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317
316화 다른 길을 걷다
유지하가 복귀한 뒤 메가시티 퍼시픽은 각국의 최우선 감시 대상이 되었다.
공격당할까 봐 접근하진 못했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형 보트 등을 동원해 감시하고 있었다.
민간인이 타고 있었다고 하면 최소한의 면피라도 되기 때문이다.
타국의 수뇌부가 궁금해하는 건 단 하나였다.
―그래서 유지하는 언제 피바람을 일으킬 것인가?
대학살극을 저지른 잔혹무도한 독재자가 돌아왔으니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주류였고 사람들을 가슴 졸이게 만들었다.
일각에선 원정함대를 그냥 놓아 준 것에서 희망 섞인 예상을 하기도 했다.
―당장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는 소문이 돈다.
―이럴수록 긴장해야 한다. 그는 완전히 미쳤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이런 예측은 유지하를 악마화한 것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하도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붓다 보니 확증편향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선입견과는 상관없이 유지하는 조용히 지구를 떠날 준비를 갖췄다.
범죄자나 부패한 정치인, 그리고 인류연합과 맞지 않는 성향을 가진 시민은 그의 악명에 벌벌 떨며 메가시티를 떠나기 바빴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강제로 내보내야 했을 테니까.
그들이 떠나준 덕분에 이주 준비는 수월하게 끝났고 드디어 두 개의 메가시티가 하늘로 떠올랐다.
약 2만 ㎢에 달하는 지반이 통째로 상공으로 치솟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정보요원들이 기겁했다.
“지진이다!”
“저건 지진이 아니라 메가시티가 떠오르는 겁니다! 메가시티가 통째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에테르 역장을 사용하면 부분적으로 중력을 컨트롤할 수는 있다.
유지하가 떠난 뒤에도 그 기술은 공사현장 등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저 거대한 지반을 통째로 들어 올린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지반이 햇빛을 몽땅 가리는 바람에 마치 밤이 된 듯 사방이 어두워졌다.
정보요원들은 서서히 하늘로 떠오르는 지반과 메가시티를 보며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유지하는 애초에 이쪽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걸.
“그냥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나…….”
“우리와는 완전히 관계를 끊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들은 유지하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그는 깔끔히 떠남으로써 모든 관계를 청산했다.
다른 메가시티와 스마트팜, 핵융합로를 가져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시설도 언젠가는 낡을 것이고 현 인류에는 그걸 보수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부품이 부족했다.
지난 6년간의 혼란 속에서 아전투구를 벌이다 보니 스마트 팩토리를 제대로 써먹지 못한 탓이 컸다.
이제 스마트 팩토리를 새로 건립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보요원들은 앞으로 지구에 펼쳐질 광경을 상상하곤 치를 떨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남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벌어질 겁니다…….”
요원들은 지구 곳곳을 누비는 터라 지난 십여 년간 환경이 어떻게 변했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대충 눈치챈 상태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존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기온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며 해안선은 이제 월별로 통계를 내야 할 정도로 급속도로 후퇴 중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계속 좁아진다는 뜻이다.
4월에 기록적인 폭염이 닥치는가 하면 평생 눈을 본 적이 없던 중동인들이 폭설에 갇혀 아사하기도 했다.
홍수와 화재 등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스테라가 나타나는 바람에 다들 희망을 가졌지만 이젠 헛것이 되고 말았다.
정보요원들은 이런 사정을 상세히 수뇌부에 보고했다.
메가시티 아메리카가 발칵 뒤집혔다.
* * *
―뭐? 메가시티 두 개가 통째로 하늘로 올라가? 그게 가능한가?
―말이 안 된다. 그게 질량이 얼마인데… 요원들이 잘못본 거 아닌가?
―정찰기를 보냈으니 두고 봅시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떠난 거라면…….
