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635
약먹는 천재마법사 635화
신을 죽이는 방법(1)
구세계의 신살자.
레녹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감각을 날카롭게 일으켜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승천문의 실패를 경험한 기계도시에서 그것을 언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미 멸망한 세계의 인과를 직접 입에 담는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침묵하는 군인들과 어딘가 미묘한 기색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보는 마이스터들의 모습.
“헤르메스,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침묵하던 마이스터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문 너머에서 필요한 정보를 가져올 때는 반드시 사전에 상의를 거치기로 했을 텐데.”
“…….”
“이번 분기의 책임자로서 문 너머를 탐색하고 연구하는 역할을 맡았음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조정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해.”
기계도시의 각 분기마다 열리는 해저장벽 심성관.
각 분기마다 그 안에서 머무는 마이스터와 군인들, 그리고 문을 연구하는 책임자가 하나씩 붙어서 승천문의 실패를 수습하고 있는 것일까.
‘기계머리의 연구원, 강철심장의 군인, 전쟁망치의 장인까지…… 나름 균형을 맞춰서 해저장벽 내부를 관리하고 있었군.’
그렇다면 헤르메스의 등 뒤에 고고하게 떠오른 저 거대한 원의 고리가, 바로 승천문의 실패에서 비롯된 유산이라는 말이 된다.
“죄송합니다, 하베스터.”
헤르메스가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입 밖으로 내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 말에 다른 마이스터들의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헤르메스의 말이 단순히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세계의 편린들 중에서도 금구조치를 당한 정보라는 말이군.”
“확실히, 그렇다면 틀림없이 분기 내 목표를 전면수정할만한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서 우리를 불러낸 것이냐.”
“말씀드린 대로,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로드하기 위해서는 알맞은 조정이 필요합니다.”
헤르메스의 투명한 시선이 마이스터와 군인들을 향했다.
“이해하셨다면 곧바로 시작하고 싶군요.”
“……획기적인 정보와 지식의 편린을 찾는데 성공하더라도, 결국 대가를 맞추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폐해만을 남긴 경우가 수두룩했지.”
가장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늙은 마이스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네. 이번에는 그리되지 않도록 충분히 책임을 져야 할 게야.”
“이를 말이겠습니까.”
헤르메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던 마이스터들이, 뒤에 묵묵히 서 있던 군인들에게 손짓했다.
“지금부터 문의 조정을 시작한다. 너희들은 관련 작업을 보조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군인들 사이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던 레녹이 슈트 안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이스터들은 구세계의 신살자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협력하고 있다.
그건 예전에도 문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정보를 발견했을 때마다, 비슷한 방식의 작업을 거쳐 습득해 왔기 때문이겠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하나는 문 너머에서 정보를 꺼내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와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얀의 기억에서 보았던 승천문의 유산이, 레녹이 막연하게 추측하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천문 프로젝트는 틀림없이 실패했다. 하지만 문 너머에는…….’
기계도시 마키나에서 유달리 구세계의 흔적과 유물, 지식들이 자주 발견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 세계가 아니라, 이미 인과가 소멸하고 멸망한 두 번째 세계가 있었고.
승천문의 실패를 통해 이들은 WORLD 2.0의 기억과 지식, 혹은 그에 준하는 유물들을 꺼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네 번째로 향해야 했던 문이 멸망한 두 번째 세계로 연결되었는지, 문 너머에 존재하는 구세계의 공간은 과연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인지.
지금 당장 레녹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
넓은 호수 위에 마련된 거대한 공동에서, 작업을 도우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뿐.
레녹을 비롯한 군인들이 필요한 자재와 물건들을 운반하고, 마이스터들이 전선과 장비들을 거대한 고리 위에 부착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기묘한 진동음을 내며 호수 위에서 돌아가는, 수십 개의 원이 겹쳐진 거대한 고리.
각자 다른 방향과 속도로 회전하는 고리마다 측정장치와 데이터 출력 장비를 연결한 뒤, 임시로 설치한 연산장치를 통해 수치를 조정한다.
작업 도중에 물자를 전달하고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레녹 역시 문의 형상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희고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금속. 착각인지 그 형상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른거리기도 한다.
