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10
약먹는 천재마법사 210화
실마리(1)
[시간을 달라고?]“그렇습니다.”
[하하핫!!]널찍한 스크린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버질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듣는 건 꽤 오랜만인데. 옛날 생각나는걸.]“제니스가 준비한 칼날이 생각보다 날카로워 보입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이쪽에서 역으로 큰 손해를 볼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군.]찰랑.
잔에 담긴 술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얼마 전까지 브로커 일로 벌이를 연명하고 있던 어린애가 아니라면 말이야.]“…….”
[카이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그 아이가 서른이 약간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이 바닥에서 보낸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겠군. 그렇지 않아?]버질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스크린 저편에는 너른 밤하늘 아래 펼쳐진 화려한 수영장이 비치고 있었다.
풀장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뛰노는 수십 명의 젊은 남녀들.
그리고 한 여자가 수영장의 꼭대기에서 술잔을 들고 그들을 내려다본다.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 어린 애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게 참 마음에 들어.]카르텔의 수장이 술잔을 든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고작해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것들이, 지금이 세상의 전부인 양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바라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많이 변하셨군요.”
[버질. 우리가 함께 일한 시간이 몇 년째인지 기억하나?]“……30년을 넘긴 뒤로는 새어본 적이 없습니다.”
카르텔의 수장이나, 버질이나 겉으로는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나이는 외견을 훌쩍 넘긴 지 오래.
그만큼 스스로의 경지를 올려 초월에 다가선다는 것은 기나긴 시간과 고행을 동반하는 법이다.
시간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결국 마력량의 점진적인 증가에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의존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시의회의 늙은이들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린 그 순간으로부터 50년이 넘게 흘렀다. 이 도시의 그림자를 나눠 가지기로 협의한 뒤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여성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였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미련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제야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하는군. 아이러니한 일이야.]“…….”
“당신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버질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는 뒤를 따를 뿐이니까요. 카르텔의 다른 사장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뒤를 따른다라……. 그래, 그렇군.]말없이 술잔을 흔들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카이세가 손녀에게 무슨 유산을 남겨줄 생각이었는지는 확인해야겠지.]정처 없이 흔들리던 여성의 목소리가 한없이 싸늘하게 변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 불로(不老)의 비술을 탐하던 늙은이들을 멈춰 세운 비밀이 무엇인지. 카이세는 그 답을 알고 있었을까?]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손녀에게 남기기에는 너무나도 큰 비밀이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였기에 지금까지 제니스가 살아남았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버질은 그 말에 반박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당신의 뜻을 따라 흘러갈 겁니다.”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 네가 아니라면 다른 사장을 보낼 테니. 카이세의 손녀가 어떻게 자랐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군…….]* * *
“영역이란 무엇일까요?”
“…….”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아리스가 던진 질문에, 레녹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발칸 시립중앙도서관 8층.
거대한 통유리에서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이곳은 마법 서적과 논문들로 가득하지만, 막상 마법사들은 잘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이상한 공간이다.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은 이곳을 기피하고,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면 보다 전문적으로 이론과 서적이 갖춰진 장소를 찾아가기 마련.
하물며 라바테논 대학 도서관이 민간인들에게 공개된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멋모르는 초짜나, 혹시 몰라서 기존의 논문을 모두 뒤적이는 괴짜가 아니라면 굳이 이 도서관을 찾을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레녹이 정식으로 조교수로 취임한 뒤로는, 사실상 도서관에서 만남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서로의 이론에 대한 자세를 토론하는 일은 연구실에서 해도 충분한 데다, 레녹이 반으로서 일이 바빠지면서 도서관을 찾을 일이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레녹이 쓴 논문이 예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한테 그런 걸 물으셔 봤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왜요?”
“왜라니요……. 사실상 자성영역은, 6레벨과 7레벨 언저리에 도달한 천재들에게만 허락된 분야가 아닙니까.”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것은 순전히 재능과 성향에 달린 일이지만, 단순히 전개 여부를 떠나 그 능력을 깊게 파고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술사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심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뿐더러.
대부분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기억이 구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학회에 출시된 논문들 중에서도 자성영역에 대해 깊게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결국 자성영역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술사의 가장 비밀스러운 심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논문을 저술하는 술사든, 연구 대상이 되는 술사든 자신의 영역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는 이는 없으리라.
연구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아리스가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존의 길을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나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만의 심상을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던 것이다.
물론 레녹 역시 따지고 보면 그리 다른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가뜩이나 정령술식을 다루는 저 같은 마법사에게는 완전히 미지의 분야죠. 제 의견을 들어봤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뇨.”
