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81
약먹는 천재마법사 381화
미련과 숙원(6)
후우웅……!!
내뻗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
레녹은 그 시린 감촉을 온전히 인지한 상태로,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지 손가락에 새롭게 끼워진 유물반지, 파이겐바움의 눈을 마주한다.
본디 허수차원을 통해 술식의 이면이나 결계진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물.
이벨린을 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반지를 사용한 탓에 그 기능 일부가 마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하나 있다.
눈동자를 마주하고 기능이 떨어진 반지를 발동.
동시에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왼쪽 눈의 마안을 끌어올려 반지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마안과 허수차원을 바라보는 기능이 찰나의 순간 수백 번씩 교차하며 레녹의 의식을 한없이 잡아 늘이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이익……!!
종이가 천천히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주위의 모든 것이 느려진다.
그것은 진둔의 마지막 대담 당시 그가 레녹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용했던 의식의 무한한 분할.
아직 맨정신으로 시도할 수는 없지만, 반지와 마안의 능력을 조합해서 한없이 느리게 느껴지는 체감의식 사이.
그 엇비슷한 시간선에 선 레녹이 순식간에 일련의 계산을 마치고 현실로 복귀했다.
파앗!!
“후우……!!”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력을 끌어올리자, 레녹의 손가락 사이로 뻗어 나간 무수한 마력사가 부유섬의 아래쪽에 달라붙었다.
촤르르르륵!!
동시에 섬을 구성하는 흙더미와 돌을 분해해서 빠르게 아래로 흩뿌리기 시작한다.
가벼워진 부유섬의 속도는 빨라지지만, 이렇게 된다면 섬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짧아지게 될 터.
“에반? 지금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피스가 입을 열다 말고, 멍하니 아래쪽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레녹의 마력사를 타고 아무렇게나 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흙더미들이, 섬의 아래쪽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무언가를 건조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넓은 설원 한복판에 그림처럼 그려진 광활한 흙의 미로.
레녹의 마력이 담긴 흙의 미로가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설원의 눈이 그에 호응하듯 일어나 벽의 두께를 보강하고.
땅 아래서 순식간에 건조된 미궁이 부유섬의 아래쪽에서 교전하던 주시자들과 추적자들을 한 번에 가둬 버렸다.
쿠구구구구……!!!
[앞으로 달려라.]직후 부유섬의 위에서 울려 퍼지는 레녹의 전성.
그 말을 들은 주시자들 전원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잡아!!”
“미로 안으로 도망친다!”
“멍청한 놈들, 이렇게 급조된 미궁으로 뭘 할 수……!”
추적자들 역시 곧바로 부유섬을 뒤쫓기 위해 달렸지만, 미궁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변을 눈치채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다다닷!!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처음보다 훨씬 빠르게 멀어지는 거리감.
미궁에 들어서자마자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주시자들과 달리, 미궁의 벽을 부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추적자들.
그제서야 레녹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추적자들이 경악한 기색으로 입을 쩍 벌렸다.
“대규모 공간왜곡……. 조악한 흙더미로 이 정도의 공간간섭을……!!”
“미궁에 들어선 존재를 일일이 특정해 거리감을 다르게 매겨내는 식인가!!”
“청의 눈, 어떻게 영역도 사용하지 않고 이런 이적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주시자들 역시 레녹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말없이 숨을 들이켰다.
진둔의 사상전역. 항하사미궁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모방해낸 레녹의 소미궁.
미궁 안에서 서로 다르게 움직이며 틀어지는 공간의 왜곡을 레녹은 이 자리에, 진둔의 결계술과 마력을 이용해서 잠깐이나마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가능성과 시간선을 다르게 구현해 내며 갈라지는 무수한 미로의 갈림길.
그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도 모자라, 진둔과 직접 만나 그 대답을 전해 들은 레녹이기에 가능한 모방.
항하사미궁의 진체와 비교하면 한없이 조악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미로의 벽을 한두 개 박살 내는 정도로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추적자들이 빠르게 미로를 빠져나왔지만, 이미 늦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속도를 올린 부유섬과, 그에 다시 올라탄 주시자들의 모습이 설원 끝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술사전력의 차이를 실감한 이 상황에서, 이렇게 거리가 확 벌어진 것은 치명적이다.
빠르게 상황을 인지한 추적자들이 먼저 멈춰서고, 머리가 돌아가는 게 느린 일부는 섬의 끝자락에서 쏘아지는 폭격에 온몸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설원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폭발음 사이로 추적자들이 쓴 물을 삼키는 동안, 눈보라 너머로 희미해지는 부유섬의 모습.