다비가 품 안에서 조용히 레녹의 이어폰을 통해 속삭였다.
[기계도시와 거대도시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관련 데이터가 아무것도 없어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합금이에요.]‘아니, 이건 구세계의 물건이다.’
레녹은 이것이 운금(雲金)이라 불리는 규격 외 등급의 합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WORLD 2.0에 존재하는 아이템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아름다우면서도 구름처럼 흐릿한 형상이 외형변화 옵션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 때문.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 이곳에 있는 문이 승천문의 실패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문이라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승천문 프로젝트를 통해 2세계의 멸망에 손이 닿았다면, 당시 완성된 승천문은 오직 이 세계의 물질로만 만들어졌을 테니.
그렇다면 프로젝트 당시 만들어져 실패했던 승천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직 테레메르의 종언을 찾지도 못했는데, 지나치게 이쪽 일에 엮여버렸군. 이건 곤란한데…….’
심성관에 들어온 시점에서 승천문과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직접 문을 이용하는 광경을 옆에서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행된 이유는, 마이스터들을 불러모은 저 헤르메스라는 남자 때문이겠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저 남자가 이 도시의 비밀에 가장 깊게 관련된 존재이자 머리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엑스 마키나 위원이자 기계머리 파벌. 심지어 연구원 책임자로서 이 자리에 와 있다면, 틀림없이 수뇌부에 해당하는 거물일 터.
하지만 헤르메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레녹의 감각은, 알려진 정황과는 다른 사실들을 고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기척과 반응이 없다. 마치 무기물을 마주하는 것 같아.’
호흡과 신진대사, 마력패턴 모두 틀림없는 유기체의 그것인데도 기이할 정도로 그 모든 행동과 반응이 이질적이다.
수뇌부에 해당하는 거물치고 무력이나 위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지는 무기질적인 언행.
문을 오랫동안 연구하며 탐구한 부작용으로 어딘가 어긋나 버린 상태가 된 것일까.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문의 형상이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고, 다른 마이스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방출 마력수치 상정 이하. 출력을 좀 더 높여야 할 것 같군.”
“역시 저번에 너무 지나치게 사용해버렸어. 이렇게 이른 시점에 다시 불러내서 문제가 생긴 거야. 조만간 문을 한번 갈아 치워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오아손 당신이 무리해서 테레메르의 종언을 손대보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그런 게 아니었나요?”
익숙한 이름에 레녹이 귀를 기울인 사이, 마이스터들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선발식에 참가한 장인이 고칠 수 있을 정도면, 내가 고치지 못할 리가 없네.”
“또 헛소리를 시작했군.”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건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장물이야. 제대로 수리하면 아티팩트의 형상변화 능력에 대해 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아손이라 불린 장인이 입고 있던 슈트를 탕탕 두들겼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이동식 공방이 내장된 슈트를 제작해 낸 것도, 구세계의 기술력을 연구해서 얻어낸 성과가 아니었나.”
“…….”
“마키나의 기술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구세계의 지식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새로운 영감과 발상을 불어넣고 있네.”
오아손의 눈동자가 일순 섬뜩하게 빛났다.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가능성이야.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난 절대로 이 기회를 포기하지 않을걸세.”
마이스터들은 그 노골적인 말에 언짢은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다른 마이스터들 역시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오아손과 비슷한 것을 바라고 여기 모여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점에서 나시사 솔머를 설득하지 못한 것은 아쉽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오아손의 말을 들으며 웃고 있던 헤르메스가 말했다.
관문을 수면 아래쪽에서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손을 털고 가뿐하게 일어선다.
“화덕진군의 공방을 차지한 그녀의 협조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문의 상태를 안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요.”
“…….”
이 자리에 없는 마이스터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일까, 다른 이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뭐, 모든 마이스터들이 거사에 협조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동업자의 의사는 존중해 줄 생각이네.”
“그렇게 고집이 센 장인들이 있어. 언제까지 공방에만 처박혀서 사업을 꾸리지도 않고 밍기적거릴 생각인지.”
모든 마이스터들이 이 일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승천문 유지보수 작업에 협조하는 이들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문의 실패를 통해 흘러나오는 구세계의 기술력을 마이스터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인가.