아리스는 단칼에 레녹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레녹이 쓴 논문을 보고 확신했어요. 레녹이 가진 이론적인 안목은 기존의 마법사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네?”
“레녹이 써낸 그 논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6레벨의 마법사들이 도달하는 마력의 성질변화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풀어 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전격계열 마력과 전자기파간의 호환성. 그건 다른 말로 하자면 물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력의 성질변화를 의미하고 있죠.”
“…….”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학회에서 끊임없이 화두가 되는데다, 레녹이 큰 의심을 받고 있지 않는 거예요. 사실상 이건-”
“6레벨에 직접 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써낼 수 없는 논문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까.”
아리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처럼 깊고 푸른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녹. 당신의 이론적인 재능은 단순한 마법사의 경지 너머를 바라보고 있어요. 어쩌면 정령마법을 습득하게 된 것 역시, 다른 마법사들과는 완전히 기준점이 다른 그 독특한 사고관 때문일지도 모르죠.”
“…….”
“외람된 말이지만, 제게는 바로 그런 독특한 사고관이 필요해요. 레녹이 의견을 말하는데 신중한 타입이라는 건 알지만, 터무니없는 추측이라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사고관의 틀을 깨줄 수 있는 발언을 원하시는군요. 확실히 관점을 달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죠.”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논문을 쓸때 좀 더 이것저것 고려해서 주제를 선정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단지 정령술사에 걸맞은 테마를 잡아서 논문을 내고 성과를 인정받을 생각이었는데, 설마 그 논문 안에 마력의 성질변화에 대한 이해가 섞여들어 가는 바람에 역으로 의심을 피하게 될 줄이야.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레녹이 직접 계획하고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리스와 자성영역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점은 이득인가?’
아리스가 자성영역에 심상을 담는 일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레녹 역시 비슷한 문제에 처해 있다.
다만 레녹이 생각하는 것은 심상을 담는 것 자체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성영역에 심상을 담는 것도 좋지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자신의 영역에 어떤 심상이 각인되느냐에 따라서, 해당 영역의 능력이 결정된다고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레녹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을 원하는지에서부터 거꾸로 출발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기껏 심상각인을 성공시키고 7레벨의 경지에 올라선다고 하더라도, 막상 영역의 능력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테니까요.”
“…….”
아리스는 말없이 두 눈을 깜박였다.
그녀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
어떻게 해야 영역에 심상을 투영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막상 7레벨로 올라선 뒤에 영역의 능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지를 걱정하는 일은.
사실상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성공을 걱정하는 오만한 발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녹이 자성영역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레녹은 이미 자치령에서 그리샤의 자성영역 ‘남만도해경’을 두 번이나 눈에 담고, 그것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확인했다.
그녀가 주술사의 영역에 담아낸 풍경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녀의 고향. 불타 없어져 버린 밀림의 정경.
그리샤라는 주술사의 근간을 이루는 기억과 심상의 풍경이었다.
레녹은 그것을 보고 심상을 담아내는 것 자체는 자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사고와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재능.
마법사에게 필요한 모든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그의 입장에서, 내면에 담은 마음에 강제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레녹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은.
심상을 정해서 자성영역에 투영했을 때, 어떤 능력이 영역에 담길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스스로가 다루는 술식에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나 부가효과가 존재하는 편이 바람직하겠죠.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는 경지나 연구방향에 도움이 될 수 있거나……. 정 그것조차 되지 않는다면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식으로.”
“그. 그렇군요.”
“생각할 수 있는것은 다양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결국 본인이 다루는 술식과 심상이 근원적으로 동일할 거라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으니까요. 아리스는 다양한 원소계열 술식을 다루지만, 막상 본인의 성향이 번개나 얼음같은 특정한 성향이 치중되어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겠죠.”
멍하니 그동안 생각해 오던 문제를 읊어주는 레녹의 모습을 아리스가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레녹은 그런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특정한 기억이나 풍경이 어떤 식으로 영역의 능력을 결정하는지도 한 번의 사례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다른 술사의 영역을 몇 가지 더 확인해 보면서 표본의 숫자를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 부분에서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레녹?”
“…….”
그렇다.
결국 그리샤의 남만도해경만으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문제였기에 레녹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다른 마법사와 부딪쳐서 직접 상대의 영역과 그 풍경, 능력을 확인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레녹은 오히려 이번 카르텔과의 갈등 역시 그렇게 꺼려지지 않았다.
그만한 덩치의 조직이라면 틀림없이 강력한 술사들을 보유하고 있을 터.
제니의 사업이 성장하는 방향대로 놈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레녹!!”
타악!
“……!!!”
강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감촉에 레녹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책상 저편에 앉아 있던 아리스가 어느샌가 그의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