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22
약먹는 천재마법사 822화
매듭(9)
요르타 지하층계에서 깨어난 고대의 영령, 나이멜의 출신에 대해 언급하는 레녹의 질문.
하지만 나이멜은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으로 레녹을 내려다보던 나이멜이 오리스를 향해 말했다.
“오리스 아이센.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뭐?”
“이 자를 해칠 생각은 없으나, 긴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
나이멜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의 흑요석 가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개인적인 비사입니다. 요르타의 일과는 큰 관련이 없을 듯하군요.”
“……귀찮게 하는군. 네가 버린 이름이랑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냐?”
오리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나이멜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쩍 레녹을 돌아본 오리스가 당부하듯이 말했다.
“다른 영령들에게는 이미 말해두었지만, 오니온의 후인이다.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거야.”
“제전에서 이 자의 처우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나이멜이 레녹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빌어먹을, 탑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던 놈들은 영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오리스가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비우는 것과 동시에 찾아든 침묵.
안개의 사슬에 속박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이멜이 말했다.
“제전에서 귀하의 처분을 유예시킨 것은 그의 역할이 컸습니다. 호의를 산 모양이군요.”
“아닌 척 하지만 내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지.”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누군가의 위에 서기에는 지나치게 솔직한 성정이다. 그 놈에게 요르타의 권력을 쥐여줄 생각이라면 잘 도와줘야 하겠지.”
“거기까지 귀하가 신경을 쓸 이유는 없-”
“아니면 이제라도 그쪽의 출신에 대해 제대로 말해볼까?”
대번에 나이멜의 말을 끊은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와서 네가 교단 출신이라는 건 굳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
레녹이 물었다.
“너는 교단의 신녀 직위를 역임했던 영혼들 중 하나였나?”
나이멜이 처음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 존재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시감은, 분명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단순한 직감이나, 혹은 막연한 의심에서 시작되는 근거 없는 추론이 아니다.
세이나에게 양도받은 교단의 스티그마. 제사장의 권한을 상징하는 낙인이 나이멜을 두고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나이멜이 교단 고위직, 그것도 신녀의 존재와 연관이 있다는 명실상부한 증거.
하지만 반대로 나이멜은 정작 레녹이 스티그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레녹은 나이멜이 신녀의 자리를 내려놓은 존재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녀의 자리가 계승된다는 것을 아는 레녹으로서는, 나이멜이 그 계보를 이었다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
하물며 그만한 영혼이 요르타에 적을 두었다면, 영령과 같은 최고위 군령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내가 아는 교주는 자신의 신도를 아무런 대가 없이 놓아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게 교주를 부르는 레녹의 말에 나이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레녹은 그런 나이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정말로 교단의 신녀였다면, 어떻게 교리를 저버리고 요르타에서 영령이 된 거지?”
“…….”
“아니, 어째서 교단을 저버리고 요르타의 손을 잡은 거지?”
교단의 신도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교주를 맹목적으로 섬기며 믿고 따르는 이들뿐.
그나마 교리에 있어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세이나조차, 한순간도 그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녹의 눈앞에 서 있는 나이멜은 교단을 벗어나 요르타에서 영령이 된 존재.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레녹은 그녀를 보자마자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교단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나이멜이 떨리는 기색으로 두 눈을 감았다.
그 사소한 몸짓조차, 레녹이 기억하는 세이나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느껴지면 착각일까.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힌 나이멜이 레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녀에게 대대로 주어지는 성과 권한, 교단의 규율을 이리 정확하게 아는 외부인은 거의 없을진대…….”
“…….”
“다만 한 가지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두 눈을 뜬 나이멜이 느릿하게 말했다.
“저는 교단의 신녀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녀가 되기 위해 준비되었던 대용품들 중 하나지요.”
“대용품?”
“만귀야행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교단과 요르타는 승천자의 육신을 두고 한 가지 거래를 했습니다.”
나이멜이 과거의 비사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한가지 성물을 무간에 보관하는 대가로, 교단에서 야행의 의식을 돕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지요.”
“…….”
“저는 의식을 돕기 위해 간택되어 야행에 공양된 영혼들 중 하나였습니다.”
정식으로 신녀의 직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대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던 신녀 후보.
하지만 신녀가 되는 일 없이, 만귀야행의 의식을 돕기 위해 요르타에 공양된 존재인 것인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식으로 신녀의 직위를 계승받은 세이나 나이드리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영멸하였는데.
