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21
약먹는 천재마법사 221화
혈위전선(3)
“……좋습니다.”
아비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모든 예하부대를 잃어버린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알 수 없는 후련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
“당신과 같은 재능있는 술사를 상대하는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오만하게도 그만 잊어버렸던 모양입니다. 조금 더 철저하게 판을 깔고,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가능한 모든 수를 계산했어야 했는데…….”
그 직후 이 일대에 퍼져 있던 핏물들이 모조리 그의 주위로 모여들며 다시금 거대한 회오리를 그린다.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준 것으로 치자면, 제 부하들의 목숨은 헛된 것이 아니겠지요.”
지하로 스며들었던 혈액들은 물론이고, 온 공장부지에 말라붙어버린 혈흔까지 녹아서 아비드의 등 뒤에서 회전했다.
레녹은 그제야 아비드가 무슨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
“……죽은 부하들의 피를 연료로 사용하는 건가. 생각보다 동요가 적었던 걸 생각하면…… 혹시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고통과 절망이 스며든 피에는 더 밀도 높은 마력이 담기기 마련.”
휘이이이잉!!
몰아치는 피바람 속에서 아비드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했다.
머릿속에서 몰아치는 연산을 연달아 처리하느라, 육체를 조작하는 일조차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 판단이 빗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환경을 구축하고 죽은 부대원들의 혈액까지 끌어들여 만들어낸 술식.
그만한 고위술사가 처음으로 내보일 수가 무엇인지는 굳이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양손을 들어 올린 아비드가 무아지경으로 수인을 맺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이 열렸다.
“자성영역 전개.”
파아아아아!!
찰박!!
영역을 전개할 때 발생하는 무채색의 파동은 없었다.
대신 레녹의 발치에서 별안간 짙은 핏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실드에 막혀 레녹의 몸에 직접 닿는 일은 없이 양옆으로 흐르며 순식간에 일대 공간을 장악했다.
순식간에 폐공장 부지 일대를 뒤덮고 흘러가기 시작하는 피의 강이 만들어졌다.
레녹은 그 순간 아비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혈마법의 영역전개는 이런 식인가……. 마냥 똑같지는 않다는 거겠지.”
“호, 알아보시겠습니까?”
파바바박!!
아비드의 산뜻한 말과는 달리, 피의 강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가시들이 일제히 레녹의 실드를 두드린다.
뚜두둑!!
레녹은 볼트 마법을 흩뿌리며 주위를 청소하며 거리낌 없이 앞으로 걸었다.
“물리적인 현상을 구현한 시점에서 이미 평범한 자성영역은 아니야. 하지만 제대로 심상각인을 완성시켰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강렬했겠지.”
“…….”
정곡을 찌르는 레녹의 말에 아비드가 입을 다물고, 레녹이 쐐기를 박았다.
“내면의 심상이 완성되어 있지만, 정작 심상을 영역에 투영할 수준이 되지 못하면 이런 식이 되는 건가.”
따지자면 아리스 리첼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케이스인 셈이다.
아리스는 이미 개인의 재능과 자격은 충분히 주어졌지만, 정작 원하는 심상을 확정시키지 못해서 7레벨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비드는 완벽하게 그려진 내면의 풍경을, 부하들의 피를 제물로 삼아 억지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순간 레녹의 머릿속에서 블레이버 마탑의 마법사와 만난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다른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희생시키는 건 물론이고, 마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성영역에 닿으려고 했던 마법사의 발악을.
다르지 않다.
6레벨에 도달한 술사들이 이렇게까지 발악하면서 자성영역에 도달하려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였다.
단지 자성영역을 펼쳐내는 것 자체의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기 때문에.
마력의 성질변화를 성공시키는 것과는 한차원 다른 벽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비드를 바라보는 레녹의 입매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역시…… 마법은 참 재밌어. 같은 길을 걷는데도 이렇게까지 개인에 따라서 해석하는 방식과 구현도의 차이가 나타나다니. 아니, 이건 따지자면……. 한계에 도달한 것뿐인가?”
