내내 숨 가쁘게 차오르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 달리기만 하면 사람은 언젠가 넘어지기 마련이니까.
확실히 이런 휴식시간을 가지는 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크게 틀어놓은 대중가요.
하늘을 빨갛게 물들인 저녁노을.
슬쩍 주변을 흘낏거리니 곧바로 무성한 녹색 풀이 내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후우우우우.”
느릿하게 내쉰 숨에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느꼈다.
이 순간, 이 시간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아주 흡족한 심정으로 엘리나와 최지은이 먼저 들어간 카페에 나도 한발 늦게 발을 들였는데,
“그건 아니죠.”
“아니, 네가 이상한 거지.”
점점 사이가 좋아지는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왜 그래?”
이에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려고 하자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이 저한테 치약을 왜 먹냐고 했어요!”
“치, 치약?”
“아니, 갑자기 쟤가 민트초코라떼 세 잔을 주문하려고 하잖아.”
“민트초코?”
그러니까 갑자기 싸우는 이유가 민트초코 때문이라고?
“성아가 민트초코는 일단 먹여보고 생각하는 거라고 했어요!”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엘리나. 그녀는 아직도 성악 수석 김송아를 잘못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그래서 저도 먹어봤는데 맛있었어요! 성현, 성현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아니, 자기 취향을 남한테 강요하면 안 되지.”
“에?! 그렇지만 성아가 먹어보지도 않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지은이는 안 먹었어요. 근데 싫다고 했어요.”
“당연하지. 치약을 왜 커피에 넣어 먹니?”
“민트가 치약인게 아니라 치약이 민트맛인 거예요!”
“그거나, 그거나.”
조금씩 그래도 친해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고작 취향 차이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싸우다니···.
이 꼬마들이 나중에 커서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는 걸 아는 나로서는 참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커서 돌이켜보면 진짜 창피하겠다.’
나는 혼자 씰룩거리는 입술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엘리나. 그래도 개인적인 취향을 강요하는 건 안 좋은 거야. 김송아한테는 내가 잘 말할 테니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네? 아으으. 네···.”
내가 혼내듯이 말하자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엘리나.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이게?
그리고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에 최지은에게도 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리고 너도 남에 취향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김송아 말마따나 뭐라고 할 거면 이번 기회에 한 번 먹어봐. 알겠지?”
“…싫은데.”
“알겠지?”
“아, 알았어.”
웃는 얼굴로 아주 점잖게 내 의견을 표하자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여주는 최지은.
나는 그런 엘리나와 최지은을 뒤로하고 서둘러 카페 점원에게 말했다.
“여기 민트초코라떼 두 잔이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메뉴도 주문하지 않고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다니, 너무 창피해서 나는 얼른 주문을 마치고 자리를 옮기려 했다.
“잠깐만, 너는 왜 아메리카노야.”
“성현? 성현도 반 민초파였나요?”
그런데 두 사람은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잡아 세웠다.
“나한테는 그거 먹으라고 하고서 너만 딴 걸 시켜?”
“성현! 성현도 민초파 맞죠? 같이 먹을 거죠?”
“아니, 나는 이미 먹어봤어. 먹어봤는데 영 취향이 아니라서······”
“한 번 더 먹어보면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요.”
“그래 얘 말이 맞아. 너도 같은 거 시켜.”
방금까지 싸우던 애들 맞나 싶을 정도로 의기투합해 내게 그걸 먹이려는 두 사람.
나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메뉴를 바꿔야 했다.
편안하고 좋다고 했던 말 취소.
나는 당장이라도 연습실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
이제 콩쿠르 본선이 삼일 앞으로 다가온 시각.
여덟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알린 유키에 모리는 현재 거주하는 일류 호텔 1층 로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 중인 스무 명가량의 기자들.
그들은 유키에가 한국에 방문한 의도, 연주회를 열 예정이 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이 적힌 용지를 사전에 그녀에게 전달해주었다.
정말 갑자기 생겨난 인터뷰 일정.
유키에는 최초 한국에 입국하던 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인터뷰를 이미 한번 캔슬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요청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키에는 갑자기 생긴 인터뷰 일정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막히는 모습 없이 임했고 사전 질문이 모두 끝날 때까지 적당한 대답만 내놓으며 무표정을 일관했다.
누가 봐도 인터뷰에 전혀 흥미가 없는 모습.
-그냥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한국에 방문했다.
-연주회는 계획에 없다.
이런 어중간한 인터뷰로는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쯤은 기자들도 알 것이다.
그 때문에 기자들은 적잖게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지금껏 펜을 입에 물고 수첩만 보고 있던 한 기자가 입을 열었다.
“저번 주 미향예고에 다녀오셨던데 유키에씨도 그 세 천재에게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사전에 유키에에게 전달된 용지에는 없던 질문.
기자들은 당황하는 얼굴로 그 질문을 던진 기자를 쳐다봤는데, 그는 다름 아닌 ‘가온 일보’의 베테랑 기자 김백찬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질문은 여기 없는 것 같은데요. 기자님.”
“사전에 고지한 질문에만 대답하시겠다더니 뭐, 어정쩡한 말씀만 계속하시니 어쩔 수 없이 질문드린 거죠.”
“꽤나 낯이 익으신데, 제가 원래 인터뷰 이렇게 하는 거 알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유키에는 사전에 받은 질문에 모두 추상적인 대답만을 내놓았다.
어디서, 언제, 어째서, 어떻게, 무엇을, 왜를 따지고 들어야 할 기자들에게 마치 엿이라도 먹어보라는 듯 말이다.
그래서 김백찬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당황하게 해서라도 중요한 대답을 끌어내고자 했고, 실제 그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본 유키에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방문한 장소가 M스튜디오에다 미향예고니까 요즘 가장 뜨거운 그 피아노 세 천재를 노리고 계신 게 맞는데, 딱 한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어떤 학생을 스카우트하려고 오신 겁니까.”
