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13
약먹는 천재마법사 513화
저격수의 진가(3)
완전히 박살 난 극장 지붕 위에서 비산하는 신상의 팔 두 짝.
적어도 마이야가 방금 이벨린이 쏘아낸 마지막 화살을 쳐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신상이 훼손되었다면 박사의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박사가 생각했던 계획은 결산을 통해 신상에 축적된 힘을 억지로 끌어내 공간전이 게이트를 여는 것.
이지스의 대원들과 외인부대의 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상 쓸데없이 그들과 싸우는 데 힘을 빼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발을 빼는 게 합리적이다.
그것을 위해 신상을 보호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극장 밖에 나와 싸우고 있었지만, 이벨린의 저격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소우주 관성편향을 담아 쏘아내는 대궁저격. 마력과 심상을 섞어 담아낸 일발은 정면에서 받아내기에는 과분한 위력이 담겨 있던 것이다.
신상의 팔이 두 개나 박살 난 이상 박사의 계획이 원래대로 진행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터.
가면 안쪽으로 흔들리던 레녹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전부 죽이는 건 불가능해. 저들도 그걸 알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 테지.’
레녹이 전력을 발휘한다면 오늘 이 도시에서 이지스의 대원 대부분을 몰살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한다면 레녹의 본신술식은 물론이고 빅터의 정체 역시 어느 정도 밝혀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겠지.
지금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연달아 저격을 때려 박는 이벨린이나, 또 다른 외인전력이라는 초인은 틀림없이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다른 멤버들 역시 그것을 알기에 전력을 발휘하는 대신 상황에 묻어가려 했던 것이 아니었나.
도시 밖에서 움직이지 않는 외인부대의 존재만으로, 이지스를 상대하는데 있어 힘을 쓰는 일에 신중을 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들뿐만이 적이 아니고, 전면전을 벌인다면 외인전력까지도 맞상대를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
문제는 레녹과 소류뿐만이 아니라, 이지스의 대원들 역시 아예 그것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야, 다들 진정해라] [브로큰 애로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몰아붙여!]직전의 격전으로 레녹을 쉽게 공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대원들이, 노골적으로 시간을 끄는 소모전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이벨린이 후방에서 쏘아낸 저격이 판데모니엄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 역시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쉬이이익!!
얼어붙은 강물과 얼음 파편 위로는 반쯤 냉기에 녹아든 소류와 흑색의 바이저가 쉴 새 없이 격돌하며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다.
얼굴의 반쪽이 새하얀 해골의 형상으로 변했다가 돌아오는 소류와 맨 손으로 냉기를 쥐어 부숴버리면서도 흑마법을 연달아 터트리는 흑색 바이저.
레녹이 그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고 재차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그 순간.
키이잉……!!
머리 뒤쪽에서 레녹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기묘한 인력이 느껴졌다.
“…….”
대상지정 저항으로 거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걸린 시점에서 그 여부를 결정해야 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닌 술식.
하물며 이 술식이 시작된 방향은 이지스의 다른 대원들이 아니라 박사가 위치한 극장 쪽 방향이다.
레녹은 그것을 인지하고 곧바로 술식의 흐름에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파앗!!
두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전에 레녹의 몸이 통째로 전이되며 극장 메인 홀에 다시 나타난다.
전신에서 냉기를 풀풀 흘리면서 걸어들어오는 소류와 그 밖에도 막 전투중에 있었는지 한창 살기등등한 마력을 흩뿌리는 다른 멤버들.
서로를 보며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두 개의 팔이 떨어져 나간 신상 위에 앉아 있던 박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불렀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지……?”
박사가 시선을 돌렸다.
“방금의 저격으로 신상이 파손되면서 게이트를 여는 일은 요원해졌다. 대신 남아 있는 힘으로 너희들을 극장 안으로 공간전이시키는 데에 사용했지.”
“쓸데없는 짓을 했군.”
소류가 차가운 표정으로 박사를 올려다보며 일축했다.
“잠깐 시간을 버는 정도에 그칠거다. 이쪽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밀고 들어올게 뻔한데, 무슨 생각이지?”
“바로 그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거든.”
박사가 그렇게 말하며 털뭉치를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앉아 있던 거대한 이면팔비의 신상이 그대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모래알처럼 그대로 흩날려 무너져내리는 신상의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열 개의 보석.
