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the Unique Lineage RAW novel - Chapter 442
27. 구스타프는 비장하다.
“근데 제 얼굴 까고 대놓고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만히 안 놔둘 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심히 걱정되는 일이다. 남기주 할아버지가 와도 아버지 눈 밖에 나면 좋은 꼴 보긴 힘들 것 같은데.
아들을 빼돌려서 수작을 부린 걸 알면 어쩌시려나?
아버지는 세최특이라 불리시지만, 세최또라는 이명도 있다.
괜히 사람에게 세계 최고의 또라이라는 이름이 붙진 않는다.
“……안 괜찮아.”
기주 아저씨는 솔직하고 정직했다. 파랗게 죽은 얼굴로 말하는 걸 보니, 숨기고 싶어도 못 숨길 것 같지만.
“그럼 시작부터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 아재가 계약서를 쓰자마자 바로 초를 치네.
난 다시 팔짱을 꼈다. 계약서를 쓰자마자 물러야 할 것 같은데?
“감추면 돼.”
“뭘요?”
“얼굴하고 이름을.”
“감추고 이계에 들어가겠다고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보증인이 될 거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네 팀은 내가 구성한 팀이자 협회에서 지원하는 팀이 될 거다. 전폭적인 지원까진 힘들지만, 내 손이 닿는 한도까지는 할 거고.”
협회장의 조카라고 했으니, 전폭적인 지원도 가능하지 않으려나.
팔짱을 낀 팔에 슬쩍 힘을 풀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보증을 서시면 얼굴을 가리고도 활동할 수 있다?”
“선례가 없진 않아.”
난 팔짱을 완전히 풀었다. 말하는 걸 보니,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지금도 헌드레드 팀원 중에는 얼굴을 감춘 이들이 있다. 전직 테러범이라는 소문이 도는 놈들도 있는데 그래도 꿋꿋이 홀로그램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솔깃한데.
“그럼 저도?”
“너뿐만 아니라 팀원 전체를 가릴 거다. 그럼 정체를 짐작도 못 하겠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하는 법이야.”
“나중에 걸리시면 어쩌시려고?”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한다.”
이 아저씨, 식은땀 흘리면서 입술을 비틀어 올린다. 저걸 미소라고 짓는 것인가.
그야말로 목숨 건 미소다. 이 양반 담백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사상이 나와 어울렸기에, 슬며시 주먹 쥔 손을 들게 만든다.
그러자 기주 아저씨도 주먹을 들어, 내 주먹을 툭 쳤다.
주먹 인사 한 번에 우리는 다시금 마음이 통하는 동료가 되었다.
“내 쪽 인원이 선별되면 알려 주마. 그때까지 너도 같이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골라 놔라. 팀원 숫자가 최소 여덟은 되어야 할 거다.”
“그러죠.”
이거로 끝이었다. 룸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좀 전의 소란은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사라졌다.
남아 있던 이들도 다 가고 로니만 남았다.
“넌 한가한가 보다.”
“1학년이잖아. 여름 햇살 선배는 팀에서 사람이 나와서 갔고, 가을 마녀 선배는 그냥 떠났고, 네 님은 이후 선배랑 같이 갔고.”
마지막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구나.
후, 가슴 아프다. 이후랑 떠난 미랑이라니.
그 자리는 내 자리인데.
이후는 집도 미랑이 사는 곳 근처라고 했다.
네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어야 했는데.
차도 함께 타고 간다지?
네가 타는 그 차, 그 차도 내 차였어야 했다.
가끔 같이 식사도 하고 급하면 전투 도시락도 먹곤 하겠지?
하, 미랑이 차린 음식, 그것도 내 것이어야 했다.
둘이 결혼해서 애를 낳아도, 그 애도 내 것이어야만 한다.
아니, 모든 게 내 것이어야 한다.
둘 사이의 아이를 떠올리자, 내장이 찢어지는 아픔이 가슴부터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이게 바로 단장의 아픔인가.
누군가 칼로 내 창자를 잘게 토막 내서 푹 삶아 버린 것 같았다.
“안 아프냐?”
이 미친 새끼가.왜 이렇게 배가 아픈가 했더니, 어느새 나타난 구스타프가 내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뭐 하냐, 너.”
“말을 걸어도 듣질 않길래.”
“바빴다.”
“……뭐가 바빴다는 거냐? 바로 앞에서 멍때려 놓고.”
“머릿속이 바빴다고.”
내 대답에 로니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음, 홀릴 뻔했다. 얘는 이런 미소를 함부로 보이고 그러나.
불멸자의 기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뇌쇄적인 미소 하나로 주변 남자를 깡그리 병에 걸리게 할 수 있으리라.
상사의 병은 불치병이니.