야행의식에 공양된 나이멜은 영령으로 아직까지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후보조차 이리 강대한 영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까.
세이나를 대신해 새로운 신녀가 될 후보가 더 있으리란 정황을 깨달은 것에 만족해야 할까.
“그렇다면 너는 아직 교리를 섬기고 있는 신도인가?”
“……모르겠군요.”
나이멜이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요르타에 공양되어, 야행을 함께한 것에는 어떠한 후회도 없습니다. 교리로부터 멀어진 뒤에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심을 다했으니까요.”
“…….”
“하지만 만귀야행이 실패하고 선택을 강요받은 그 순간……. 제 안에 남아 있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레녹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나이멜이 고백하듯 중얼거렸다.
“그분을 온전히 따르지도, 야행을 이루지도 못한 시점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더군요.”
시작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교단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며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게 된 것인가.
그 사실에 대해 레녹이 생각하는 사이 나이멜이 반문했다.
“귀하는 이미 교단의 신녀와 만난 적이 있으신 듯하군요. 저와 그녀를 겹쳐보고, 제 출신을 짐작해낸 겁니까?”
“신녀는 진혼정이 승천자의 유해를 사사로이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막으려 했다.”
레녹이 대답했다.
“승천자의 육신을 손에 넣고, 요르타의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진혼정에서 무엇을 획책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대심판관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이멜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요르타 근처에 머물러 있다면, 지금이라도-”
“신녀는 죽었다.”
“…….”
침묵하는 나이멜을 향해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무너지는 무간의 성소에서, 스스로를 공양해 완전히 영멸했지.”
“영멸이라…….”
나이멜이 할 말을 잃고 시선을 들어올렸다.
“제가 오래전에 바라던 결말을, 그녀는 이미 이루고 이 세계를 떠났군요.”
“…….”
“그것이 한낱 대용품에 불과했던 저와 다른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이나 나이드리가 마지막 순간 선택한 결말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녀 스스로 결정하여, 어떤 후회도 남기는 일 없이 매듭을 지었다는 것뿐.
세이나의 최후를 전해듣는 나이멜 역시, 레녹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그녀를 기리고 있을까.
하지만 레녹은 감상에 빠지는 대신, 곧바로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며 재차 입을 열었다.
“교단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이멜의 출신을 들춰내고, 신녀의 최후를 설명해 준 것은 감상에 빠지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니까.
“교단의 관계자로서 야행에 바쳐졌다면, 그 과정에서 교주의 힘이 어떠한 방향으로 작용했는지 알고 있겠지.”
“…….”
“도래의 시체를 무간의 성소에 안치하기 전에, 교주가 이 도시 어디에 자신의 힘을 남겼는지 알고 싶다.”
무간의 성소에서 도래의 시체를 마주하고, 기억을 들여다본 뒤에도 알지 못한 비사가 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없는 요구를 하시는군요.”
나이멜이 흐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교단도, 야행도 저버린 보잘것없는 영혼이나 도리를 모르는 자는 아닙니다. 어찌 제게-”
곤란한 기색으로 말하던 나이멜의 시선이 레녹의 손목에서 빛나는 스티그마에 닿은 순간,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나이멜의 얼굴을 바라보며 레녹이 손을 까닥인 순간.
쩔그렁!!
거짓말처럼 레녹의 두 손이 사슬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워졌다.
“다시 묻지.”
침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나이멜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짐작 가는 장소가 있나?”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창백한 안색으로 레녹의 스티그마를 바라보던 나이멜이 힘겹게 말했다.
“신녀의 권한이란 이런 식으로 전승될 수 없는 법인데, 어찌……!!”
“짐작 가는 장소가 있나?”
“…….”
대놓고 이곳에서 탈출해서 요르타를 더 뒤져보겠다는 레녹의 질문.
하지만 나이멜은 그런 레녹을 만류하거나 막아서는 대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의 관계자들이 사용하던 의식장이 있습니다. 당시 교단의 손이 닿은 유적이라고는 유일한-”
“위치는?”
“……요르타 지하 19층계.”
나이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요르타의 공신과 반역자들을 한데 모아 불사 지른 화장터입니다.”
* * *
쿠르르륵!!
헤드레인 강 심처.
수압이 짓누르는 어두운 강바닥 아래를, 거대한 유령함선이 비틀리듯 유영하며 가라앉고 있다.
처음 레녹이 손에 넣었을 때와는 다르게, 파손되고 부러져 적잖게 마모된 함선의 형상.