아메리카 수뇌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지하가 일시적으로 날뛰더라도 적당히 받아 주면 언젠가 교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성격이 약간 부드러워졌다는 보고도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유지하는 메가시티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요원들이 위치를 잘못 찾았을 거라는 부질없는 희망은 정찰기가 보내온 사진과 영상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메가시티 아메리카의 티투스 프랭클린 대통령은 퍼시픽이 있어야 할 위치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신음을 삼켰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에테르 역장으로 그걸 들어 올린다는 게 가능하긴 한가?”
“사이커들을 호출해서 문의했습니다만, 잘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미치겠군. 그렇다면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이 되었나?”
“예. 정찰위성 사진 보시겠습니다.”
사진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프랭클린 대통령은 숨을 멈췄다.
“푸른 문? 우주공간에 이게 무슨 문이지? 합성인가?”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쪽을 보시면…….”
사진 한 장이 더 놓였다.
아스테라 위성궤도에 푸른 문이 나타나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행성 뒤로 고리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건 뭔가?”
“모릅니다. 현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모른다, 모른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
“죄송합니다.”
일개 요원에게 목소리를 높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대통령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원으로 적당히 구슬리고 기술을 받아내려 했는데 모두 허사가 되었다.
그뿐인가?
이제 인류는 황폐화된 지구에서 구원받으리란 기약도 없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남은 자원과 땅을 가지고 싸우면서 말이다.
프랭클린 대통령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아스테라라는 곳으로 떠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닐 테니 협상을 시도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유지하라는 인간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였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잘 듣게. 오늘 입수한 정보는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알겠나?”
요원은 체념하듯 말했다.
“조만간 밝혀질 내용입니다.”
“지금만 아니면 돼! 아스테라 자체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잖나? 시간이 분노를 누그러트려 줄 거네.”
그것은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메가시티 2개를 아스테라로 옮긴 시점에서 유지하에겐 그 어떤 압박이나 회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프랭클린 대통령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고 자존심을 버리고 허리를 굽히는 선택지도 고르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만 벌면 아스테라인가 하는 행성에 우주선을 보내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메가시티 아메리카는 인류연합이 사라졌다는 내용을 철저히 숨겼다.
그 거대한 도시가 사라진 걸 눈치 못 채는 건 이상하지만 다들 근처에 접근하길 꺼린 데다 협상을 프랭클린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은 상태였다.
좋은 대화가 있었다며 성과를 강조한 그의 말을 다들 믿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언제고 탄로가 나는 법이다.
링 월드는 아스테라를 품은 채 에테르를 방출해 워프게이트를 열었다.
워낙 막대한 에테르가 방출된 까닭에 어지간한 사이커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고, 거대한 워프게이트가 나타난 것을 목격했다.
“저건… 대체 뭐지?”
“푸른 문… 플레이그 퀸이 이용했다는 워프게이트…….”
“잠깐, 그러면 아스테라가 어디로 가버리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랭클린 대통령은 대화가 훌륭하게 진전되고 있다며 타국을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광경은 그가 속였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아스테라는 푸른 문으로 천천히 들어가더니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이제 지구엔 인류연합을 제외한 세력밖에 남지 않았다.
유지하의 초기술도 없고, 넘쳐나는 자연재해와 식량난이 그들을 기다릴 뿐이었다.
지금까지 프랭클린 대통령이 자신들을 기만했음을 알게 된 여러 메가시티는 격렬히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놈이 우리를 속였다!
―대화가 진전되고 있다면서 이게 뭐냐? 왜 유지하가 말도 없이 사라진 거냐!
―애초에 인류연합을 압박하는 게 아니었다!
분노한 것은 각국뿐만이 아니었다.
메가시티 아메리카의 시민들도 유지하와 아스테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아스테라가 있던 곳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정치인들이었다.
“이 개 같은 새끼들아아아!”
“내 사랑스런 루시아는 언제 일어나는 거지? 6년째 창고에서 썩고 있다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 총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수만 명이나 되는 흥분한 군중이 총을 마구 쏘아대며 관리본부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책임자들은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가 버렸다.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놈들을 죽여라!”