“빌어먹을…… 놈들이 북대륙에서 활동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건만.”
“괜히 동부에서 빠르게 패권주자로 성장한 게 아니었군. 다들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저 정도라면 조만간 중앙전선에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돌아가지. 항하사미궁 잔해 사이를 뒤지는 게 차라리 낫겠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섬을 응시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 * *
설원 밖을 빠져나오자마자 마른 고목나무들이 모여 만들어낸 건조한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홀쭉한 나무들이 수 미터에 가까운 높이를 자랑하며 차가운 호수를 사이에 두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북방수림.
호수 위로 한 줌의 떨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평온이 거짓말인 것처럼.
거대한 부유섬이 붕 떠올라 그대로 호수 위로 처박혔다.
콰아아아아앙!!
그 중량이 통째로 물 위로 떨어져 내리며 얇게 얼어 있던 호수 표면이 통째로 뒤집어진다.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겪은 것처럼 파도가 몰아치며 호수에 고인 물을 모두 뱉어냈다.
반쯤 거꾸로 뒤집혀 처박힌 부유섬이 제힘을 이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호수 밖으로 튀어나가 숲 한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른다.
웅장하게 서 있던 나무들이 젓가락처럼 부러지고 밀려나며 사방팔방에 흙먼지를 흩뿌렸다.
“쿨럭, 쿨럭!!”
“찝찝해…….”
“모두 무사한가?”
엉망진창이 되어 박살 난 부유섬의 파편 위에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주시자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전사들이 빠르게 부유섬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근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없지?”
“그래. 추격은 모두 뿌리친 것 같군.”
힘없는 목소리로 주시자 한 명이 대꾸했다.
“에반이 아니었다면 족히 한나절은 싸워야 했을지도 몰라.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는데.”
“아니, 따지고 보면 섬이 갑자기 호수에 꼬라박힌 것도 에반이 부유섬의 흙을 마음대로 가져다 써서 그런 거잖아.”
“최선을 다한 거다.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우욱…….”
파리해진 안색으로 근처에 쓰러진 나무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레녹의 모습에, 주시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실상은 부유섬이 처박히는 그 잠깐 사이 멀미가 도진 것뿐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주시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무리가 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
레녹의 굽은 등을 바라보는 주시자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라피스 님이 저 마법사를 그렇게 아끼는 이유가 있었군.”
“미궁 최심부에서 마탑과 전단의 괴물 셋을 혼자 상대하던 것도 그렇고, 실력과 판단이 예사롭지 않아.”
“아직 주시자가 아닌데도 소집령에 초대할 만해. 어디서 저런 남자가 나타난 거지?”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이벨린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레녹의 등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뱉어, 뱉어.”
“잠깐만, 등을 그렇게 치면…….”
“그냥 토하는 게 좋다니깐.”
등허리를 두드리는 이벨린의 손놀림은 실로 절묘하게 레녹의 빈속을 자극해 내용물을 게워낸다.
본의 아니게 그녀 앞에서 한차례 그대로 토악질을 한 레녹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멀미약이 다 떨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군. 돌아가면 여분을 보충해야겠어.”
이번 여정을 대비해서 온갖 상비약을 잔뜩 챙겨왔는데, 설원과 미궁, 부유섬을 오가며 다 써버리고 말았다.
레녹은 일단 다른 일들을 신경 쓰기 전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을 근처에서 서성이던 라피스에게 물었다.
“그리샤의 상태는 어떻지?”
“……여기 있다.”
라피스의 등 뒤 나무에 기댄 채 초췌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그리샤의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조차 잠깐 멀미를 한 레녹의 안색보다 나아 보였다.
그리샤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녹이, 품 안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땀을 줄줄 흘리던 그리샤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픽 웃었다.
“미궁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묘하게 공손해졌군. 승천자에게 설마 예절주입을 받다 온 건 아니겠지?”
포션 뚜껑을 여는 순간에도 너스레를 떠는 그리샤의 말에 레녹도 가볍게 웃었다.
“그쪽이 8레벨의 소환술사와 친구 사이인 걸 보니까 연배가 실감이 나서 말이다.”
“아, 노라……. 그 녀석이 에놀라스 마탑의 대모가 된 지도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군.”
떨떠름하게 어깨를 으쓱인 그리샤가 말했다.