그 주체가 저기 호수 위에 고고히 서 있는 헤르메스라 불린 남자의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시사 솔머가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그녀의 의사를 별로 존중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헤르메스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모인 분들 중 한 명이 손을 쓰셨다고 알고 있는데.”
“……!!”
아무렇지도 않게 암살 사건의 주동자를 언급하는 헤르메스의 말에 마이스터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이스터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작업을 도와주던 군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조정은 전부 끝났다. 작업구역으로 돌아가 추후 지령을 기다릴 수 있도록.”
“그리나 마이스터. 하지만 저희는…….”
“기계화병단의 군단장에게는 내 직접 따로 과정을 서술해 제출하지.”
“……알겠습니다.”
책임자로 보이던 군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 역시 그들을 따라 작업을 도와주던 시늉을 멈추고 호수 밖으로 걸어 나와야 했다.
바깥에서 보이는 호수의 모습은, 어느새 거대한 마력 장벽에 둘러싸인 채 유리탑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문의 출력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해저장벽 내부의 풍경이 변질되며 일어서고 있는 것인가.
호수 바깥으로 걸어 나오자마자,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방금 들었던 말은 전부 기억에서 지우는 거다. 이해했겠지?”
무거운 기색으로 수긍하는 군인들을 보며 지휘관이 슬쩍 몸을 돌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잠깐 근무지를 이탈할 예정이다. 너희들은 작업 구역으로 돌아가 대기해라.”
말은 그렇게 해도, 지휘관 역시 자신의 상관에게 이번 일을 보고할 생각이겠지.
레녹은 대형을 이탈하는 지휘관과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다른 군인들을 보다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팟!!
슈트 밖으로 점멸을 사용해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군인들과 반대로 걸음을 돌리는 레녹의 모습.
하지만 주인이 사라졌음에도 레녹이 입고 있던 슈트는 자연스럽게 군인들과 대열을 맞춰서 움직인다.
다비를 통해 작업 구역에 돌아갈 때까지만 슈트를 조작해도 상관은 없겠지.
얼굴에 쓴 철가면을 다시 끝까지 변조시켜 뒤집어쓰고, 기척을 감춘 채 이번에는 마력을 끌어올려 다시 호수 근처로 진입했다.
거대한 빛의 고리를 등진 채, 마이스터와 헤르메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헤르메스.”
“흠.”
“기나긴 기계도시의 역사 속에서도 자네는 더할 나위 없이 우수한 연구원이지만,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어.”
엄격한 목소리에도 헤르메스는 주눅 들거나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치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는 것처럼.
레녹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것이 원래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기계도시의 내막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무리해서 해저장벽을 돌파한 의미가 있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던 걸까…….’
탐사선 한정으로 심해를 돌파해, 강제로 해저장벽을 열어젖힌 레녹의 행동은 원래라면 이 시점에 결코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기적이다.
이 기계도시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변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공간에 억지로 도달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여 밟았어야 할 절차들을 뛰어넘어, 대번에 기계도시의 가장 치명적인 비밀 언저리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사이 문의 조정에 집중하던 다른 마이스터가 소리쳤다.
“조정이 거의 다 끝나간다! 거래에 필요한 실험체를 불러와라. 문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출력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어!!”
“…….”
그 말에 헤르메스를 질타하던 오아손이라 불린 마이스터가 시선을 돌렸다.
“일단 일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하…….”
“문 너머를 오랫동안 들여다본 뒤, 저는 깨달았습니다.”
오아손의 말을 끊어버린 헤르메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리 부정해 보았자, 우리의 영광과 명예는 수십 년 전보다 한참 퇴보했다는 사실을…….”
“…….”
“그것이 승천문의 실패에서 비롯된 과오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헤르메스의 단호한 말에 좌중이 침묵에 잠겼다.
지금껏 일절 끼어들지 않고 조정 작업에 집중하던 다른 마이스터들까지 시선을 돌렸을 정도.
“헤르메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수십 년 전에 논의가 끝난 일이예요. 이제 와서 그 모든 결정들을 뒤집기라도 할 셈인가요?”
“승천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계도시가 마도공학의 정점에 서 있던 건, 실패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 넘게 내려온 희생을 부정할 생각이냐?”