반으로 뚝 부러져 덜렁거리는 돛대를 바라보며 레녹이 고개를 내저었다.
“……돌아가면 따로 수리를 시도해 봐야겠군.”
오니온의 함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지만, 빅터의 신분으로 손에 넣은 물건인 만큼 사용에는 신중해야 한다.
망가진 선박의 수리조차 누군가에게 맡기기보다는 레녹이 홀로 처리하는 편이 비교적 안전할 터.
레녹의 말을 듣자마자 다비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선박 부품 조달 카탈로그를 다운받아 둘까요?]“됐어. 규격 자체가 너무 오래된 물건이라 현대의 매뉴얼로는 호환이 되지 않을 거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힐끗 함선을 둘러보았다.
온갖 부품이 파손되고 변질된 뒤에도 함선의 기능 자체에는 큰 손색이 없다.
돛대가 반으로 부러진 뒤에도 멀쩡하게 항해가 가능한 것은, 함선에 내장된 힘 때문에 가능한 일일 터.
레녹이 손을 보고 고쳐야 할 부분은 바로 그쪽이었다.
“군령술식을 제대로 익혀야 일이 편해질 텐데, 좀처럼 진전이 없단 말이지…….”
함선의 선두에 매달려 수중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군령들의 모습.
하지만 오리스가 다루던 유령상어와는 달리, 레녹이 조작하는 군령들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낑낑대기만 할 뿐이다.
레녹이 시전하는 군령술식이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그 의지에 따르는 군령들 역시 힘이 약한 영체들뿐.
문제는 군령술식을 익혀야 할 이유가, 단순히 함선을 운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데 있었다.
도래와의 결전이 끝난 직후, 새하얀 관에 안치되어 잠들어버린 레녹의 화신체.
그 화신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사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
‘사도 선정 의식을 화신체에게 돌린 반동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자성영역 광라무해궁을 펼친 상태에서, 도래의 육신에 깃든 화신체를 빼내고 권사의 힘을 손에 넣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다만 선정 의식을 통해 사도가 된 레녹의 화신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새하얀 관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바.
남은 방법은 조작술식으로 직접 조작하거나, 군령술을 통해 화신체를 강제로 각성시키는 것 정도.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일단 화신체를 각성시켜 다시 자신과 동기화시켜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녹 자신의 존재에서 비롯된 화신이다. 사도로 선정되어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그 본질만큼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을 터.
무엇보다 레녹은 기껏 손에 넣은 화신체를 다른 이에게 결코 빼앗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화신체가 있어야 비로소 신분을 공존시키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테니.’
오니온의 유령함선과는 달리, 화신체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바.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함선 선두에 매달린 군령을 조작해, 함선을 더 깊은 수중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우우우…….]군령들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기만 할뿐, 레녹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예전에 요령을 익혔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
머쓱해진 레녹이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군령술의 요령을 베껴 다른 술식에 접목시키는 건 무척 간단했는데, 오히려 술식 자체는 습득이 잘 안 되는군.”
군령술을 익히는 것이 레녹이 얻은 수확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줄 거라는 확신을 얻은 뒤.
레녹은 오리스의 도움을 빌려 군령술의 요령을 여러 차례 지도받았지만, 좀처럼 군령술을 사용할 수 없다.
술식의 원리나 요령 자체는 금방 이해했지만, 정작 군령들이 레녹의 의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
“봐라. 지금처럼 이렇게…….”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헤드레인 강 아래를 유영하는 백귀들을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
낫을 든 채로 강 아래를 떠다니던 백귀들이 기겁하며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흐, 흐아아악!! 나를 내버려 두거라!!]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과하겠다, 제발……!!]“…….”
레녹의 통제 아래 놓이는 것 자체를 극도로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도망치는 군령들.
도망치거나, 두려워하며 당장이라도 레녹의 술식에서 벗어나려 발작하기만 할 뿐.
[흠, 마스터가 무서운 사람이긴 해도 저 정도는 아닌데요…….]다비 역시 의외라는 듯이 턱을 괸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마스터를 두려워할 만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그렇긴 하지.”
레녹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문제는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원인을 특정하기가 어렵다는거야.”
[…….]당장 요르타에 와서 손에 넣은 새로운 술식과 권한만 정리해도 한둘이 아니다.
화신체의 습득. 신녀로부터 이양받은 제사장의 권한. 구세계의 대천사 카슈인의 각성.
