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74
약먹는 천재마법사 374화
진둔(3)
진둔의 몸에서 생명 유지 장치를 뜯어내는 그 찰나의 순간.
자이기스와 레녹이 서 있는 시간선에 끼어들지는 못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인지하고 있다는 것일까.
“승천자는 아니지만, 승천자보다도 더 알 수 없는 존재지. 나는 그렇기에 저자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둔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래전에 거래를 했지.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됐을 뿐이야.”
자이기스는 깊은 눈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런 짓을 하는 건…… 우리가 그동안 계속해서 서로를 마주 보아왔기 때문이지, 뭘 이제 와서 묻고 있느냐?”
“…….”
레녹 역시 알고 있었다.
단망경과 마안을 결합해서 계속 마주했던 진둔의 환영이, 정말 단순한 환영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
미궁의 밖에서 시작해 안으로 들어오는 사이 늙어가던 진둔의 모습은, 자이기스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소년으로 시작해 청년을 지나, 장년을 넘어 노년에 다다른 한 남자의 일생을 보았다.
바로 그 요람의 끝에서, 진둔은 레녹이 자신을 만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 그 눈동자……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있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늠하는 눈이야. 난 알 수 있다.”
“그건…….”
“단순한 마안이 아니라, 네 심상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겠지?”
그에게는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레녹이 미궁에서 드러낸 일말의 흔적만으로, 진둔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근본을 짚어 다시 한번 레녹에게 일러준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 심지어 그 혼자만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을 때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거기서부터 거꾸로 되짚어가면, 네 심상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이 가지. 천견이 네게서 무엇을 보고 전언을 남겼을지도 말이다.”
게임이 거의 다 끝나간다.
진둔이 놓는 백 돌은 계속해서 그 수가 줄어가고, 레녹이 놓는 흑 돌은 끊임없이 영역을 부풀린다.
형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레녹의 머릿속에 흘러드는 정보량이 격해지고, 그 농도는 끝을 모르게 짙어져 간다.
당장 그 모든 것을 녹여내는 것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레녹의 손에서 온전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
진둔은 자신이 쌓아 올린 길의 끝에 놓인 풍경을, 고스란히 레녹에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만 거듭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라도 의미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킬킬거리며 웃은 진둔이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가기 전에 보험을 남겨두는 거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아놓으면 찝찝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려도 좋다.”
“아뇨. 잊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레녹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잊히지 않게 하겠습니다.”
네 번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런 사실은, 천견에게 닫힌 세계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인과가 꼬리를 물고 닫혔다는 것은, 이 세계에 더 이상 다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늘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진둔에게 직접 확인했을 뿐.
레녹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진둔은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침묵했다.
“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하는 게 좋았다.”
진둔이 돌을 쥐면서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오랫동안 상대가 되지 않아서 금방 그만뒀지. 나 혼자서 대국을 두는 게 훨씬 재밌다는 걸 알았거든.”
“…….”
마지막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녹은 그가 하는 말을 흘려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계술은 나 자신과의 승부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대국이다. 내면에 자리 잡은 모순을 돌파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휘어잡고 해결하는 것. 나는 그 복잡한 묘리가 꽤 마음에 들었어.”
진둔이 웃었다.
“아니, 그런 나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탁!!
끝이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남은 돌을 레녹이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진둔이 말했다.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하자.”
“말씀하시죠.”
진둔은 레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진 게 아니라, 져준 거다. 알지?”
그 실없는 농담에, 레녹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서로 안면을 익힌 지는 찰나에 가까운 시간.
하지만 레녹은 눈앞에 쭈그리고 앉은 이 초라한 노인이,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건 레녹이 이 미궁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진둔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반추해 왔기 때문이겠지.
알고 있었다.
“아뇨.”
마지막 돌을 놓고 게임을 완전히 흑의 돌로 뒤집어엎은 레녹이 대답했다.
“제가 이길 겁니다.”
