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65
“구경났나?”
같은 술사들이라 그런지, 그 잠깐의 울림만으로 반의 저력을 대충 느낀 모양이다.
안색이 파리해진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옮겼다.
“….실례했군.”
“손속이 잔혹한 걸로 유명하다던데, 이거 조심해야겠어.”
“프리랜서중에는 오랜만에 떠오르는 거물이잖아. 나중에 같이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비위나 잘 맞춰주자고.”
뿔뿔히 흩어지는 사람들과, 역으로 그 마력에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아마드 랭글리라고 한다. 작은 사무소를 하나 운영하고 있지.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 줘.”
“난 워렌 홀란드다. 쓸만한 마법사를 찾고 있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시간나면 명함에 적힌 주소로 와다오.”
이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천차만별이고 생각하는 바도 다양하기 마련이다.
레녹이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다음에도 함께 일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신중함.
반대로 이 기회에 그에게 다가가서 적극성을 어필해야 레녹의 눈에 들 수 있다고 판단하는 과감함.
한 사람의 선택에 대해 제각기 자기만의 판단을 가지고 반응하며, 갈려나간다.
그래. 바로 이런 곳이기 때문에 레녹 역시 돌아보지 않고 곧장 이 거리에 몸을 들이밀지 않았던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으면서 레녹은 생각에 잠겼다.
저 멀리서 다른 이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자.
등대지기에게 무슨 말을 듣던간에, 레녹은 반드시 다시 이 거리로 돌아온다.
그것만을 기억하고 도시를 떠나면 충분했다.
자치령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열차 (1)
“후우우….”
새하얀 달이 떠오르는 새벽.
입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뺨을 차갑게 쓸어올리는 추운 날씨.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해 발칸의 새벽은 싸늘하기만하다.
가방 하나를 들고 코트 깃을 여민 채 인적없는 거리를 걷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레녹의 기분이 묘하게 변했다.
“킥킥….”
“푸우ㅡ뭐하는 새끼야?”
물론 아직까지 잠들지 않고 도시를 활보하는 양아치들도 어디에든 널려있다.
으슥한 곳에서 담배를 태우며 레녹을 노려보다가, 적당히 견적이 잡혔다 싶으면 어슬렁 걸어나오는 놈들 투성이다.
볼트를 몇번 지져주고 입을 다물게 만든 뒤 걸음을 옮겼다.
일반적으로 거대도시 밖으로 향하는 방법에는 세가지 방식이 있다.
항만을 이용한 배편과 도시 밖으로 향하는 차선을 이용한 차편, 그리고 비행선을 이용한 하늘길까지.
하지만 발칸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시정부에서도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는 하나의 교통방식이 더 있으니.
바로 노후된 철로를 이용한 기찻길이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예전에 레녹이 아리스를 따라 학회에 향할때도 비슷한 열차를 이용해서 발칸 밖으로 나간 전례가 있었으니.
다만 그만큼 수단이 공식화되어있지 않고, 암암리에 다른 이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용되는 방식이라 생각하는게 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 발칸과 필레놈 자치령은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천견의 사망 이후로는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험악한 관계.
출입기록이 공식적으로 남는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도시 외곽. 제니가 가르쳐준 장소를 따라서 쭉 걷다보니 안 그래도 희미하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호흡이 옅어진다.
차가운 콘크리트 냄새만이 코를 찔렀다.
외곽 구역 끄트머리까지 걸어나가자, 달빛을 등지고 홀연이 서 있던 등이 굽은 남자가 보였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면서 레녹을 철조망 너머로 이끌었다.
마치 개구멍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조악한 길이지만, 레녹은 가타부타 불평하지 않았다.
제니가 직접 준비해놓은 교통편이다.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앞서가던 남자가 비쩍 마른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말했다.
“아가씨가 직접 연락을 주시다니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처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먹고 살려고 붙들고 있던 일이라 더 감회가 깊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얼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손사래를 친 남자가 쉭쉭 웃었다.
“자치령까지 가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겁니다…. 많이 낡은 물건이지만 속도까지 느린 건 아니지요. 하루를 넘길 일은 없을거예요.”
“안전은 확실한겁니까?”
“발칸과 자치령을 잇는 사잇길에는 항상 정찰대들이 전시상황을 대비하고 있죠. 하지만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이 시간에는…. 오히려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줄 겁니다.”
돈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돌려말하는군.
하지만 한달에 한번밖에 열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 자체는 마음에 걸렸다.
제니는 자치령으로 가는 열차가 움직이는 이 시간까지 고려해서 모든 일정을 여태까지 맞춰왔던 것인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딱 들어맞는 시간이었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꼬리를 돌렸다.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전에는 도착하겠군요.”
“세관이 눈감아주는 시간을 고르다보니, 결국 돌고 돌아 이런 새벽에 영업을 할 수 밖에 없더군요.”
밤바람이 차갑다. 보온 마법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확연하게 피부로 와 닿을 정도였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풀이 문드러진 메마른 황야를 조금 걷다보니 저 멀리 철도역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철도역이 아니라, 한창 옆에 떨어진 작은 초소로 향했다.
노란 전등이 흔들리는 허름한 초소.
발칸의 외곽을 지킨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초라한 시설이지만, 이 철도역이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폐쇄되어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거기에 상대는 부패하기로 소문난 시정부의 공무원. 그것도 외곽지역 소속이다.
초소의 낡은 책상에 양쪽 발을 턱하니 올리고 신문을 노려보던 중년의 남성이 두 사람을 빤히 노려보았다.
