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634
약먹는 천재마법사 634화
해저장벽 심성관(3)
덜컹, 덜컹!!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
좌우로 보이는 벨트의 폭은 십수 미터가 넘고, 그 위에 얹힌 채 이동하고 있는 온갖 물건들이 보인다.
벨트 위에 쓰러진 채 멍하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레녹이 천천히 일어섰다.
초점을 되찾은 레녹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체내 시간으로는 5초 남짓 흘렀을 뿐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아니었군.’
경지에 오른 고위계 마법사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을 때도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간의 개념이 상대적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생체반응 몇 가지를 기준점으로 정해두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계산할 수 있기 때문.
레녹이 해저장벽을 열자마자 의식을 잃고, 이 컨베이어 벨트 위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장벽 안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시간이 한참 지나기라도 한 것마냥,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공간에 표류된 것처럼 쓰러져 있었을 뿐.
찰칵!!
레녹과 같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채 이동하던 어느 이름 모를 권총을 잡아챘다.
‘마력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기는 하지만 탄창이 뭉개졌고, 총구는 접혀 있다. 회생불가. 완전히 망가진 물건이군.’
그뿐만이 아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다른 장비와 아이템 역시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하자가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간혹 멀쩡한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벨트에서 밀려 떨어지는 다른 장물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쿠웅!!
컨베이어 벨트 뒤쪽에서 무언가 떨어져내리는 굉음에 고개를 돌린 레녹이,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장물과 망가진 장비들, 아이템의 산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거꾸로 틀어박힌 탐사선의 형상이 눈에 보였기 때문.
레녹은 곧바로 그쪽으로 걸어 탐사선의 상태를 살폈다.
“아르마델타 합금의 마모가 생각보다 덜하군. 한번 정도는 더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저장벽에 진입할 당시부터 탈출방법을 생각해 두었지만, 탐사선이 멀쩡하다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진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탐사선의 형상을 수축시켜 품 안에 갈무리했다.
탐사선의 모습을 거둬들린 레녹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으음…….”
크기를 알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유리공동.
공동 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너머로,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는 옅은 푸른 빛의 투명한 바다가 넘실거리고, 수풀이 우거진 야자수와 온갖 나무들이 얽힌 숲의 모습이 보인다.
마도공학의 낙원. 기계문명의 정수라고 불리는 마키나의 심처.
그 중 가장 핵심중의 핵심 지역이라 불리는 해저장벽 안의 풍경은, 의외로 그 무엇보다 마도공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장소였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개입이나 조치 없이, 순수하게 자연의 풍경이 보존되어 있는 듯한 모습.
심성관을 찾으려면 컨베이어 벨트가 이동하는 방향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터.
위이잉!!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벨트를 거꾸로 걸어 레녹은 공동을 거꾸로 역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유리장벽 앞에서 막히고 말았다.
단단한 유리장벽 앞에 마력문자로 떠오른 알림의 모습.
[44B 에이리어. 당일 폐쇄 후 소각.] [관계자들은 추후 지시가 있을때까지 현장대기.]“폐쇄라…….”
그러고 보니 레녹이 이 공간 안에 들어온 직후 에이리어를 폐쇄하겠다는 안내음성이 들렸었다.
흘려 넘겼지만, 그것 자체가 이 공간 너머로 누군가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을까.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장벽이 닫히며 그 안으로 들어오는 장물이나 아이템은 더 이상 없었다.
레녹이 그 사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 그 순간, 느닷없이 유리공동 안의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화르륵!!
발 아래서 치솟은 새하얀 불길이 순식간에 사방에 산처럼 쌓여 있는 장물들을 휘감고 집어삼킨다.
막대한 열기에 순식간에 곳곳에서 녹아내리는 여러 아이템과 장물, 쓰레기들의 모습.
레녹조차 실드가 없다면 오래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화력이다.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레녹이 곧바로 점멸을 사용해 유리공동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파밧!!
현재 레녹이 위치한 곳은 이 거대한 섬의 최외곽에 위치한 밀림.
밀림 한복판을 가로지르듯이 굽이진 유리공동 통로가 섬을 둥글게 둘러싸듯이 회전하고 있다.
이 섬의 중심부로 가려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유리통로를 쭉 따라가야 하겠지만…….
레녹은 대뜸 걸음을 돌려 섬 외곽에 펼쳐진 바다에 뛰어들었다.
찰박!!
허리 아래쪽으로 차오른 바닷물과,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보던 레녹이 손을 바다 아래 집어넣었다.