“에놀라스는 남부 대륙에서 가장 위세가 강성한 마탑들 중 하나다. 노라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추후 언젠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거야.”
“그쪽 덕분이군. 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영락없이 날 죽이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는데.”
“후후…… 노라는 젊을 때부터 굉장한 다혈질이었어. 죽일 것처럼 싸우던 놈과도 친구가 되고, 또 원수로 변하기 일쑤였지. 그 괴팍한 성질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남아 마탑의 대모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리샤가 아주 오래전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쓴웃음을 지었다.
“해묵은 인연이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번 일에서 난 거의 한 일이 없었으니까.”
“…….”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런 부유섬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리샤는 미궁의 일에 직접 나서지 못한 자신에게 적지 않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녹은 그런 그녀에게 시답잖은 위로를 건네는 대신,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 그녀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와도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대충 내막을 설명해 줄 수 있나?”
마안의 봇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따로 만나러 가야 하는 상황.
제니는 올리비에라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리샤가 주었던 인형에 올리비에라가 관심을 보였었다고 말했다.
그리샤가 과거의 일들을 되짚어보고 있을 때 그녀에 대해 물어야 대략적인 정보들을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리샤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에라……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걸. 미안하지만 노라와는 달리 그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줄 게 많지 않아.”
“무슨 의미지?”
“올리비아가 거대도시에 자리 잡은 이후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거든.”
“…….”
“그 뒤로는 서로의 존재만 간간이 인지하고 있었을 뿐, 마주친 적도 없어. 프로젝트의 실패 이후로 알 수 없는 연구만 붙잡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지.”
거대도시의 블랙컨슈머. 기계도시의 승천문. 군령도시의 만귀야행.
하나같이 굵직하고 장대한 기적을 구현하기 위한 프로젝트이자, 모조리 처참한 실패로 남은 과거의 부산물.
그리샤는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 역시 그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엮인 관계자들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희망에 차 있던 시절이 있었지. 자신보다 더 큰 기적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거라 믿던 시절이…….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일일 뿐이야.”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리샤의 혼잣말.
지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천천히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난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건전지가 다한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순식간에 잠에 들어버린 그리샤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천천히 일어섰다.
꼬박 한나절을 넘게 부유섬을 고속으로 이동시킨 그리샤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일.
제아무리 방대한 주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의 몸으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무리한 운용이다.
오히려 주력을 그렇게 사용하고도 멀쩡하게 잠에 드는 그리샤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피스가, 어깨에 걸려 있던 외투를 조심스레 그리샤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리샤의 주력량을 생각하면 하루 정도는 깨어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좋아…… 이 숲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겠군.”
레녹이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린 그 순간, 그의 바로 뒤에서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개머리거인, 래퍼드가 들고 있던 짐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난 소리였다.
그것이 근방의 나무를 모조리 쪼개 만들어낸 장작더미라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쓴웃음을 짓고.
천막에 사용되는 베일을 옮기던 지엘이 옆에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밤이 오기 전에 불 피우고 잘 준비 해야 하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아직도 뭘 머뭇거리고 있는 거야?”
사방에서 주시자들이 돌과 나무를 치워 잘 곳을 만들고 텐트를 친다.
누구는 모닥불을 피우고, 누구는 무너진 부유섬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요리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불침번을 정하고 경계를 서는 주시자들의 모습은, 마치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기 그지없다.
그런 주시자들의 앞에서, 라피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엣헴.”
“……왜 네가 뿌듯해하는 거지?”
레녹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내 피식 웃고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원을 벗어나자 차갑기만 하던 공기가 따스해지고, 해가 지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이 느껴진다.
북대륙 설원에 소환되어 미궁 밖에서 진을 쳤다가, 미궁 안에서 레이스를 벌여 마침내 승천자를 만나 대답을 얻기까지.
길고 길었던 북대륙의 일이, 이제서야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이 나고 있었다.
* * *
레녹과 이벨린은 그 후 하루를 꼬박 주시자들과 함께 숲에서 머물렀다.
주시자들은 레녹이 진둔을 만나고 왔다는 것을 짐작하는 듯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미궁 안쪽에 도착한 순간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세 명의 초인들과 혼자서 대치하던 레녹과 기절한 이벨린의 모습.
두 사람이 미궁 안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거기까지 도달했을지, 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들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두 명의 8레벨, 하나의 7레벨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던 레녹의 무력이 인상 깊게 남았던 걸까.