도래로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구중도래의 무예는 물론이고, 오리스에게 배우고 있는 군령술까지.
레녹 자신을 계속해서 바꿔나가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 한가지로 원인을 좁히기 어렵다.
당장 이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할 상황도 아니다 보니, 막연하게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을 뿐.
다비 역시 그런 레녹의 말에 고민을 포기하고 로브 안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마스터가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그래.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
쿵!!
그 순간, 함선의 선두에서 사슬을 물고 잠영하던 군령들이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거세지는 수압 속에서 더 이상 스스로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할 만큼 약해져 버린 것.
대번에 이끄는 힘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선 유령함선의 모습.
주변에서 함선을 대신 끌어줄 군령을 찾던 레녹이, 마력감지를 한번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곤란하군.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그런지, 주변에 잡히는 기척이 아무것도 없어.”
함선은 군령술사였던 마드리치 오니온의 유산으로, 군령술이 아닌 다른 술식으로는 호환이 거의 되지 않는다.
레녹의 마법으로 억지로 조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연비가 떨어져 장거리를 항해하는 데는 부적합할 터.
어두운 물길 아래 멈춰선 함선의 갑판 위에서, 고민하던 레녹의 시선이 품 안에서 뒹굴거리던 정령에게 닿았다.
[…….]“…….”
[마스터. 전 지느러미 같은 것도 없다구요.]다비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지만, 레녹은 그런 다비를 양손으로 훌쩍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여우정령이 앞발을 대롱대롱 내민 채 기가 막힌 기색으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나이멜이 언급한 지하 19층계가 바로 앞에 있어. 한번 시도해 보고 아니면 바로 그만두지.”
[…….]“내키지 않으면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마력을 사용하는 건 똑같으니까, 내가 해도 상관없고.”
[아뇨.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한번 해볼게요.]부웅!!
순식간에 레녹의 몸만큼 크기를 키운 전뇌정령이, 함선의 갑판 앞으로 폴짝 뛰어나와 사슬을 물고 앞발을 오므렸다.
[가마 위에 올라타서 칭송을 받는 게 꿈인데, 오히려 거꾸로…….]투덜대면서도 다비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온몸을 크게 부풀려 강물 속을 천천히 내리 걸었다.
다섯 개의 꼬리가 빳빳하게 일어선 채로 회전하며,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웅!!
다비의 헤엄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함선의 형상.
정령의 존재는 군령과는 엄연히 다르지만, 같은 영체라는 개념으로 묶여 있는 만큼 유령함선과 호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다비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함선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정령과 함선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갑판 위에 올라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순간 느껴지는 기묘한 일체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이건…….”
정령의 마력이 유령함선과 강하게 호응하면서, 그 의념 자체가 하나로 합쳐져 뒤섞이고 있다.
레녹이 그 심상치 않은 의념의 공명에 곧바로 다비를 불러서 멈춰 세우려던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함선의 사슬을 중심으로 일어선 광채가, 다비를 향해 모조리 흡수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함선을 이끌고 달리는 정령의 의지를 따라, 함선 전체가 호응하며 약동하는 듯한 움직임.
오니온의 함선 전체가 다비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회전하며 그대로 사라지고.
다비의 의념이 레녹을 등에 업은 채 순식간에 지하 19층계를 질주.
사방에서 충돌하는 결계를 단숨에 돌파해, 수중 한복판에 존재하는 메마른 벌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마스터!!]함선의 형상이 다비에게 흡수되는 것과 함께 떨어지는 레녹을, 거대화한 다비가 앞발로 받아든다.
당황한 기색으로 꼬리를 휘두르며 레녹을 끌어안고 구른 다비가 벌떡 일어나 레녹을 집어 들었다.
[괘, 괜찮아요?!]“그래. 타박상 정도는 무마할 수 있어.”
레녹이 가볍게 기침하며 다비의 품 안에서 내려섰다.
황폐한 벌판 위로 내려앉은 레녹의 모습과 주변에 가득 쌓여있는 잿더미의 형상.
그리고 눈앞에서 여섯 개의 꼬리를 흔들면서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레녹을 기다리는 다비의 모습.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다비를 지나쳐 유적지와 사라진 함선을 찾으려던 찰나.
“……잠깐. 여섯 번째?”
다섯 개의 꼬리 끝에서 유령의 형상처럼 붕붕 떠다니는 여섯 번째 꼬리를, 레녹이 덥석 움켜쥐었다.