바다 아래쪽에서 젖은 모래 알갱이를 몇 개 집어 든 레녹이 입을 열었다.
“다비. 이거 보여?”
[네. 곡률을 계산하면 되는 거죠?]레녹의 말을 곧바로 이해한 다비가 말했다.
[마스터가 손에 쥐고 있는 모래알갱이 42개. 전원이 모두 완벽한 구체예요.]“역시 그랬군. 자연환경 자체는 정교하게 구현했지만, 바다 아래 쪽 지형물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던 거야.”
바닷물에 모래를 씻어내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여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설계된 모형정원이다. 우리가 서 있는 모래와 바다, 유리공동과 컨베이어 벨트까지 마도공학으로 만들어낸 공간이군.”
바다 밖으로 걸어나온 레녹이 가볍게 외투를 털어내자, 달라붙어 있던 바닷물과 소금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한 번의 손짓으로 온몸을 깔끔하게 정리한 레녹이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숲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첨단 마도공학의 기술력을 이용해 만들어낸 것이 가장 원초적인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라니, 이유가 있을 텐데…….”
레녹은 유리공동 안으로 돌아가는 대신, 공동 바깥에 우거진 숲을 맨몸으로 걷기 시작했다.
후욱!!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밀려오는 텁텁한 공기.
평범한 인간이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탈수증세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레녹은 여러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주변의 환경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펜터렉트의 위치를 생각하면 테레메르의 종언이 이곳에 있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어째서 귀중한 구세계의 유물을 보관해두어야 할 심성관이, 이렇게 무분별한 무인도의 형상을 띄고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러한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두어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틀림없을 터.
주변의 어떤 풍경도 놓치지 않으려고 쉴 새 없이 마력감지를 돌리던 레녹이, 근처에서 무언가 수상한 기척을 찾아냈다.
[마스터?]“이쪽 나무 등걸 사이. 이상할 정도로 뿌리가 비틀려 있다.”
억지로 뿌리를 치우고 만든 공터.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다.
파박!!
공용마법을 사용해 땅을 파낸 레녹이, 무언가 걸리는 감촉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해골? 아니, 해골이라기보다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든 레녹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인간의 두개골처럼 보였던 그것은, 자세히 뜯어보면 전혀 다른 생물의 골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
이마 위로는 뿔이 세개 나 있고, 콧구멍이 하나, 턱 아래쪽 골격 관절은 무려 다섯 개가 넘는다.
모르긴 몰라도 생전의 모습은 입이 네 갈래로 갈라진 괴물의 형상이었을 터.
하지만 다비가 그 자리에서 레녹의 말을 부정하고 나섰다.
[생명체의 경구 골격이 이런 식으로 붙어 있었다면, 먹이를 먹을 때마다 턱이 갈려 나갔을 거예요.]“실존했던 생물의 두개골이 아니라는 말이군.”
과연 다비의 말대로 두개골의 강도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은데도, 골격끼리 마찰해 마모된 흔적은 거의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시간과 모래먼지의 흐름에 휩쓸려 닳아 없어진 흔적들뿐.
잠깐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서 있던 레녹이 중얼거렸다.
“거꾸로 생각하는 게 맞겠어. 이런 생물이 존재했기에 두개골이 남아 있던 게 아니라, 두개골을 만들어서 이런 생물을 재현하려고 했다면?”
[이 두개골조차도 인위적인 실험의 흔적이라고 가정하는 건가요?]“승천문의 실패가 구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이것 역시 구세계의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실패작이겠지…….”
레녹은 거기까지 말한 뒤, 쓴웃음을 지으며 두개골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기계도시가 무엇을 바라고 승천문을 만드려 했는지, 이제 알 것 같군. 그리고 어째서 그들이 실패했는지도.”
타닥!!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걸음소리에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마력감지에 잡히는 기척이 두개. 생명반응이 활발하고 마력응축도가 높은 것으로 보아, 실력 있는 육체능력자다.
레녹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희미해지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후우…….”
피가 묻은 묵직한 자루를 짊어진 두 남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금속슈트를 입고, 어깨에는 견장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간부급 제원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그런 두 군인의 온 몸에 먼지가 가득하고, 몸짓이 꽤 피곤해 보인다는 것일까.
군인들은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다 짊어지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다른 군인이 자루 안의 내용물을 꺼내 땅에 휙휙 던지면서 대답했다.
레녹이 아까 흙더미 사이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기괴하면서도 독특한 형태의 뼛조각.
“여기 해저장벽 안에 머무르는 동안은 시간감각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니까.”