더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에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6레벨에서 벽을 느낀 술사들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법을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이 길을 잃은 와중에 자신의 개성이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겠지.
레녹은 그런 시도 자체가 결코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마법이란 세계의 법칙을 자신의 기준대로 해석하는 방법이었으니.
종국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과정에서 아비드가 정답을 골라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참지 못한 아비드가 버럭 소리쳤다.
“뭘 그렇게 잘난 듯이 지껄이는 겁니까!!!!”
콰아아아아앙!!
레녹의 주위에서 피의 분수가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혈류의 손이 그를 휘감고 내리찍었다.
그와 동시에 내리찍은 손을 지지대로 삼아 피의 폭풍 속에서 붉은 거인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파지지직…….!!
직후 레녹이 잡고 휘두른 전격에 거인의 팔이 터져나가지만, 액상으로 돌아온 혈류가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쐐기처럼 재차 레녹을 향해 날아든다.
뚜두두둑!!!
무차별적으로 실드를 두드리며 마법사의 숨통을 노리는 혈류마법.
기본적으로 점성과 강력한 마력반응력을 지닌 촉매로 작용하는 혈류는 수류계열 마법에 비해 범용성은 떨어질지언정, 그 조작능력만큼은 동레벨의 술사들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다.
하물며 술사가 자성영역을 전개하며 술식지배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시점에서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곧 공격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부하들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전개한 이 피의 강 아래에서라면, 틀림없이 레녹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아비드가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과과과과과!!!
서로를 노려보고 선 두 술사가 손을 휘젓는 것과 함께 두 갈래의 마력이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전격과 혈류의 파도로 격변했다.
시선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 레녹의 급소를 노리고 짓쳐들어오는 수십 발의 혈탄(血彈).
실드의 집중과 압축, 회전의 묘리를 동시에 전개시키며 막아낸다.
터터터텅-!!
단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줄타기.
그러나 레녹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안에 가득 담긴 전격을 그대로 하늘에 흩뿌리면서 거대한 전격의 파동을 흩뿌렸다.
비가 내리는 하늘 가득히 퍼져나가는 전격의 파동이 레녹의 의념에 맞춰 정교하게 쪼개지고 분화하면서 길쭉한 창날이 되어 비처럼 내리꽂히고.
[신라지망(迅羅地網)] [다중타극(多衆墮極)] [비창(飛蒼)]퍼버버버벙!!
피처럼 붉은 거인의 몸에 적중하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너머에 존재하는 아비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제 몸의 형태까지 마구잡이로 우그러뜨리며 무너져내리는 거인의 모습.
그 와중에도 쉴새 없이 주먹과 피로 만들어진 회탄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레녹의 공방을 박살 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두 눈에서 새파란 안광을 쉴새 없이 흩뿌리는 레녹 역시 허공에서 내리 질주하는 전격의 흐름을 잡아 휘두르며 지상을 열기로 불태웠다.
쿠구구구구……!!!
두 마법사가 휘두르는 파괴적인 여파에 공장부지가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화력전으로 끌려가던 대치상황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레녹이 아니라 아비드 쪽이었다.
“으으으윽!!!”
이를 악문 아비드의 코에서 찐득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인을 맺는 손이 어지러워지고, 계속해서 좌표와 마력흐름을 계산하던 머리가 흐리멍텅하게 변했다.
마력의 성질변화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을 넘어 스스로의 재능으로 영역을 전개할 줄 아는 6레벨 군위 마법사들간의 결전.
기본적으로 전면에 서는 일이 드문 술사들이 이렇게 마지막까지 전장에 남아서 술식을 겨루는 것은 본디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레녹의 말도 안 되는 전장장악능력이 그것을 가능케 만들고 있었다.
아비드가 발을 빼는 대신 역으로 부하들의 혈액까지 끌어모아 자성영역을 전개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터.
레녹의 선공으로 시작한 대규모 광역마법에 소모된 마력이 상당했을뿐더러, 그만한 고유마법을 즉석에서 응용 조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신력을 소모했을 거라는 계산.
