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83
약먹는 천재마법사 483화
바다를 달리는 대지(5)
품 안에서 요동치는 펜터렉트의 감촉.
눈앞에서 레녹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도의 존재.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을 눈치채고 곳곳에서 모여드는 시선들.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흔들리는 피오와 래퍼드의 기척을 느끼며 레녹은 생각에 잠겼다.
‘꼬였군.’
여기서 어떤 식으로 대처한들 들키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레녹이든 다른 주시자들이든, 상황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에 후회하거나 오래 미련을 가지는 대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레녹의 품 안에서 요동치는 펜터렉트에 도박을 한번 걸어볼 것인가에 대해서.
‘아티팩트는 만능이 아니다. 그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마법과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서조차, 아티팩트는 결국 도구일 뿐이다.
제아무리 강력한 아이템이나 유물급 아티팩트라 할지라도, 특정한 목적성이나 방향성을 기반으로 설계된 물건.
설계 방향성에 적합한 목적과 상황 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효율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레녹이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찰나의 순간 고민에 빠진 것은, 펜터렉트를 처음 사용했을 때 이 물건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형편 좋게 막강한 아티팩트로 변해 주위를 찍어누르는 식이 아니다.
그 순간에 생명유지장치의 형태로 변해 레녹의 손에 쥐어진 펜터렉트의 변형이, 과연 정말로 우연에 불과한 변수였을까.
단순히 그 순간을 무마하기 위해 변형되었다기에는 펜터렉트의 능력은 굉장히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용했었고.
레녹은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담아두었으니까.
무엇보다 레녹 자신부터가, 행운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도 자이프? 지금 거기서 뭘 하는 겁니까?”
“빨리 단상으로 돌아오세요. 나이드리 대주교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란이 슬슬 단상 위에까지 전해졌는지, 의자 위에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대행자들이 이곳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다소 오만한 언동으로 자이프라 불린 사도를 재촉하는 몇몇 대행자들.
무려 사도에게 직설적인 말을 내뱉을 뿐만 아니라, 본신의 실력도 무려 7레벨 이상으로 보이는 실력자들이다.
아마 교단의 각 지부를 대표하는 강자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이들이 아닐까.
대행자들 중에서도 유독 존재감이 강한 안대를 쓴 주교와, 뚱뚱한 사제가 재촉했음에도 자이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만큼 레녹에게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좋아.”
후드 끝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눈앞의 사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레녹의 손이 천천히 사제복 안쪽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요동치는 펜터렉트를 움켜쥔다.
아티팩트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피오에게 몰래 신호를 보냈다.
혹시라도 펜터렉트의 능력이 실패 이상의 결과를 낳는다면 그 즉시 피오의 변이능력을 통해 시선을 끌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
단순히 펜터렉트의 능력에 온전히 기대기보다는, 확실한 대안을 만들어두고 그 전에 먼저 도박수를 던진다.
그렇게 생각한 레녹이 침을 꿀꺽 삼킨 뒤, 그대로 변형이 끝난 펜터렉트를 확인하기도 전.
자이프가 느닷없이 레녹의 사제복 앞섶을 움켜쥐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홱!!
전투를 상정하지 않은 탓에 반응이 늦었다.
레녹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펜터렉트의 변형체가, 두 사람의 시야에 거의 동시에 들어오고.
자이프와 레녹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건?”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명패.
아무런 힘도 존재하지 않는, 녹이 슬어서 이제는 빛이 바래버린 이름표에 불과하다.
명패 끄트머리에는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을법한 글씨로, ‘마르티네스’라 적혀 있을 뿐.
생각보다 평범한 물건으로 변한 펜터렉트의 모습에 레녹은 살짝 고민에 잠겼지만, 자이프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
마치 지금 이 자리에서 못볼 것을 보았다는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명패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사도의 모습.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레녹과 명패를 번갈아 바라보며,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것처럼 시선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자이프!!”