“이 게임을? 아니면 현실을?”
레녹이 웃었다.
“어느 쪽이든.”
* * *
기나긴 의식의 편린 사이에서 레녹이 눈을 떴다.
차가운 요람의 바닥 냉기가 뺨을 타고 그대로 올라온다.
그 위로 뜨끈한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며 몸을 적혔다.
촤아아아악!!!
눈앞에서 흘러내리는 새빨간 선혈.
생명 유지 장치를 빼앗긴 진둔의 육신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피가 흘러나오고, 그 유해가 바닥을 뜨겁게 적신다.
희미하게나마 이어지던 호흡이 끊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진둔 자이기스 이더노어는 그렇게, 이 요람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승천에 도전하며 인리를 초월한 9레벨의 초인들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영원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 진둔의 숨을 직접 멎게 한 장본인, 복마전의 단장은 조심스럽게 진둔의 몸을 안아 들었다.
“바라는 결말 안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켜낸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남자이자 여자이며, 노인이자 아이 같은 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하지만 그 담담하기 그지없는 선언 사이로, 일말의 애도가 섞여 있다는 것을 레녹은 이해했다.
“하지만 결코 당신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 아무리 지저분한 희생과 대가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는 계속해서 존속해야만 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노이즈 사이로, 한없이 싸늘한 안광이 흘러나온다.
에르몽조차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차갑게 굳어버린 결의.
단장은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은 진둔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 더 이상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적을 만들어내서라도 다음을 준비하겠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신세계의 신이라도 될 생각입니까?”
에르몽이 멍하니 중얼거린 말에 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쓰러진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을 뿐.
비척거리며 일어나 단장을 올려다보는 마이야를 향해.
“마이야. 두 사람을 수습해서 미궁 밖에 데려놔. 둘 모두 조직에 들어오기에 충분한 실력을 지닌 이들이다.”
“난 복마전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
에르몽이 쓰러진 채로 힘없이 대꾸했다.
“여기서 그냥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편이 그쪽에게 훨씬 편할 텐데요.”
“난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는다.”
그 말에 처음으로 단장이 대답했다.
이제까지 다른 존재를 무시하고 진둔에게만 말을 걸던 단장의 대답.
에르몽이 곧바로 다시 물었다.
“당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더라도 말입니까?”
“하늘이 열리고 외해의 종말이 내려오는 순간에 인간의 의지란 하등 중요하지 않게 될 테지.”
“…….”
그 담담한 선언에 에르몽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지닌 바 생각과 가치관과는 달리,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단장이 천천히 에르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세계의 모든 가치가 잡아먹히기 전에 다른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
“그건…….”
“생명은 자신보다 거대하고 숭고한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순간에만 진정으로 세계를 구축하고 존속시킬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흐름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일.”
단장이 말했다.
“기적이란 결코 우연이나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 나는 단 하나의 기적을 위해 판을 뒤집고, 모든 것을 존속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미쳤군요. 당신은.”
에르몽이 단언했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단장이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쓰러진 에르몽과 레녹을 스쳐 지나가며 단장이 중얼거렸다.
“한번 끝을 바라본 사람은, 그 누구든지 결말로 향하는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단장이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마이야가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선다.
요람의 궁을 벗어나려는 단장과, 두 사람을 제압해서 챙겨 들려는 마이야의 발걸음이 교차한 그 순간.
쿵!!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레녹의 몸이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비틀거리며 일어선 레녹의 체내에서 웅장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웅!!!
마치 비행기의 엔진이 회전하는 것처럼 웅장하고 섬뜩하기 그지없는 회전음.
그의 체내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그의 마력을 가감 없이 사방으로 준동시키고.
레녹의 등 뒤에 떠오른 황금빛의 원이 헤일로처럼 등 뒤를 환하게 비추었다.