거기다 킬리안을 도망쳐 보내기 위해 전개한 환영에 들어간 정성이 상당했을 거라는 고위마법사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까지.
이 조건이라면 먼저 자성영역을 전개하고 몰아붙인다는 가정하에, 최소 절반 이상의 승산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먼저 자성영역을 전개한 아비드 욘센이, 레녹과의 화력 대결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여전히 손끝에서 머무는 마력이 사방에서 흩날리는 핏물과 섞이며 자유롭게 움직이고, 그의 앞에 선 거인은 의념에 따라 착실하게 묵직한 충격파를 내리찍는다.
그러나 처음 그 자리에 오연하게 선 레녹의 공방이 뚫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역으로 아비드의 통제하에 놓인 혈류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체감될 뿐.
한계이상의 화력을 마주한 혈류가 아비드의 조작능력을 넘어서 그대로 증발하고 있는 것이다.
덜덜덜덜……!!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비드의 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한다.
머리로는 아직 승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변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비드 본인이라는 의미.
그리고 이 순간 제대로 평정을 찾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레녹과 아비드가 지나온 시간의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비드 욘센이 처형부대의 필두로서 카르텔의 적을 숙청하며 보낸 시간과
레녹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자들을 상대로 사선을 넘나들며 쌓아올린 시간의 차이.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숱한 경이를 마주한 마법사와 정면에서 손속을 겨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 답이 무엇인지는 아비드 욘센의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알고 있었다.
“후우, 후우…….!!”
하지만 그럼에도 아비드는 틀림없는 6레벨의 군위마법사.
수십년의 세월동안 현장에서 흔들림없이 자리를 지켜온 베테랑들 중 하나다.
몸이 작금의 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서는 착실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뻐근해진 마력으로 공방의 속도를 아주 살짝 늦추는 것과 동시에 가려진 피안개의 너머에서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잡혀 나온 것은 손목만 한 굵기의 단검 한 자루.
그의 직속 상관인 맥퀸에게서 아주 비밀리에 전수받은, 메릴다의 송곳니.
마력내성을 지닌 그녀의 어금니라면 레녹의 실드를 단번에 박살 내고 그 심장에 이빨을 박아넣을 수 있을 터.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비드가 희생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혈류계열 고유마법 : 증강.
[역혈문(逆血門)]끼기기기기기긱!!!
“아으으윽……!!”
가장 강력한 혈마법은 바로 자기 자신의 피로 사용하는 희생영창.
아비드의 전신에 흐르던 피의 흐름을 거꾸로 회전시키면서 동시에 그 비쩍 마른 몸에 존재하는 모든 잠력을 운동능력으로 전환한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그저 칠공에서 피를 분사하면서 즉사할만한 금술이지만, 혈법사인 그에게는 오히려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남겨둔 비장의 수일뿐.
전신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넘치는 것과 함께, 손에 들린 송곳니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있는 피가 거꾸로 돌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위해 작용해야 할 중추가 맛이 가버린다.
덜덜 떨리던 손이 안정되고, 더없이 평온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한 발을 내디딘 것과 동시에.
아비드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쐐애애애액!!
육체적 능력이라는 크게 연관이 없을 마법사가 발휘하는 단 한순간의 기적.
동시에 거인이 온몸을 부풀리면서 그 거대한 팔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소환수를 통해서 대리영창을 맡기는 건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알고 있기는 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손안에 쥔 번개를 휘둘러 거인의 팔을 날려버리려던 레녹이 멈칫거리며, 그 모습을 확인하고.
“역시 고위술사에게는 배울점이 많…….”
“죽어어어어어!!”
촤아아아악!!
거인의 가슴팍에서 튀어나온 아비드가 손에 들고 있던 메릴다의 송곳니를 그대로 휘둘렀다.
거인을 이용한 수인은 그저 눈속임. 진짜는 레녹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거인의 몸 안쪽으로 숨어들어간 아비드의 찌르기 한번.
지금까지 판을 깔아 쌓아 올린 손패를 모조리 버리면서까지 시도하는 단 한 번의 승부수.