곳곳에서 쏟아지는 질타에도 헤르메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철의 규율. 준 것 이상을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는 합리 아래 문이 만들어졌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담아 다음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이제 잡상인보다 못한 흥정으로 대가를 바치고, 멸망한 세계의 찌꺼기를 주워 먹고 있지요. 저는 이제 이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선을 돌린 헤르메스의 표정은 싸늘하게 비웃고 있었다.
“실패보다도 못한, 낙오와 몰락의 증거지요.”
“헤르메스!!”
참지 못한 마이스터들 중 누군가 강하게 작업대를 내리쳤다.
쾅!!
“그만 됐다!! 문의 조정이 끝났으니 필요한 실험체를 불러오도록. 네가 말한 신살자의 정보를 확인한 뒤, 추후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흘러간 기억을 돌아보는 일도, 잊힌 정보들을 되새기는 일도 이제는 충분합니다.”
헤르메스가 그렇게 말하며 관문의 고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저는 문 너머에서 그것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찾았죠.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키이이잉……!!!
헤르메스의 손을 따라 거대한 빛의 고리가 회전하는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크기로 겹쳐진 고리 수십 개가 동시에 가속하며 공간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렇게 비틀린 균열 너머로 전혀 다른 풍경이 비춰졌다.
다른 마이스터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안돼!! 다른 공양물이 없는 상황에서 문을 열었다가는, 누구도 규율을 피해갈 수 없다!!”
“잡아!! 문이 열리는 것을 막아라!!”
마이스터들 대부분은 마력을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아는 강력한 초인.
마력을 끌어올린 장인들이 각자 도구를 쥐고 헤르메스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찰칵.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 너머에서 새어 나온 강렬한 광채가 순식간에 호수 위를 뒤덮고 번뜩였다.
파아아아앗!!
아이러니하게도 마이스터들은 그 빛을 마주하자마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동시에 레녹의 귀에도 울려 퍼지는 각양각색의 깔짝이고, 비틀리며, 부서지고 폭발하며 기어가는 온갖 다채로운 소음.
보얀의 기억에서 마주했던 것처럼, 문 너머에서 무작위로 새어 나오는 압도적인 정보량.
그것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 뛰어난 초인인 마이스터들조차 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이건 불가능해……!!”
헤르메스의 발밑에 쓰러진 장인, 하베스트가 힘겹게 소리쳤다.
“어떻게, 규율을 어기고 혼자서 문을……!!”
원래라면 문을 여는 것 자체는 헤르메스의 권한만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일까.
다른 마이스터들이 헤르메스의 부름에 응했던 것도, 혼자서는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믿음은 헤르메스가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는 것으로 완전히 깨졌다.
헤르메스는 하베스트의 말에 대답해 주는 대신, 쓰러진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을 열었다.
“하베스트. 우리가 이 문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
하베스트는 대답 대신 힘겹게 손에 쥐고 있던 접이식 칼날을 휘둘렀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발악에 가까운 몸짓으로 휘두른 일격.
푹!!
어처구니없게도 그 칼날은 너무나도 쉽게 헤르메스의 목덜미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
주변에서 하베스트를 돕기 위해 의식을 차리려던 다른 마이스터들.
지켜보던 레녹은 물론이고, 발악하듯 칼을 휘두른 하베스트 자신마저 흠칫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헤르메스의 눈부신 은발이 잘려 떨어지고, 칼날이 틀어박힌 목덜미 사이로 붉은 선혈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인간과 초인을 가리지 않고 목숨이 위험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
하지만 헤르메스는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몰골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강철의 규율에 따라 잊혀진 것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문 안에 놓고 와야 합니다.”
“……너, 너…….”
“지금까지 저희는 기억이나 지식을 대가로 삼아 구세계의 편린을 손에 넣어 왔습니다만,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헤르메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하베스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리가 손에 넣은 것이 멸망한 세계의 편린 그 자체라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혼이나 의식도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새하얀 빛의 고리 너머로 성큼 다가선 헤르메스가, 하베스트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문 앞에 섰다.
목 반쪽이 잘려나가 덜렁거리는 처참한 몰골로, 헤르메스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특정한 정보나 기억이 아닌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면, 똑같은 값어치를 지닌 무언가를 내주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