숫자를 생각하면 아마 신상의 눈동자를 구성하던 수정체 열 개를 의미하겠지.
박사는 그것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멤버들에게 골고루 굴려주었다.
여덟명의 멤버들에게 각자 하나씩, 그리고 마이야에게는 추가로 두 개 더.
“신상이 파손되기 시작한 순간 게이트를 여는 일은 포기하고, 이번 결산에 사용된 내부 데이터를 압축하고 백업하여 수정체에 나눠 담았다.”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레녹이 쥔 수정체를 향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10개의 수정체 중에서 4개만 멀쩡하면 이번 결산의 인과를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어. 잘 부탁하지.”
“…….”
그제서야 박사가 무슨 이유로 자신들에게 이 수정체를 맡겼는지 깨달은 멤버들의 입가에 헛웃음이 맺혔다.
이벨린의 저격을 허용한 순간부터 박사는 게이트를 여는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결산을 통해 입력된 데이터들을 보존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상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구세계의 인과를 데이터 형식으로 정리해 입출력을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동안 수집된 구세계의 인과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이번 결산에서 새롭게 갱신된 정보들은 달라.”
털뭉치 안으로 짐승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제대로 동조가 끝나기 전까지는 반드시 원본 데이터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희들은 그 수정체를 각자 들고, 이 도시를 알아서 탈출해 주면 된다.”
“흐흐, 내 알 바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되는 일 아니냐.”
혈노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칼날을 휘휘 돌렸다.
박사가 곧바로 대답했다.
“상대의 전력이 강한 만큼 이쪽의 능력이 드러나기 쉬워진다. 손해 보는 전투에 어울려줄 이유가 있나?”
애초에 이번 결산 자체가 전투를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닌 만큼, 교전이 이어질수록 신상의 파손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박사 쪽이다.
하물며 판데모니엄의 멤버들 대부분은 조직력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개인주의자들이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신상을 지키는 일에 가담시키기보단, 제 몸을 건사하는 수준에서 수정체 정도만 챙겨달라 부탁하는 게 합리적이라 박사는 일찌감치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혈노는 그 말에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한참 신나게 싸우고 죽이고 맛보고 있었는데, 쓸데없이 흥을 끊더니 하는 말이 그것뿐인가……?”
손에 쥐여쥔 수정체를 떨어뜨렸다.
퉁!!
부서지는 대신 데구르르 굴러 발치에 덜어지는 수정체.
“이걸 여기에 그냥 버리고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 달라지는 게 있겠나.”
박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음 결산에는 유감스럽지만 함께할 수 없게 되겠지.”
“…….”
얌전히 수정체를 주워들고 넝마가 된 옷으로 쓱쓱 닦아내는 혈노.
피에 미친 노괴도 결산에 참가해 떡고물을 받아먹지 못하는 건 아까운 모양이었다.
“대충 이해했다면 여기서 결산을 한발 일찍 마무리하도록 하지. 추가로 더 할 말이 있나?”
“여기 모인 전원에게 수정체를 분배하는 건 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다만…….”
꺽다리 인형, 체비엔이 슬쩍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부상자가 있지 않나?”
“아니, 신경 쓰지 마라!!”
버논이 살짝 파리해진 안색으로 술을 머금고, 이내 관통당한 어깨 부위에 퉤 뱉었다.
치이익……!!
동시에 어깨 부근에서 증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지혈되기 시작하는 상처의 모습.
단순히 알코올로 인한 소독효과라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빠르고 기민한 반응이다.
‘술을 매개로 하는 소독과 지혈 술식인가.’
버논의 언동을 생각해 보면 그가 다루는 능력은 술을 통해 파생되는 효과들을 다루는 힘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 명까지 수정체를 골라 쥐고 준비를 마친 모습을 보며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난 여기까지군.”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선 마이야의 모습을 슬쩍 올려다본 박사가 웃었다.
“오늘 결산에는 무척 흥미로운 사람들이 찾아왔고, 묻고 싶은 것도 아직 한참 남아 있지만…… 추후의 즐거움으로 미뤄둘 수밖에.”
“…….”
“이만 실례하지.”