거기에 담긴 아비드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거인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는 아비드의 모습을 인식한 순간, 레녹의 몸보다 머리가 먼저 반응한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순식간에 하나의 의지 아래 구체화되며 새로운 마법으로 화했다.
레녹의 내면에서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공용마법과 고유마법, 그리고 연금술 간의 호환이 이뤄지며 개념을 넘나드는 단 하나의 의념이 레녹의 손끝에서 내리꽂히고.
빠지지지지직!!!
레녹의 손안에서 피어오른 새파란 불꽃이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창조계열 고유마법 : 연금술 응용.
이중연성(二重鍊成).
[창염(蒼炎)]그것은 본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을 아주 잠시나마 현실에 때려 박아 만들어낸 모순(矛盾)의 결정체.
염열계열의 [축화(築火)]와 빙결계열의 [빙륜(氷輪)]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술식을, 오직 1세계의 연금술이라는 금기를 이용해 이어붙인 억지.
본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물질을 조합하는데 사용되던 연금술의 개념을, 두 갈래 마법을 조합하여 연성해내는 것.
예전의 레녹이 전력으로 자성영역을 전개하고서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던 이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비에 젖은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원래는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이 레녹의 재능 아래 강제로 현실에 구현되면서 공간이 조금씩 우그러들어 간다.
차가운 불이다.
대기라는 연료를 먹어치우고 급격하게 덩치를 불려 나가며 사방을 불태우는 대신, 끝없이 얼려내는 새파란 불꽃이 아비드의 이마에 적중한 순간.
쩌어어어어엉!!!
격렬하게 움직이던 이 자리의 모든 것들이 우뚝 멈춰 섰다.
쉴새 없이 굉음이 울려 퍼지던 공장부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꺼…….”
아비드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절규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피로 만들어진 거인의 가슴팍에서 튀어나오던 그 자세 그대로, 수인을 맺는 척하던 거인의 거체까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던 모든 혈류의 흐름이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후두두둑!!
공간에 가득 찬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방울이 그대로 얼어붙어 우박으로 변했다.
근방을 두드리는 우박의 둔탁한 충격에, 천천히 얼어붙은 피의 거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쿠구구궁……!!
조각상이 박살이 나는 것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산산조각나는 거인의 파편.
그 충격으로 같이 지면에 머리를 뉘인 아비드가 그제야 힘없이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레녹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송곳니를 움켜쥐었다.
아비드가 힘없이 웃었다.
“흐, 흐……”
“좋은 승부였다.”
그에게는 위로조차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레녹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만 한 수준의 술사와 이런 식으로 붙어볼 만한 기회가 많지는 않지. 여기까지 올라오고 나서야 그걸 알게 되더군.”
레녹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비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의 시체는 물론이고, 부하들의 피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해 먹는 놈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지닌 마법의 재능만큼은 진실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레녹은 이만한 수준의 마법사와 직접 목숨을 걸고 싸워보았음을 실감했다.
자치령에서 그리샤와 한번 수준을 겨루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일환이었을 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내놓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고위 술사를 상대해 본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아비드 욘센이 사용하는 혈마법의 응용방식, 그리고 그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가지 잡기술들은 레녹이 영감을 얻기에 차고도 넘쳤다.
거기다, 지금 레녹이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기에도.
“이만큼, 다른 계열을…… 이어붙이, 제정신이 아니…….”
아비드가 얼어붙은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서 급격하게 생명의 기운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아비드는 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잔혹하고, 일말의 동정할 여지도 없는 악인이었지만 그 역시 한 명의 마법사였기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얻어야 할 깨달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렇군……. 이미, 도달한……. 그런 모습을…… 흐흐, 벌써……”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더 이상 레녹의 모습이 비치는 일은 없다.
죽음이라는 한기가 그의 의식을 감싸고, 레녹조차 알 수 없는 순간 속으로 인도했을 뿐.
레녹은 묵묵히 쏟아지는 우박을 어깨로 맞으면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