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28
약먹는 천재마법사 728화
마법사와 마탑(5)
“페이샤 그리스번 소장의 소식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
데이머스는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참모는 그런 데이머스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작전 중 사망. 혹은 그에 준하는 패퇴로 추정됩니다. 사령부에서는 이미 확정을 내린 듯합니다.”
“그래?”
쿠르르릉……!!
데이머스가 서 있는 드넓은 갑판 아래로, 육중한 캐터필러가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듯 움직였다.
가파른 산맥 위를 질주하는 강철의 함선.
수백 대의 포문을 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전선을 가로지르는 기동전함.
데드라이즈의 최정예 군단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기동력을 지녔다는 특수기동 7군단.
작전을 시작하면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는 위명에 걸맞게, 군단본부와 참모지부는 함대와 일체화되어 있다.
수백 명의 군인들을 동시에 수용 가능한 전함 십수 척이 구불거린 산맥을 거꾸로 거스르듯, V자를 그리며 이동한다.
쿠과과과!!!
십수 척의 함선이 내달리는 것만으로 천지가 흔들리며, 발아래 깔린 모든 것을 짓뭉개 버렸다.
마구 엉킨채 자라난 나무와 바위들이 한줌의 먼지가 되어 으스러진다.
산맥 곳곳에 숨어서 저항하던 군인이나 초인들 역시 함선의 진격 앞에 육편이 되어 뭉개질 뿐.
데이머스는 그런 대열의 가장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갑판 아래 펼쳐진 지옥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산맥을 두들기는 함선을 바라보던 데이머스가 물었다.
“그리스번 소장의 휘하 간부들은 어떻게 되었지?”
“마일로 스탁턴과 벤제 솔시어 중령 역시 생존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스탁턴 중령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데이머스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의미없는 조언이 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예?”
“아무것도 아니다. 사령부에서는 이미 확정을 내렸다고?”
“네. 이미 현장 참모진들에게 공유되는 기밀 회선으로 먼저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질문을 받은 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중앙전선에 집중. 계획대로 헤드로 군벌 인수합병을 우선으로 한다. 그 전까지 장성들의 개별적인 행동은 금지한다고…….”
“…….”
페이샤를 비롯한 소장들은 작전에 있어 자의적인 판단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소장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무력을 지녔던 페이샤가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상위 간부들의 개별적인 작전을 금지하는 것도 일견 당연한 일.
“블레이버 마탑과의 협업이라, 지령 하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그건 어떻게?”
“아, 그건…….”
참모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송하 대장님께 처리가 일임되었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데이머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송하 대장에게 지금 움직일 만한 여유가 있었던가?”
“사령부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원수님께서 직접 지명하신 듯합니다.”
“…….”
데이머스가 침묵했다.
민간군사기업을 표방한 이 군단에서, 원수라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으니.
“그렇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어.”
데이머스가 중얼거렸다.
판데모니엄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데드라이즈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군사기업의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보다도, 규율과 규칙에 묶여 있는 군인 이외의 다른 삶이 궁금했을 뿐.
군단 내부에서도 가장 자유롭다는 특수기동군단을 지휘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느껴지는 갈증이 있다.
원수는 그런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 일탈의 방향을 어떻게 통제하는 것이 도움이 될 일인지까지도.
그렇기에 데이머스는 아주 간만에 내려온 원수의 명령이 어떤 미래를 암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분께서는 첫 번째 관문이 가지고 싶어지신 모양이다.”
* * *
[37번째 메시지 재생.]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시정부 직속 연구기관 보나파르트에서 발칸 최초의 마탑의 창설을 축하드리고자-]삑.
[44구역 아티팩트 제작 공업소. 마탑의 원만한 자재 공급과 건승을 기원하며 견본을 첨부합니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답신을-]삑.
[세바스찬일세. 자네가 새로운 탑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정말 축하하네. 괜찮다면 내 손님 중에 투자자들을 만나볼 생각이 있나? 물론 맨입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제니를 통해서 선물을 보냈으니 내 성의를 확인해 보고 결정해 주게.]삑.