그 말과 동시에 박사의 머리 위에 마이야의 손날이 떨어져 내렸다.
으드득!!
외마디 비명도 없이 그 자리에서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지는 털뭉치.
레녹은 일전에 항하사미궁에서도 이와 같은 풍경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마이야가 박사의 의사를 대변하는 생명을 죽임으로써 금술을 발동해 미궁 레이스의 상황을 한번 뒤집으려 한 적이 있지 않았었나.
만약 박사가 그때와 같은 방식을 사용해 무언가 도움을 줄 생각이라면, 보다 가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터.
그 대답은 마이야의 입에서부터 나왔다.
“바이루츠 서북부와 남서부 측 도개교와 사찰 입구는 피해라. 점성술에 흉조가 가득 든 위치는 그 두 위치가 가장 강력하군.”
“…….”
“다른 방면 아무 곳으로나 탈출해서 몸을 피하던가 알아서 해라. 이게 박사의 마지막 전언이다.”
“그건 방금 마이야 당신이 방금 한 일로 알아낸 것인가?”
“글쎄.”
마이야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끌리면 곧바로 마르시아의 포격이 날아들기 시작할 거다. 움직여.”
서늘한 마이야의 시선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레녹이 물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뒷수습이라도 할 생각인가?”
“말같지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단칼에 레녹의 말을 쳐낸 마이야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 화살을 쏘아내는 녀석을 보고 갈지, 잠깐 고민하고 있던 것 뿐이다.”
“아는 사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군.”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야.”
싸늘한 마이야의 대답에 레녹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두 도시의 공무원들끼리 안면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
날이 선 마이야의 눈짓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레녹이 말했다.
마이야의 입가에 날카로운 조소가 맺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빨리 지껄여봐.”
“현궁의 저격을 흐트러뜨릴 방도가 있다.”
레녹이 다른 멤버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계획에 따를 생각이 있는 사람은 남아서 기다려. 사브리나, 언령술로 드루이드의 부적 같은 물건을 몇 개 만들어줄 수 있나?”
“어렵지는 않지. 어떻게 할 생각인데?”
사브리나의 질문에 레녹이 웃었다.
“위성도시 전체의 교통편을 잠깐 움직일 생각이다.”
* * *
레녹은 곧바로 극장 뒤편에 나 있는 통로를 통해 옆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무너진 터미널.
아마 위성도시를 설계할 당시부터 문화생활과 교통권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겠지.
레녹은 망설이지 않고 터미널 동력실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한참 전에 끊어진 접합선을 대충 마력으로 연결했다.
“뭐 이렇게 끊어진 부분이 많은 거지?”
[전선의 재료들은 뭉텅이로 잘라서 팔면 돈이 되니까요. 옥션에도 비슷한 장물이 많아요. 다 그런 식으로 도난당한 거겠죠.]“연결 부위는 그렇다 쳐도, 소실된 내부 부품은 손대는 것도 어렵겠군. 수복할 수 있겠어?”
[저를 뭘로 보는 거예요?]투덜거린 다비가 레녹의 품 안에서 폴짝 뛰어내려 곧바로 꼬리를 활짝 펼쳤다.
네갈래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과 동시에 전뇌정령의 몸에서 마력이 발산.
그대로 끊어진 동력실에 흘러들어가며 망가진 시스템을 순식간에 수복시켰다.
우우웅!!!
먼지 쌓인 계기판에 불빛이 들어오고, 모니터가 하나둘씩 켜지며 수십 대의 카메라 화면을 비추기 시작한다.
낡은 터미널 지하 아래쪽에 위치한 수십 대의 철도 아래쪽을 비추는 카메라.
드문드문 꺼져서 제대로 외견을 알아보기 어려운 철도 카메라 아래쪽에는 한참 전에 운행을 멈춘 열차 수십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스템 수복률 34%. 동력 접합 78%. 정상운행 불가 판정. 강제로 시스템을 돌려서 비상운행모드로 들어갑니다.]왜앵왜앵!!
다비가 그렇게 말하며 시스템을 조작하는 사이, 레녹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해당 에너지를 전력으로 치환했다.
파지지직……!!!
동력부 내부 엔진 시설 안쪽에 그대로 필요한 전력을 대량으로 공급.