더 이상 레녹의 자격에 대해 항의하는 주시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레녹이 설원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것이 감명 깊었는지, 한결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이들이 대부분.
“에반, 이 자식이 네가 도착하기 전에 뭐라 했는 줄…….”
“저 말 믿는 거 아니지? 난 우리 보스의 안목을 항상 신뢰하고 있다고.”
“지랄하지 마, 라피스 님 생일 선물로 이 새끼가 글쎄 마도공학 테디베어를…….”
“야, 야 조용히 해!!”
“그냥 완전히 어린애로 보고……. 조직 기강이 이래서야…… 빨리 이런 무례한 놈은 퇴출시켜야…….”
하룻밤 잠깐을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 뿐이지만, 레녹은 주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라피스가 청의 눈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겠지.
청의 눈을 단순한 결사가 아니라, 다양한 실력자들이 함께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등대지기의 마음을 레녹은 이해했다.
레녹 역시 주시자들과 적당히 어울려주면서도, 승천자와 있었던 일을 이들에게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진둔과 나누었던 대담과 비밀은, 레녹이 지닌 본질적인 근본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는 종류의 것.
청의 눈을 그럭저럭 신뢰할만한 이들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으니까.
대신 레녹은 판데모니엄의 단장이 나타나 진둔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갔다는 사실만은 라피스와 이벨린에게 따로 일러두었다.
복마전과 전면에서 대립할 것을 선언한 그녀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이것 하나만큼은 두 사람에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라피스는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 잠도 자지 않은 채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그녀의 고민이 끝나면, 복마전이 무엇을 노리고 바라는지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이들과 논의해 보겠지.
레녹은 거기서부터는 라피스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이른 아침.
레녹은 이벨린과 함께 주시자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주시자들의 대열 앞에 서 있던 라피스가 두 사람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정말 같이 돌아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어요?”
“근처 도시에 에이전트 지부가 있어. 거기서 열차표를 공수하면 사흘이면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걱정스러운 라피스의 말에 이벨린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에반도 동의했으니까 우리는 그쪽으로 돌아가려고. 나도 에이전트 일을 너무 오래 놓고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일을 해놓고 또 일을 하러 간다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영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는 지엘의 말에, 저주술사 렌스가 웃었다.
“각자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다른 법이니까요. 오늘 이 순간처럼,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등대지기는 너무 무르다. 모든 것을 바쳐 목표를 위해 헌신해도 부족한 것이 구세의 교리이거늘.”
“고리타분한 소리 하지 마. 라피스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래퍼드와 흡혈귀 청년이 다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레녹과 라피스가 같이 웃었다.
“다음번에는 다른 주시자분들과도 인사를 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8레벨에 이른 주시자들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긴 하군.”
일전의 회의를 통해 새롭게 영입한 주시자들 중에서도 극위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기왕이면 경지에 대한 감을 잡기 전에 한 번쯤 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각기 다른 사정이 있는 법이겠지.
청의 눈은 지금 이 설원뿐만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만큼, 일이 바쁜 주시자들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피스는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 살짝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다음번에는 에반도 그 분들과 같은 곳에 서 있는 건가요?”
“글쎄…….”
레녹은 쓴웃음을 지었을 뿐, 거기에 대해 명확한 대답은 해주지 못했다.
어떻게 길을 벗어나야 할지는 대충 감은 잡았다. 방향도, 방법도 이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부터는 오롯이 레녹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었을 뿐.
레녹은 언제나 자신을 믿고 확신을 가져왔지만, 이번만큼은 그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에반 님께서 조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신 덕분에, 저도 고민이 끝났어요.”
“…….”
진둔과의 대담에서 간단하게 주고받았던 천견에 대한 말들.
네 번째가 없다는 절망적인 진둔의 예언과 천견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
승천자의 입을 통해 진상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라피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동부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며 힘을 키워왔지만, 이제부터는 저희도 전선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에요.”
“전선이라면…….”
청의 눈을 이끄는 수장의 입에서 언급될만한 전선은 여러 곳이 있지만, 레녹은 라피스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대.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대한 힘과 의지가 격돌하는 대전장.
“중앙도시 아르스노바에 남겨진 최후의 유산…… 청의 눈은 이제부터 그 유산을 손에 넣고 세계를 구하기 위한 분기점에 서겠습니다.”
귀도 교단, 주문연맹, 이능개화전단, 에더가든, 셀 수 없이 강대한 마탑과 무문들.
라피스는 그 모든 이들이 시선을 돌리는 중앙전선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딜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