[견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미리 연락을 주지 그랬어요.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세트 아티팩트를 몇종 보냈어요. 조만간 다시 연락하죠.]마담의 메시지가 끝난 순간, 작업대 아래로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던 레녹이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
발칸에 첫 번째로 세워진 마탑의 주인이 레녹이라는 사실은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 나갔다.
견뢰를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축하의 메시지와 선물을 보내오는 상황.
그만큼 이 도시에 창설된 마탑이 지니는 의미가 다른 이들에게도 중대하게 느껴진다는 뜻이겠지.
반의 신분과 성격을 알고 있는 이들이 그러할진대, 시정부 직속 연구기관이나 마탑과 협업이 가능한 사업체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회사 지하금고에 선물을 더 쌓아둘 공간이 없다고 미역머리 유기체가 성화예요.]레녹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튼 다비가 툴툴거렸다.
[일단 장부는 만들어뒀으니까 더 늘어나기 전에 빨리 가져가서 치워달라는데요?]“……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제니한테 답신을 보낼 때는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말도록.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으니까.”
갈수록 다른 사람들을 이상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듯한 다비를 두고, 레녹이 허리를 폈다.
“좋아. 성분 분석 조정은 대충 끝났다. 이제 결괏값만 받아보면 되겠군.”
피곤한 듯이 눈가를 매만지는 레녹의 왼쪽 눈에는 밀라가 선물해 준 모노클이 얹혀 있었다.
작업대의 조명이 사라진 직후, 레녹이 한참 만지작거리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의 보석이 끝에 달려 있는 길쭉한 금속의 외견.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이것은, 조든이 카이세의 유품이라 말하며 건네준 목걸이였다.
조든이 처음 이 목걸이를 주었을 때는 다른 용도를 지닌 물건이라 생각했지만, 카이세의 유품이라면 다른 쪽이겠지.
카이세의 유품 중에서도 에단 바쥬르가 유일하게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이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렇기에 레녹은 연구실로 돌아와 목걸이의 성분 분석에 한창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했지만, 역시 생체 분석 데이터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네요.]메시지 분류를 순식간에 끝낸 다비가 빠르게 분석 데이터를 공유하며 말했다.
레녹이 새로 마련한 연구실. 새하얗고 널찍한 공터 곳곳에 들어찬 수십 대의 연구장비.
일이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사 모았지만,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먼지가 쌓인 장비도 수두룩하다.
다비의 도움을 받아 장비 내부 시스템을 업데이트하고, 전력을 연결해 상태를 점검.
먼지가 쌓인 연구실을 한바탕 청소하고 난 뒤에야, 레녹은 조든이 건네준 목걸이를 비로소 분석할 수 있었다.
[목걸이를 구성하는 금속이나 석영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물건이에요. 보존마력의 농도를 고려하면 최소 500년 이상으로 보여요.]“구체적인 연도를 알 방법은 없나?”
[지금 여기 있는 장비로는 어려워요. 그나마 특이할 만한 점이 더 있다면, 내열성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 정도?]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 방면으로는 의도적으로 설계가 이뤄진 것 같아요. 구체적인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흠…….”
보존마력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여기 연구실에 마련한 장비보다 훨씬 더 거대한 관측장비가 필요했다.
굳이 따지자면 성능이나 출력보다는 스케일의 문제.
목걸이의 연원 하나만을 알아내는데도 이 정도 절차가 필요한데, 그 이상을 조사하려면 자원이 얼마나 필요할까.
“바로 무언가를 알아내긴 어려울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연구실 가장 안쪽에서 꿈틀대며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박스를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치이익!!
“…….”
굵직한 레버 하나만을 단 채, 아무런 장식이나 부품도 없는 상자의 형상.
레녹이 마키나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자, 그 본질을 제대로 유추할 수 없는 혼돈의 상자다.
간이승천문의 토대를 조합해 만들어낸 랜덤박스. 레버를 당기면 구세계의 흔적을 무작위로 뽑아내는 물건.
이 물건 때문에 예지자 안타레스가 레녹의 저택을 한번 방문해서 직접 확인을 했을 정도.
멍하니 랜덤박스를 바라보던 레녹이,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스터?]“카이세의 유품이라고 했었지?”
[……네?]딸깍.
다비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레녹이 대뜸 랜덤박스의 레버를 당겼다.
