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89
약먹는 천재마법사 389화
새로운 프로젝트(5)
카르텔과 다이크.
기업의 형태로 음지와 양지 각각을 입지전적인 자리에 오른 두 조직들.
거대도시가 구역을 나누는 에이리어 형태로 완전히 개편된 이후로 두 조직의 수뇌부가 직접 대면한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 거대도시 발칸의 역사로 따져보았을때 어찌보면 큰 의미가 있는 자리에서.
파노아 벨루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버질은 슬쩍 레녹을 향해 눈짓을 던진 뒤 말없이 헛기침을 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을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침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레녹은 파노아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녹의 기억으로 다이크의 사장과 파노아는 단순한 상명하복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공적인 일 이상으로 믿고 의지하던 사장이 하루 아침에 사망하고, 내부 사업망이 절반 이상 날아간 상황에서 쉽게 정신을 차리기 어렵겠지.
일이 벌어진지 오래지 않아 어떻게든 주위와 연락을 이어나갈 생각을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기에 레녹 역시 파노아가 당장 답장을 보내오지 않는 것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고.
잠깐의 침묵.
쓱 눈가를 닦고 고개를 들어올린 파노아의 얼굴은 살짝 초췌하기는 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했군요. 두 분께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다이크 사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버질이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양지에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고도 음지의 군수산업에 뛰어든 것 자체가 그쪽의 기획이었다지? 하물며 일찌감치 반을 알아보고 그의 몸값이 올라가기 전에 알뜰살뜰하게 써먹은 것 자체가, 능력과 안목을 동시에 갖춘 인재라는 말이겠지.”
“말을 해도 꼭…….”
레녹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과는 반대로,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탁탁 두드린 버질이 웃었다.
“하지만 원래 시대를 앞서나가는 선구자는 뭇매를 맞는 법이야. 결과적으로 율령이 풀리기 전에 미리 지하세계의 무기산업에 뛰어든 덕분에 다른 이들의 공분을 샀다 해도 과언이 아닌가?”
날카로운 직언. 지금 다이크에 일어난 상황과 그 원인을 세심하게 내다보고 있지 않고서는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부정할 수 없군요. 그 말이 맞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파노아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해도 제 선택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겁니다. 끝없이 이익을 추구해도 제 자리를 지키기 버겁기만 한 도시니까요.”
“그렇군. 이해했다.”
그제서야 몸을 앞으로 숙인 버질이 양 손을 교차한 채로 시선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판단력까지 망가진 건 아니었군. 이 정도라면 어느정도 손을 거들어줘도 괜찮겠어.”
“다이크의 일에 카르텔이 직접 개입할 생각인가?”
레녹의 말에 버질이 동의했다.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라면. 원래 은혜는 간절한 쪽에게 베풀어줘야 오래 기억하는 법이거든.”
“당연한 소리를 있어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군.”
“……어쨌든, 금제율령이 사라진 이 시점에서 굳이 양지와 음지의 경계를 따져가면서 개입을 망설일 이유가 있나?”
버질은 파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시의회 내부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 찬반이 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우리도 마음대로 움직여서 원하는 쪽에 붙으면 그만이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죠?”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노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희 회사를 향한 일련의 사태에 시의회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 * *
레녹은 자신을 찾아온 시정부 기밀관리청의 직원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집중을 놓지 않은 채 말을 듣고 있던 파노아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새로운 프로젝트라……. 사실 저희 내부적으로는 이미 아킬레우스 사의 소행이라고 거의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만.”
“아킬레우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군.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나?”
“물론입니다. 외부에 공표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뿐, 탈취당한 군수공장에 남아 있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료화면을 해킹해서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킬레우스가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다이크 역시 반격을 위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으고 있었다는 말인가.
머리를 잃었음에도 실무진들이 살아 있는 한, 기업의 힘은 아직 죽지 않았다.