“……가겠다.”
결착이 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레녹에게 작은 티켓을 하나 휙 던지고 돌아서는 자이프의 모습.
레녹은 그것을 쥔 채로 물끄러미 자이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레녹을 추궁하던 그 모양새가 이상할 정도로 미련이 없어진 듯한 태도.
성큼성큼 좌중을 헤치고 걸어 단상 위로 올라선 그에게 대행자들이 뭐라 쏘아붙이지만.
자이프는 착각했다, 외부인인 모양이다 하는 말로 흘려넘기고 있었다.
나이드리 대주교의 주도 아래 시작된 예배.
레녹은 단상위에서 조용히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엿듣다가, 조용히 근처에서 그를 지켜보는 피오와 래퍼드에게 눈짓했다.
조용히 광장을 빠져나온 세 사람이 빠르게 거리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거의 무조건 사달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일이 이상하게 됐군.”
“무슨 수를 썼길래 교단의 사도를 속여넘긴 거지?”
“글세…….”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이 적힌 교단의 명패를 내려다보았다.
펜터렉트가 일전에 모습을 바꾸어 레녹에게 도움이 되었던 방식,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우연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을 갑자기 무마시킨, 혹은 헤쳐나가게 만든 열쇠가 지금 이 명패와 이름 안에 있다는 말일 터.
“마르티네스…….”
교단의 인물이자,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누군가.
그 이름이 레녹의 기억속에 아직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이겠지.
역시, 펜터렉트가 레녹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생전 듣도보도 못했던 생경하거나 초월적인 아티팩트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레녹 자신의 기억이나, 상황을 되짚어서 철저하게 지금의 구도를 유리하게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단서를-
“에반?”
“……미안하군. 잠깐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레녹은 그렇게 말한 뒤 인파 사이에 섞여 걸으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말을 흘렸다.
“미끼가 필요해. 준비할 수 있겠나?”
“어, 내가 준비할게. 변이술식을 사용하면 20초 정도면 네 모습으로……”
“아니, 너희 둘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누군가를 내 모습으로 만들어야한다.”
“뭐?”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피오를 두고, 레녹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도 자이프가 레녹을 두고 물러난 뒤로 단상의 대행자들 중 누구도 추가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행자들이 거의 틀림없이 레녹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했다.
어쩌면 지금 거리에서 레녹과 피오, 래퍼드가 함께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 있을수도 있는 상황.
이 시점에서 피오가 사라지고 에반의 모습만 대신 나타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
피오와 래퍼드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레녹을 대신할 미끼가 필요했다.
“…….”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준비하지. 마력이 좀 많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환술을 걸어 넣으면…….”
“아니. 내가 하겠다.”
레녹의 발치에서 혀를 내밀고 걷고 있던 래퍼드가 말했다.
“방법이 있어. 잠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지.”
한산한 골목 아래쪽에 위치한 철도길.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듯 버려진 길 위에는 온갖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개머리 거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래퍼드가 수인을 맺는 것과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희끄무레한 광채.
우웅……!!
등 뒤에서 내려앉은 광채가 천천히 인간의 형태로 변해 세 사람의 앞에 내려선다.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훔친 래퍼드가 수인을 유지한 채로 피오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일부러 외견을 고정하지 않았으니, 네 술식으로 에반의 변이 정보를 뒤집어씌워라.”
“자, 잠깐만……. 이게 도대체 뭔데?”
피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인간 형태의 광채를 가리켰다.
“이렇게 마력밀집도가 높은 뭔가에다가 술식을 뒤집어씌워도 되는 거, 맞아?”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힘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레녹 역시 다소 신기한 기색으로 그 형상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화신(化身)이군.”
“기억하고 있었나?”
“항하사미궁에 돌입하기 직전의 전투에서 네가 보여준 적이 있었지.”
라피스가 불러낸 부유섬에서 레녹과 래퍼드가 추격자를 쫓아냈던 소규모 전투.