박스의 문이 철컥 열리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그 안에 대뜸 목걸이를 던져넣었다.
휙!!
순식간에 끝이 보이지 않는 광채 저편으로 사라진 목걸이의 형상.
다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침묵하다 물었다.
[바텐더한테는 뭐라 말하시려구요?]“간이승천문은 카이세가 프로젝트의 테스트베드를 위해 손을 댄 물건이었지.”
레녹이 말했다.
“이 목걸이가 카이세의 유품 중 하나라면, 그에 반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추측에 기대 성과를 기대하기엔 너무 무모한 도박이 아닐까요…….]“마력사를 목걸이 끝에 붙여두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쓰면 곧바로 되찾아올 수 있-”
쐐애액!!
박스 안쪽에서 튕겨 나온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레녹의 옆을 스치고 사라졌다.
두두둑!!
실드가 대번에 깎여나가며, 그 충격으로 사방에서 연구실이 크게 흔들렸다.
연구실 벽과 천장을 튕겨 나간 무언가 그대로 곳곳으로 불규칙하게 튕기면서 사방을 두들겼다.
장비 손상을 대비해 미리 보호마법을 걸어두지 않았다면, 비싼 장비들이 대번에 고철이 되어버렸을 터.
치이익!!!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걸이가, 연구실 바닥 내장재에 박혀 있었다.
레녹의 머리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비가 물었다.
[누가 봐도 못 먹을 걸 먹은 반응 같은걸요.]“……그렇긴 하군.”
차마 부정하지 못한 레녹이 마력사로 목걸이를 집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단시간에 엄청난 열기에 노출된 것처럼 달궈진 목걸이의 형상.
이리 뜨겁게 달궈졌는데도 목걸이를 이루는 금속과 석영의 손상은 보이지 않는다.
내열성이 아주 좋다는 다비의 말을 믿고 진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꽤 주목할 만한 결과.
치이익!!
“음…….”
잠시 고민하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른 연구부터 처리할까?”
[…….]다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꼬리를 토닥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레녹은 신경 쓰지 않고 작업대를 청소했다.
그러지 않아도 시작해둔 채 도중에 멈춰버린 연구가 한둘이 아니다.
“운명자천칭 극예 5법과 오로크니어의 질량술식. 이 두 가지만 파고들어도 족히 몇 달은 꼬박 연구실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마력의 성질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극예 5법과, 승천자 오로크니어가 본신술식으로 사용하던 질량술식.
레녹이 근래 손에 넣은 마법과 술식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연원과 가치를 보유한 두 가지.
둘 다 연구를 시작한 지는 꽤 되었고, 나름대로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막상 진전이 있던 시점에서 레녹은 연구를 멈춰두었다.
술식의 방향과 묘리에 대해 감을 잡고 파고들수록,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두 가지 마법 모두 제대로 익히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레녹의 재능이나 학습속도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투자와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레녹은 자신에게 허락된 편법을 사용해 두 가지 마법체계를 강제학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로보로스를 굴리면서 두 가지 마법체계를 고스란히 영구기관에 흡수시킨다.”
레녹이 작업대를 두들기며 말했다.
“일단 마법체계 안에 녹여버리고 계속 굴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야말로 날로 먹겠다는 발상의 극한이네요.]“…….”
다비가 꼬리로 레녹의 뒤통수를 탁탁 두들기며 하품을 하다, 작업대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작업대 청소를 아직 다 못 끝냈나? 세척장비를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더니 많이 녹슬-”
레녹이 그렇게 말하다, 다비가 발견한 흔적을 보고 말을 뚝 멈췄다.
달아오른 목걸이를 치우고, 그 위에 작업대가 녹은 흔적.
그 흔적이 마치 휘갈겨진 필기체처럼 유려한 문자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
“…….”
[내열성이 과하게 좋은 이유가 있었네요.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달궈서 낙인을 찍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 아닐까요?]“……그렇겠지. 그림보다는 문자의 형태로 보이는군.”
[괴상하게 흘려 쓴 문체네요. 공용어가 아닌 것 같은걸요.]레녹은 그런 다비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것과 비슷한 필체를 어디에서 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해 냈기 때문.
천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외겁도시에서 보내진 메시지.