떨어지는 주가와 주주들의 거센 항의까지는 막기 어렵겠지만, 다음 경영진을 선출하기 전에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노아는 레녹이 설명해 준 일련의 정보만으로 이미 상대를 특정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만약 반 님의 말씀대로 시정부 고위층 일부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면……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지금까지 정체를 특정하지 못했는지까지도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파노아가 버질의 허락도 없이 테이블 구석에 놓인 프로젝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파앗!!
순식간에 벽면에 떠오른 무수한 사람들의 사진들.
“저희가 최근에 입수한 보안회사 아킬레우스의 임원 조직도입니다. 그중 가장 오른쪽에 자리한 남자.”
검버섯이 핀 얼굴의 노인. 어딘가 인자한 인상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마드리치 오니온. 5년 전까지 발칸 시정부 대법원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법기관의 수장으로 아킬레우스에서 거금을 들여 명예직에 앉혔다고 하죠.”
파노아는 이 노인의 사진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정부와 아킬레우스가 손을 잡았다면, 이 남자가 이번 일의 배후에 서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마드리치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기억이 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버질이 말했다.
“도시가 세워지기도 전부터 살아왔던 권력가다.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기 전에는 회장님과도 힘싸움을 벌일 정도로 강력한 군령술사였다 하더군.”
“…….”
“맞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동한지라 시정부와 기업 양측에 인맥이 많고, 은퇴한 뒤에도 사법기관을 꽉 잡고 있다는 소문으로 유명하죠.”
프로젝터를 매만지던 파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희 회사를 향한 일련의 공작이 새로운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 남자 정도의 직위와 위치는 되어야 접근과 시행이 원활할 겁니다. 그리고 왜 그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까지도 설명이 가능하죠.”
마드리치 오니온이 수장으로 존재하던 사법기관 중에는 다양한 범죄자와 수배자를 가둬두는 수감시설 역시 존재하고 있다.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범죄자들에게 목줄을 채우고 자신의 수족으로 자유롭게 부리고 있는겁니다. 신상정보가 말소된 오래된 수감자들을 꺼내 사용하면 뒤탈도 없고 흔적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굉장히 과감한 추측이군. 꼬리가 밟혔다가는 마드리치 본인도 귀찮아질텐데.”
“하지만 지금까지 군수공장을 습격했던 테러범을 수차례 잡아들였음에도 아직까지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프로젝터를 거둬들인 파노아가 그대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등을 돌렸다.
“당장 여기서 근거없는 추측만을 논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추가로 확보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졸 걸릴 텐데 괜찮겠나? 지금 그쪽이 음지쪽에 만들어놓은 생산시설이 절반 넘게 파괴되었다 들었는데.”
전직 대법원장의 뒤를 캐는 일이다. 파노아의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를 모아서 행동에 나서려면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잃어버린 공장은 되찾고, 시설은 다시 지으면 그만입니다.”
칼같이 대답한 파노아가 순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번 일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습니다.”
“…….”
“두 분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드리치 오니온은 과거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도 직접 참여했던 극소수의 공식적인 관계자들 중 하나…… 이번 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을 확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파노아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버질의 집무실을 나섰다.
“추가적으로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철컥!!
바람처럼 사라진 파노아의 뒷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버질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단있는 사람이군. 왜 저 나이에 다이크라는 조직의 실세로서 행사하고 있는지 알만해.”
“절차를 신경쓰기 어려운 시점이겠지.”
재떨이를 가져다대고 연초에 불을 붙인 레녹이 대꾸했다.
“아킬레우스 역시 규모로는 다이크에 뒤쳐지지 않을만큼 거대한 기업으로 알고 있다. 이번 일의 주동자를 특정한 이상 가만히 있기 어려웠을 거야.”
“오호라, 그녀를 변호해 주는 건가?”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 네 말대로 기회가 닿을때 도와주면 확실하게 갚아줄 사람이다.”
당장 방위군 사태때만 하더라도 파노아가 직접 나서서 특수부대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었나.