그때 래퍼드는 원시신앙을 통한 생츄어리와 화신체 강림을 통해 접근전과 집단전 양면에서 상당한 위용을 과시하지 않았던가.
화신(化身). 다른 말로는 아바타(Avatar).
마법과 같은 체계술식보다는, 영체를 다루는 영력에 가까운 힘이지만 그 유용성과 강력함에 대해선 널리 알려져 있다.
단순히 술자의 분신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술식적인 의미에서 자아의 표상에 가까운 개념으로.
술자 자신이면서도 자신과는 또 다른 자아의 구현이라 정의 내리기도 하는 복잡한 의미를 담은 술식.
레녹 역시 화신의 구현을 잠깐 따라해 보기도 했었지만, 미궁 당시에는 영체를 다루는 감각이 지나치게 흐릿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래퍼드는 바로 그런 자신의 화신을, 레녹을 대신해 미끼로 삼을 더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임의로 불러내었던 것이다.
“으음, 그렇군……. 아주 흥미로운데…….”
피오가 변이술식을 입힐 틈도 주지 않고 화신의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는 레녹의 모습.
그 눈에서는 전에 없던 열의가 크게 느껴질 정도다.
“에반?”
“물리력보다는 술식적으로 보조와 협응, 공명과 상응의 의미가 더 강한 느낌인가……. 오히려 더 좋아. 이런 식이라면 여러모로 굉장히 유용하겠는걸…….”
영체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마드리치 오니온과의 전투를 통해 군령술에 대해 깊게 이해한 지금은 다르다.
래퍼드의 원시신앙을 통해 구현된 이 화신이 얼마나 술식적으로 가치가 높고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레녹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사태를 잠시 잊고 화신의 원리에 대해 몰두하게 할 만큼.
한동안 화신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레녹이 래퍼드를 향해 시선을 홱 돌렸다.
“이런 느낌, 사용하려면 그쪽 종교를 꼭 믿어야만 하나?”
“……그럴 리가 있겠나.”
래퍼드가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화신을 구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재능을 갈고닦아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뿐. 그 방법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
“행여나 이게 탐이나 믿지도 않는 신앙에 발을 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겠군. 오히려 화를 입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나한테 묻는다 한들…….”
래퍼드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그나마 방법을 찾자면 요르타에 방문해 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곳에는 화신체를 아예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술사들이 한가득일 텐데.”
“좋아.”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둬야겠군.”
단순한 분신이라기보다는, 술식적인 협응존재에 가까운 개념이지만.
잘만 조정해서 사용한다면 어설프게나마 1인 2역 노릇을 가능케 만들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좋아. 그럼 래퍼드의 화신체에 변이술식 덮어씌우면 되는 거지?”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킨 피오가 양손을 내밀었다.
“빌어먹을, 나도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거에 변이를 써보긴 처음인데…….”
파아앗!!
피오의 긴장 섞인 말과는 달리, 그의 손에서 뻗어나온 술식이 그대로 화신체의 몸에 덮어 씌워지며 외견을 그대로 바꿔낸다.
화신체의 몸속에서 빛이 사그라들며, 자연스럽게 그 외견과 체격이 에반의 것으로 변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두 발을 딛고 선 채로 물끄러미 주변을 바라보는 에반의 모습.
피오조차 긴장한 기색으로 주춤거렸다.
“토, 통했나……?”
“화신체는 마력감응과 마나수용능력이 굉장히 탁월하다. 네 술식에 반발할 가능성은 낮았지.”
래퍼드 역시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기한 기색으로 자신의 화신을 살폈다.
“다만 피오 네가 변했을 때처럼 급격한 컨디션의 저하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군……. 변이 데이터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던 건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오히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덜 민감한 게 아닐까.”
“일리 있는 추론이군.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으니, 너희는 이 화신과 같이 거리로 나가서-”
그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화신체가 느닷없이 피를 토해냈다.