그 한 번으로 수십의 남자를 때려눕힐 것이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
웃던 로니가 대뜸 물었다.
주어가 빠졌지만, 못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미랑이는 내 천생연분이니까.”
“얼굴이 예뻐서?”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어릴 때부터 그렇게 정해 뒀어.”
“누가?”
“내가.”
“으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기에 답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구나.”
로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다물었고 구스타프가 이어 말했다.
“한판 붙자?”
“……게임?”
“아니.”
“볼링?”
특수종 사관학교는 갖가지 위락 시설이 갖춰져 있다.
훈련이 아니라면 이곳이 지상 최고 낙원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교수 중 안식년에 학교 안 숙소에 기거하며 여행 다니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이곳만큼 맛있는 밥과 편안한 장소가 흔치 않으니까.
“대련.”
난 구스타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애가 좀 아픈 것 같았다.
“열은 없는데.”
“이거 치워. 질 건 알지만, 그동안 나도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 한판 붙어 보자고.”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니,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거절할 수 있지만, 친구가 이리 간절히 말하니 들어주고 싶지 않나.
“가자, 그럼.”
“구경해도 되니?”
로니가 구스타프한테 물었다. 곧 처참하게 깨질 쪽은 저쪽이니, 당연히 저기에 물어야 했다.
“마음대로 해.”
구스타프는 고개도 안 돌리고 답했다. 어째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내 대련장으로 가자.”
후기 실기 시험 우승자로서 난 여유를 보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참 깨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덤비나.
그렇게 대련장에 들어서자, 구스타프가 복장을 갈아입고 나왔다.
연두색 파워 슈트였다.
정확히는 생도에게 주어지는 연습용 슈트다.
전투용이 아니라 대련용이긴 한데.
“제대로 붙어 보자.”
슈트를 입은 구스타프가 말했다.
흠, 얘 봐라.
복싱으로 치자면 먼저 헤드기어와 복부 보호대를 차고 나온 셈이었다.
물론 그런 보호대 따위와 사관학교에서 주어지는 슈트는 천지 차이다.
어지간한 부상을 방지하는 주문이 걸려 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여러 겹의 방호막이 발동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걸 입으면 위험하다. 그만큼 힘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으니까.
시험에서 슈트를 쓰지 않은 이유다. 부상 방지 용도이긴 하나, 이걸 쓰고 하면 힘을 아끼지 않고 싸우자는 거니,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실제로 슈트를 입는 게 다칠 확률이 몇 배는 더 높다는 논문도 있었다.
사관학교의 테스트 실용성이라는 논문이라고 했던가.
시험 따위에 다치지 말라는 학교의 배려로 우리는 슈트를 입지 않았었는데.
지금 구스타프가 입고 나온 거다.
그러니까 지금 구스타프는 부상의 위험성을 안고서라도 제대로 싸워 보자는 거였다.
“아프고 싶니? 피 나고 싶어?”
“각오가 없으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어.”
얘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이리 생각하면서도 나도 슈트를 착용했다.
“친구를 죽이시게요? 생도 살인은 중죄입니다. 온신.”
내 개인 대련실이다. 당연히도 레베카가 있었다. 내 AI가 돌려서 경고했다. 큰 부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반만 죽일 거야.”
나도 각오를 다졌다.
얘가 왜 갑자기 덤비지?
설마.
“너 혹시.”
난 슈트를 입고 마주 선 채로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아니지?”
내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나운 기세가 심장에서부터 일어났다.
이 새끼가 돌았나.
“네 짐작이 맞을 거다.”
구스타프가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지-잉.
동시에 뇌안(雷眼)에 염동력 에너지가 잡혔다.
반사적으로 번개의 눈을 발동한 난 염동력으로 만들어진 덩어리를 피해 옆으로 굴렀다.
두둥.
슈트를 입고 굴렀더니, 몸에 둔중한 감각이 남았다.
조금 전 구스타프의 염동 충격파는 꽤 쓸 만했다.
모양의 구현화보다 속도에 치중한 공격이었다.
충격파에 모양이 뭐가 중요하나.
맞추기만 하면 되는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뒤쪽 대련장 벽이 울렸다.
구스타프가 만든 염동력 공격이 재차 날아들었다.
“널 위해 준비했다. 연속 충격파.”
구스타프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보였다. 이어 염동력 덩어리가 연이어 날아왔다.
그리고 난 그걸 보며 그대로 카피했다.
모양은 날리고 속도에 치중한 염동력 덩어리.
처음에는 내가 발동하는 게 좀 늦어서 밀렸고.
그다음에는 얼추 비슷해서 상쇄해, 볼썽사납게 구르지 않아도 됐다.