빠르게 음지의 무기산업을 장악한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레녹을 향한 보은까지 잊지 않는 파노아의 능력은 레녹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때라면 모를까, 프로젝트의 내막을 캐낼 생각인 레녹의 입장에서 굳이 파노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회장은 언제쯤 볼 수 있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휙 돌린 레녹이 물었다.
“파노아 앞에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전쟁의 여파로 경지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너희 회장에 대한 소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말이야.”
“정말 눈치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군.”
쓴웃음을 지은 버질이 대꾸했다.
“네 말이 맞다. 마드리치가 건재하던 시절에 한차례 회장님과 맞붙었던 적이 있었지.”
“…….”
“회장님께서 그 케케묵은 노괴를 기억하지 못하실 리가 없으니, 그의 이름을 대고 연락을 하면 답을 주실 거다.”
“흠, 노괴라…… 그건 따지자면 너희 회장도-”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니야.”
슬쩍 말꼬리를 돌리는 레녹을 보며 버질이 콧김을 내뿜었다.
“대신 이쪽의 업무를 한가지 도와준다는 조건 하에, 회장님께 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지.”
“조건이라고?”
“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게 단지 프로젝트의 일 때문만은 아닐텐데. 개인적인 볼일이 있기 때문에 회장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
틀린 말은 아니다.
레녹은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를 만나서, 갈수록 상태가 이상해지고 있는 자신의 마안에 대한 개선방안을 문의할 생각이었으니까.
오랜시간동안 칩거하며 그 수준이 다소 추락했다고는 하다, 여전히 그녀는 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우월한 마안보유자들 중 하나.
칠채보의 마안을 보유한 그녀라면 레녹의 마안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질은 그런 레녹의 얼굴을 보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네 볼일이 뭔지 굳이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외이사로서 회장과 대면하려면, 회사일을 도왔다는 실적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일 하나 같이 해보자고.”
“……일단 듣고 생각하지.”
“넌 회사 업무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카르텔의 지휘계통에도 한 차례 격변이 있었다.”
팔짱을 낀 버질이 말했다.
“사장단의 자리를 두명 더 늘리고, 내부 이사진의 인재 영입 역시 적극적으로 진행 중이지. 네가 만났던 예리엔 역시 그 과정에서 고과를 인정받고 승진한 케이스다.”
새로 취임한 사장중에서 외부 인사가 있다고 하더니, 회장의 지령이 있었던 건가.
“문제는 그 과정에서 회장님의 지인을 통해 새롭게 취임한 3사장의 행동거지가 수상쩍기 그지없다는 거다.”
“…….”
“벌써부터 권력싸움에 뛰어들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 필요가 있지. 그런 의미에서 그쪽의 손을 좀 빌리고 싶군.”
그제서야 버질이 말하는 의도를 깨달은 레녹이 피식 웃었다.
“날 사장직을 노리는 경쟁자로 인식하게 만들어서 놈을 자극할 심산인가? 굉장히 음흉하기 그지없는 발상인걸.”
“3사장은 동대륙 출신이라 도시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다. 당연히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지. 이번 기회에 그 배후를 한번 뒤져봐야겠어.”
왜 버질이 굳이 레녹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레녹은 바로 몇 년 전에 1사장을 역임하던 배신자 파르덴 맥퀸을 직접 처단한 장본인.
3사장을 향해 시비를 거는 분위기로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혹시 모를 사태에서 새로운 사장을 처단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가 아닌가.
보아하니 버질은 레녹을 새로운 사장으로 만드는 일은 잠시 보류해둔 대신, 그를 카르텔의 배신자를 솎아내는 처형인으로 써먹을 생각으로 보였다.
“좋아. 일을 질질 끌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레녹이 카르텔을 이용해 먹는 동안은, 저쪽에서도 레녹의 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이해해야겠지.
차라리 버질처럼 대놓고 솔직하게 말해오는 편이 낫다.
물론 이런 버질의 태도조차 그동안 레녹을 상대하면서 그의 선호를 분석한 결과겠지만.