“쿨럭!!”
한 손으로 입을 가렸음에도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줄줄 새어 나온다.
기침을 멈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벌벌 떨기 시작하는 화신체의 모습.
모두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커허억…….!! 크학!!”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손을 머리 위로 내뻗는 모습이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화신체가 느닷없이 피를 토하고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면,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
경악 섞인 눈으로 레녹을 돌아보는 피오와 래퍼드의 모습.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레녹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변이 술식이……. 오류가 좀 심한 모양이군.”
“…….”
먼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녹의 말.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 말에 섣불리 동의하지 못했다.
* * *
레녹은 피오와 래퍼드, 에반의 모습으로 변장한 화신을 떠나보내고 혼자 철도길 사이에 남았다.
화신에 담긴 마력을 대폭 줄여서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다면 곤란했겠지.
피오가 직접 의태했을 때보다 화신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에는 틀림없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거리 밖에서는 에반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제대로 비춰지고 있을테니,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힐끗 철도길의 가장 끝자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쌔애액……!!
방금 전까지 인기척이라고는 일체 존재하지 않던 고요한 철도길의 끝.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레녹의 시야를 잠깐 가린 그사이, 어느새 장년 남성의 모습이 저편에 서 있다.
단상 위에서 레녹의 존재를 눈치채고 추궁했던 사도 자이프.
광장에서는 레녹을 모른 체하고 보내주었던 그 남자가, 지금 이렇게 다시 레녹을 찾아와 마주 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이프가 입을 열었다.
“용케 감시망을 피했군. 그쪽을 눈여겨보는 대행자들이 틀림없이 있었을텐데.”
“처음부터 그걸 요구한 것 아니었나?”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 쥐고 있던 작은 티켓을 흔들었다.
자이프가 레녹을 놓아주기 직전에 던지듯이 쥐여주었던 티켓.
그것은 진작 사라진 이 철도역의 기찻길에서만 사용되는 낡은 티켓이었던 것이다.
눈앞의 사도가 이 곳을 약속장소로 잡고 싶어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남은 것은 그의 내면에 서린 작은 의심을 해소해 주는 것 뿐이다.
품안에서 명패를 꺼내드는 것과 함께 자이프가 흠칫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걸 보고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교단의 마르티네스. 그 이름에 대해 알고 있다.”
침묵하던 자이프가 어렵사리 말했다.
“거대도시 발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사도강림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본성에도 파다했었지.”
“잘 알고 있군.”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네놈이 그 명패를 손에 지니고 있는 거지?”
자이프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마르티네스는 정말 선정의식을 거치지 않고 사도가 되는 데에 성공했단 말인가?”
“…….”
레녹은 대답하기에 앞서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을 생각하면 그 역시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펜터렉트가 하필 이 명패의 모습으로 바뀐 이유.
자이프가 이 명패를 보고 감출 수 없을 만큼 크게 동요했던 이유.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레녹에게 있다. 남은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일 뿐.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침없이 품 안에서 축소시켜 두었던 한가지 물건을 자이프의 앞에 꺼내놓았다.
쿠우웅……!!
묵직한 굉음을 흘리며 떨어져 내린 것은 레녹의 키를 뛰어넘는 거대한 형상의 갑각방패.
실로 단단하면서도 무거운 중량으로 인해 레녹이 전투에서 애용하는 병기들 중 하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갑각방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윌터 마르티네스가 사도로 변해 남긴 잔해물.
그리고 같은 사도인 자이프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겠지.
“이건……!!”
“내 이름은 에반 마르티네스.”
두 눈을 부릅뜨고 한발 앞으로 다가오는 자이프를 보며 레녹이 웃었다.
자이프의 내면에 어린 의심에 쐐기를 꽂아주는 한걸음.
이 모든 연극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한마디면 충분했다.
“같은 사도로서, 대주교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