“장벽 밖에서 요격시스템이 작동했다더라.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서 우리도 더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심해어 같은 괴물 새끼들이 또 장벽에 대가리를 들이박았나 보지.”
“최고등급 경계령이었대. 지금 다른 부대쪽에서도 조금씩 말이 나오는 것 같아.”
“……최고등급 경계령이라고?”
그 말에 다른 군인의 목소리가 떨떠름하게 변했다.
“X발,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체감상 거의 며칠간은 쉬지 않고 일한 것 같은데, 슬슬 사이클이 한번 끝날 때가 되긴 했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한숨을 푹 내쉰 군인이 뼛조각을 그러모아 땅에 묻기 위해 손을 지면에 갖다댄 그 순간, 목소리가 싹 변했다.
“이봐, 너 혼자 여기 온 적 있어?”
“뭐?”
“땅의 고른 정도가 기억보다 훨씬 균일해. 누군가 한번 파헤쳤던 것 같다.”
“……아니.”
서로를 마주본 군인 두명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벌떡 일어섰다.
한마디 말도 없이 한 명은 통신기를 꺼내 들고, 다른 한 명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다.
금속슈트 사이로 마력이 끓어오르고, 허리춤에서 마력이 번뜩인 그 순간.
파직……!!
수풀 사이로 번뜩인 한줄기 뇌광이 두 사람의 관자놀이를 동시에 관통했다.
“끄륵……!!”
전격 안에 섞어넣은 다비의 전뇌간섭 명령어가 한 발 늦게 작동.
그 자리에서 슈트 전면부가 활짝 열리고 기절한 두 군인들을 뱉어냈다.
레녹은 기절한 군인들의 얼굴과 신상을 확인한 뒤, 마력패턴과 티켓의 복제를 빠르게 끝내고 금속슈트 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찰칵!!
[패턴코드 인식 완료.] [기계화병단 3군단 특수직군 중위 에릭 프라우슈.]슈트를 착용하고 에릭의 마력패턴을 그대로 불어넣자 슈트가 그대로 주인을 인식하고 움직인다.
레녹의 움직이는 동작 자체를 실시간을 보정해서 도움을 주는 용도. 전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설계된 고급 장비겠지.
다만 에릭의 신체에 맞게 커스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사소한 이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두 군인이 지나온 마력의 자취를 따라 숲을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유리공동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13F]삐빅!!
미리 복제해둔 에릭의 티켓을 공동 벽면에 갖다 대자 손쉽게 문이 열렸다.
레녹이 깨어났던 44B 구역에 비하면 중심부에 상당히 가까운 숫자.
하자미나 레녹은 그 기괴한 두개골을 발견한 시점에서 이렇게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물의 흔적을 모방한 두개골. 승천문과 심성관의 관계성을 생각했을때, 그것은 틀림없이 구세계의 화석이나 생명체를 모방하려 한 흔적.
마력이 조금씩 담기기는 했지만 가치가 떨어졌던 44B 구역의 장물들과는 달리, 구세계의 생물에 대한 자료는 연구가치가 높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나 장소에서 취급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13F 에이리어 유리공동 안으로 들어서자, 레녹과 같이 금속 슈트를 입은 군인 몇몇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레녹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오는 다른 군인들의 모습.
“에릭. 저스틴과 함께 나가지 않았었나?”
“저스틴은 현장에서 보존 처리 작업을 마친 뒤 곧바로 다른 에이리어로 차출되었습니다.”
레녹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44B 구역의 소각과정에서 폐기되지 않은 잔해들 회수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44B 구역? 그쪽에 아직 관계자들이 남아 있었던가?”
“…….”
살짝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다른 군인들이 서로를 마주보았지만, 레녹은 자신의 거짓말이 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44B 에이리어를 폐쇄하기 직전 관계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메시지.
기계도시에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구역에서 결코 의미없는 지령을 내릴리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그 잠깐 사이 회선을 확인했는지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44B 구역 폐쇄와 소각처리, 협조 요청 관련 지령이 내려진 건 사실입니다. 현장에서 임시로 보고 없이 조치를 한 모양이군요.”
“후우…… 멋대로 이쪽 인력을 갖다 쓰는 일은 그만해 줬으면 좋겠군.”
“어쩔 수 없으니까 일단 움직인다. 에릭, 너도 따라와.”
다른 군인들이 유리공동 안쪽 컨베이어 벨트를 일제히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녹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위에서 지령이 떨어졌다. 심성관에서 생물과 가축 파트를 담당하던 인력들은 모두 중심부로 모이라 하더군.”