김민호와 최지은 그리고 이성현을 데려가려는 사람들은 비단 국내에만 있지 않았다.
어차피 성공할 루키를 데려가 적당히 이끌어주고는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이 업계의 나쁜 관행을 김백찬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본 모 대학에 교수로 취임한 지 올해로 딱 2년 된 유키에는 김백찬의 눈에 그 나쁜 관행을 실천하러 온 사람으로 비친 것이다.
“그 질문에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는 대답 말고는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아직은 모르겠다는 말은, 역시 누군가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이군요.”
“글쎄요.”
그녀가 확실한 부정을 하지 않자 김백찬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대답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터뷰는 끝났다.
유키에는 금방 자리를 떠났고 다른 신문사나 방송사의 기자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김백찬만은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선배님. 저희도 이제 슬슬 갈까요?”
그때 김백찬에게 다가온 신입 기자.
아직 단독 취재가 무리라는 판단에 베테랑인 그가 교육을 맡은 사람이었다.
“필력 좋은 칼럼니스트 하나 구해야겠다. 막내야”
“칼럼은 왜요?”
“야 임마. 생각을 해봐, 저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가 왜 직접 비행기 타고 한국까지 날아왔겠냐?”
“서, 선배님 말씀대로 일본에서 그 천재들 중에 한 명을 스카우트해가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쯧. 그건 벌써 다 나온 얘기고 이놈아. 더 크게 봐야지”
김백찬은 자리를 옮겨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더 크게요?”
“그래.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 같은 아마추어 축제 때문에 유키에 모리가 직접 한국에 왔잖아. 이 상황이 말해주는 건 딱 하나지.”
“그, 하나가 뭔데요?”
막내 기자는 사뭇 진지해지는 김백찬의 얼굴에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물었고 그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쉬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뿐만이 아닌 거야. 클래식의 성지라 불리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김민호, 최지은, 이성현의 등장을 인지하기 시작한 게 분명해.”
“음, 그러니까 유키에 모리는 다른 거장들이 그 애들의 재능을 제대로 가늠하기도 전에 먼저 채가려고 했다. 그거네요!”
“그렇지. 그쪽 동네 거장들은 아직, 그냥 그런 애들이 있다더라 하는 수준일 테니까, 후우우.”
김백찬의 입에서 흰 담배 연기가 쭉 뿜어져 나오고 잠깐의 뜸을 들인 그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콩쿠르 본선이 끝나면 다들 제대로 알게 되겠지. 이성현이라는 천재를 말이야···.”
***
“고생하셨습니다!”
“성현 학생도 고생 많았어요.”
내가 고개를 푹 숙이며 힘차게 인사를 드리자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는 마 원장님.
그는 콩쿠르 본선을 단 하루 앞둔 오늘, 아침부터 오후 5시가 된 지금까지 오직 나를 위한 레슨을 진행해주었다.
내가 이번 무대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새로운 시도, 두 가지 연주법의 활용.
정석 선배가 그 발상을 내게 주었다면 마 원장님은 이를 더 섬세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나와 함께 고민해주셨다.
“그나저나 조금 의외네요.”
“네?”
“M스튜디오에서 누구보다 연습량이 많은 우리 성현 학생이 콩쿠르 전날에 휴식을 취하겠다는 게 좀 신기해서요.”
자타공인 연습실 지박령인 내가 고작 5시에 집으로 향하겠다고 했던 것이 아무래도 의외였던 모양이다.
“컨디션 조절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원장님이 말해주셨으니까요.”
내 말에 마 원장님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일부러 점수를 따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꽤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마 원장님은 내가 M스튜디오를 나갈 때까지 계속 신경을 써주셨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움직였다.
마 원장님이 특별히 준비해주신 콩쿠르 본선 티켓 두 장.
무료로 풀리는 예선 티켓과 달리 본선은 값도 어느 정도 나가고 매진되는 시간도 빨라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마 원장님에게 부탁을 드렸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그 두 장의 티켓을 부모님에게 드렸고,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가 편안한 휴식을 맛봤다.
사실 마 원장님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나는 이미 이틀간 한숨도 자질 않았다.
오늘 연습을 일찍 마치고 본가에 돌아온 이유는 티켓 전달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길고 깊은 잠을 자고 싶었던 것이 더 컸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내 방 침대 옆에 있는 컴퓨터를 켠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검색해봤는데, 연관 검색어에서 눈에 띄는 이름 하나가 검색되었다.
유키에 모리.
이어서 그 단어를 클릭하자 다양한 기사들이 보였다.
-유키에 모리 한국 방문, 연주회는 예정에 없어.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미향예고를 다녀간 것으로 밝혀져···!
-유키에 이번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참가자 중 한 명을 스카우트하려 한다고···.
-주요 관람 포인트는 과연 누가 유키에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무슨 인터뷰를 했길래 이런 기사가 뜬 거야···?
그보다 나만이 아니라 민호나 지은이도 역시 스카우트 대상에 포함돼 있던 건가.
잠시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가 나는 이내 당연히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 때문에 바다 건너까지 올 리가 없잖는가.
“하아.”
요 이틀을 뜬눈으로 지새운 탓일까.
묵직한 탄식과 함께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내 방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친숙하면서도 막상 제대로 본 적은 없는 천장, 나에게 있어서 콩쿠르 본선 무대 역시 이 같은 느낌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정말 손이 다 저릴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이번 본선을 준비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연주뿐.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들어 머릿속에 흐르는 곡을 또 연습해보는 나.
그렇게 잠이 드는 줄도 모르게 스르륵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이윽고, 콩쿠르 본선의 아침이 밝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