대략 여덟 번의 염동 충격파가 공중에서 맞부딪칠 때쯤에는 내가 먼저 발동하기까지 했다.
구스타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더니 무형의 벽을 만들어 밀어냈다.
후기 실기 시험에서 맞붙은 게 얼마 전인데, 그 짧은 시간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
난 염동력을 창처럼 만들어 뻗었다.
다가오는 염동력 덩어리 때문에 앞 시야가 가로막혔다.
뇌안이 염동력을 전부 가시화해서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눈앞을 가로막은 염동의 벽을 찢은 직후, 난 깜짝 놀랐다.
구스타프가 사라졌다.
싸우던 상대가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 새끼가 제가 무슨 불멸자야? 어디 갔냐?
좌우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머리 위에서 둔중한 압력이 내려앉았다.
“내려앉아라, 게슈타인.”
이건 또 뭐야.
어느새 머리 위에 올라선 구스타프가 내 머리 위로 천장 내려앉히기를 시도했다.
한국어와 독일어를 섞어 염력을 구현한다는 건, 전력을 다했다는 방증이었다.
그건 곧 현실이 되어 내 눈에 잡혔다.
이전에는 영역이 넓은 대신 시전 속도가 느렸다면 이번에는 반대였다.
전광석화처럼 염동력이 내리꽂힌다. 대신 범위가 좁았다.
겨우 내 머리 위를 가렸다.
숨 돌릴 틈도 없었고 힘을 아낄 틈도 없었다.
나도 순식간에 가진 염동력의 태반을 쏟아부어 위로 쏘아 냈다.
무형의 압력이 만나 겹치더니 가운데가 부풀었다.
이런 젠장.
뇌안 덕에 앞으로 벌어질 일이 훤히 보였다.
무형의 압력이 만나 상쇄되는 게 아니라 엇갈리며 터진다.
뻥-!
농구공 수십 개가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휙 뒤로 날아갔다.
퉁 하고 벽에 등을 부딪치고 바닥에 엎어졌다.
반사적으로 염동력 방패를 썼고 슈트의 보호막이 발동했기에 다치진 않았으나.
더럽게 놀라긴 했다.
“구스타프?”
무릎을 바닥에 대고 일어나며 입을 열자, 반대쪽에서 답이 나왔다.
“끙, 죽을 뻔했다.”
“이 미친 새끼, 슈트 입었다고 몸 안 사리고 덤빌래?”
“쳇, 그냥 당할 줄 알았다고.”
한껏 비장한 채 하더니, 지고 나서 본래의 나사 빠진 구스타프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우리 염동력자 친구는 가슴팍이 망가진 슈트를 벗더니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나도 슈트를 벗어던지고 냅다 앞으로 달려가 놈의 멱살을 쥐었다.
“너 미랑이한테 반한 거냐?”
갑자기 나한테 덤빌 이유, 여자 빼고 뭐가 있겠나.
“……무슨 헛소리야?”
구스타프가 눈썹을 씰룩이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슬며시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내 짐작이 맞다며?
여자 문제 때문에 비장하게 덤빈 거 아니었나?
“세상 사람이 다 너랑 같진 않지.”
“짐작이 맞다고 그랬잖아.”
“그 짐작이 이 짐작은 아니지.”
구스타프의 한국어 실력은 출중했다.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1학년 생도 전원이 널 노려.”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너랑 대련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을 거라고.”
“왜?”
“네가 목표가 됐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왕 특수종 세상에 몸담기로 한 거, 너라는 목표를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다.”
“암살하겠다고?”
“아니! 너를 뛰어넘겠다고! 정당하게! 그걸 짐작한 거로 생각한 거다.”
아, 그게 그 말이야?
미랑이 좋아하는 것만 아니면 됐다.
근데 왜 다들 나를 목표로 잡았다는 건지 모르겠네.
“후기 시험 때 그런 모습을 보여 줘 놓고 모르긴 뭘 모르냐? 넌 이제 특수종 사관학교 모든 생도의 트로피야, 힘으로 취해야 할 트로피.”
이거 재밌네, 압도적인 힘에 눌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덤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이 어딘가.
특수종 사관학교다.
전 세계 유수의 재능러들만 모인 곳이다.
재능만으로 우월함을 입증하던 이들이 모두 모여 서로의 능력을 다투는 곳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낙오자의 낙인이 찍히는 곳이다.
그러니.
“그러니 나도 좀 부탁해도 될까? 슈트는 없어도 되고.”
로니가 이어 나섰다.
“후, 음, 그러자. 그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구스타프, 너 마지막에 왜 머리 위로 날았냐?”
내 말에 구스타프가 화사하게 웃었다. 난 그 미소가 어째 재수 없어 보였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