“또 손님을 데려오셨군 그래. 신고 하나만큼은 성실하게 한단 말이야.”
입에 문 연초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중얼거리는 남자의 표정에는 아무런 의욕도 없다.
아니, 이런 시간에 저렇게 방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자체가 어찌보면 엄청나게 담대한 심장을 가진 것이 아닐까.
레녹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사이 남자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공무원에게 건네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품안에 챙겨넣은 그것이 무엇일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뒷돈을 받아먹지 않고서야 이 오밤중에 오가는 손님들을 그가 눈감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을 휘휘 내젓는 공무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다시 철도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몇번째 손님입니까?”
“어디보자…. 오늘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열명 정도군요.”
이끼가 잔뜩 낀 철도역에 올라서자 그제서야 열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와 함께 타고 갔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섯칸 짜리 녹이 슨 열차 한대가 낡은 철로 위에 서 있었다.
새벽의 어둠 사이로 빨려들어가듯이 놓여진 철로를 타고 덜덜거리는 열차 위에 올라타자, 남자가 레녹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열차 위로 올라서자 단번에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먼저 앉아있던 손님들의 얼굴도 가지각색이다.
중절모를 푹 눌러쓴 거한, 넝마를 주워입은 듯한 소년, 로봇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만큼 온 몸을 개조한 사이보그….
레녹은 신경쓰지 않고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한참 전부터 얼굴과 마력패턴을 변형시켜놓은만큼, 반이라는 신분을 들킬 염려는 없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만큼 레녹도, 반도 필레놈 자치령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출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이중신분이 아니라 삼중으로 신분을 가리는셈인가.
어차피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처지에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먼지가 풀풀 풍기는 열차의 뒷좌석에 앉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품안에서 연초를 꺼내서 불을 붙인 뒤 입에 물고 기다리자 머지않아 열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녹이 슨 철로를 따라 어둠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열차.
창문 너머로 비치는 흐릿한 달빛 속에 텅 빈 고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열차 안의 공기는 한없이 싸늘하고, 또 적막했다.
이 시간에 거대도시를 떠나 자치령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라면 평범한 사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공허한 분위기도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팔짱을 끼고 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같은 마법사를 보게 되다니, 반가워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가면을 쓰고, 기척을 감춘 여자.
다만 가면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레녹과 비슷한 또래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기세와 여유로운 어조는 그녀 스스로도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라는 증거.
무심코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이미 주위에 마력장을 펼쳐놓았으니까.”
레녹이 대답하지 않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이런 시기에 자치령으로 향하고 있다는게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되네요.”
그가 누군지 알고서 접근했다기보다는, 이런 곳에서 같은 마법사를 만난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는 듯 했다.
눈을 가늘게 뜬 레녹이 연기를 흘려보내며 대답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주위를 힐끗 둘러보고, 가지고 온 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냅다 가방을 거꾸로 들어 레녹과 그녀의 사이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탈탈 털어냈다.
순식간에 안의 내용물이 고스란이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
느닷없는 기행에 레녹이 멍하니 입을 벌렸지만, 이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을 눈치채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녀가 가방에서 쏟아낸 십수가지의 물건들이, 모조리 마력이 담겨있는 아티팩트였던 것이다.
수중에 든 물건을 고스란히 레녹에게 공개한 그녀가 말했다.
“부탁을 하려면 대가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원하는 걸 하나 골라요. 일단 그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군요.”
“……….”
레녹은 황당한 표정으로 여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레녹의 시선에 담긴 의중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카시아라고 해요.”
얼굴을 가리고 당당히 이름만을 밝힌다니 어불성설이다. 이름도, 신분도 모두 이 순간을 무마하기 위해 지어낸 가짜겠지.
마력패턴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정체를 감추는데 필요한 아티팩트나 그에 준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녹의 마력감응력을 막아낼수는 없었다.
눈앞의 마법사조차 눈치채지 못할만큼 은밀하게 흘려보낸 마력을 대번에 품 안쪽으로 비집고 장막을 열어젖힌다.
분명 철저하게 대비되어 있었을 보안을 꿰뚫은 레녹의 감각이 순식간에 그녀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녀 본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하게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레녹은 그녀의 마력패턴을 온전히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마력패턴을 기억속에서 뒤져본 레녹이, 일치하는 누군가의 패턴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이건…. 한번 본적이 있는 마력이군. 기억에 있는걸로 보아서는 아마….’
한번 본 마력패턴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기에 알 수 있다.
학회 당시, 전장장악술식을 시연하기 위한 시연장으로 향하던 도중 아리스와 함께 나눴던 잠깐의 대화.
재능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리스가 왜 레녹을 데리고 일하는지 의문을 표하던 중년 여자.
바일라 연구소장이라는 그 마법사의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던 젊은 여마법사의 마력패턴이 분명했다.
시간과 장소가 그녀의 마력과 연결되는 순간 관련된 기억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바일라 연구소장은 체내보유마력의 단절 현상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그것 때문에 레녹이 그녀의 상태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지 않았던가.
너무 금방 스쳐지나간 일이라서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기억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핵심적인 정보는 건져냈다.
바일라를 보좌하고 있던 이 여자가 이런 시기에 자치령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정이 그녀의 신분에서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으리라.
그녀는 레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답하기 싫으시다면 제 용건부터 먼저 하도록 하죠. 그 정도라면 상관없을테니.”
“…..그렇습니까?”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 치고는 굉장히 대담한 태도를 지닌 여자다.
느닷없는 보상 공개도 그렇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말을 들어보지 않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레녹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