“회장한테 미리 이야기나 잘 해둬.”
사장실의 문고리를 잡은 레녹이 버질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껏 조건을 들어줬는데 올리비에라가 거절하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플 테니까.”
쓴웃음을 지은 버질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보지.”
* * *
제니의 전화에 레녹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공직자 중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편에 속하는 것 같더군.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주체가 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
[……빌어먹을, 이건 너무 거물이 걸린 것 같은데.]“아는 사람인가?”
[아니. 하지만 블랙컨슈머를 잇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계할 능력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알지.]제니가 투덜거렸다.
[문제는 그만한 노괴가 아킬레우스 정도의 보안회사랑 손을 잡고 일을 시작했다면 불길한 생각밖에 안 든다는 거야.]“새로운 프로젝트가 금제율령을 대체하기 위한 통제의 일환이 아닐까 말인가?”
[…….]대답하지 않는 제니의 반응에 레녹이 웃었다.
“버질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아킬레우스가 깊게 엮여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뻔한 일이었지.”
금제율령이 묶어두고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양지에서 율령의 존재에 합의했던 초인들뿐.
음지와 양지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통제력을 만들어서, 도시 전체를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몰아넣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수천만 명이 살아가는 이 도시의 모든 생명과 자산을 한데 모아서 발악한다면, 누군가는 승천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더라도 레녹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직히 버질이 이번 일에 끼어드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그 흡혈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나?”
[업무능력은 확실하지만, 아인종답게 차가운 피가 흐르는 놈이야. 놈이 이번 일을 물었다는 것 자체가 다이크 쪽에도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말이겠지만…… 아니, 그냥 가정이니까 잊어버려.]너스레를 떠는 제니의 말에도 레녹은 칼같이 잘라서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 그래?]“버질을 마냥 신뢰하지 말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다만 올리비에라를 만나기 위해서는 조건을 어느 정도 들어줘야 할 거야. 그것까지는 피할 수 없을 것 같군.”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유통사업을 절반 이상 그쪽 자회사에 넘기지 않았던 거긴 한데…….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살짝 한숨을 내쉰 제니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난 새로 들어온 그 3사장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있을게.]“그래. 가능한 빠르게 부탁하지.”
레녹은 힐끗 시선을 들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위 풍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친구와 한판 붙어야 상황이 정리될 것 같으니까.”
뚝.
전화를 끊은 레녹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저녁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노아가 직접 마드리치 오니온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겠다고 나선 이상,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그 사이 레녹은 일정에 쫓겨서 밀렸던 개인적인 볼일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복잡한 외장결계와 내부 보안장치를 뚫고 현관문을 열자, 발밑으로 무언가가 우수수 떨어져 흘러나왔다.
촤라라락!!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뭉치.
레녹은 황급하게 그것을 주워들고 문을 닫자마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그러게 디스플레이를 쓰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레녹의 품 안에서 튀어나온 다비가 종이 뭉치 위에서 폴짝거리며 말했다.
[꼭 적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 건 마스터였잖아요. 전뇌정령의 마스터가 이렇게 아날로그를 좋아해서야. 흥.]정령의 투정을 들은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결계술은 직접 손으로 그려보고 공부하지 않으면 효율이 나오지 않는 분야니까. 디스플레이에 그리면 제대로 그 전개과정을 관찰하기도 어렵거든.”
[원 하나도 삐뚤빼뚤하게 끄적이는 마스터의 손으로 말인가요?]“…….”
[사시으 마해으부니데에.]한참 동안 전뇌정령의 양쪽 볼을 쭉 잡아늘린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현관 신발장이 위치한 곳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종이 더미.
연구실에 다 담아두지도 못한 채 맨션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레녹이 진둔의 결계술을 연습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자성영역의 부분전개……. 진둔의 결계술에 숙달되면 틀림없이 닿을 수 있는 힘이다.”
삐뚤빼뚤한 결계진을 들어 올린 레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부터 그것을 위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