군인들 중 누군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저장벽 내부에서도 가장 위험한 비경으로 간다. 설령 무언가를 들어도 절대로 기억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내지도 않도록 철저하게 조심하도록.”
다른 군인들을 따라 빠르게 컨베이어 벨트를 거슬러 올라가자, 중심부에 접근할수록 주변의 시설과 풍경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장물이나 아이템의 흔적은 사라지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주위는 깔끔해진다.
곳곳에서 보이는 다른 군인들이 벨트 주변을 서성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물건의 등급을 분류하고, 가치가 낮은 장비나 아이템은 그대로 벨트에 흘려보낸다.
유리공동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공동의 너비가 커지고, 느껴지는 마력의 농도는 강렬하게 변한다.
그리고 공동의 중심부 쪽에서 하나둘씩, 다른 군인들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공동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통솔자들.
레녹이 마력감지를 끌어올리며 정신을 집중한 그 순간, 그들의 정체를 깨닫고 놀란 표정으로 마력을 추슬렀다.
“……마이스터?”
선발식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서 레녹과 다른 장인들의 결과물을 평가했던 마이스터.
오래전에 여러 자격과 검증을 통과하고 경지에 오른 장인들이, 놀랍게도 이 해저장벽 안쪽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슈트를 착용하고 있지만, 그 기척과 특유의 마력은 여전히 레녹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레녹이 마이스터들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들을 따라 거대한 유리공동의 통로를 끝까지 따라 걸어들어온 그 순간.
지하 끝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에 도착했다.
‘이건…….’
거대한 공동 안에 호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예 복도 끝에서부터 펼쳐진 공간 전체가 거대한 수면으로 이루어진 호수의 형태.
하지만 마이스터들이 호수 수면을 밟고 걷고 있는데도 그 위에서는 희미한 파문만이 일어날 뿐,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자연스레 부유마법을 이용해 몸을 살짝 띄운 레녹은 호수 아래쪽을 바라보다, 그 안이 마냥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빛냈다.
언뜻 보기에는 투명한 유리처럼 녹아내린 아름다운 호수의 수면 아래쪽에, 온갖 장비와 부품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유리호수처럼 보이는 수면 아래쪽에, 레녹이 본 기억이 있는 다양한 장비들이 부유하고 있다.
선발식에서 확인했던 구세곙의 유물들. 심성관이라 불린 지고의 비보들이 모여 있는 창고가 바로 이곳인 걸까.
그동안 주변의 풍경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던 마이스터들도, 호수 아래쪽에서 빛나는 장비들에서는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호수 저편에서 그들을 부르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늦으셨군요. 조금 기다렸습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존대에 흠칫 놀란 마이스터들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군, 헤르메스.”
그들 중에서 선두에 서 있던 마이스터가 천천히 양손으로 슈트의 헬멧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냈다.
치익……!!
“예정보다 너무 일러. 다시 모이는 건 도시 구획이동 배정일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
그 말에, 안개에 휩싸인 호수 저편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눈부신 은빛의 장발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청년의 모습.
백색의 제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는 남자의 얼굴은 정갈하다 못해, 무기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남자의 등 뒤로 고고히 떠오른 거대한 원형의 고리.
크고 작은 고리 십수개가 겹쳐진채, 각기 다른 방향과 속도로 회전하며 빛을 내뿜는 신비하기 그지없는 광경.
눈부신 빛의 고리를 등 뒤에 둔 헤르메스가 뒷짐을 진 채로 빙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꼭 한번 실험해 봐야 하는 일이 있었기에.”
“실험해야 할 일이라고?”
“예. 이번 분기에 필요한 분해자원 수급과 장물 확보는 끝났습니다. 남은 건 검증이 끝난 구세계의 생물을 확인하고 폐기하는 일뿐이죠.”
그 말과 동시에 헤르메스의 새하얀 눈동자가 마이스터들 사이를 가볍게 훑고 지나쳤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찬찬히 둘러보며, 고요한 백색의 호수 저편을 투명하게 응시한다.
마치 여기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반응을 살피려는 것처럼 잠깐 침묵한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혹시 존재하지도 않는 가축이나 미욱한 생물 따위가 아니라, 진짜 인간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까?”
“……뭐?”
“우리가 이 문 너머에서 꺼내오는 것이 말 그대로 망가진 세계의 장난감이라면, 그 너머에는 저희 같은 인간들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헤르메스가 한점의 때도 묻지 않은 얼굴로,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예정에는 없던 일이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구세계의 신살자를 로드하려 합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