“이 망할 것들을 싹 태워 버리자!”
시위는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폭력적이 되었고 급기야 사제폭탄까지 등장했다.
거대한 관리본부가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시민들이 총을 쏘며 환호성을 울렸다.
아메리카의 기상을 어김없이 보여 준 건 좋았지만 허탈한 감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런 소요 사태는 여러 메가시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행해 산불처럼 번져갔다.
당국은 이 사태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피신하는 데 급급했다.
정황을 뒤늦게 알아차린 소수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탄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그를 악마화하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정부가 그의 악명을 과장해서 지지도를 올리는 걸 막았어야 했다.
―애초에 그가 만든 메가시티에서 살고, 그가 만든 핵융합에서 전기를 끌어오고, 그가 만든 스마트팜에서 식량을 얻지 않았나? 무슨 염치로 비난을 퍼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다. 그는 가버렸고 이제 인류는 서서히 종말을 맞이하는 것만 남았다.
―종말까진 아니지 않을까? 그래도 18억이나 되는 인구가 남았는데.
―해가 갈수록 올라가는 기온과 후퇴하는 해안선을 생각해 봐라. 아마 1세기 정도 후에는 극소수의 원시부족만이 남게 될 거다.
―어쩌면 1세기 후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메가시티 노스에서 반응탄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인류는… 완전히 끝났다…….
―아니, 인류는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스테라로 간 사람들이 있으니까.
메가시티 상공에서 종말의 빛이 번쩍였다.
* * *
배성민은 정신이 없었다.
메가시티를 대체 어떻게 옮길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유지하는 정말 옮겨버렸다.
그렇다고 메가시티가 우주공간에까지 올라간 건 아니었다.
워프게이트.
유지하를 아스테라로 이끌었다는 그 푸른 문이 등장했다.
배성민은 그 문 앞에서 형용하지 못할 경건함을 느꼈다.
‘이건… 신의 힘이군.’
이게 신의 힘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동시에 이 힘을 다루는 유지하마저 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아스테라인들은 유지하를 보고 신이자 황제라고 부른다고 한다.
최초로 아스테라를 통일한 황제.
그 콧대 높던 엘프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엘드그라실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악마의 침공까지 막아낸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배성민의 입장에선 진짜 일어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마법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것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가시티가 아스테라에 도착하고 서서히 착륙하자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쿵.
거대한 메가시티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입구가 열렸고 배성민은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여기가 아스테라야?”
“정말 대단하다…….”
오염되지 않은 알프스 산맥을 연상케 하는 전경이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공기는 시원할 정도로 맑았고 푸른 언덕과 저 멀리 만년설을 담고 솟아 있는 산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돛을 단 배가 하늘을 돌아다니는 광경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거 뭐죠? 배가 하늘을 날아다녀요!”
“우주선도 하늘을 날지 않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여기엔 하늘을 떠다니는 섬도 있다는데요.”
하여튼 여러모로 신기한 곳이었다.
배성민은 풍경을 구경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블루 드래곤을 발견했다.
언젠가 인사를 나눈 지갈레온이었다.
인간 모습이었을 때는 상당히 촐랑거린다는 인상이었는데 저렇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보니 굉장히 웅장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멋지게 착지하려다가 콧잔등을 바닥에 박고 말았다.
―으헉! 아이고 코야.
드래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지갈레온은 고개를 휘휘 흔들어 정신을 차린 다음 배성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비서실장이라고 했나?
“그… 렇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날 타라. 레오볼드가 기다리고 있다.
레오볼드라면 유지하가 여기에서 썼던 이름이다.
소냐, 파티마 등과 함께 지갈레온의 등에 올라타자 그가 투덜거렸다.
―레오볼드 놈 게이트는 어디다 팔아먹고 날 수송용으로 써먹었겠다? 다음에 톡톡히 받아낼 테다.