다비가 검색해서 레녹에게 보여준 적 있던 그 괴상한 필체가, 여기 적혀있는 문자와 굉장히 유사했던 것이다.
다비 역시 그것을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사람이 쓴 걸까요? 하지만 사용하는 문자가 너무 다른데…….]“거의 확실해. 이걸 봐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쓰고 있던 모노클을 다비에게 내밀었다.
두툼한 앞발로 모노클을 받은 다비가 주둥이를 걸치고 눈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모노클 너머로 메시지와 문자를 번갈아 바라본 다비가 묘한 감탄사를 냈다.
[오호. 오호.]밀라가 선물해 준 모노클은 마력의 투사율을 다르게 비춰 가시광선 너머의 영역을 보는 물건.
그를 통해 두 가지 필체를 대조하면, 외겁도시의 메시지와 작업대 위에 새겨진 문자 아래로 묘한 마력의 기척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하는 문자는 다르지만, 두 메시지가 같은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명백한 증거.
“동일인은 아닐지 몰라도, 같은 방식의 필기법을 사용한 거다. 아마 마도서를 작성할 때 요구되는 기술이 아닐까 싶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 들었다.
폐쇄구역에서 카이세의 소멸을 지켜본 뒤, 레녹은 마담에게 카이세의 죽음에 대해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마담은 카이세의 시신을 흡혈귀들이 보관하기로 결정한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다고 대답했고.
레녹은 거래를 통해 마담이 연락책으로 지니고 있던 수첩을 손에 넣었다.
“혈려서기 자이블. 어쩌면 이 물건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사용자의 피를 잉크로 삼아 작동하는 수첩이자, 스스로 자아를 지니고 질문에 대답하는 기록장치.
기계도시 마키나로 향하기 직전에 사용했던 적이 있지만, 마키나로 향하는 일이 급해서 미뤄두었던 물건.
이제와 이 휘갈긴 문자에 대해 자문을 구할 대상이라면, 이 수첩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머리 위에 올라탄 다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건방진 종이쪼가리가 하나 있었죠?]“카이세의 시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예열이 필요하다고 해서 오래 이야기를 못 했었지.”
레녹은 곧바로 혈려서기를 펼치고, 자신의 피를 찍어 수첩에 적어넣었다.
“오래 사용할 수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필요한 부분만 빠르게 체크하고 넘어가자.”
예상대로 혈려서기는 즉시 레녹의 부름에 응답했다.
[위대하신 초월자이자, 자격을 얻은 승천자를 뵙습니다.]혈려서기는 사용자의 혈액을 통해 그 경지를 짐작하고 태도를 달리하는 물건.
그렇기에 이 수첩은 레녹을 승천자로 착각하고, 아주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오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지만, 질문을 던지면 그럴듯한 대답을 들려준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필요한 것은 레녹이 이 수첩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정확하게 골라 적어넣는 것뿐.
“혈려서기는 생명과 피에 관한 테마를 정리해 보관하는 기록장치다.”
핏방울이 맺힌 펜을 든 레녹이 눈을 빛냈다.
“연관성을 그쪽 테마로 지어주는 것이 중요해. 그렇다면…….”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업대 위에 새겨진 문자를 그대로 베껴서 수첩 위에 그려 넣었다.
문자 아래쪽에 다시 자신의 피로 질문을 적어넣는 검증까지.
=이 문자를 사용하는 혈족이나 생명종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대답해라.
문자란 언어와 문화의 정수.
공용어와 동떨어진 문자라면 틀림없이 그만한 규모와 역사를 갖춘 세력에서 파생된 개념임이 틀림없다.
혈려서기 자이블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틀림없이 필터링에 하나쯤은 걸릴 법도 하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혈려서기가 레녹의 피를 들이마시고 대답을 토해냈다.
[위대한 승천자여. 저는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입을 다문 레녹의 머리 위에 주둥이를 포갠 다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엣헴거렸다.
[허접한 펄프쪼가리는 어쩔 수 없죠. 대세는 네트워크 검색도 가능한 전뇌정령이라구요.]하지만 혈려서기는 레녹이 다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다른 대답을 토해냈다.
[다만 이 이름의 주인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검색자료가 1건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