축 늘어진 마법사의 등 뒤에서 한 바퀴 회전한 황금빛의 파동이 요람의 잔해 사이를 싹 밀어내며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그 막대한 척력 사이로 쓰러진 에르몽의 육신이 장난감처럼 날아오르고, 마이야가 재빠르게 그 몸을 낚아채 다시 움직일 수 없게 꺾어버렸다.
뚜둑!!
“끄악……!!”
“팔다리 인대를 모조리 끊어놓았으니, 혼자 힘으로는 걷기 힘들 거야.”
차가운 눈으로 에르몽을 노려본 마이야가 그의 몸을 발치에 툭 던져두고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일으키는 레녹의 모습. 휘청이는 그 몸 사이로 가공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쉴 새 없이 터져 흐르고 있다.
방금까지 마력을 모두 소모한 채 헐떡이던 마법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강대한 기세.
관문에 들어오기 직전에 레녹이 펼쳤던 광역마법, 염열나선의 위력을 기억하던 마이야로서는 안색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저쪽이군……. 단장,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여전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노이즈. 하지만 단장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명백하게 흥미로워하는 듯한 기색. 그의 다음 말에서 그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군. 생각이 달랐다.”
“뭐?”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군.”
단장의 몸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마력이, 한결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지막 순간에 대답을 나누었던 거야……. 약속은 지켰지만, 의지는 저 마법사의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 알 수 없는 소리만을 중얼거리던 단장이, 그제야 마이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둔이 지니고 있던 항하사미궁의 조작 권한을 저 마법사가 넘겨받았다.”
“……뭐?”
“승천자가 사망했으니 그의 심상으로 만들어진 미궁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겠지만, 이 요람에 모인 마력 일체는 잠시나마 저 마법사의 것이겠군.”
단장이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진작 의식은 차렸을 테고, 마력을 가다듬고 나면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마력 배열 속도를 생각하면 방향은 잡은 것 같은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
콰아아아앙!!!
대답은 없었다.
수십 미터 계단 위에 서 있던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직후 단장의 눈앞에 나타난 레녹이 그대로 팔을 휘둘렀으니까.
손가락을 부채처럼 휘두르는 가벼운 손짓에 따라, 새빨간 폭염이 파도처럼 터져 나와 요람의 천장 위를 붉게 물들였다.
화르르르르르륵!!!!
검붉게 터져 나온 화염의 파도 사이로 새파란 전광이 희미하게 번뜩이면서 회전한다.
사방으로 흘러넘친 폭염의 끄트머리부터 거꾸로 얼어붙으면서 순식간에 수백 도가 넘는 기온을 뒤집고 공간을 싸늘하게 얼려 버렸다.
와드드드득!!!
“크흡……!!”
눈앞에서 순식간에 몇 개의 속성을 변환시켜 가며 몰아치는 격렬한 마력의 공세에, 마이야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녀 역시 요람까지 도달하면서 소모한 마력이 상당한 수준.
아무리 레녹과 기본적인 경지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저만한 마력을 손에 넣은 마법사를 상대로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쩌저적!!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싸늘한 냉기가, 한순간에 지옥 같은 열기로 변해 마이야의 살점을 미친 듯이 갉아먹기 시작한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뜩이는 속성 반전.
기겁한 마이야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단장!!!”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지만, 단장은 그런 마이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돌렸다.
“이런 곳에 오래 있다가는 진둔의 유해가 상하겠군.”
“야!!”
“말한 대로 두 사람 모두 상처 없이 살려서 미궁 밖으로 보내줘라.”
레녹과 에르몽 두 사람에게는 어떤 관심도 없어 보이는 듯한 모습.
마이야가 그 상식을 벗어난 반응에 입을 멍하니 벌린 그 순간.
허공에서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레녹이 마이야의 어깨를 짚으며 속삭였다.
“비켜.”
콰아앙!!
손안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마이야의 몸을 종잇장처럼 구겨 요람 벽면에 처박아 버린다.
레녹은 자신이 일으킨 충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돌려세운 단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