배성민은 어느덧 높아지는 고도와 거친 바람을 쐬며 그에게 물었다.
“지갈레온 님,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원래는 안 되지만 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특별히 들어주도록 하지.
“대통령님… 그러니까 레오볼드 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이 아스테라에서 말입니다.”
―아스테라에서? 설마 처음부터 듣겠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가급적이면 듣고 싶습니다.”
소냐와 파티마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지갈레온은 투덜거리면서도 얘기해 주었다.
―처음엔 완전히 미친놈인 줄 알았지. 허접한 비행선에 타고 부유대륙이 불쑥 기어 올라와서는 날 포섭하려고 했거든. 우린 아주 멋진 싸움을 벌였고 난 녀석의 정성에 감복해 힘을 빌려주기로 했지.
유지하가 들었으면 머리를 한 대 후려쳤을 정도의 심각한 왜곡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그가 없었고 덕분에 지갈레온은 자기 멋대로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처음엔 남작이었나? 하여튼 동쪽 구석에 붙은 쥐꼬리만 한 영지부터 시작했을 거야. 그 지랄 같은 성격은 그때부터 유명했지. 남작 주제에 죄다 시비를 걸고 다녔거든. 오죽하면 사방이 적이었겠어?
“그, 그렇군요…….”
세틀러호와 아르마가 있는 이상 그를 적대한다고 해서 적이 될 순 없었다.
배성민은 반응탄이라도 썼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일은 딱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엘프놈들이 선을 넘었지. 난 레오볼드가 화내는 거 처음 봤다니까.
“어떻게 선을 넘었나요?”
황선영이 묻자 지갈레온은 지겨운지 머리를 흔들었다.
―내 입으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다른 놈한테서 들어. 하여튼 그놈은 차츰차츰 성장해서 기어코 엘브랑데와 자이움을 멸망시켰지. 중간에 약한 척을 많이 해서 나도 잠시 착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니더라고. 그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한 적이 없었어.
“대통령님의 주특기는 죽은 척과 약한 척, 그리고 자작극이죠.”
―오! 역시 측근이라서 그런가 잘 아는구만. 아무래도 자네와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유지하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면 며칠 밤을 지새워도 부족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황도 제롬으로 모이고 있을 때, 유지하와 아르마는 집무실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구를 떠나온 걸 후회하시나요?”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링 월드의 힘이면 지구의 환경을 고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구와 18억의 인류를 버렸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2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느낀 것은 사람을 설득하는 건 참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를 반대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플레이그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편이 훨씬 쉬울지도 모른다.
“그들을 설득하는 데 에너지를 쏟느니 일찌감치 갈라서는 게 낫지.”
한때는 진정한 통합이라는 달콤한 문구에 흔들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도 가혹했으며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갈라서는 게 최선이야. 언젠가…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지구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인류는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유지하는 링 월드의 중앙 시스템을 바라봤다.
이 거대한 세계는 아스테라와 두 개의 위성, 그리고 에테르 우주를 품고 워프게이트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문명이라 해도 1년이 걸리는 상당히 긴 여정인데, 이는 우주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유지하에겐 안티에이징 시술과 엘프의 유전자가 있었다.
적절히 조합한다면 300년 이상의 수명을 보장받게 된다.
“하여튼 당분간은 쉴 수 있겠어.”
“좋은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아마 마스터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래…….”
사람에겐 휴식이 필요하고 그건 유지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눈을 감자 아르마가 안겨왔다.
“쉬는 동안 할 게 많아요. 오두막도 짓고, 살림도 들여야죠. 그리고…….”
“그리고?”
“아이도 낳을 거예요. 첫 번째 아이 이름은 벌써 정해 뒀어요.”
이쯤 되면 모르는 척 하기가 더 힘들다.
유지하는 자신에게 안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고 수고했어.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네. 마스터.”
그녀는 유지하의 품에 얼굴을 기대며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