비상운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을 억지로 시스템 안쪽에 때려 박고, 철로 위에 놓인 열차들을 강제로 작동하게 만든다.
[현재 운행 정지 위치를 기준으로 시그널 발동. 도시 외곽을 향해 전력 탈출 운행 시작.]멈춰 있던 수십 대의 열차들이 일제히 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놓여 있는 철도 앞으로 튀어나간다.
서로 부딫히며 으깨지고 뭉개지면서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수십대가 넘는 열차들이 일제히 지하 철도 아래쪽에서 솟아올라 지상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선다.
두두두두두두!!!
극장 근처 터미널을 중심으로 내달려 순식간에 위성도시 곳곳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열차들의 행렬.
메인 홀에서 버티고 있던 다른 멤버들이 살짝 놀란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빅터가 한 일이지?”
“시선을 분산시킨다는게 저런 의미였군.”
“알아서 하나씩 잡아타라는 거였나?”
굳이 열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저렇게 많은 열차들이 동시에 운행을 시작한 것만으로 적지 않은 화살이 분산될 터.
도시 외곽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열차들의 존재를 이지스의 대원들이나 이벨린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억지로 혼란을 만들어 신경을 분산시키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레녹은 근처 터미널의 망가진 열차 운행 시스템을 잠깐 수복시키는 것만으로, 이 자리에서 수월하게 몸을 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대처가 자연스러운데…….”
“속을 알 수 없는 자식이다. 함정일 가능성도 부정할수는 없어.”
물론 체비엔이나 로기어 같은 이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먼저 의심하고 나섰지만.
머리 위에서 연달아 쏟아지는 화살비를 두고도 오래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 버논을 저격했던 화살처럼 창에 버금가는 크기와 위력은 없지만, 팔뚝만 한 화살을 끊임없이 쏘아내며 운신 자체를 방해하고 있다.
위력이 큰 저격 한 발, 한 발 대신 광범위한 투사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대 역시 시간이 끌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몰라, 씨발. 난 먼저 간다!!”
“버논.”
“선택은 자기 몫이지, 거래는 끝났어!! 멍청한 놈들아, 열심히 고민이나 해봐라. 하하핫!!”
부상당한 어깨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트린 버논이 그대로 극장 지붕에 올라타, 멀어지는 열차 끝자락에 올라탔다.
껄껄 웃으며 술병을 들이키고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
동시에 사브리나가 작성한 언령술의 부적을 움켜쥐자 그 기척이 빠르게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기척을 한없이 주위에 동화시키는 드루이드의 부적.
레녹이 그 물건을 다량으로 만들어달라 요청한 이유를 버논 역시 곧바로 이해했던 것이다.
사브리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먹은 듯 피식 웃으며 곧바로 폴짝 다른 열차에 올라탔다.
“그래, 뭐 이제 와서 믿고 안 믿고가 어딨어. 다들 나중에 봐!”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
“한심하군…….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려 들다니…….”
“핫, 기다리라고 했던 것 치고는 지극히 수상한 방법이군. 난 따로 가겠어.”
“흐흐, 쓰레기들을 더 죽이다 가는 건 상관없겠지……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레녹의 안배에 의지하지 않고 사라지는 이들도 있다.
어찌 됐든 열차가 유발하는 혼란 사이를 틈타 목적을 이루려는 것은 마찬가지.
남아 있던 것은 레녹과 소류, 그리고 마이야 셋뿐이다.
소류는 차가운 시선으로 터미널을 작동시키고 돌아온 레녹을 돌아보았다.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 이런 일에 꽤 익숙해 보이는데, 내 생각이 틀린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레녹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지만, 소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행동한 이유를 짐작하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잠깐 고개를 기울였을 뿐.
“혼란을 일으키는 작업과 방식에 익숙한 술사라…… 레딩 혁명군이나 테러게이드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을 텐데. 카이우슈 때도 느꼈지만, 생각의 방향성이나 스케일은 확실히 특이한 편이군.”
“…….”
“효율적인 루트가 있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먼저 가겠다.”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사라진 소류가 또 다른 열차 위에 올라타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마이야가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느꼈지만, 이상한 놈이군.”
“……저 얼음쟁이 말인가?”
“아니, 너 말이다.”
마이야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너, 항하사미궁에서 날 만난 적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